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vs 윌리엄 피트 유럽 프리메이슨 권력 암투

 


나폴레옹이 황제가 됩니다. 이는 윌리엄 피트나 프란시스 베어링, 호프 가문 모두에게 손실보다 이득이 더 컸다고 인드라는 평가합니다.

당대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나폴레옹 황제 체제 이전 나폴레옹 공화국 체제가 굉장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일, 조제프 푸셰 일대기를 정치 소설로 남긴,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에 의하면, 조제프 푸셰는, 변신의 변신을 거듭한, 삼국지 가후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인상이 깊었던 건, 총재 정부 시절, 푸셰가 바뵈프를 드러내놓고 지지하지 않으면서 우회적으로 바뵈프를 바뵈프를 통해 난을 일으키도록 은밀히 지원했던 것입니다. 이를 전혀 몰랐던 바뵈프가 난을 일으키자 곧바로 일망타진한 것입니다. 이는,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가 그간 행한 프랑스 흔들기의 종말을 알린 셈입니다. 물론, 이 시기,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가 프랑스 총재정부에 긍정적 판단을 내리고 겉으로 반프랑스였지만, 속으로는 친총재정부였던 점도 작용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방식을 그간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만이 구사했던 방식이었는데, 프랑스도 총재정부 시절부터 영국 방식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후, 1805년 친형을 파리대동방 랏지 총재로 임명하지만, 파리대동방 프리메이슨 조직을 사실상 1799년부터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파리 대동방랏지의 중심은 지식 자본 + 귀족 상징 자본이었으나,

1799~1802년 사이 군사력, 관료력, 행정 네트워크 중심의 실용 자본으로 교체됩니다."

1799년까지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가 프랑스 파리대동방랏지 모던파 프리메이슨을 중심으로 프랑스 흔들기 거점으로 활용해왔습니다. 허나, 나폴레옹이 1799년 파리대동방 랏지에 적극 개입하여 친영국 모던파 프리메이슨들을 대거 축출합니다. 더 나아가 1801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랏지와 파리대동방 랏지 의식 통합으로, 영국 모던파 프리메이슨에 대항한, 파리대동방 랏지를 중심으로 한, 고전파 프리메이슨 중심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 및 런던 모던파 프리메이슨들에게 매우 중대한 위협이었습니다.

해서, 인드라는 조선의 마지막 기회를 숙종 때로 보는 것입니다. 휘그-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숙종을 개망나니로 취급하지만, 인드라는 오히려 숙종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드라는 휘그-맑스주의적 입장에서 평가절하당했던 나폴레옹이 인드라가 20세기말 배낭여행 중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강의 제목이 나폴레옹 시대 재평가였던 데에 매우 놀랐고, 나중에 관련 내용을 인터넷 등을 통해서 접하고서, 충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인드라가 숙종을 높이 평가하는 건, 비록 고양이를 매우 좋아하지만, 숙종이 길고양이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드라가 숙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 유통가치론, 국제유통자본론, 국제시장경제사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최초의 숙종 평가입니다.

인드라는 숙종의 백두산 정계비나 울릉도 왜인 금지 등 실리적인 외교 능력만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숙종은 13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직접 통치에 나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13세라면, 오늘날에도 중2병 시절이 아닙니까? 이건 한국사 소드마스터하면 척준경이듯, 한국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인 것입니다. 심지어 세계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경우인 것입니다. 휘그맑스주의 파쇼 해석으로는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드라가 ㅄ취급하는 광해군이 세조-선조 개망나니 계보가 아닙니까. 게다가 숙종은, 화폐 유통 시도, 대동법 시행 등 여타 다른 왕과 달리 유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는 인드라가 높이 평가하는 세종대왕과 견줄 시도입니다. 숙종 때 각종 사화가 많이 발생했던 건, 숙종이 시종일관 개혁 정책을 펼치니, 신진 사대부들 가슴에 야망을 제대로 불지른 것이 원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인드라는 세조 때부터 조선이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고 보는데, 숙종 때에 단종과 사육신 명예를 회복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 세자빈 명예도 정상화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숙종 때가 소빙하기 최저점을 지날 때인 데다가 당대 세계 최강국 청제국에서 강희대제, 옹정제가 등장하였습니다. 하여, 인드라는 장희빈도 재평가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여, 인드라는 조선 실학파가 숙종 때부터 발생했다고 봅니다. 하면, 왜 숙종은 실패하였습니까? 인드라는 역사적 사례를 보면서, 진인사대천명을 떠올립니다. 하늘이 숙종을 돕지 못했습니다. 인드라가 보기에, 당대 숙종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시대가 숙종을 외면하였습니다. 나폴레옹처럼.

숙종은 인드라처럼 병약하였습니다. 하여, 숙종이 오래 살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인드라가 초등학교 시절,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의 슬픈 눈을 보고, 또 늘씬하게 패야 더 맛있다고 개패듯 패서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후, 채식주의자가 된 것처럼, 숙종이 어린 시절 낙죽(우유)를 먹다가 소 울음 소리에 우유를 먹지 않았다는 동질감에서 숙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숙종이 평소 온화한 성격이지만,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다는 인성 평가는, 인드라 관점에서 인드라의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원칙과 매우 유사합니다. 한번, 두번 정도란, 인간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 관용적일 수 있지만, 세번 저지르면, 매우 문제가 깊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숙종도 인간이니까 그 자신에게는 예외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숙종이 아닌 숙종에 적대하는 세력에게는, 특히 토호 세력에게는, 숙종 속을 알 수 없다, 변칙이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 영국 국내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고전파 공화파 프리메이슨들을 중심으로 '영국'도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은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습니다. 이는 당대 영국에서 인기있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영국만이 아니라 전유럽적 현상이기도 하였습니다.

A. 중세 시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언제나 반잉글랜드 반런던 동맹이었습니다.

B. 모던파 프리메이슨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는, 프랑스 혁명을 빌미로 상당할 정도로 영국 국내에서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고전파 프리메이슨에게 큰 불만을 야기하였습니다. 경제 문제와 외교 문제가 우선이지만, 이러한 영국 국내 동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습니다.

C. 모던파 프리메이슨은, 영국 국교회를 중심으로, 반 로마 카톨릭 동맹의 구심점이었습니다. 허나, 1801년 파리대동방랏지 고전파 프리메이슨 결성으로, 칼뱅 장로교, 퀘이커교, 감리교, 침례교, 루터교, 프랑스 위그노 등 개신교 교파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프리메이슨 지부가 줄기차게 주장하던 카톨릭파마저 흡수하여 반영국 반영국국교회, 반모던파를 완성시키면서, 모던파 프리메이슨 윌리엄 피트 영국 정부는, 최대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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