포트 에리의 크리스탈 비치에서 밤산책을 하며

새벽 3시 쯤, 포트 에리의 크리스탈 비치에서 밤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상념들에 잠겼다.

 

우선 첫번째 상념은 한 때 불꽃처럼 불타올랐던 홍콩 영화의 전성기에 대한 상념.

19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홍콩 영화가 홍콩 영화다웠던 시절에는, 그네들의 영화 속에서 청춘, 우정, 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 시절 홍콩 영화에서는 진한 인간애가 넘쳐 흘렀다.

프랑스에서 격동기인 1960년대에 새로운 영화적 기법인 누벨바그가 등장하여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홍콩 역시 1997년으로 예정된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두고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 및 기대가 교차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다 격정적이고 파워풀한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갈등 및 변화가 용솟음치는 시기에는 그 에너지를 원동력삼아 문화산업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나는 산책 도중 <천장지구>, <첩혈쌍웅>, <천녀유혼>, <영웅본색>, <열혈남아>, <중경삼림>, <007 북경특급> 같은 홍콩 영화의 전성기 시절의 기리성 같은 영화들의 OST를 들으면서, 새삼스럽게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흡사 온 몸이 감전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사그라진 홍콩 영화의 르네상스와 같이 나 역시 이 한 몸을, 이 유일한 청춘을 후회없이 불태워야 할 것이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


두번째 상념은 <야인시대>의 main theme을 들으면서

격동적이었던 20세기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번째 상념은 2000년대 초반에 애니원을 통해 잠깐 보았던 기억이 나는 애니메이션 <세인트 세이야>의 국내 버전 오프닝 곡을 들으면서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부모의 맞벌이 때문에 저녁 늦게까지 혼자 외롭게 집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 때까지 부모 몰래 컴퓨터로 게임을 하며 보내는 것이었는데, 저녁식사는 주로 동급생 가족이 운영하는 일식집에서 일본식 제육덮밥을 주문하여 해결했다. 양이 좀 적고 영양학적 밸런스도 맞지 않았지만 (야채가 거의 없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세인트 세이야>의 곡을 듣고, 동시에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니 많은 상념이 스쳐지나갔다. 그 시절로부터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났다는 것, 하지만 내가 지금 바라보는 별들은 내가 그 시절 바라보았던 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네번째 상념은 애니메이션 <베르세르크>의 OST인 <Earth>와 <Berserk>를 들으면서 하였다.

작곡가 히라사와 스스무의 테크노틱한 곡들이 처음 이 애니메이션에 삽입되었을 때 일부 평론가들은 어울리지 않다고 지적했던 것 같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파울로 코엘료의 표현대로라면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서는) 중세시대 젊은 기사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음악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히라사와가 태국의 음악, 아마 무당과 관련있는 듯한 토속 음악에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베르세르크의 음악 속에 투영되어 나타난다는 것 역시 (마치 초월적 계시 내지는 신내림을 연상시키는 <Earth>의 후렴구가 그 예다) '자아의 신화'라는 작품의 세계관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나는 이 곡들을 들으면서 밤하늘을 별들을 1분 동안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무한하게 펼쳐진 별들은 내게 우주의 신비에 대해, 또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히라사와의 초월적인 트랜스 음악이 주는 감동, 그리고 저 밤하늘의 별들이 주는 신비와 광대함에 압도되었다.


이렇듯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지나간 역사와

미래의 역사를 생각했고,

그렇게 이곳, 포트 에리에서 더없는 낭만에 잠겨

2시간 반 동안의 산책을 끝마쳤다.

 

아, 나는 어쩌면 이렇게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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