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조했던 교육 때문;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쿄대가 있었다

1928년 1월 24일 도쿄대 내에서 신우익단체 우익동아리 칠생사와 좌익동아리 신인회의 학내 폭력충돌,그들은 학교 내에서 서로 결돌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지켜 나갔다.천황이 몸통이라면 도쿄대 법학부는 수족이었다.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교차한다. 암기를 통해 자칭 엘리트라 부르는 도쿄대학생, 그들은 똑똑하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로 변질되었다. 

 도쿄대 수재의 이러한 결함은 메이지시대에 독일에서 초빙되어 법학부 교관을 역임한 하인리히 바넨티히 Heinrich Wanentig가 일찌감치 지적했다.

 지극히 희소한 예외를 제외하면 내가 검열한 모든 시험 답안의 공통된 특질은 자신의 독립된 판단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답안들은 실제로 강의 한두 시간 분량의 필기를 전부 암기한 것이며,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옮겨놓은 것도 종종 힜었다.(<도쿄대학 법학부는 '찻잔'을 양산해왔다.>)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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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훗날 자신이 젊어서 받은 교육을 이렇게 돌아보았다.
 
 우리가 어릴 적에 배운 학문은 겨우 경서나 역사 같은 것이고, 여기에 보태어 약간의 산술 정도를 배우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았다. 역사라고 해도 일본 역사나 중국의 역사를 제외하면 다른 여러 민족의 역사 연구는 당시로서는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伊藤公直話 1936년) (32p)

난바라가 그즈음 일관되게 말하던 것은 일본을 저 전쟁으로 몰고 간 최대 원인은 일본인 전체가 정신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되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인은 그릇된 지도자를 맹종하고 말았다. (중략) 전쟁의 시대에 일본인 대부분은 천황을 현인신으로 떠받들고 천황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목숨조차) 바치겠다고 했다. 국민 모두가 광신적인 천황교 신도가 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2권 64장 히라가의 도쿄대, 전쟁체제 아래 크게 번영하다, 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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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책임은 일본 지배세력이나 군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그리하여 전후 일본의 전쟁 책임 관념이 대단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다치바나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 문제가 지금의 일본과 연결선상에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종전 이후 다시 힘을 모아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선 일본이, 오늘날 과연 선진국답게 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 의식을 갖고 있는지는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당시는 우리 후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익적, 국수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소수 우익 국수주의자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 일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감정이 요즘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우익적이었다는 말이다. 즉, 천황숭배자였다는 말이다. 그 시대 일반국민은 모두 속고 있었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강요받았다는 설이 전후 널리 유포되고 그것이 역사를 보는 표준적인 시각이었던 시대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략)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2권 64장 히라가의 도쿄대, 전쟁체제 아래 크게 번영하다, 9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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