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버트런트 러셀의 자서전 내용 정리 2 - 에블린 베어링의 비서로 일했던 에드워드 그레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다


에드워드 그레이가 한 거짓말

대중들이 분노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감사해했다.

중립국을 고집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줘서

p. 226 

https://en.wikipedia.org/wiki/Edward_Grey,_1st_Viscount_Grey_of_Fallodon

Grey left university with no clear career plan and in the summer of 1884 he asked a neighbour and relative, Lord Northbrook, at the time First Lord of the Admiralty, to find him "serious and unpaid employment." Northbrook recommended him as a private secretary to his kinsman Sir Evelyn Baring, the British consul general to Egypt, who was attending a conference in London.[10] Grey had shown no particular interest in politics whilst at university, but by the summer of 1884 Northbrook found him "very keen on politics," and after the Egyptian conference had ended found him a position as an unpaid assistant private secretary to Hugh Childers, the Chancellor of the Exchequer.[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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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898 Grey became a director of the North Eastern Railway, later becoming Chairman (1904-5; curtailed by his appointment as Foreign Secretary). In Twenty-Five Years (see Works, below) Grey later wrote that ‘…the year 1905 was one of the happiest of my life; the work of Chairman of the Railway was agreeable and interesting…’. After leaving the Foreign Office Grey resumed his directorship of the NER in 1917, and when the North Eastern Railway became part of the London and North Eastern Railway he became a director of that company, remaining in this position until 1933. At the Railway Centenary celebrations in July 1925, Grey accompanied the Duke and Duchess of York and presented them with silver models of the engine Locomotion and the passenger carriage Exper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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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most important action came in the July Crisis in 1914, when he led Britain into World War I against Germany. He convinced the Liberal cabinet that Britain had an obligation and was honour-bound to defend France, and prevent Germany from controlling Western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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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crisis of July 1914 that followed the assassination of Austrian archduke Franz Ferdinand, Germany tried to secure British neutrality in the war that was coming, first by offering to restore Belgian and French independence after the war (but making no such promises regarding French colonies). That offer on 29–30 July was followed by a more desperate appeal on 1 August: a commitment not to attack Belgium or France or to take French colonies – if Britain would remain neutral.

It was the British foreign secretary, Edward Grey, who rejected these offers out of hand – and who (with prime minister Herbert Asquith) concealed them from the cabinet and from parliament.

Hilariously, the British government then accidentally declassified a telegram from Grey to the British ambassador to Germany, Edward Goschen, explaining the whole affair.

According to the telegram, the German ambassador, Karl Max Lichnowsky, had asked Grey ‘if Germany gave a promise not to violate Belgium [sic] neutrality we [Britain] would engage to remain neutral’. Grey wrote: ‘I replied that I could not say that; our hands were still free, and we were considering what our attitude should be.’

‘The Ambassador pressed me as to whether I could not formulate conditions on which we would remain neutral. He even suggested that the integrity of France and her colonies might be guaranteed.’

Grey said that he ‘felt obliged to refuse definitely any promise to remain neutral on similar terms, and I could only say that we must keep our hands free.’ Rather than negotiating to protect Belgian neutrality, and French territory, Grey preferred to close down diplomacy.

 https://peacenews.info/node/7708/editorial-tell-me-lies-about-great-war

벨기에 침공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벨기에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이 중립을 지킬 것으로 생각해서[8] 몰트케(小)에게 슐리펜 계획을 중단하고 전력을 러시아로 보내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년간 슐리펜 계획을 총괄하고 수정하며 발동할 날만을 기다린 몰트케(小)에게 이는 씨알도 안 먹히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몰트케(小)는 슐리펜 계획을 수정해 동부로 옮기는 새로운 작전을 짜려면 족히 1년이나 걸리는데다가 이미 발동된 순간 멈추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빌헬름 2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황제를 설득시켜서 결국 발동, 계획대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4일에 벨기에를 침공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

화이트헤드 전쟁광의 모습 야만적

 p. 226

 

제1차 세계대전 깨우쳐준 것

거의 모든 것보다 대중들은 돈을 사랑했으나

파괴를 더 선호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진리를 추구한다고 떠들었으나,

10%도 아니다.

진실보다 인기를 더 선호한다는 것 

1902년 이후 친한 친구 Gilbert Murray 프로 보어

에드워드 그레이 찬양. 독일 비난.

H. H. 애스퀴스와 그레이를 살해하고 싶은 마음 직접 만난다면

학살당할 젊은이들

...

영국에 대한 사랑은 거의 내가 갖고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

p. 227


George Santayana 

케임브리지

중립적

인간이란 종에 전혀 존중심이 없었고

서로 파괴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철학적 거리두기 분리감.

...

루시태니아호 침몰 이전엔

모든 독일인이 나쁜건 아니다

박수 받았지만

그 후에는 더 치열하게 반독일 

상류사회에서 러셀을 기피하게 됨

p. 228


T.S. 엘리엇 나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

러셀이 엘리엇에게 돈 빌려줬고 나중에 전쟁 끝나고 갚았다

p. 229

 

전쟁 반대 책 썼는데 베스트셀러 되고 평생 인세의 기반

소유적인 충동과 창조적 충동을 구분. 

최고의 인생은 창조적 충동에 기반.

정부, 전쟁, 가난은 소유충동

교육, 결혼, 종교는 창조적 충동.

p. 229-230 


D.H. 로렌스

케인스 비롯 멤버들 소개

다 싫어했다

죽었다고

인류에 대한 증오

민주주의를 믿지 않고

working class는 자기 안위 밖에 모른다. 당장의 현실ㅇ ㅔ유리한 표결만 한다.

파시즘

줄리어스 시저 같은 영웅이

러셀: 살아서 뭐해? 강의는 해서 뭐해?

p. 230


로렌스 - 피에 의식이 깃들어있다.

기억 다 저장

아우슈비츠

p. 231

(왜인지 아로는 D.H. 로렌스와 C.S. 루이스를 해깔렸다.)


용기는 내가 사랑하는 여성들에게서 본 공통적 자질

p. 235


케렌스키 혁명. 동정적인 집회.

버트런트 러셀

철학자

전세계에 지식인으로 유명

백작

p. 241


6개월 징역

아서 벨푸어의 배려로

감방에서 책 읽고

글쓰고

간수들이 방해도 안함

다른 죄수들 형편은 훨씬 나뻤다 

(E.D. Morel이 그 예다)

p. 242


Strachey의 eminent victorians보면서 감옥에서 낄낄댔다.

p. 243


감옥: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일에 집중

카톨릭교회보다 장점이 있다

p. 244


여친 Colette 다른남자 사랑 빠졌

질투

불면증 

고통 괴로워했다

p. 245

 

인간을 사랑하지만, 내 밑바탕 가장 깊은 감정에는 그 어떤 인간과도 공유할 수 없는 고독

바다, 별, 밤바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보다 더 의미가 있었고

인간에 대한 갈애는 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공허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

대부분의 인간은 파괴적 충동에 이끌려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p. 247

 

A month ago Europe was a peaceful comity of nations; if an Englishman killed a German,

p. 250

 

독일이 프랑스에 벨기에를 통해 선전포고 할 거란걸 몰랐는가? 열강들의 관심사가 벨기에를 지키는 것이었다면, 왜 벨기에의 (중립국으로서의) 위반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는가?

또 프랑스가 러시아와 연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p. 254

 

원래 자유당 지지했던게 전쟁 안할거라 여겨서; 근데 유권자들 기만하며 전쟁 몰두

p. 256 


1916년 극심한 무기력증과 우울증 경험

p. 266


논리학에 대한 비트켄슈타인의 비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

전쟁보다도 비트켄슈타인이 내 철학에 대한 태도를 훨씬 바궈놨다.

p. 267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햇 칭찬받는 것에는 관심없다.

내 인생의 주요한 욕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p.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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