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 센터의 장식용 그림을 그리는 제안을 거부한 파블로 피카소, 전범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상 수상을 받기를 거부한 레득토, 문화공로상 수여를 거절한 데즈카 오사무, 문화훈장 수여를 거절한 오에 겐자부로는 훌륭하다

반골 정신 만세!


씨알 정신 만세!


무뇌아 대중들 혐오!

 

 

p.s 사르트르 씹새끼는 잘난척하며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가 나중에 돈달라고 했다가 개망신 당해서 무시함.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06714.html


노벨상 계절이 돌아왔다. 노벨상 위원회는 지난 화요일 물리학상에 이어 금요일까지 화학상, 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수상자를 차례로 내놓았다. 두어 주 전부터 올해 수상자 점치기로 호들갑 떨었던 외신들은 무슨 난리라도 난 듯 저마다 1면 머리기사로 수상 소식을 감아올렸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봐왔던 풍경이다. 근데, 해마다 되풀이하는 상 하나를 놓고 대문짝만한 지면을 투입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아무도 의문을 달지 않는 게 더 희한하다. 오히려 나라 안팎 언론사들은 노벨상 계절에 맞춘 예상 특보들을 미리 짜놓고 기다릴 정도다.


노벨상의 서구·기독교·남성 중심주의

노벨상이란 건 이름난 상일 뿐, 세계시민들의 삶을 쥐락펴락할 만한 뉴스거나 달리 세계시민사회에 시급한 과제를 던지는 뉴스도 아니다. 원칙을 말하자면 외신에서 뉴스 가치를 판단하는 두 축인 사안의 중대성에서도 긴급성에서도 노벨상은 특보 대접을 받을 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다. 게다가 이 상은 시민 입장에서 보자면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야말로 힘센 자들만의 리그고 가진 자들만의 축제였다. 1901년부터 등장한 노벨상은 2012년까지 물리, 화학, 의학, 문학, 평화, 경제(1969년부터 수상) 분야를 통틀어 모두 862명(단체 24개 포함) 수상자를 내는 동안 40%에 가까운 330명을 미국에 몰아주었다. 여기에 영국, 독일, 프랑스 세 나라에 준 230여명을 보태면 60%에 이른다. 또 여기에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 준 200여개를 더 보태면 미국과 유럽이 90% 가까이를 싹쓸이한 셈이다. 그 나머지 100여개 가운데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가 또 반쯤 가져갔으니 한마디로 제3세계 수상자들은 색 맞추기 선전용이었다는 비난이 전혀 지나침이 없다.

실험실도 없고 실험용 쥐 살 돈도 없는 가난한 나라들한테 과학·경제 분야 상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문학상과 평화상은 경우가 달랐다. 타이 기자 수팔락 깐짜나쿤디의 “없이 살아도 문학은 했고 평화는 원했다”는 말을 귀담아들어볼 만하다. 문제는 이 두 분야 상이 가장 정치적인 도구 노릇을 했다는 건데, 문학상은 지난 100년 동안 영어·불어·스페인어·독어권이 돌아가며 나눠먹기를 하는 동안 주류 국제어 고착현상이 아주 질 나쁘게 진행되었다. 이건 언어를 이용한 국제패권주의의 다른 말이다. 물론 그 틈에 제3세계 문인들이 가끔씩 상을 받기도 했지만 거의 모두 주류언어권 식민지 쪽이었다. 고유한 언어를 통해 정서를 표현하는 문학에 유럽식 국제 표준에 맞춘 상을 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치명적인 위협일 수밖에 없다.

이게 평화상으로 넘어오면 아주 폭력으로 변한다. 2009년 대통령이 되자마자 첫날 업무로 파키스탄 공습 명령을 내렸던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된 지 기껏 여덟달 반 만에 “국제외교 강화를 위한 특별한 노력과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라는 당치도 않은 배경을 들이댄 노벨상위원회로부터 평화상을 받았다. 그 무렵 오바마는 아직 국제 외교무대에 본격 진출한 적도 없는 풋내기였다. 작년엔 유럽중심주의로 무장한 채 유럽의 이문을 위해 담벼락을 친 지역블록인 유럽연합(EU)이라는 괴물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미국의 전쟁에 들러리 서고 강대국 입김에 휘둘려온 유엔 몸통과 유엔 산하 기구들이 줄줄이 평화상을 받은 건 평화의 본질을 제쳐두고도 희한한 일이다. 유엔 가맹국 가운데 한 나라의 일개 재단이 심사를 거쳐 유엔에 상을 준다는 건 자기 몸에 자기가 상을 준 것과 다를 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건 또 어떤가? 100년이 넘도록 노벨상은 기껏 44명 여성에게만 상을 돌렸다. 세상의 반이라는 여성을 향한 지독한 편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말끝마다 여성과 어린이를 내세워온 노벨재단의 평화 선전이 시민사회가 지닌 보편적인 인식마저 쫓아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다. 노벨상의 종교적 편향성은 아예 질릴 정도다. 비기독교인에게 상을 준 경우는 불교도인 아웅산수찌와 달라이 라마, 무슬림인 무함마드 유누스, 야세르 아라파트를 비롯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쯤 되면 노벨상의 정체가 밝혀진 셈이다. 전형적인 서구중심주의, 기독교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아주 전근대적인 상이다. 이건 21세기 세계시민사회가 외치는 인본주의와 거꾸로 달리는 재단이고 상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그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걸 슬퍼하며 난리를 피워야 옳을까? 개인이야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정부와 언론까지 나서 노벨상 수상 프로젝트 같은 걸 입에 올리는 게 온당한 발상일까?

말이 난 김에 오늘은 노벨 평화상을 꿈꾸며 인생을 세탁한, 그러나 끝끝내 후보에만 올랐을 뿐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 한 사나이 이야기를 해보자. 1930년대 중일전쟁 기간 동안 쌀 투자로 떼돈을 번 그 자는 제2차 세계대전 피바람이 휘몰아치던 시절 자신이 만든 비행장과 조종사 훈련시설을 군대에 기증하는 한편 파시스트 국수대중당을 휘어잡고 정치판에 나서 전쟁몰이에 앞장섰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극동국제군사법정(IMTFE)은 그자를 A급 전범으로 체포해 수감했으나 3년 뒤 워싱턴의 정치적 고려와 국제법 해석 논란에 따라 재판 없이 풀려났다. 그자와 함께 풀려난 A급 전범 가운데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으로 대미선전포고 선봉에 섰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친미주의자로 돌변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암흑가를 주름잡으며 미국중앙정보국(CIA) 요원 노릇까지 했던 극우분자로 박정희와 만주국에서 쌓았던 친분을 앞세워 한일국교회담 때 공을 세운 고다마 요시오가 있다. 그 셋은 풀려난 뒤 ‘친미’ ‘극우’ ‘반공’이라는 깃발을 함께 부여잡고 친분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그자는 모터보트레이싱 도박 합법화를 추진해 스스로 이권을 잡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어 일본을 벗어나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한국 친구 이승만과 타이완(대만) 친구 장제스와 함께 세계반공연맹(1990년부터 세계자유민주연맹으로 개칭)을 창설했고 반공주의자 문선명과 친분을 쌓으며 통일교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는 그자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달아주었다.

사사카와 료이치다. 이자가 바로 1962년 사사카와재단(현 닛폰파운데이션)을 만든 인물이다. 사사카와재단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누비며 농업 개발과 해양 연구 지원을 비롯해 세계보건기구(WHO) 같은 국제기구에도 막대한 돈을 뿌리며 마침내 친구들로부터 ‘평화의 전사’니 ‘지구적 자선사업가’란 별명을 얻었다.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사카와의 노벨상 사랑

사사카와는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국제화를 적극 지지하면서 재단을 해외로 넓히기 시작했다. 1983년 미국-일본재단을 만든 데 이어 1983년 영국사사카와재단, 1985년 스칸디나비아사사카와재단, 1990년 프랑스-일본재단을 줄줄이 세워나갔다. 사사카와는 그 재단들을 통해 학자들과 언론인들에게 엄청난 돈줄을 풀어대며 ‘일본 알리기’와 ‘반일 정서 순화’ 작업을 벌이는 한편 방대한 자서전을 만들어 돌리면서 노벨 평화상을 꿈꾸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1987년 사사카와 영리더십 장학금을 설치했던 고려대와 1995년 사사카와재단으로부터 아시아연구기금이라는 이름 아래 100억원을 받은 연세대가 말썽을 빚기도 했다.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도 사사카와재단 기금을 받아 썼다. 미국 쪽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매사추세츠공대, 시카고대학, 하와이대학, 예일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사사카와재단 기금을 거부해 좋은 비교거리가 된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전쟁 사죄를 모르는 이 사사카와재단과 관련자들이 여전히 일본 안쪽 극우 세력 온상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지원하거나 국제사회에서도 성노예(위안부) 문제, 난징학살 같은 예민한 사안들을 오도하면서 일본-중국과 일본-한국 사이의 영유권 분쟁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극우호전주의 나팔수 노릇을 해왔다는 대목이다. 그 뒷심이 바로 사사카와재단의 돈줄을 집어삼켰던 일본 안팎 학자들과 언론인들, 이름하여 ‘사사카와장학생’들이었다.

버마 휴전협정 조인식에 나타난 일본인의 정체

외신판에서는 전방위 국제사업을 벌여온 사사카와재단이 이미지 작업을 벌이면 일본 정부가 파고들어가는 관계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실제로 외신판에서는 버마(미얀마) 독립투쟁 시절 일본으로 가서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온 독재자 네윈 장군과 친분을 쌓았던 사사카와가 두 정부 사이에서 막후 역할을 해왔다는 설이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그동안 버마를 취재해 온 나는 최근 몇 년 들어 사사카와재단의 버마 개입이 일본 정부와 협력관계를 넘어 정부 대리인 수준으로 튀어오른 걸 눈여겨보고 있다. 2011년 출범한 버마의 테인세인 대통령 정부는 평화정착을 내걸고 반세기 넘도록 분쟁을 겪어온 버마 내 소수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과 전면 휴전협정을 맺었고 현재 평화회담 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는 이 과정을 취재하는 동안 사사카와재단이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비롯한 국경 해방혁명세력들한테 휴전회담용 자금을 제공해왔다는 내밀한 정보를 잡았다. 근데 지난 8월8~10일 사이 랑군에서 버마 정부와 버마학생민주전선 사이의 휴전협정 조인식을 취재하면서 사사카와재단 직원이 공식 입회인석에 앉는 놀라운 사실과 마주쳤다. 이건 사사카와재단이 재정 지원만 한 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위임을 받았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와 사사카와재단의 작동 방법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장이었다.

1995년 사사카와는 저세상으로 사라졌지만 사사카와재단은 이름만 닛폰파운데이션으로 바꾼 채 대를 이어 후회할 줄도 반성할 줄도 모르는 일본을 온 세상에 뿌려대고 있다.

노벨상과 사사카와재단, 이 둘은 비록 겉모양이 다르고 작동법이 서로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괴멸적인 현대전쟁 발판을 놓은 다이너마이트 생산으로 부를 쌓은 노벨과 전쟁판과 도박판에서 부를 쌓은 사사카와의 재단 밑천에서부터 시민사회의 지향과 거꾸로 달린 과정이나 지배세력의 공고화를 받쳐온 정신이나 모두 시민의 눈에는 같은 색깔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사사카와는 노벨 평화상을 그렇게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1964년,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작가는 오직 글로써 행동해야 한다. 내가 노벨상 수상자 장폴 사르트르라고 서명하는 건 그 상을 준 단체와 같다. 해서 작가는 가장 명예로운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단체로 변형시키지 말아야 한다”며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다.

1973년, 베트남 정치인 레 둑 토는 “아직 베트남엔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노벨 평화상을 거부했다. 그해 공동수상자였던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물론 상을 받아갔다.

시민사회는 뭔가를 거부할 줄 아는 이런 원칙주의자들이 뿜어낸 결기를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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