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재 + 명언
뭣이 중한디?
하루에 대한 기본 태도
하루를 영원처럼.
(초인적 태도)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가고 가고 가다 보면 알게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이상적 현실주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점
혁명가
...
나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안목을 지닌 인간이다.
...
“100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기재였다.”
저자 루젠둥은 20세기 초 중국의 대표적 학자인 천인커(陳寅恪·진인각·1890∼1969)를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천인커는 ‘학자를 가르치는 학자’로 불렸다.
...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다.
...
나는 천재 중의 천재고,
재벌 위의 재벌이며,
연인들의 연인이다.
심상화에 대한 관점
마치 결과를 아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경영 스타일
천재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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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uesday an unidentified man was filmed interrupting a comedy set to challenge Mike Tyson to a fight in a deranged attempt to 'elevate his status'
The man tries to play off the situation, saying: 'I don't give a f***! I'm joking' as the owner pushes him towards the exit
Its then the man says 'look this is easy' and pulls out a gun from his waistband and cocks it, shocking the MC and drawing gasps from crowd members
The man looks at Tyson and says 'Hey I love you fam, salute to all of your accomplishments, for real, if it wasn't for you we wouldn't have no inspiration'
Tyson calls the man over and he goes in for a handshake and the two then hug it out. The man then screams 'New York! Brownsville!'
After he is finally gone, the person recording thanks Tyson and the tense crowd applauds him
Even after he left attendees were shaken and some did not want to leave right away out of fear the armed man was still waiting for them in the streets
어느 날, 사이코 일자(一者)가 인생이 존나게 심심한 나머지,
자신을 여러 존재로 나투어 분한 뒤
연극 놀이를 하게 되었다.
- 일자: (거울을 보며) 나는 너무 이뻐.
(맡은 배역: 공주병 환자)
- 일자: 나는 너무 못생겼어 ㅠㅠ 듁고싶어 ㅠㅠ
(맡은 배역: 외모 콤플렉스 환자)
- 일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인간이야. 전세계 인류는 내 재능의 발끝에도 못미쳐.
(맡은 배역: '우월함'을 연기하는 케릭터)
- 일자: 내 인생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외모도 별로고, 수입도 변변찮고, 어저쭈 저쩌구 궁시렁 궁시렁 주절주절.
(맡은 배역: '열등함'을 연기하는 케릭터)
- 일자: "단언컨대, 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즐기세요."
(맡은 배역: 멍청이)
- 일자: 일자(一者)가 혼자서 연극놀이를 하는 것이 이 세계라니, 말도 안돼... 그런걸 유식한 말로 범재신론이라고 하지. 힌두교 베단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어쩌고 저쩌고...
(맡은 배역: 헛똑똑이 지성인)
- 일자: 저 개씹새끼, 죽여버리겠어!!!
(맡은 배역: 스스로에 대한 살인충동에 빠진 일자)
정신분열증세가 심한 일자는 돌도끼로 대가리를 맞은 듯
가끔씩 우울증과 구토 증상을 호소했으나,
어쨌든 이 놀이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일종의 마약처럼 금단증세가 너무 심했다.
그는 살인자인 동시에 살인피해자였고,
신인 동시에 피조물이었으며,
남자인 동시에 여자였고,
동양인인 동시에 서양인이었으며,
미남미녀인 동시에 삼엽충이었고,
모순과 혼란, 그리고 사랑의 집적체였다.
I am a NOBODY trying to tell EVERYBODY about a SOMEBODY who can change ANYBODY!!! #JesusisKing
지구의 역사를 바꾸기 위한 시간여행자 그룹
과거를 바꿔야 현재로 돌아올 수 있는 시스템
자기 정체를 누설하거나, 자연스럽게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현재로 돌아올 수 없다.
'시간여행자 그룹'은 1970년대 오일쇼크, 1980년대 영국 광산노조 파업사태, 학교체벌이 만연한 학교 등 여러 곳에서 역사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한다.
유언없이 숨진 美 남성 160억 재산, 이름도 모르던 119명이 상속
"미청구 재산이 상속자에게 반환된 사례 중 가장 큰 금액" 미국 조폐국이 찍어낸 1달러 지폐 미국 조폐국이 찍어낸 1달러 지폐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시카고=연합뉴스) 김현 통신원 = 평생 존재도 모르고 살았던 먼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는 일이 동화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27일(현지시간) 시카고 언론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유언장 한 장 남기지 않고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시카고 남성 조지프 스탠케익의 유산 1천100만 달러(약 160억 원)가 스탠케익의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 119명의 친인척에게 배분될 예정이다. 일리노이주 재무관실은 미청구 재산 반환 작업 과정에서 스탠케익이 거액의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평생 결혼도 않고 직계가족 없이 혼자 조용한 삶을 살다가 2016년 12월 23일 시카고 남서부 게이지파크 지구의 소박한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스탠케익에게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모두 앞서 세상을 떠났고 아무도 자녀가 없었다. 확인 결과 스탠케익이 남긴 재산은 '이지'(Easy)라는 이름이 붙은 보트 한 척과 은행 예금, 뮤추얼펀드 투자금 등 1천100만 달러에 달했다. 스탠케익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웃들은 그가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전했다. 재무관실 대변인은 조사관들이 법적 상속인 파악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그의 가계도를 추적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고 밝혔다. 스탠케익의 유산 관리를 맡은 케네스 피어시 변호사는 "상속인은 모두 119명, 5세대에 걸쳐 있으며 시카고를 포함한 일리노이주 외에 뉴욕·뉴저지·미네소타·아이오와에서부터 캐나다·영국·독일·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까지 북미와 유럽 곳곳에 퍼져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 스탠케익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 사람은 단 1명도 없다"고 그는 부연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세금을 제외하고 1인당 평균 6만 달러(약 8천500만 원)씩을 손에 넣게 된다 재무관실은 "미국 역사에서 유언장 없이 남겨진 미청구 재산이 상속자에게 반환된 사례 중 가장 큰 금액"이라고 전했다. 피어시 변호사는 "상속인이 대부분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돈을 전달하는 데만 최대 4년이 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투자전문매체 '마켓워치'는 "미국에서 유언장 없이 사망한 경우 은행 계좌·부동산·유가증권 등 자산은 사망자가 거주한 주(州)의 '유무언 상속법'에 따라 처리된다"며 다만, 타주에 소재한 부동산은 해당 주법을 따르게 된다고 전했다. 법원이 상속자의 적법성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유산은 주 정부에 귀속된다.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기이한 황금왕국 '조문국' [미스터리]https://www.youtube.com/watch?v=e2LYpH3Qzsk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km지점 금성면(金城面) 대리동(大里洞) 산 38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옛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古墳)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있다. 능(陵)의 둘레가 74m이며 능의 전면(前面)에는 가로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그런데 이 왕릉이 발견되기에는 신기한 전설이 있으니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허미수 문집에 실려 있다. 먼 옛날에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던 도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하였고 가운데는 금소상(金塑像)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하였더니 그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날 밤에 의성군수(義城郡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아무 곳 아무 데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 고 현몽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곳을 발견하여 봉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전해 온다. 현재의 능지(陵地)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吳克謙)의 외밭(瓜田)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新羅時代)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陵)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 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縣令)께 고(告)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외 374여 기(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이 부근에 산재하고 있다.</yt-formatted-string>
조문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언어 추가 조문국 문서 토론 읽기 편집 역사 보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문국 (召文國)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에 존재하였던 국가 였다. 기록상의 조문국 [ 편집 ]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삼한시대 [ 편집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이(卷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제이(第二)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조에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벌휴이사금 2년, 1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
ko.wikipedia.org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B%AC%B8%EA%B5%AD
'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 삶의 파도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너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 - 아슈타바크라 기타
이사람 몇년을 같이 같은 헬스 다니고
샤워장도 같이 썼는데 키도 엄청 커서 모델인가 했는데
몇달전 티비보고 깜놀했네요
매일 같은 사간대에 같이 운동했는데 설마
연예인에 이렇게까지 확 뜨다니
요즘 너무 떠서 헬스도 몇달전까진 개인1대1로 바꾸더니
최근엔 아에 오지도 않네요
저희동네가 변두리이긴 한데 의외로 연예인 출신이 많은데
캬리 파뮤파뮤,미야자키 아오이,격투가 마사토부인,타베 미치코
등 출신이 꽤 있네요
혹시 이런경우 있으신가요?
힙x)일본배우 사카구치 켄타로 아시는 분 계시나요?
이사람 몇년을 같이 같은 헬스 다니고 샤워장도 같이 ...
hiphople.com
처음엔 그냥 일반인이 모델하나
(헬스장 옷치고는 멋있고 맨날 헤어밴드해서)
했는데 갑자기 테레비 보다가
어?! 저 시키 우리 핼스장?!
했는데 그다음부터 ㅈㄴ 의식하게되고
막 자랑하고 싶은데 말은 한마디도 못한 사이고 ㅋㅋ
친하게 지낼걸 하고 후회했죠
ㅈㄴ허옇고 키 엄청 커요
근데 매일 거울봄
국게에 뮤즈 글 보고 생각났는데
저도 이런기질이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ㅋㅋㅋ
어 나만 알고 같은 헬스도 했는데
ㅈㄴ 떠서 빡치네 ㅋㅋ 이거 이감정 ㅋㅋ
다들 도쿄23구 중심지로 다 이사나가고해서
실제로 연예인은 거의 없죠 ㅋㅋ
도쿄 치곤 변두리라
아 제희동네 아따맘마에 나와요
그 제작 회사가 우리동네고(도라에몽,짱구,아땀맘마 제작) 배경이 이동네라 역이랑 노란 전철이랑
백화점 이름 좀 바꿔서 나와요 ㅋㅋ
네 니시토쿄시 라고 여기가 아따신치(아따맘마)
애니 배경인 곳이예요
한국으로 치면 일산 분당 쯤 되는거 같네요
주소는 도쿄인데 변두리
주원장의 책사, 유백온(劉伯溫)의 비가(悲歌)
善惡皆吾師(선악개오사) 풀
세상에서 일어나는 착한 일이나 악한 일이 모두 자기 몸가짐의 거울이 된다는 말
https://www.youtube.com/watch?v=d7MT1n6TrLE
잔혹동화의 역할. 옛 동화가 잔혹한 이유는?
그는 자신의 사상과 말을 가지고 보다 열의 있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다른 번뇌에 시달리고 자신의 주위 전체를 멸시하였다. 그는 낡은 기둥이나 벽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감정이 풍부할 뿐 아니라 남에게 구속받기를 꺼렸다. 활동적이고 자유롭고 1년 동안 할 농담을 매일같이 지껄여대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우울했다. 자신의 슬픔을 낯설고 이상하고 귀중한 사실처럼 즐기고 있었다.
불어: empire de la création
라틴어: imperium creationis
이들은 삶을 사랑하긴 하지만 보통 시민들보다는 삶에 덜 집착하는 편이고, 언제나 동화 속 왕자를 만나
그의 성으로 따라 들어갈 용의가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힘겹고 슬픈 종말을 늘 예감하고 있었다.
황야의 이리 P. 204
'일기일회'란 말은 중국 진(晉)나라 원언백의 "만년에 단 한번, 천년에 단 한차례뿐인 귀한 만남 '만세일기 천재일회(萬歲一期 千載一會)'에서 나온 말이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기회)이며, 모든 만남도 생애 단 한 번의 만남(인연)이라는 뜻이다.
모든 순간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고,
만남의 순간도 단 한 번 뿐이니,
그만큼 정성으로 손님을 응대하며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一期 人生 !
모든 인생이 최고의 순간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 !
만남의 순간도 한 번 뿐이니
정성으로 응대하며 함께하는
和敬淸寂의 구현.
[다큐] 1300년 된 여관 호시료칸;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정신으로 천년을 잇다
https://blog.naver.com/stratic007/222679389300
[다큐] 1300년 된 여관 호시료칸;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정신으로 천년을 잇다
1. 호시료칸과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정신 동영상1300년된 일본 여관...
blog.naver.com
이라크 니네베
아슈르바니팔: 특이할 만한 사항으로 지식욕이 매우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수도 니네베에 도서관을 직접 세워 여러 문서들을 보관한 도서수집광이었다. 이게 세계 최초의 도서관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와 에누마 엘리시도 이 니네베 도서관[3]에서 출토된 것으로, 여기에서 나온 자료들이 아시리아, 더 나아가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체에 대한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당시 왕들이 대부분 자신의 이름조차 적지 못할 때 자신의 언어였던 아카드어는 물론 당시 중동과 소아시아에 알려진 주류 언어를 해독할 줄 알았으며 문학작품을 제작할 줄 알았고 자신이 겪은 역사적 사건들을 들고있는 점토판에 기록했으며 당대 알려진 대부분의 식물학, 화학, 천문학, 수학을 할 줄 알며 궁술과 군사부문에 능통한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마음찢어지는 유언은 유명한데,
"짐은 신과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잘 대접했으나 질병과 고통 그리고 불행이 짐에게 닥친 이유는 무엇인가? 짐의 나라의 분란과 짐의 가족의 불화를 참을 수 없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창피한 사건들 때문에 늘 괴롭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짐을 짓누르노라, 짐은 고뇌에 울부짖으며 삶을 마감하노라, 죽음이 짐을 덮쳐 쓰러뜨리노라, 짐은 비탄과 한탄에 젖어 밤낮으로 울부짖노라. 신이시여,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다루시겠습니까? 부디 저를 구원해 주소서."
1931년 4월 8일, 영등포역에서 두 명의 '신여성'이 열차에 몸을 던져 목숨을 잃었다.
국내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은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이자 음악가 홍난파의 조카인 홍옥임과 종로의 대형서점 덕흥서림의 주인 김동진의 딸 김용주의 동반 자살사건이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알려진 명문가 출신 두 여성의 죽음은 당시 '조선 최초의 동성정사(同性情死)사건'으로 불리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책속으로 추가
일기예보에 바들바들 떠는 나날
음식점은 원래 현금 장사라 그날 번 돈을 바로 결제에 충당할 수 있어서 자금 변통이 어려워지기 힘든 구조다. 하지만 유사와는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을 만큼 어제 매출로 오늘 결제를 메꾸며 근근이 버티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낭패스러운 일은 주말의 비였다.
날씨가 궂으면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고, 수천만 원 단위로 입금액이 달라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월요일에 결제할 돈이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돈을 갚지 못하면 또 사죄하러 가서 결제일을 늦춰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주말에 비라도 내리면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말이지 환장할 지경이었다. “제발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 하며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기상캐스터가 “이번 주 날씨입니다. 주말에는 강한 비가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우울함이 극에 달해 화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 81쪽, 2장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
아내와 함께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도 밤늦게까지 둘이 남아 일했다. 퇴근길에는 문 닫기 직전인 슈퍼마켓에서 떨이 채소를 사다가 초라한 저녁 식사를 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대화조차 없었다. 매일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 근처에서 만나 맛있기로 유명한 음식점 이곳저곳을 다니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식탁에 마주 앉아 떨이 채소나 먹으며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운명의 장난에 농락당하고 있었다.
- 97쪽, 2장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
지하철 투신 미수 사건
어느 날 나는 국세국에 체납액 납부 문제로 불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울한 기분으로 오테마치 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새 담당자는 전임자와 달리 모질고 냉정한 남자였다.
담당자에게 상당히 벅찬 납부 계획을 강요받은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더는 못 버틸지도 모르겠군.’
‘이제 한계인가.’
‘요구대로 납부하지 못하면 어쩌지.’
그때였다.
갑자기 몸이 플랫폼에 들어오는 전철 쪽으로 기울어지나 싶더니 나도 모르게 선로에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나 자신조차도 그 순간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궁지에 몰려 있기는 했지만 결단코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잘못으로 진 빚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죽는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도,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는데도, 그때 내 몸은 틀림없이 선로를 향하고 있었다. 분명히 삶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하려고 한 것이다.
- 101쪽, 2장 《바닥보다 더 깊은 바닥》
무엇이 늘어나든 날짜만은 확실히 줄어든다
이 5년, 즉 1,827일분의 ‘일일 달력’을 만들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침실에 걸어두었다.
‘오늘도 회사는 망하지 않았어.’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버텼구나.’ ‘나도 회사도 아직 살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달력을 한 장씩 넘김으로써 내일을 향한 집념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아, 오늘 하루도 끝났다. 이제 1,800일 남았어.’ 하며 달력을 넘기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괴롭고 굴욕적인 일이 있더라도 어쨌든 하루는 지나간다. 하루가 줄면 다시 늘어나는 법은 없다. 빚은 늘어날지도 모르고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지만 날짜만은 반드시 줄어들었다. 그것이 정말 감사했다. 카운트다운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 115쪽, 3장 《딱 5년의 승부》
spiritual배경영화
강령술
과학계와의 대립 등
영화 프로이트대 융
1862년 발족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스트클럽, 케임브리지 대학교 고스트클럽(1862)
마법을 보고 자란 나의 세대
해리포터 영화 2001
어느 날 갑자기 외딴 섬에 강제로 끌려온 수천 명의 아동들이 군대식 통제와 폭행, 강제노역에 시달린 곳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거쳐 1980년대 초반까지, 경기도가 운영했던 '선감학원'입니다.
'아동판 삼청교육대'로 불리는 이곳에 대해 최초로 정부 차원의 진실 규명과 유감 표명이 나왔습니다.
차현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경기도 안산의 작은 섬 선감도.
지금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됐지만, 30여 년 전엔 외딴 섬이었습니다.
지난달, 이곳 야산에서 진행된 발굴 작업.
조심스럽게 땅을 파내려가자 뭔가 발견됩니다.
치아입니다.
[유해발굴 조사관]
"여기 어금니 두개 보이세요?"
닷새간 발굴에서 발견된 치아만 68개.
대부분 15살에서 18살 사이 청소년들의 치아로 추정됐습니다.
지난 1942년부터 82년까지, 이곳에서 운영됐던 '선감학원'의 희생자들로 추정됩니다.
당시 선감학원 제복의 단추들도 함께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뼈의 경우는 시신이 아동인데다 발굴된 토양이 산성이고, 오랜 시간이 흘러 대부분 분해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이곳엔 여전히 150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매장된 지 40년이 넘었기 때문에, 시간이 더 흐르게 되면 남아있는 유해까지 삭아 없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일제 시절부터 군사정부까지 40년 간, 경기도가 운영했던 선감학원에는 최소 4천 6백여 명의 아동이 끌려왔습니다.
[김영배/선감학원 피해자]
"아침이면 매일 여기 집합을 해서‥이제 지시사항 하달하고 그다음에 이제 군대식이야 군대식‥"
'거리를 배회하거나 걸식하는 아동을 근절한다'면서, 부모가 있는 아이들까지 마구 끌어갔습니다.
[정효일/선감학원 피해자]
"아버지는 사망하였고 원아대장에는 엄마는 정신이 나가가지고 행방불명이 됐고, (내 신상기록을) 엉망진창으로 해놔가지고‥"
염전 관리와 가축 사육, 농사 등 아동에겐 가혹한 노역이 강제됐고, 구타와 성폭력도 일상이었습니다.
1인당 평균 1제곱미터 공간에서 이른바 '칼잠'을 잤고, 식사는 한달 내내 감자국과 무장아찌, 김치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부패가 심해 흙속 애벌레까지 먹었다고 했습니다.
[김영배/선감학원 피해자]
"뻘건 황토 흙인데, 그 흙이 맛있어‥어떻게 먹을 수 있는 수단으로 그걸 먹은 거지."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다 숨진 사망자도 속출했는데, 그 시신도 대부분 아이들이 묻었습니다.
[안영화/선감학원 피해자]
"헤엄쳐서 물을 건너가야 하는데 그 물을 이기지 못하고 익사를 해서 떠밀려오는 친구들이에요‥여기다 제가 와서 묻었어요."
지금껏 선감학원 공식 사망자는 29명이지만 실제론 수백 명으로 추정됩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권력의 중대한 인권 침해'라며 정부와 지자체, 경찰 등의 사과를 촉구하고 특별법과 유해발굴 추진을 권고했습니다.
김동연 경기지사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명예 회복과 생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지상에서 초고층 빌딩을 올려다본 독특한 앵글을 통해 수직 성장한 홍콩의 경제와 사회를 은유한 이 사진들은 내게 마치 "인간세계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이비드 미첼의 말을 재확인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잠을 자는 동안 무의식 속에서 이 이미지들을 토대로 소설이나 동화에 어울릴법한 이야기 구조를 하나 생각해냈다. (* 깨어있을 때처럼 의식적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저절로' 생각해낸 것이다.)
바로 같은 공간(빌딩숲)에 모여사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세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보따리'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살아가긴 하지만, 같은 공간(빌딩숲)을 점유하고 있고, 때로는 이야기의 동선이 겹치기도 한다. 즉, 완전히 별개의 옴니버스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 속에 투영되고 침투되어 나타난다.
말하자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처럼 다양한 화자의 관점에서 세계의 풍경을 담아내고, 인간 의식의 지도를 보다 종합적으로 완성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작은 조각이 전체 조각의 형상을 비추는 프랙탈 구조처럼 이 이야기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로서 기능한다. 하여, 소우주와 대우주에 대한 고대 연금술의 은유("위에서 그러한 것은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힌두교의 인드라의 망, 불교의 연기법과 화엄사상, 만화경과 만다라, 복잡계 물리학과 자기조직화 현상으로까지 웅장하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빌딩숲의 다양한 풍경들 (예시)
1층 - 학업 스트레스를 비관해 아파트에서 투신하려는 쌍둥이 여중생 둘이 살고있는 곳
2층 - 하루에 10번씩 부부싸움을 하는 집
3층 - 고독사의 위험에 빠진 전직 정치인이자 독거노인의 집
4층 - 요도자위 등 변태성욕에 빠진 남성의 집
5층 -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문학에 빠져 집안 인테리아를 19세기 풍으로 하고 사는 여성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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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층 - 노처녀 히스테리에 걸린 39세 여성의 집
29층 -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는 의사의 집
32층 - 정치 비자금을 잃어버려 난처한 상황에 빠진 공작원의 집
45층 - CIA가 파견한 스파이의 집
58층 - UN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믿는 조현병 환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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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층 - 일본 아니메에 광적으로 탐닉하는 42세 오타쿠 남성의 집
150층 -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거식증에 걸린 패션모델의 집
200층 - 출가를 고민하며 불교서적을 읽는 가정주부의 집
팩트바이러스
회사 짤린 아빠와 수능 망한 아들의 택배 상하차 알바 썰.jpg
https://factvirus.co.kr/archives/20862
의로운 나치당원 욘 라베
4만5000원에 산 골동품, 알고보니 2000년 된 로마 흉상
미국 텍사스의 한 여성이 단돈 35달러(한화 약 4만4500원)에 산 골동품이 2000년 된 로마시대 유물로 확인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5일(현지시각) 미국 언론 뉴욕포스트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거주하는 로라 영이라는 여성이 지난 2018년 기부물품을 판매하는 매장에서 35달러에 구입한 로마시대 흉상이 지난 4일부터 샌안토니오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라 영은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조각상은 매우 오래돼보였고 로마시대 것처럼 보였다"라며 "아주 아주 특별한 조각상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구매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로라 영의 직감은 맞았다. 경매사 소더비는 그가 발견한 조각상이 기원전 1세기 말에서 서기 1세기 초 사이의 로마시대 흉상이라고 결론내렸다.
샌안토니오 미술관측은 "이 흉상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평생을 바친 폼페이우스의 모습이 담겨 있다"라고 설명했다.
폼페이우스의 아버지는 한때 로마제국 최고의 실력자였으나 옛 동맹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내전을 벌였다가 패해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2/05/402631/
4만5000원에 산 골동품, 알고보니 2000년 된 로마 흉상
미국 텍사스의 한 여성이 단돈 35달러(한화 약 4만4500원)에 산 골동품이 2000년 된 로마시대 유물로 확인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5일(현지시각)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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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GATTI
“If comparable, it is no longer Bugatti.“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 - 앨런 케이(Allen Kay)
"새는 날짐승이잖아. 그런데 무거운 새는 못 날아요. 그때는 날개가 덮개가 되죠(웃음). 인간도 몸이 불으면 못 날아. 늙고 병들면 머리가 빠지고 이빨이 빠지고 어깨에 힘이 빠져요. 비극이지. 그런데 마이너스 셈법으로 몸이 가벼워지면 날아요. 고통을 통과해서 맑고 가벼워진 영혼은 위로 떠요. 덩컨 맥두걸이라는 학자가 실험했어요. 죽은 후 위로 떠오르는 영혼의 무게를 쟀더니 21g이었죠. 그러니 죽어갈수록 더 보태지 말고 불순물은 빼야 해요. 21g의 무게로 훨훨 날아야지요."
Ginger Jones
11 months ago
My daughter who died by suicide in 2015 recommended this to me in an old email. I am revisiting old emails as a cathartic. She died at 33, my only child. We shared a love of music that moved us deeply, not necessarily the radios top 10 favs. I miss her. I feel her in the depth of this recommended great deeply moving song. I love it. Thank you!
"아마추어는 한계가 올 때까지 달리지만,
프로는 한계가 온 다음부터 달린다"
- 김현종
밥 프록터: 당신 믿음이 감정상태와 일치되는 순간, 당신은 그것과 결합한다. 이 결합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
밥 프록터: 우주는 아직 가공되지 않았다. 생각의 다른 이름은 운명이다. 당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기다리라.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닿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큰 업적이자 축복이다.
- 링컨
Some people may dismiss them as 'crazies' captives of passion, or rather slaves of romance, intoxicated in love.
https://m.blog.naver.com/dongkdk3323/70178484293
I came without an inkling of how I came here, but I've lived with all my heart and soul loveing every moment to the fullest.
Someday, without fail, everyone will disappear, scattered into the blackness of time.
If you possessed a modicum of self-respect, I reasoned, why should yu run errands, speak for another, or write for somebody?
- You are only limited by weakness of attention and poverty of imagination.
- Failure is just there to point you in a diferent direction.
one rule for you, one rule for us
"It's the context of our life that will change our life, not the content of our life that will change our life."
[서양설화] 솔로몬의 72악마
솔로몬의 72 악마 [Devil of Salomon] 악마학에서 솔로몬 왕이 봉인했다는 72체의 악마로써 솔로몬의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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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hang on man..
Idealism without egotism is feckless; egotism without idealism is destructive.
Toutes choses sont dites déjà ; mais comme personne n'écoute, il faut toujours recommencer
고대 아람어의 수비학 코드
Abra ca dabra
"내가 말한대로 이루어지리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꿈을 이룬 이유ㅣ#59ㅣ아누셰흐 안사리 Anousheh Ansari
https://www.youtube.com/watch?v=CESbcMCaiaE
What we achieve inwardly will change outer reality
- Plutarch
지하철에서 자고 있던 남자 정체에 일본인들 충격받은 이유…사망 상태였지만 승객 아무도 눈치 못해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aver?mode=LSD&mid=shm&sid1=001&oid=009&aid=0004895616&rankingType=RANKING
지하철에서 자고 있던 남자 정체에 일본인들 충격받은 이유…사망 상태였지만 승객 아무...
지하철 종착역에 도착해 모든 승객이 하차한 뒤에도 잠을 자던 남성이 이미 사망한 시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다. 수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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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입 속에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미국인이 알고 보니 20년 전 비행기 추락사고 생존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죽음을 두 번이나 피해간 것이다.
뉴욕포스트는 12일(현지시간) 전날 고래 입에서 탈출한 매사추세츠주에 살던 마이클 패커드(56)가 20년 전 비행기 사고 생존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패커드는 2001년 11월 29일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중미 코스타리카에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사고 당시 3명이 숨졌으나, 패커드를 비롯한 5명은 밀림에서 이틀을 보낸 끝에 가까스로 생존했다. 패커드는 사고 당시 얼굴에 중상을 입고 팔다리 여러 곳이 부러졌지만, 가까스로 구조됐다. 당시 생존자들을 치료한 의사는 “하루라도 늦었으면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패커드는 바닷가재를 잡으러 물에 들어갔다가 고래에게 삼켜지면서 두 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미국 CBS 방송에 출연한 그는 물속에서 고래에게 삼켜질 때는 “순간 큰 충격을 느꼈고 모든 게 어두워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처음에는 상어에게 공격받은 줄 알았는데,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을 때 이빨이 없어서 고래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 세상에, 내가 고래 입에 들어왔는데 고래가 날 삼키려 하네. 이게 끝인가보다. 내가 곧 죽는구나.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네” 싶었다고 했다.
고래 뱃속에서 그는 “그렇게 큰 동물을 이길 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고래는 날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할 터였다. 밖으로 내뱉거나 삼키거나 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고래 입 속에서도 잠수 탱크로 숨은 쉴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숨이 쉬어지네. 공기가 바닥날 때까지 이 안에서 숨 쉬고 있으려나”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고래는 30초 정도 뒤에 패커드를 뱉어냈다. 그는 “순간 고래가 수면 위로 올라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댔고, 내가 허공에 떴다가 다시 물에 내려앉았다”며 “나는 풀려났고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트에 타고 있던 동료들에게 구조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살아나온 패커드는 다리가 부러졌을까 봐 걱정했지만, 검진 결과 크게 다친 데는 없었어서 몇 시간 뒤 퇴원했다.
고래 전문가인 필립 호어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당시 그를 삼킨 고래도 ‘패닉’에 빠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통상 고래 식도에는 멜론보다 큰 음식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어 교수는 고래는 전면 시야가 좁아서 먹이를 삼키려다가 실수로 패커드도 삼켰을 것으로 추측했다.
고래 입에서 살아난 미국인, 20년 전 비행기 추락사고 생존자
고래의 입 속에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미국인이 알고 보니 20년 전 비행기 추락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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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요세상 블로그 포스트
청나라 때 태어난 세계 최고령 할머니 135세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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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자고 있던 남자 정체에 일본인들 충격받은 이유…사망 상태였지만 승객 아무도 눈치 못해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aver?mode=LSD&mid=shm&sid1=001&oid=009&aid=0004895616&rankingType=RANKING
한남대교 차량 전복…남성 운전자 불에 타 숨진 채 발견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aver?m_view=1&includeAllCount=true&mode=LSD&mid=shm&sid1=001&oid=437&aid=0000284000&rankingType=RANKING
진짜 견원지간···새끼 죽였다고 개 250마리 보복살해한 원숭이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aver?mode=LSD&mid=shm&sid1=001&oid=025&aid=0003159879&rankingType=RANKING
진짜 견원지간···새끼 죽였다고 개 250마리 보복살해한 원숭이
인도에서 원숭이 무리가 새끼원숭이를 죽인 데 대한 복수로 개 250여마리를 죽이는 ‘피의 복수’를 벌이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뉴욕포스트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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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심수봉이라는 트로트 가수 아세요?
그 가수분이 부른 곡중에 백만송이 장미가 있는데..
오늘 러시아시간에 러시아 노래를 배우다 그 백만송이 장미가 리메이크 된 노래라는걸
알았어요.. 러시아 원곡 이름이 "밀리온 로스 :백만송이 장미"죠
그리고 그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 니꼴라이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씌여진 곡이라더군요..
러시아에 이름 없는 무명 화가였던 리꼴라이는 자신이 일하는 카페에 여가수를
짝사랑해 그녀의 생일날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를 가지고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화가인 그에게 꽃 값을 만만치 않았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과 자신의 그림 그리고 자신의 모든걸 팔아 백만송이의 장미를
구래 그녀의 생일전 그녀의 집앞에 그 백만송이의 꽃을 장식하였죠
그리고 생일날 아침 그녀가 창문을 열자.. 그녀의 눈 앞에는 흐드러지는 백만송이의
붉은 장미를 보고 감동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녀는 니꼴라이의 고백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장미라는건 유한한 것. 장미가 식어가면서 그녀의 마음도 식어갔죠
가난한 화가였던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 자신을 원망하며.. 그녀는 꽃이 다 시들무렵
니꼴라이 떠납니다. 그녀의 가슴에는 그 백만송이의 장미를 묻고요..
그 후 니꼴라이의 삶은.....
러시아에서 짝수의 장미는 장례식에서 고인에게 바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고백하기 위해 꽃을 마련할때 홀수의 수를 사죠
그런데.. 니꼴라이는 과연 그걸 모르고.. 그녀에게 짝수의 꽃을 준걸까요?
그 뒤 니꼴라이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자신의 순간중 제일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백만송이 장미로 그녀에게 고백했던 날이라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냥... 그 이야기를 듣고 느낀건데.. 아무래도 니꼴라이는 일부로 짝수의 장미를
선물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은.. 가난한 화가였고.. 그녀에게 해줄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만 싶었지.. 가난한 자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수 없었기에..
일부로 그러지 않았을까.. . 하고 생각해 봤어요....
나중에.. 그런 멋진 고백을 할 날이.. 저한테도 올까하는 ㅋ 엉뚱한 상상과 더불어. ㅋ
글을 줄여요 ㅋ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요.; 그럼.;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15640
문득 든 생각인데, 이 포스트 하나만 참조해도 저는 경지 흉내내면서 베스트셀러 단행본 만들 자신 있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류의 제목으로 책을 내구요. 이를테면 "경지지만 괜찮아!", "경계선 지능장애자인데, 내 이야기한번 들어볼래?" 같은 식으로 하면 재밌을듯.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인데다가, 상당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아서, 베스트셀러로 작정하고 만들려면 정말 가능! 드라마화도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돈벌기는 쉽겠지만 좀 사기치는 느낌이라 못할듯.
그런데 '경지'들이 문장력은 꽤 괜찮은데요? 인터넷 커뮤니티 생활하는 자칭 '일반인들'보다도 나은데?
맥길대 졸업앨범에 적힌 문구가 인상깊다.
"When one is right, victory is only a matter of time."
- 브레진스키
무의식의 의식화
코로나
장례식 친구한테 옮겨
회사사람들 다 피해 가해자 피해자
격리기간 끝난 뒤에도 3주 더 격리햇으면 좋겟다는 회사
나오면 휴가 쓰겠다는 직원도 있고.
결국 퇴사
5년동안 일한 회사인데 허탈감 상실감
https://www.youtube.com/watch?v=y4y9T48mSQE&ab_channel=KBS%EC%8B%9C%EC%82%AC%EA%B8%B0%ED%9A%8D%EC%B0%BD
아오지탄광 드라마틱한 여성의 삶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관련해 ‘별의 순간’이란 표현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에서 가져온 말이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운명적인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순간을 제대로 포착하면 자기 구상을 실현할 수 있고, 못 잡으면 그 순간도 헛되이 지나가 버린다.”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선 같은 의미로 ‘신의 발자국 소리’란 표현을 썼다.
“그건 비스마르크의 표현이다. 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면 기회를 포착해 신의 옷자락을 잡아채야지, 아무 준비도 없이 가만 있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Perfection is achieved, not when there is nothing more to add,
but when there is nothing left to take away.
— Antoine de Saint-Exupery
I would have written a shorter letter, but I did not have the time.
— Blaise Pascal
“‘삶이란 얼마나 많은 숨을 쉬었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숨을 멎을 만한 순간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았는가로 평가할 수 있다(Life is not measured by the number of breaths we take, but by the moments that take our breath away.)’
난 두 세계 사이에서 있어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 비동시성의 동시성 (전근대, 근대, 탈근대)
서로 다른 시대의 특징이 공존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
스팀펑크
Steampunk
1980년대 중반 사이언스 픽션(SF)의 하위 장르인 사이버펑크에서 파생된 문학 장르로, 증기기관의 발달에 의한 산업혁명이 진행중이던 19세기 전후의 빅토리아조 영국 등을 무대로 SF적이거나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역사의 재해석을 시도한 일군의 복고적인 대체역사소설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사이버펑크는 근미래를 다루는 SF장르이니 역으로 근과거에 해당하는 18~19세기를 다루는 SF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질문이 스팀펑크의 출발점이다. 전기 대신 증기기관이 극도로 발달한 평행세계를 자주 다루며, 사이언스 픽션이 늘 그래왔듯이 기존 사회의 '타자'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Vive l'empereur
a cane sciolto
a stray dog who eschews rigid affiliation with any movement, religious or political
시즉필성始卽必成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고 멀리 뛰라!는 말이다. 이 말은 수운 선생이 해월 최시형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가르침
水의 응고작용이란 生의 원동력
유의이불언有意而不言(깊은 뜻은 있으나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것
팔문
음양이나 점술에 능한 사람이 귀신을 부리는 술법.
팔문은 개문(開門), 휴문(休門), 생문(生門), 상문(傷門), 두문(杜門), 경문(景門), 경문(驚門), 사문(死門)을 말한다. 이 8가지 문은 각각 '승리하는 문', '피해를 입는 문', '패배하는 문'을 의미한다.
motus animi continuus 정신의 끊임없는 움직임
1853년 7월 15일자 루이제 콜레에게 보내는 플로베르의 편지에서 따온 것
"Set your life on fire. Seek those who fan your flames."
Rumi
Inferno / Dante Alghieri - The World of Dante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1 Midway in the journey of our life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2 I came to myself in a dark wood,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3 for the straight way was lost.
Ahi quanto a dir qual era e cosa dura 4 Ah, how hard it is to tell
esta selva selvaggia e aspra e forte 5 the nature of that wood, savage, dense and harsh --
che nel pensier rinova la paura! 6 the very thought of it renews my fear!
Quid pro quo ("something for something" in Latin) is a Latin phrase used in English to mean an exchange of goods or services, in which one transfer is contingent upon the other; "a favor for a favor".
오예의 엘리사벳의 영성을 고통의 신비leidensmystik로 표현한 것은 적절하다.
- 리사 펠드먼 배럿
신적 지성 Divine Intellect
하느님 본성을 존재의 '순수함'puritas, '충만함'plenitudo, '부정의 부정'negatio negationis, '하나', '지성', '순전한 무'nihtes niht로 다양하게 부른다.
교차대구chiasmus (뒤바뀌어 반복되는 형태, a+b, B+a)
뵈메 - 끝 간 데 없음ungrund
자기 원인(causa sui)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 entrate
단테 <신곡> <지옥>편 제3곡 중 지옥 문 위에 새겨진 글귀
C'est la vie! 그것이 인생이다
술이부작
공자
자신자인역신지(自信者人亦信之)라고,
제가 불안함에 떨고 있을 때 저희 아버지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이에요.
'스스로 믿는 사람만이 남도 그를 믿어준다.'
If it's yours, it's not good to be there.
And if it's yours, it will stay with you forever.
just hang on man
Ancient Greek: φοῖνιξ
phoînix
bɛnu
κέντρον: meaning center
The Man Who Laughs in french
L'Homme qui rit
"남들이 뭐라 해도 넌 너의 길을 가(tu vai oltre, continua la tua strada)."
-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enthusiasm의 어원.
희랍어
엔토우시아스모스enthousiasmos
테오스로 가득찬 theos
신성으로 가득 찬
너는 내 영혼의 피난처
안식처
처칠
그가 남긴 어록 중 좋아하는 말이 있다. ‘운이 다할 때 사람은 정신을 넓혀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ni de droite ni de gauche)"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마크롱
(無信不立·무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ex caelis oblatus 신의 선물
먼저 행운을 약간 우연 내지 미신으로까지 치부하는 동아시아 문화권과 달리,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행운을 성공을 위한 덕목들 중 하나로 보고 인생과 관련된 진지한 관점으로 접근했다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로마에서는 패장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전쟁에선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해야 하지만 결국 승패는 운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131] 당시 유명한 장군들에겐 fortuna, felicitas, felix 같은 행운과 연관된 별칭이 붙어다니곤 했다. 술라는 자기 스스로 존칭을 행운아라는 뜻의 Felix로 지어 술라 펠릭스라 했다. 장군보다는 문학가였던 키케로조차 위대한 장군이 갖춰야 할 필수요소 중 하나로 felicitas를 꼽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행운(Fortuna Caesaris· Felicitas Caesaris)’이란 표현은 당대와 그 이후에도 일종의 상용어구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행운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묘사된다. 당대인들에게도 운명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많은 고대의 전기 작가들은 카이사르의 성공이 운명의 호의 덕분이라고 믿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그 운명을 권력 쟁취의 동력으로 삼았던 슈퍼 휴먼”으로 그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에 강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로 카이사르를 묘사했다. 현대의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행운의 연속이라고 평할 만한 카이사르의 삶을 두고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카이사르에게 미소 지었다”고 요약했다.
부모의 연애 스토리가 독특하다. 해머의 아버지가 출장으로 여러곳을 바쁘게 다니다가 비행기를 놓쳐서 급하게 다른 비행기를 잡아 탔는데, 겨우 잡은 좌석 옆의 승객이 해머의 어머니였던 것. 해머 어머니는 남친이 잠든 사이, 옆좌석에 앉은 해머의 아버지와 비행시간 내내 대화를 했는데 서로 너무 잘맞았고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Ego vir videns (나는 나의 가련함을 본 인간이로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댔지만, 세상의 괴로움은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운다”는 건 만고의 명언이다.
[출처] 자살인가, 타살인가?|작성자 Laissez Faire
488억원에 팔린 저택 지하실에서 발견된 30년 된 시신
http://news.jtbc.joins.com/html/382/NB11964382.html
미시담론
메타노이아 예수
우리말 성경 회개로 번역되지만, 진정한 회개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변한 것을 의미
엘로힘(Elohim)
히브리어
여럿이면서 하나로 묶인 통일체
뜻을 높게 가지고 기운은 조용하고 고요하게 간직한다.
雲高氣靜(운고기정)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Kulturkampf 문화투쟁
Aus der Asche fliegt ein Phonix auf (잿더미에서 불사조가 날아오른다)
Wohlstand fuer Alle
모두를 위한 번영
고대 로마에는 "책 아니면 아이(libri aut liberi)"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창의적인 작업에 매진하는 사람은 가족을 희생물로 삼는다.
"위대한 시인을 갖기 위해선 위대한 수용자(국민)가 있어야 한다
월트 휘트먼
30년 숲속에서 산 할매
천년불상안 미라
https://www.youtube.com/watch?v=CnwpZOrCW4g동영상
천 년 불상 안에 '승려 미라' 발견 / YTN
[앵커] 천 년 가량 된 중국의 불상 속에서 승려의 미라가 발견돼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스님이 참선을 하다 앉은 자리에서 열반한 것으로 추정...
www.youtube.com
https://www.yna.co.kr/view/AKR20200709100600083?section=international/all&site=hot_news_view
'목욕통을 배 삼아' 中수능생 폭우 뚫고 험난한 고사장행 | 연합뉴스
'목욕통을 배 삼아' 中수능생 폭우 뚫고 험난한 고사장행, 김진방기자, 국제뉴스 (송고시간 2020-07-09 14:18)
www.yna.co.kr
Grenzsituation
극한상황
sine quo non
indispensable element
one who wants to wear the crown, bear the crown
Imponderabilia
power which no one could fathom
만시지탄
<Von Freude ist nicht die Rede!>
우리는 재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Steiner called anthroposophy Geisteswissenschaft (science of the mind, cultural/spiritual science), a term generally used in German to refer to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117]
una religio in varietate rituum, a single faith manifested in different rites,
"Princeps Concordiae", or "Prince of Harmony"
은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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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 가람(강의 옛말)으로 보이나 아쉽게도 은은(隱隱)하다는 한자어다. 은가비 : 은은한 가운데 빛을 발하라. ... | 草芽라고 단어는 있으나, 풀싹이라는 뜻으로 한자어다
가짜 순우리말
토트
이집트 기록의 신
지옥사전
Le Dictionnaire infernal
地獄辭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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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이온[편집]
그리스어로 '시간', '영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냥 '영원한 존재' 정도의 뜻. 보통이 아이온은 데미우르고스를 창조했다고 여겨진다. 아이온은 하나 또는 여럿으로 나타난다.
Summum bonum is a Latin expression meaning "the highest good", which was introduced by the Roman philosopher Cicero,[1][2] to correspond to the Idea of the Good in ancient Greek philosophy. The summum bonum is generally thought of as being an end in itself, and at the same time containing many other pursuits typified as Good by philosophers of the time.
The term was used in medieval philosophy. In the Thomist synthesis of Aristotelianism and Christianity, the highest good is usually defined as the life of the righteous and/or the life led in communion with God and according to God's precepts.[2] In Kantianism, it was used to describe the ultimate importance, the singular and overriding end which human beings ought to pursue.[3]
The "revolution from above", the Avantgarde, or the Partei neuen Typs
쿼바디스
라틴어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
It ain‘t over till it’s over
승패를 스스로 판가름해서는 안 된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생의 경쟁에서 육체는 아직 살아있는데,정신이 기절한다는 것은 정신의 수치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
시벌노마(施罰勞馬)
주마가편(走馬加鞭)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한다는 뜻으로 일을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하도록 격려...
I'm the best there is,
the best there was,
and the best there ever will be
68혁명 구호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상상력에 권력을
너희들은 일하지 마라
국경을 철거하라
혁명을 생각하면 섹스가 떠오른다
불비불명
https://brunch.co.kr/@brunchflgu/540
불비불명(不飛不鳴)
■ 인용1) 초나라 장왕(莊王)은 즉위 후 술과 여자에 빠져 3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냈다. 장왕은 즉위하면서 “감히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이 있으면...
brunch.co.kr
Descartes 마쉬래 아니마타
숨쉬는 기계
호모 픽토르
인간은 상징을 창조하는 피조물
On his return to Lisbon, the Queen was informed by the Nuncio of the Pope's honour to Faria Jr. So, she too invited the young priest to preach to her as well, in her chapel. But Faria, climbing the pulpit, and seeing the august assembly felt tongue tied. At that moment his father, who sat below the pulpit, whispered to him in Konkani: Hi sogli baji; cator re baji (they are all vegetables, cut the vegetables). Jolted, the son lost his fear and preached fluently.
Faria Jr., from then on, often wondered how a mere phrase from his father could alter his state of mind so radically as to wipe off his stage fright in a second. The question would have far reaching consequences in his life.
발렌베리 가문의 원칙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esse, non videri
“Buy when there’s blood on the streets,” Rothschild famously said.
Be with me always - take any form - drive me mad! only do not leave me in this abyss, where I cannot find you!
how great thou art
수적천석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푸코
파놉니콘
중간전체주의
여인이여 그대는 나와 무슨 상관인가?
요한복음 2:4
유교적 가치관
30세 꼬맹이
샹델리에
기독교 교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의 아들 다르다
나는 빛을 만들고, 어둠도 만들며, 평화를 만들기도 하고, 악을 만들기도 한다. 주이신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행한다.
- 이사야 서 45:7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출 23:19; 34:26; 신 14:21)
이 짧은 구절은 수세기 동안 성서 학자들 사이에 그 해석을 놓고 논란이 되어 왔던 ...
Мне нравится, что Вы больны не мной,
Мне нравится, что я больна не Вами,
I like the fact that you’re not mad about me,
I like the fact that I’m not mad for you,
https://sites.google.com/site/poetryandtranslations/tsvetaeva/-i-like-the-fact
해상 보급에 의존한 채 고립되어 바다에 떠다니는 크루즈.. 그리고 그 안에서 절망하는 승객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Et a l'aurore, armes d'une ardiente patience, nous entrerons aux splendides Villes.
1971년 네루다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원래는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장식하는 시 구절.
An invasion of armies can be resisted, but not an idea whose time has come.
- 빅토르 휴고
탐마까이 종단'(Dhammakāya Tradition, 담마까야)은 1970년대에 창종된 태국의 불교 종단이지만, 그 뿌리는 그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
불언실행: 말없이 실행함
가려운 곳 긁는다 셴파 티베트어
파르마콘 데리다 약과 질병
양단불락
줄탁동시
드로몰로지 질주학
F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돛. 안전. 돌고래 헤엄.
속도 르네상스 유행. 아우구스투스 좌우명.
컨실런스 함께 띈다
유불선 회통 - 통섭 서양
유교 화이부동, 불교 원융회통
포르만토 디지록, 에듀테인먼트
au revoir! 또 보자 see you later
율도국
홍길동이 서자를 차별하는 조선 사회를 비판하면서 활빈당을 조직하여 팔도를 돌아다니며 탐관오리가 백성들에게 착취한 재물들을 뺏어가자, 임금[2]은 길동을 잡을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홍길동은 온갖 도술을 사용해 잡히지 않고 오히려 관군을 농락하고 자신에게 병조판서[3]라는 벼슬을 주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결국 임금은 길동과 직접 대면 후 대화를 나누고 원하는대로 병조 판서로 임명한다. 이에 길동은 임금에게 큰 절을 올린 후, 부하들과 함께 조선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아 저도에 정착한다.
정착한 섬에는 율도국이란 나라가 있었고, 당시 국왕이 주색잡기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자[4], 홍길동은 율도국을 정벌하고 그곳을 빼앗아 왕이 되어 다스리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선과 연락을 지속한다. 홍길동은 그 이후 삼십 년 동안 재위하다가 그의 부인들과 함께 월영산에 들어가 학이 되어 승천하였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 다스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실종된 남편을 70년간 기다린 여성
알고보니 프랑스
격추기 추격당해 죽어가면서도 인명피해 막기 위해 마을 반대편으로 돌진
한 마디로 한 가지 무언가를 엄청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원래 무사가 영지를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1]에서 나온 말. 방송에서는 一生懸命를 쓰는 게 원칙이지만 원래 버전인 一所懸命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 문화와 일본인을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 일본인의 장인정신, 즉 대를 물려 300년간 같은 곳에서 소바집을 하는 가문의 정신 같은 건 여기서 나오는 것. 또한 평생 직장을 중시하는 풍토[2] 역시 이 잇쇼겐메이 사상에서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일반기업에서 평생직장이나 연공서열 개념은 처음부터 정착된것은 아니라서 사실 메이지 시대나 다이쇼 시대때는 해고와 이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30년대 파나소닉사에서 시작해서 1950년대 이후에 정착된 개념이다.
현실이 어떠하던 많은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한 목숨 바쳐 들이는 정성'을 매우 숭고하게 그리고 있다. 세계 어떤 사람이던 이런 장인들을 존경하는 건 같지만 일본은 특히 이 '정성", 곤조 '근성', '최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매우 크다. 일본 사람들은 이 잇쇼겐메이라는 말과 함께 '결사'라는 말을 참 자주 쓰는데, '결사'적으로 해도 안 되면? 할복. 다른 사람들은 야훼나 하늘에 걸고 맹세하지만 일본인들은 목숨을 걸고 맹세하는 것도 같은 맥락. 그만큼 비장한 말이지만 너무 자주 쓰이는 느낌도 있다.
coup de grace
fait accompli 기정 사실
가온누리
"가운데를 뜻하는 가온과 세상을 뜻하는 '누리'의 합성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라고 알려져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일단 '누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가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문의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
'누리’는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나 ‘가온’이 등재되어 있지 않아 ‘가온 누리’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참고로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가운데’의 어원을 ‘<가온대<가온?<가??’로 제시하고는 있으나 ‘가온’만 분리해서 따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났을땐 내가 울고 사람들이 웃었으니,
내가 죽을땐 내가 웃고 사람들이 울길.
Grassy knollism
증거가 부족함에도 음모설을 제기하려는 경향
(달창기사단? 어준이 병싄?)
https://www.urbandictionary.com/define.php?term=grassy%20knollist
레드 헤링
red herring
매우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 명제로부터는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것을 지칭.
직역하자면, 붉은 빛깔의 청어.
Homo ludens
Die kunst über geld nachzudenken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금강경 불취어상
https://www.youtube.com/watch?v=laxuJf66_2A
동영상
한 회사원이 일으킨 기적의 구출극.영종대교 추돌사고[한일부부 토크]
#한일부부 #일본 #日韓夫婦 #韓国 ◆자기 소개◆ ぱく家(박가네)︰日韓夫婦(한일부부), 日韓情報(한일 정보) 일본 도쿄→ 홋카이도에서 가장 인구...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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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엽 영국 해적선이 조선에 침입해서
조선 수군과 하루종일 해전을 벌이다가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수광 지봉유설
실제로 1622년 7월 19일자 <광해군일기>의 기사를 보면,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현(興陽縣)의 앞바다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 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들어와서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언급되는데, 기사를 쓴 사관은 그 배가 “아마 서양의 배였을 것이다.”라고 추측했습니다. 이 국적불명의 서양 배는 조선 수군과 한참 싸우다가 달아났는데, 나중에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적의 배 한 척도 잡지 못했다니!”라며 탄식하는 분위기가 퍼졌다고 합니다.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mystery&no=8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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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생활 20년
부임 2년에 5학년 아이들 맡아
10년차에 잘생깅 청년이 거리에서
여기서 번호 따면 안되느네 설레였는데
알고보니 제자
예전의 앳된 모습은 하나도 없이 멋진 청년으로 자란
아쉽다
관에 들어가 인증샷 찍었다가 다음날 진짜로 관에 눕게 된 청년
https://www.insight.co.kr/news/25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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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도 윤정희 진짜 알츠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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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산다는 건 하루를 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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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나하고 맞는 상대인지 아닌지
미리 예정조화를 알 수 있음
//
16세기 말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에서는
기독교도가 된 사람이 꽤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 세기 전반기에 일본 막부가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시작하자 일본인 기독교도들이 대거 마닐라로 망명했을 때 이 무리 중에는 조선인 기독교도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 "우리는 우리의 선택(prohairesis)이다."
//
인도판 그리스 로마 신화로 불리는 대사서시 <마하바라타(Mahabhrata)>
I see it now. This world is swiftly passing!
이제야 깨달았도다. 생이 이렇게 짧은 줄을!
//
루미
tawhid (oneness of God),
Grist for the 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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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사건 당시 B씨 아내와 초등학교 1학년 둘째 딸도 가게 근처에 있었다. 중학생인 첫째 딸은 현장에 없었다.
B씨 아내는 가게 안에서 아주버니(A씨)와 남편이 서로 밀치며 말다툼을 벌이자 급히 딸의 손을 잡고 다른 곳에 피해 있었다고 한다. 앞서 가게 안에서는 A씨 형제가 '네가 대출금을 갚아라' '왜 내가 갚느냐' 등 고성이 오갔다고 상인들은 전했다.
그 사이 A씨가 B씨를 가게 앞 도로에 패대기치자 이를 본 주변 상인들이 A씨를 뜯어말렸다. 하지만 B씨는 이미 흉기에 찔려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B씨 아내가 달려와 쓰러진 남편의 상처 부위를 막고 지혈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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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수면부족 시대
잠을 산다
잼는 컨셉
너의 잠을 사겠으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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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등명 법등명의 뜻은 자기의 등불을 밝히며 법의 등불을 밝히라는 말이며
자귀의 법귀의의 뜻은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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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숨막힐 듯이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엎을 듯 한 총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산청군 금서면 생존자 최금자씨 증언#
거창 양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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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 한국사 최강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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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명 중에서 거의 반수를 골라내어 호 앞에 세웠다. 줄지어 선 사형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어부나 농민차림의 청년들은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냐고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한 늙은이는 "영명하신 성주님 살려달라"고 소리쳐 울었다. 그러나 도시(부산)에서 끌려온 젊은이들은 "뭣 때문에 죽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죽는다고 했고, 이왕 죽는 몸이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죽겠다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총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마구 쏘는 총성 속에 거꾸러지며 발악하는 아우성소리,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처절히 들려왔다. 붉은 피를 쏟는 시체는 아직도 꿈틀거린 채 호 속에 던져져가고 그 위에 흙이 덮어져갔다.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의 한 현장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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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일화들을 보면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했다. 특히 밀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신하들 집으로 찾아가는 등의 행위도 자주 했다. 거대한 청 제국의 황제보단 풍류를 아는 유쾌한 부자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선대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건륭이 하향 비교받는 점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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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야쿠자들은 사람을 죽인 뒤 수산화나트륨으로 액화시켜서 거름으로 뿌려버린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기계도 있다고 한다.
증거는 완전히 안 남고 (남는건 거름 뿐), 완전범죄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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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에 총 쏴 체포된 개도둑…강아지 들고 도망가다 ‘셀프 총격’
https://www.msn.com/ko-kr/news/world/%EC%A0%9C%EB%B0%9C%EC%97%90-%EC%B4%9D-%EC%8F%B4-%EC%B2%B4%ED%8F%AC%EB%90%9C-%EA%B0%9C%EB%8F%84%EB%91%91%E2%80%A6%EA%B0%95%EC%95%84%EC%A7%80-%EB%93%A4%EA%B3%A0-%EB%8F%84%EB%A7%9D%EA%B0%80%EB%8B%A4-%E2%80%98%EC%85%80%ED%94%84-%EC%B4%9D%EA%B2%A9%E2%80%99/ar-BBYgvnD
https://news.joins.com/article/20555683
진시황릉 현재 기술로 발굴 못해…30~50년 후에 발굴키로
죽은 진시황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 그 무덤 인근에 묻었다는 병마용의 모습. 다가서는 적을 향해 언제라도 공격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이들의 표...
news.joins.com
보도에 따르면 중국 국가문물국과 과학기술부 등은 중국 시안의 진시황릉에 대한 공동 탐사를 진행해 30~50년간 발굴을 중단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현재 기술로 문화재를 발굴하면 훼손될 것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진시황릉 현재 기술로 발굴 못해…30~50년 후에 발굴키로
“죄수 70만명을 동원해 땅을 파고 지하수 줄기에 구리 녹인 물을 채워 기반을 만들고, 자동으로 발사되는 쇠뇌를 설치하고, 수은이 흐르는 강을 만들었다. 공사 후 죄수와 장인들은 모두 생매장됐다.”
[출처: 중앙일보] 진시황릉 현재 기술로 발굴 못해…30~50년 후에 발굴키로
잠이 부족한 사람은 세상을 더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실험에서 학생들은 35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후에 fMRI 촬영을 했다. 그들의 편도체는 잠을 푹 잔 사람의 편도체보다 나쁜 일에 ㅐ해 60%나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8시간 숙면을 취한 뇌는 한결 평온해진다.
쇼트 슬리퍼 가계 유전 - hDEC2 유전자 변이
법의서
출판 이후 9개월이 지날때마다 환란이 발생했다는 책이다.[1]
1912년, 리베르 레기스 초판 발행 9개월 후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인 발칸전쟁이 발발
1913년, 리베르 레기스가 두번째로 출판되고 9개월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1930년, 세번째 출판 9개월 후, 만주사변이 발발. 이를 통해 일본은 중일전쟁 및 진주만 공습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1938년 12월 22일, 마지막으로 출판되고 9개월이 지나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원문을 읽고 싶다면 이쪽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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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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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추락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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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 - 나무위키
SF 의 펑크 서브컬처(Punk Subculture) 장르 스팀펑크 디젤펑크 사이버펑크 Steampunk 1 . 개요 1.1 . 탄생 배경 1.2 . 파생장르 1.3 .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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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싫은 인간
부모 친구 연인 다 버리고
50년 뒤 냉동인간 꺠어나
모두 죽어 없었다
이안스티븐슨
강령술 초능력 실험
관한 주제의 영화
본인의 여성 편력을 책으로까지 펴내며 유명세를 얻었던 일본의 70대 재력가가 돌연사한 사건과 관련, 3년 만에 그의 20대 부인이 체포됐다고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 경찰본부는 70대 사업가 노자키 고스케(野崎幸助·사망당시 77세)를 살해한 혐의(살인·각성제 단속법 위반)로 그의 부인 스도 사키(須藤早貴·25)를 이날 체포했다.
스도는 2018년 5월 24일 와카야마현 다나베시 소재 노자키의 집에서 노자키가 치사량의 각성제를 섭취해 중독사 시킨 혐의를 받는다.
노자키는 스스로 ‘기슈(紀州)의 돈 후안’이라고 말할 정도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기슈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과 미에(三重)현 남부의 칭하는 지명이며, 돈 후안은 17세기 스페인 전설에 등장하는 호색한이다.
노자키는 중학교 졸업 후 고철 수집, 방문판매원을 하며 돈을 모아 금융업, 주류판매업, 부동산 투자 사업 영역을 확대해 고액 납세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자산가가 된 후 자신의 여성 편력을 떠벌리고 다녔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성매매업소를 물려받아 수십 년간 업소 여러 곳을 운영하며, 128억원 상당의 불법 수익을 올린 가족이 경찰에 구속됐다.
대 이어 성매매
경기남부경찰청은 28일 성매매 방지 특별법 위반 등 혐의로 삼 남매와 이들의 배우자 등 5명을 입건하고 이 중 50대 A씨 등 2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출처: 중앙일보] 빚 이용해 성매매 늪 빠뜨렸다···악랄한 삼남매 '128억 집창촌' [영상]
A씨의 모친은 수원역 부근 집창촌에서 수십 년 전부터 성매매 업소를 운영해왔다. 모친이 사망하자 A씨 남매는 대를이어 1998년부터 지난 3월까지 23년간 이곳에서 업소 5곳을 운영했다.
수법도 악랄했다. 채무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상대로 선불금을 제공해 성매매하도록 유인했다. 또 몸이 아픈 여성 종업원들을 쉬지도 못하게 하며 손님을 받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들이 올린 불법 수익은 총 12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수사당국은 실제 이들이 해당 업소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벌어들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의 악행은 지난해 11월 20대 여성 2명이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 내 A씨 등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1~2년간 일하며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금품을 빼앗겼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수원지방검찰청에 접수하면서 드러났다. 검찰은 사건을 수원서부경찰서에 배당했다.
[출처: 중앙일보] 빚 이용해 성매매 늪 빠뜨렸다···악랄한 삼남매 '128억 집창촌' [영상]
중국 위진남북조의 유송(劉宋)시대에 황실의 인척인 유의경이 쓴 지인소설(志人小說)
본래 이름은 '세설(世說)'이었지만, 남송 시대쯤에 '신어(新語)'가 붙어서 세설신어가 정식 명칭이 되었다. 제목의 의미는 세상의 이야기들. 당시의 명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각각의 주제에 따라서 장을 나눠서 기록해 놓고 있으며, 이야기는 대체로 짤막하다. 한마디로 당대의 가십(gossip) 모음집. 또한 귀신, 환상종, 기이한 자연재해 등 온갖 신기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며 오늘날로 치면 괴담이나 도시전설급의 으스스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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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 석숭의 돈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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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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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개요 2 . 발단 3 .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좀 고쳐주세요 4 . 극적 해결과 일화 4.1 . 일화의 진위 여부 5 . 기타 6 . 평가 1. 개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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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칼집에 '용' 칼콧등에 '연꽃'..칼자루 문양은?[사진=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방송 캡처]
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
아주경제 홍준성 기자 =조선시대에 장수가 아닌 선비가 쓰던 환도가 처음 발견됐다.
환도란 조선시대 사용하던 전통 무기로 허리에 차기 편하게 칼집에 고리를 단 칼을 말한다.
20일 YTN단독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조선 선비의 칼은 김천 성산이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보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되면서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조선 선비의 칼은 칼자루와 칼집에 새긴 문양의 아름다움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된다.
어른 팔길이의 칼집에는 구름 속에서 용이 꿈틀하는 문양히 새겨져 있고 쇠로된 칼자루에는 물고기가 칼 콧등에는 연꽃 모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희귀성과 예술성, 역사성까지 국보급 문화재로서 3박자를 모두 갖췄다.
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했다는 게 맞군요","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들이 아직 많이 있나 보네요","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성산이씨 가문이 어려운 결정을 했네요"등의 반응을 보였다.
https://www.dogdrip.net/dogdrip/367822605
머리 위에 학벌이 보이는 세계.txt - DogDrip.Net 개드립
https://m.dcinside.com/board/genrenovel/4018736?recommend=1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미 허드슨 교수 "어떠한 물리적 이론으로도 설명 불가능.....
www.dogdrip.net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미 허드슨 교수 "어떠한 물리적 이론으로도 설명 불가능..."'
' 잇따른 혼란에 정부"원인규명 및 사태파악 중" 일관된 대답만 이어져... '
' 갑작스러운 대치동 학원가 및 수능 등록생 폭발적 증가... 올해 수능 응시 희망생 600만 명 돌파할 듯 '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엔 한 가지 변화가 발생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 서울대학교 전기전보공학부 19학번 ]
[ 중앙대학교 철학과 15학번 석사과정 수료완료 ]
[ 동통대학교 배달종사자양성학과 20학번 ]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인지, 애초에 물질인지 아닌지도 규명되지 않은 글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글자에는 그 사람의 학벌이 그대로 쓰여 있다. 학번까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영국 등 전세계에서 각 나라의 언어에 맞춰 글자가 생겼다.
전세계를 뒤덮은 건 글자만이 아니었다.
학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생긴 암묵적인 갈등부터 글자의 존재에 대한 종교계의 대립, 수많은 음모론과 종말설이 세계를 뒤덮었다.
글자가 나타난 지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각지에선 혼란과 대립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일단 이부분은 잠시 제쳐두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글자가 나타난 뒤로, 2주동안 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할 뿐더러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 총각~ 세상이 말썽이여도 월세는 내야지! 대체 방 안에서 꿈쩍도 안하고 뭐하는 거야? "
"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지금은 밖에 나가기 곤란합니다. "
" 이번주 금요일까지 안나오면 그땐 나 혼자서는 안 올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
주인집 아주머니가 언성을 높였다.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한참동안 반응이 없자 결국 아주머니가 포기하고 돌아갔다.
' 밤에 야반도주를 할까? 아냐, 서울 한복판에 사람 하나 마주치고 않고 달아나는 건 불가능이야. '
홧김에 손에 붙들고 있던 무전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 대체 본부에선 왜 연락이 안오는 거야! '
지지난 주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연락이 되던 본부와의 연락이 한순간에 모두 끊겼다.
격양된 감정을 누르기 위해 마른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내 머리에도 역시 내 학벌이 적혀 있었다.
내가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글자 때문이다.
학벌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아니, 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조기졸업한 수재다.
내 글자만 혼자 다른 내용이 쓰여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 학벌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적혀 있다.
그렇다면 내가 왜 밖을 나가지 못하냐고?
[ 김일성대학교 15학번 남파공작요원부 ]
그냥 좆됐다.
내가 간첩이라고 홍보를 해주고 있다, 남파공작요원부라는 비밀 학부를 나온것까지.
아니, 여기서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도 수령님의 시련이라면 받들겠습네다. 나 리재혁, 불필코 극복할 것입네다. 이깟 글씨 몇 자 같은 시련 고향에선 암것도 아니디요. '
'많이 공부하고 널리 보라. 화합하지만 특색이 있어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多學博見 和而不同(다학박견 화이부동)'
매미는 비가 와도 운다
제갈량 담박명지, 영정치원
무릇 군자는 고요함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검소함으로 덕을 키운다.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고요하
지 않으면 먼 곳에 이르지 못한다.
이후 <소학>에 인용 됨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남의 일로 보지 않는다.
- 고대 로마의극작가 테렌티우스
음과양
pardes rimmonim
카발라 남자 여자 음과 양
신의 측면
sometimes you have to reach into someone else's world to find what's missing in your own
what nature leaves imperfect, the art perfects
연금술
Beware the quiet man. For while others speak he watches.
And while others act, he plans.
And when they finally rest, he strikes.
Exception disproves the rule
representations collectives
levy-bruhl
pleroma
융
Ignotum per ignotius (Latin for "the unknown by the more unknown") describes an explanation that is less familiar than the concept it would explain.
numinosum. rudolf otto's term (in his idea of the holy) for the inexpressible, mysterious, terrifying, directly experienced and pertaining only to the divinity.
hic Rhodus, hic salta
Prove what you can do, here and now
Non foras ire,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 (Go not outside; truth dwells in the inner man)
"The golden opportunity you are seeking is in yourself. It is not in your environment; it is not in luck or chance, or the help of others; it is in yourself alone."
- Orison Swett Marden
sub specie aeterni
timeless
이승만 반공포로
자중자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
주역의 괘상 중에 천택리는 운을 기다리는 경건한 마음이다. 이 괘상은 '하늘이 주는 복을 담는 그릇이 있다'는 뜻이다. 하늘 아래 연못!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어린이처럼 쑥쑥 자란다는 뜻이다. 또한 하늘을 뒤따라간다는 뜻이니 좋은 운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독신을 막는 방법
가장 비루하고 작은 곳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대한 세계가 탄생한다.
사람은 한 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창공으로 치솟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우주도 두 손으로 가벼히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겨야 옳다.
- 정약용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머무르는 것을 두려워하라.
rosicrucian problem of opposites (per crucem ad rosam)
the uniting symbol of carl jung:
aurum philosophorum
omnis festinatio exparte diaboli est - al haste is of the devil, as the old masters used to say
포세이돈으로부터 오디세우스를 구원해주는 여신 leukothea
euosis / one
prsica theologia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Ad quid venist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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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son d' etre
존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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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민술(고대 작센어: Irminsul)은 색슨인의 종교적 상징이다. 기둥 모양의 물건이라고 하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수백 년 간 의견이 분분하다.
이르민"의 노르드어 형태는 "요르문(고대 노르드어: J?rmunr)으로, 곧 "위대한, 거대한"이라는 뜻이다. 야코프 그림은 요르문그룬드(i?rmungrund; 거대한 땅, 곧 지구), 요르문간드(i?rmungandr; 거대한 뱀) 등의 표현을 예시로 들면서 고게르만족의 "이르민"이라는 이름을 노르드의 "요르문"과 결부시켰다.[2]
Irminsul
데미 우르고스
coup de grace 결정적 한방
sine qua non 필수요소
aid sweet in his grave, the hope of humanity not yet subjugate in his.
- 에머슨
L' existence precede l'essence
Premeditatio Malorum
kiveiru 진리에 도달
Ekpyro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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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pyrosis (/ˌɛkpɪˈroʊsɪs/; Ancient Greek: ἐκπύρωσις ekpyrōsis, "conflagration") is a Stoic belief in the periodic destruction of the cosmos by a great conflagration every Great Year. The cosmos is then recreated (palingenesis) only to be destroyed again at the end of the new cycle. This form of catastrophe is the opposite of kataklysmos (κατακλυσμός, "inundation"), the destruction of the earth by water.[1]
The concept of ekpyrosis is attributed to Chrysippus by Plutarch.[2][3]
에픽테토스는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prohairesis)이다."
Enkrat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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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nophon was one of the first to write about enkrateia.
Enkrateia (Greek ἐγκράτεια, "in power - from ἐν (en, “in”) + κράτος (krátos, “power”). Enkrateia comes from the adjective enkratês (ἐγκρατής from ἐν (en, “in”) + κράτος (krátos, “power”)) meaning possession, power over something or someone else.
During Socrates' life three of his disciples, Isocrates, Xenophon and Plato, transformed the adjective enkratês to the noun enkrateia and gave it a different meaning: with them, enkrateia meant not power over something or somebody else but power over yourself, power over your own passions and instincts, self-control.[1]
For Aristotle, enkrateia is the antonym of akrasia (ἀκρασία from ἀ = without + κράτος = power, control) which means "lacking command (over oneself)".[2] In this sense, enkrateia is the state of performing what is known to be a positive choice because of its positive consequences as opposed to akrasia, which is the state of performing what is known to be not a positive choice (because of its negative consequences), but nevertheless performing it because of its immediate pleasures.[3]
To Xenophon, enkrateia is not a particular virtue but "the foundation of all virtues".[4]
Euthymia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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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thymia (Greek: εὐθυμία, "gladness, good mood, serenity", literally "good thumos") is a term used by Democritus to refer to one of the root aspects of human life's goal.
Diogenes Laërtius records Democritus' position as "The chief good he asserts to be cheerfulness (euthymia); which, however, he does not consider the same as pleasure; as some people, who have misunderstood him, have fancied that he meant; but he understands by cheerfulness, a condition according to which the soul lives calmly and steadily, being disturbed by no fear, or superstition, or other passion."[1]
In Seneca’s essay on tranquility, he uses the Greek word euthymia, which he defines as “believing in yourself and trusting that you are on the right path, and not being in doubt by following the myriad footpaths of those wandering in every direction.”[2]
표류교실의 세계관
이상한 괴물
곤충 유전자
신인류
밥잘사주는누나 팝송차용
1200년 된 세계최고 도서관
http://www.hani.co.kr/arti/PRINT/7620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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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 지방의 어떤 마을에서는 1920년까지 독신의 문제를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그 마을에는 <혼인의 밤>이라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그날 밤이 되면, 열여섯 살이 된 처녀와 총각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마을 어른들은 참가하는 처녀 총각이 동수가 되도록 사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다. 행사는 먼저 산기슭의 야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흐드러지게 먹고 마시는 성대한 잔치로 시작된다. 그러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처녀들이 먼저 식탁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간다. 처녀들이 달려가 덤불 속에 숨으면,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총각들이 그녀들을 찾으러 간다. 어떤 처녀든 그녀를 가장 먼저 찾아낸 총각이 그녀를 차지하게 되어 있다. 예쁜 처녀일수록 그녀를 찾는 총각들이 많게 마련이지만, 아무리 콧대가 높은 처녀라도 자기를 가장먼저 찾아낸 총각에게 퇴짜를 놓을 권리는 없다.
그러다 보니, 예쁜 여자들을 가장 먼저 찾아내는 것은 꼭 잘생긴 총각들이 아니라 날래고 눈치 빠르고 꾀 많은 총각들이기가 십상이다. 다른 총각들은 덜 매력적인 처녀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떤 총각도 처녀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마을로 돌아오는 것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총각이 못생긴 처녀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혼자서 돌아오면, 그는 마을에서 쫓겨나고 만다. 못난 처녀들로서는 그 행사가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어둠이 짙을수록 유리한 건 그녀들 쪽이다.
이튿날에는 결혼식이 거행된다. 그 마을들에 노총각과 노처녀가 거의 없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이세욱, 임호경 옮김, 열린 책들, 페이지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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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프 알 아킴
파티마 왕조38)의 칼리프 알 아킴은 카이로에 살았다. 그는 자기 도시를 얼마나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지, 자기 권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불합리한 법령을 제정한 다음, 자기 백성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수수한 마실꾼 행색으로 미복(微服)을 하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의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사회학적 실험을 한 셈이었다.
백성들이 자기 명령에 얼마나 잘 복종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야간 노동을 금지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빛이 부족한 상태에서 일을 하면 시력이 나빠진다는 거였다. 누구든 밤에 촛불을 켜놓고 일하다 적발되면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밤 마실꾼으로 변장하고 돌아다니다가 그는 어떤 빵집 주인이 일하고 있는 현장을 잡았다. 알 아킴은 그 사람을 빵 굽는 가마에 넣어 화형시켰다. 그러고 나니, 모든 백성이 밤일을 금한 그 법에 잘 따랐다. 그것을 확인하지 그는 법을 바꾸어 주간 노동을 금지했다. 이번엔 모두가 밤에만 일을 해야 했다.
그의 백성들은 길들여진 짐승처럼 그의 기발한 법령들이 공표되기가 무섭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금방 따라왔다.
그때부터 그에겐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는 모든 종교를 지배하기 위하여 카톨릭 성당과 유대교 회당을 헐게 하고는, 변덕쟁이 군주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두 종교의 신전을 다시 짓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해 주었다.
이어서, 그는 여자들에게 향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신발 삼는 것을 금하고, 화장을 못 하게 하더니, 급기야는 여자들의 외출마저도 금지해 버렸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만든 법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러 돌아다니다가, 공중 목욕탕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을 찾아냈다. 그는 즉각 모든 출구를 봉쇄하도록 지시했다. 여인들은 그 안에서 굶어 죽었다.
알 아킴은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토후들 앞으로 보내는, 봉인된 서신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서신에는, <이것을 가져온 자에게 황금을 듬뿍 주시오>라는 내용 아니면, <이것을 가져온 자를 죽이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뿌린 편지를 줍는 것은, 읽는 자가 죽음을 당한다는 점만 빼면, 오늘날 복권을 사는 행위와 다를 게 없었다.
어느 날, 그의 옷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십중팔구는 그의 수많은 적 중의 하나가 그를 살해했을 터였다. 그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죽은 뒤에 그에 대한 숭배가 은밀하게 번져 나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를 지혜와 상상력이 충만했던 군주로 추켜세우는 사람들마저 나타났다. 이슬람교의 종파 가운데는 알 아킴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종파도 생겨났다. 시아 파의 과격한 종파인 드루즈 파가 그것이었다.(드루즈 파 신도는 특히 레바논에 많이 있다).
38) 북 아프리카에 있었던 한 왕조(909 ~ 1171). 이슬람 교 시아 파의 한 갈래인 이스마일 파의 왕조이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탈 파티마의 후손이 세웠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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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남한으로 건너와서 신세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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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으로 요약 하겠음.
애 4명딸린 29세 女가 남편(30세)과 이혼 하려고 택시 타고 가던중
택시기사(36세) 와 눈이 맞아 성관계 했다가 애인(27) 한테 걸려 추궁 당하자
택시기사를 허위 강도 강간을 당했다면 신고
자녀 4명은 아빠가 과연 한사람일까?
https://namu.live/b/headline/180215?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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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홀
장외주식 이희 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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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대 전설의 도둑 할머니
https://gongyuan1872.blog.me/221293353897
100억 대 전설의 도둑 할머니, 노후를 감옥에서 보내다
위 사진 속 늙고 힘없어 보이는 86세 고령 할머니, 그녀는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 63년간 뉴욕, ...
gongyuan1872.blog.me
강제로 성매매당한 중국 5세 소녀 사건 이후 이야기
https://gongyuan1872.blog.me/221297555935
강제로 성매매 당한 중국 15세 소녀, 사건 이후 이야기
*이 이야기는 중국 포털사이트 sina에서 강제 성매매 당한 소녀와 그녀의 가족을 취재한 이야기로 기자의 ...
gongyuan1872.blog.me
버려진 전쟁고아에서 52개 특허 가진 과학자로, 토머스 클레멘트의 이야기
웨딩드레스 입고 길거리에서 구걸하게 된 중국 목수의 숨은 이야기
[출처] 웨딩드레스 입고 길거리에서 구걸하게 된 중국 목수의 숨은 이야기|작성자 루나아
연애만 다섯 번한 중국 남자, “결혼할 여자를 찾습니다”
[출처] 연애만 다섯 번한 중국 남자, “결혼할 여자를 찾습니다”|작성자 루나아
신은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는데 그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면, Entweder will Gott die Übel beseitigen und kann es nicht:
신이 약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Dann ist Gott schwach, was auf ihn nicht zutrifft,
신이 능력은 있는데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Oder er kann es und will es nicht:
신이 악의적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Dann ist Gott missgünstig, was ihm fremd ist,
신이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도 않고 할 능력도 없다고 하면, Oder er will es nicht und kann es nicht:
그렇다면 신은 약할 뿐더러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신이 아니다. Dann ist er schwach und missgünstig zugleich, also nicht Gott,
신에게 합당한대로 그가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며 할 수도 있다고 하면, Oder er will es und kann es, was allein für Gott ziemt:
그렇다면 어디에서 악이 오는 것이며 왜 신은 그것을 없애지 않을까? Woher kommen dann die Übel und warum nimmt er sie nicht hinweg?
당신은 저를 참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어요
Vous vous etes bien fait attendre
Fuggiam gli ardori inospiti (아, 타오르는 감정들로부터 달아나라)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모네트 Nulla in mundo pax sincera
마 투, 레, 투 시뇨 레 포센테
그러나, 오 신이여, 그대의 초월적인 힘으로
오 테라, 아디오, 아디오 발레 디피안티
(오 땅이여, 안녕, 안녕, 슬픔의 골짜기여.)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사무엘상 26:25)
노리치의 줄리안 (Bd. Julian of Norwich)의 ‘멋진 어우러짐’
Bucke's magnum opus was his book Cosmic Consciousness: A Study in the Evolution of the Human Mind.[8] The book is a compilation of various theories rather than strictly a simple record of his original mystical experience.
Bucke borrowed the term "cosmic consciousness" from Edward Carpenter
판타레이(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
헤라클리투스
아베스타: 배화교 성전
판테온: 수메르 신들 회의
anagrama: 칼 융 암호
唯一命唯一生
一期一會
야마시타 보물
https://www.dispatch.co.kr/880703
에픽테토스는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prohairesi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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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여교사' 카톡 공개 /사진=스타트뉴스 단독보도 캡쳐
이른바 '논산 여교사 사건'에 대한민국이 큰 충격에 빠졌다.
충남 논산시 소재 한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보건교사로 근무한 30대 여성 A씨가 제자 2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등장했다.
지난 12일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논산 여교사의 미성년자 남학생 성폭행 여부 철저한 조사를 촉구한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학생이 동의를 했든 안 했든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면치 못한다. 만약 성관계를 했다면 미성년자 간음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은 기간제 교사 A씨의 남편이 "아내가 학생과 성관계를 가졌다"며 관리 책임을 묻는 내용증명을 학교에 보내면서 알려졌다.
"임신테스트기 사다놔" 논산 여교사-성관계 나눈 남학생 카톡 공개
그는 아내 A씨가 고등학교 3학년인 B군과 수차례 성관계를 가졌고, 이후 B군의 친구 C군이 불륜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스타트 뉴스는 논산 여교사와 B군이 나눈 카톡 메시지를 공개해 논란을 재점화했다. 공개된 카톡에서 여교사 A씨는 "약국 가서 임신 테스트기 사다놔", "임신하면 어떡하지. 어쩐지 아기 갖고 싶더라", "결혼하자"라고 B군에게 말했다.
이에 B군은 "너 노렸어", "자기가 제일 조심해야돼"라고 말했고 이야 A씨는 "알았어요, 보고싶어. 가슴 두근 거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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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선도(八仙圖)는 도교의 깊은 이치를 체득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종리권(鍾離權)·여동빈(呂洞賓)·장과로(張果老)·한상자(韓湘子)·이철괴(李鐵拐)·조국구(曹國舅)·남채화(藍采和)·하선고(何仙姑) 등 여덟 신선을 각기 독특한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인 도교의 사원에는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이 여덟 명의 신선들을 모시는 팔선궁(八仙宮)을 따로 마련해 놓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아마도 이들은 남녀노소, 빈천부귀를 대표하고 있는 데다가 그 출신 성분들이 걸인, 도사, 관리, 황제의 친척, 시인 등 각양각색이기에 도교에서 받드는 다른 신선들보다도 인간적으로 훨씬 더 가깝고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선인/인물 목록
?삼청
?원시천존
?도덕천존 (태상노군=노자)
?영보천존 (태상도군)
?현천상제 (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도道의 또 다른 화신이다.)
?태극금관제군
?무극지존
?태을구고천존
?옥황상제
?서왕모
?상상태일
?무극태상원군
?동악대제
?천신, 지신, 일신, 월신, 풍신, 우신, 뇌신, 역신, 산신, 재신[50], 토지야[51], 충왕/유맹장군[52] 등의 다양한 자연신.
?구천현녀
?마조 - 2번 항목
?벽하원군
?이랑진군
?항아
?염라대왕
?유불도의 삼교가 섞이면서 각 종교의 조사들이나 신적 존재가 신선으로 받들어지는 경우 → 공자, 석가모니, 지장보살, 미륵불, 탁탑천왕[53], 관음낭랑[54], 손오공 외 다수.
?관우
?여동빈
?종규
?북도풍음대제 (한백무림서의 무당마검에 나오는 풍도대제다.)
?주문왕, 무왕(주), 태공망, 진시황, 한 고조, 위 무제, 진 문공, 제환공 등...[55]
?남두성군, 북두성군
?이하 생략 (위에서 말했다시피, 도교의 신은 3만 6천 + α 명인데 그걸 다 쓰기엔..)
https://news.joins.com/article/5632826
유관순 올케 독립운동가 조화벽; 남편 류우석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는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여겨 여러 이념단체와 충돌; 남북한에서 그간 유관순열사가 푸대접받은 이유
홍석현 전두환 비서 - 사공일 강조 - 박근혜 전두환 추심
정일수
https://namu.wiki/w/%EC%A0%95%EC%9D%BC%EC%88%98
광동성 창녀촌 출신으로 창녀촌을 빠져나와 정을의 첩이 되었으며 정략결혼의 대가로 남편의 재산 절반을 얻어내었으며 1807년에 남편인 정을이 사망하자 남편의 부하, 동성 연인, 의붓 아들이자 공인된 후계자인 장보자와 함께 선단의 전권을 쥐게 된다.[1]
1807년부터 3년 동안 5만명 이상의 부하와 1,000척 이상의 해적 선단을 거느렸으며, 그녀의 해적 선단은 남중국해의 거의 전역을 지배했고 당시의 강대국의 어떤 해군보다도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이들에 생활 방식은 포로가 되었던 서양인들의 기록으로 알려졌는데, 놀랍게도 5만 명 가까운 해적 집단의 절대 다수가 동성애자였다고한다. 덕택에 배에 타고있던 여성들은 정조의 위험이 전혀 없었지만 포로가 된 배의 선장이나 항해사 등 고급선원들은 모두 다 본보기로 "신의 뜻에 거역하는 무시무시한 일을" 당했다고 한다.[2]
그녀가 해적행위를 하는 동안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지나가는 배들과 영국, 포르투갈 등 자신의 해적행위를 방해하는 국가들의 해군을 격퇴시켰다. 1810년에 영국, 포르투갈, 중국 등이 그녀에게 대항할 연합 함대를 구성했으며, 중국 황제[3]는 이러한 공격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올 것이 생각해 그녀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사면을 제안하였다.
그녀는 황제의 사면 제의에 응하여 광동의 정부 관리자와 협상한 끝에 그녀와 7000명의 해적들은 배와 무기를 버리고 대신에 자신들이 약탈한 보물들을 합법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고 하며 해적을 그만두고 은퇴한다. 이 시기에 장보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이후 30년을 더 살아 죽을 때까지 약탈품을 끝까지 소유하여 부유하게 살다가 손자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고 죽었다고 한다.
가상화폐 거래소 공중분해
양진호 청부살인 스님이 대행... 다단계 피라미드 형태
오늘 새벽 일 상공에 불덩어리 번쩍... 불꽃별똥인듯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103_0000520353&cID=10101&pID=10100
슈레버 회상록 영혼의 살인자
아버지가 눈꺼풀을 못 감게 강요
바로 우금치(언덕)인데
저기서 2만여명의 농민군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저 좁은 골짜기에 매복해있는 관군과 일본군에게 제대로 걸려서 몰살당한것이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갈 정도인데,
농민군 선두가 겱ㄱ 저 길목에서 계속 총탄을 맞고 쓰러지던 상황이었거든ㅇ.그런데도 불구하고 후위가 저 장면을 보고서도 끝끝내 계속 올라오다가 결국 몰살되었다는 겁니다.
계속 꼬리를 몰고 올라왔다는 겁니다 후위가..
자신들이 죽을 것을 뻔히 알고는 있지만 일단 전세상으로도 관군과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힐대로 좁혀져 있었고,
어쨌든 한야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결국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한말 조정의 폭정과 사회모순에 지치고 분노한 농민, 민중들이 새로운 참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강렬한 열망으로
불 나방처럼 열정을 불태우며 저 길목을 올라갔다는 얘기죠.
얼마나 삶이 서러웠으면..
참으로 전율스러우면서도 슬픈 엔딩장면이 이 우금치전투였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여기는 지금도 영혼제 굿을 매년 하고 있는데,
그 서러움의 기운이 백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너무 강하다고 하더군요.
비참하고 서러운 그 기운들이 서린 장소입니다.
제가 구상한 시나리오는 이거에요 -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거구요- 차원이 시간적 한계에 갇힌 게 아니라 사후세계에 모인 사람들이 각각 죽기 전에 뭔 일을 하고 살아왔는지 , 그리고 카르마가 존재하는지, - 염라대왕, 귀신, 그리스로마 신들, 전세계의 귀신들이 모여서 다같이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거에요.
그러면서 나중엔 차원이동해서 전생에도 갔다가 후생에도 갔다가... 여기서 주제는 어떤 거냐면 - 궁극적인 선악의 개념은 무엇이고, 행복은 무엇인지 다같이 고찰해봤으면 좋겠다. 철학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싶구요 - 님이 이런 드라마 좀 만드시면 제가 출연하고 싶네요 .ㅋ
기억을 유지한채 환생
극상층 극빈층
https://blog.naver.com/stratic007/221611373114
마지막 남자친구 이야기
[일본] 마지막 前일본인 남자친구 이야기| ㆍ생생외국 경험방 새우 고래등 터뜨리기 | 조회 10223 |추천 0 ...
blog.naver.com
경북 구미에서 강물에 뛰어들었던 고교생이 실종 15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11일 구미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4시 25분께 구미시 양호동 산호대교 낙동강변에서 고등학생 A(17)군의 시신이 발견됐다.
A군은 이날 오전 1시 45분께 산호대교 12m 아래 강물에 투신했다.
A군 아버지는 경찰과 119 구조대에 "아들이 강물에 빠졌다"고 신고했다.
경찰과 119 구조대 100여 명은 수색작업을 벌여 낙동강 산호대교 하류 20여m 지점에서 A군의 시신을 수습해 가족에게 인계했다.
경찰은 A군이 다리 위에서 이성문제로 아버지와 말다툼 도중 감정이 격해 뛰어내린 것으로 보고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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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3,000개 돌탑에 새긴 마음의 한(恨); 강릉 모정탑길 만든 차옥순 할머니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이어 잃고 숲속에 혼자 들어가 돌탑을 만들던 그 절절한 심정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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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ett 1
카이로 출신의 가수 밥 아잠(Bob Azzam)의 유명 곡인 야 무스타파(Ya Mustafa)의 곡으로 가사는 대충 옛날의 터키에 살던 무스타파라는 상냥한 남자가 어느 날 노예인 여자 한 명에게 사랑에 빠졌으나 그에게는 돈이 없었고 포기할 수 없어 생각하다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은 없다.' 라는 결론을 내려 결심을 하고 터키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어 그녀를 급히 방문하니 벌써 그의 나이는 60세였고 그는 결국 펑펑 울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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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ett 2
평생 미술계의 냉대와 가난 속에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방문을 걸어잠그고 그림만 그렸던 조지아의 천재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
상점의 간판을 그리던 어느 날 하루, 아름다운 프랑스 출신 여배우 마그리타 Margarita가 그의 동네에 순회공연 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로스마니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팔아 많은 장미꽃을 사서 그녀가 단 하루 묵는 호텔 광장과 창문에 온통 가득 뿌려 평소 짝사랑하는 흠모의 정을 전했다 (아, 얼마나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그녀는 금새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 같은 이야기는 피로스마니가 죽은 후 러시아 대표 시인 안드레이 보즈넨센스키 (Andrei i Vozene sensky)가 쓴 시에 라트비아 출신 작곡가가 부른 "백만 종이 장미 (Millions of Red Rpses)"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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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에쿠우스'는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찔러 정신병원에 입원한 17세 소년 알런과 그 소년을 치료하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그의 자유분방한 내면세계에 빠져드는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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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의 비서, 안중근의 동지도…일제의 핵심 '밀정'이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551830?cloc=joongang%7cmhome%7cgroup16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이범석·김규식 등 독립군 간부들의 인상착의와 특징, 군자금 모금 과정과 그 책임자들, 독립군의 현 재정 상태, 김좌진·김원봉의 연합 의거 계획 등 온갖 치명적인 정보들이 일제에 다 넘겨졌다. 학계 전문가들은 취재진이 발굴한 이 자료에 대해 "경악할 만한 밀고"라고 평가했다. 분량만 57장에 이른다.
이정이 남긴 '진중일지'(사령부일지)는 '독립운동사 자료집'에도 수록돼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다. 이정은 1920년 청산리 전투 직전, 그가 몸을 담고 있던 북로군정서 내부 상황을 일기로 남겼다. 그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일제를 상대로 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이끌었다.
그가 동지들을 배신한 것은 1924년이다. '진중일지'를 쓰고 4년 뒤였다. 그가 진중일지로 남긴 독립군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일제에도 넘어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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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3일(현지시간) 한 항공편 기장의 기괴한 행위에 승객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제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난 기장이 기내 방송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것. 자기가 이혼 소송 중이라는 내용부터 트럼프도 힐러리도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등 그야말로 뜬금없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인종이 다른 커풀 승객들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1등석 승객에게... 마지막에는 자신(여성)이 아니라 남성 기장이 운행할테니 안심하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결국 승객의 절반 정도가 놀라서 탑승을 거부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기장은 마지막에는 승객들을 안고 눈물을 뽑는 기행을 보이다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갔다. 결국 기장을 교체하느라 약 90여분 간의 지연이 발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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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숨을 참을 수는 없지만, 난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매일 더 사랑해!"라고 쓰여 있습니다.?이어 웨버 씨는 편지를 뒤집어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문구를 보여줬습니다. 앙투완 씨는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담으며 행복해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웨버 씨가 프러포즈를 한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닷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한 겁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448697&oaid=N1004565202&plink=POP&cooper=SBSNEWSEND&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창밖을 바라보는 고교생 미남
고모네집 회상
//
조조
내가 천하를 버리더라도, 천하가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2018.6.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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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위 장악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B41&newsid=02469846599461352&DCD=A10105&OutLnkChk=Y
에이스침대(003800)(103,800원 3,100 -2.90%)가 형제회사인 시몬스침대와 함께 국내 매트리스 시장을 장악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토대는 1990년대초 마련됐다.
안유수 에이스침대 회장은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1963년 에이스침대공업사를 세우고 침대 사업에 뛰어 들었다. 1980년대 세계 1위인 씰리와 합작해 선진 기술을 익혔고, 1992년 시몬스침대를 인수하면서 현재의 구도를 다졌다.
특히 에이스침대는 1990년대초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카피를 앞세워 대대적인 마케팅에 나서면서 침대 1위라는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각인시켰다.
IMF 외환위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외환위기 와중에 보루네오가구와 동서가구 등 당시 메이저 가구업체들이 휘청대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시장도 에이스침대 쪽으로 넘어왔다.
가구업체들이 외환위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진출하려 했을 때 이미 판세는 되돌릴 수 없었다. 2002년 안유수 회장이 대진침대가 갖고 있던 세계 2위 썰타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구축됐다. 안 회장 일가는 1위 에이스, 2위 시몬스, 3위 썰타를 품에 안으면서 한동안 국내 침대 시장을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에이스침대는 여전히 품질과 브랜드 관리에 공을 들이며 1위 수성에 힘쓰고 있다. 에이스침대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침대공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 매년 매출액의 12% 가량(2010년 201억원)을 광고선전비에 쏟아 붓고 있다. 2위 시몬스침대 역시 광고선전비 비율이 에이스침대에 못지 않다. 한샘이나 리바트는 전체 매출의 1% 수준인 40억∼60억원 가량만 광고선전비에 할애한다.
업계에서는 안 회장 일가에 의해 매트리스 시장 구조가 왜곡되고 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안 회장이 인수한 썰타는 현재 국내 침대시장에서 부각되고 있지 못하다. 에이스와 시몬스를 키우기 위해 다른 업체에서 썰타 브랜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인수한 뒤 퇴출시켰다는 주장을 내놓는 이들이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에이스침대가 20%대의 영업이익률을 올리는 것은 독과점에 따른 것"으로 "소비자의 선택권을 크게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이스침대 측은 에이스침대와 시몬스침대는 형제가 경영하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회사라며 독과점 주장에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다.
에이스침대는 장남 안성호 사장이 74.56%를 가진 대주주이고 시몬스는 차남 안정호 사장이 99.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안정호 사장은 0.32%의 에이스침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 로스차일드가 처음 돈을 번 과정은 국채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쇼를 하는 바람에 주식으로 대박을 터트렸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주식이 아니라 국채입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을 때, 황금기가 다시 올 것으로 기대한 네이선은 언제라도 현금화할 수 있는 수단인 금을 사 모았다. 유럽 전역에 깔아 놓은 정보망에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네이선은 워털루 전투 이전부터 금을 팔고 조금씩 영국 공채를 사들였다. 본격적으로 공채에 손을 댄 시점도 속설과는 다르다. 퍼거슨 교수의 다른 저서 ‘금융의 지배(원제 The ascent of money)’에 나오는 그래프를 보자. 네이선이 콘솔 국채를 대규모로 사들인 시기는 1815년 7월과 12월, 1816년 10월. 세 차례에 걸쳐 57, 62, 67% 선에서 콘솔을 매입한 네이선은 1817년 11월 이를 84% 수준에서 팔아치웠다.
보다 장기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봐도 네이선이 매도한 시점은 최고점 매도에 해당되지만 워털루 전투와는 뚜렷한 인과 관계가 없다. 1812년에서 1823년까지 콘솔의 가격 그래프에서 워털루 전투 전후의 급등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네이선이 런던 거래소에서 분탕질할 때 프랑스에서 막냇 동생 제임스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대목은 더욱 근거가 없다. 네이선 보다 15살 어린 제임스는 1811년(19살)에 파리로 이주해 1817년부터야 본격적인 금융업에 나섰다. "
로스차일드 대박 투자의 진실
http://www.sedaily.com/NewsView/1OH9S3AZCL
다만, 국채로 대박을 터트리긴 했지만, 그 이전에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금을 대량 매입했다가 나폴레옹이 엘바섬 탈출 이후 별 볼 일이 없어보이자 금값 폭락에 위기를 느낀 로스차일드가 국채로 만회했다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니얼 퍼거슨이 로스차일드 가문 감수를 받아 로스차일드 이야기를 책으로 냈을 뿐 아니라 키신저 저서도 책임진 노비네파 핵심 경제이론가이니 약간만 색안경을 끼고 78:22로 보면 믿을만하다고 봅니다. 로스차일드 주식 대박은 히틀러가 이차대전 때 선전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 로스차일드-모건
모건 역사도 국채에서 시작합니다.
"모건은행의 모태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조지 피바디 주식회사(George Peabody and Company)다. 조지 피바디는 원래 미국 볼티모어에서 건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이었으나,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1835년 영국 런던으로 진출했다.
금융업이 유망하다고 판단한 피바디는 그곳에서 일부 상인들과 머천트뱅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업종은 당시 유행하던 ‘고급 금융’이었다. 고객은 주로 정부나 대기업과 부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제 무역 대출을 제공하고,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며, 대형 상품을 취급했다. 이것이 오늘날 투자은행의 전신이다.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어음 인수 또는 증권 발행을 주요 업무로 하는 은행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Brown Brothers & co.)
알렉산더 브라운이 설립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재벌로서, 미국 자본주의 초기 발달단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피바디는 볼티모어의 브라운브라더스앤드컴퍼니의 영국 지사를 통해 영국 금융계에 쉽게 진출했다. 얼마 후 그는 뜻밖에도 네이선 로스차일드 남작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세계 은행가를 좌우하는 네이선과의 만남을 마치 교황이라도 만나는 양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황송해했다.
피바디를 만난 네이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비밀홍보 대리인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재산가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미움과 조롱을 받고 있었다. 런던의 귀족 계급은 네이선을 업신여기면서 그의 초대를 번번이 거절했다.
비록 로스차일드가 영국에서 세력을 떨친다고는 하나 귀족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이선이 피바디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겸허함과 인덕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인인 피바디가 앞으로 쓸모가 많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물론 피바디는 네이선의 제의를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홍보에 필요한 모든 지출은 네이선이 부담했다. 피바디의 회사는 순식간에 런던에서 유명한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매년 7월 4일에 피바디가 주최하는 독립 기념 파티는 런던의 귀족들 사이에 이미 큰 행사로 자리 잡았다. 손님들은 그토록 호화롭고 웅장한 파티 비용을 몇 년 전만 해도 무명의 보통 상인이던 피바디가 부담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1854년까지만 해도 조지 피바디는 100만 파운드급 은행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000만 파운드를 벌어들여 미국의 중량급 은행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사실 피바디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책동한 1857년의 경제위기 가운데 미국 철도 채권과 정부 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영국의 은행가들이 투매할 때 큰 손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잉글랜드은행이 파산 직전에 있는 그에게 80만 파운드의 신용대출을 긴급 제공해 기적적으로 소생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피바디가 모든 재산을 털어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미국의 국채들을 사들였다.
1857년의 경제위기는 1837년 당시 10년을 끌던 불황과 달랐다. 미국 경제가 불과 1년 만에 불황의 늪을 빠져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피바디의 수중에 미국 채권들은 그를 슈퍼급 부호로 빠르게 변신시켜주었다. 이는 네이선이 영국 채권을 사들이던 1815년의 상황과 유사하다. 정확한 내부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파산의 악몽에서 막 깨어난 피바디가 미국의 채권을 그토록 과감하게 사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피바디는 방대한 사업을 물려줄 후계자 문제로 늘 고심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젊은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을 영입했다. 피바디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주니어스 모건이 사업을 물려받았으며, 회사 이름도 주니어스 S. 모건 사로 바꾸었다.
회사는 여전히 런던에서 경영했다. 나중에 주니어스의 아들 J.P. 모건이 회사를 물려받은 후 미국 지사의 이름을 JP모건이라고 지었다. 1869년, J.P. 모건과 드렉셀은 런던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만났다. 모건 가는 조지 피바디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1880년, JP모건은 철도공사의 구조조정을 위한 비즈니스 활동에 대량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 로스차일드가 세계를 지배했던 과정을 복기하자.
무엇부터 시작했는가. 금융이다. 금융을 지배했다. 금융 중심 런던을 장악하고, 유럽 네 곳에 금융 허브를 심었다. 이는 유럽에서 전 세계로 확장하는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뉴욕과 홍콩, 싱가포르를 금융 허브로 삼았다.
다음으로 로스차일드가 주력한 사업이 무엇인가. 해군과 육군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해군을 장악하기 위해 동인도회사 지분을 삼켰다. 하고, 육군을 장악하기 위해 철도 사업을 주관하였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로스차일드가, 미국에서는 모건이. 미국과 유럽에서 물류 허브를
만들었다.
그 다음이 무엇인가. 통신이다. 천재 테슬라 도움으로 로스차일드가 행한 사업이 무엇인가. 통신과 영화, 엔터테인먼트이다.
- 채플린 기념사업회장이었던 록펠러(197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40500209204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4-05&officeId=00020&pageNo=4&printNo=15539&publishType=00020
- 에드워드 히스(영), 아민토레 판타니(이), 자크 시라크(프), 헬무트 슈미트(독), 데이비드 록펠러(미) 등이 위원회로 구성된 임펠리얼상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230032911702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6-23&officeId=00032&pageNo=17&printNo=14792&publishType=00010
- 박정희와 로스차일드
빅터 로스차일드는 1973년 이전까지 모스크바, 워싱턴, 런던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국유본 수장이었습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박정희 516혁명 이전까지는 쪽발일성 정권을 지지했으나 박정희 516혁명 이후에는 박정희를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쪽발일성 정권이 급속하게 몰락하는 반면, 박정희 516혁명 이후부터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을 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쪽발일성 경제보다 우위에 서게 됩니다.
해서, 박정희 정부는 이스라엘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여, 시온의정서가 번역해서 나옵니다. 박정희 정부 내내 유태인 칭찬하는 기사나 글이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중동전쟁이 일어나면 유학한 아랍인들은 도피하지만, 유학한 유태인은 귀국하여 총을 들고 싸운다고 말입니다. 또한,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과 이스라엘 키부츠운동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더 나아가, 인드라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1960년대말 베트남 전쟁 당시 푸에블로호 사건과 무장공비 청와대 침투사건으로 박정희 정부에게 빚을 진 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하여, 1970년대부터 한국이 화폐 수출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국유본이 쪽발에게 전자제품 기술을 알려주어 쪽발이가 전자제품이나 카메라 같은 데서 우위였던 것 아닙니까.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하는 겁니다.
- 1920년대 독점적 트러스트의 완성
세계 독점트러스트의 형성에 의한 머니 게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1910년대에 있었던 상황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권력과 민간투자금융자본이 대결의 시나리오로 모방하고 있는 전략이 이 시기의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는 다방면에서 국제적인 카르텔이나 트러스트가 결성된 시기다. 그러다 1920년대 후반에 닥친 경제공황에 의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1910년대는 해상운송, 철도, 석유, 주식회사의 의결권, 금융, 자동차, 광산, 철강, 전기, 전신, 화학분야 등 산업 전분야에 걸쳐 카르텔이나 트러스트가 형성됐다.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는 자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경쟁력 유지방법이었으며, 부를 창출하는 기법으로 분야별 1위의 기업에 의해서 주도됐다.
해상운송분야에서의 국제 카르텔은 영국,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의 해운회사들로 결성된 범선소유주위원회,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러시아, 핀란드의 기업들에 의해 결성된 발틱운송협의회, 모건 그룹의 주도로 미국, 영국, 독일의 기업들에 의해 구성된 모건 트러스트 등이다. 모건 트러스트는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증기선을 독점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광산분야에는 유태인 기업가 오펜하이머 그룹에 의해 주도된 카르텔이 가장 많았다. 국제아연사업가연맹, 독일,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미국의 기업들에 의해 결성, 유럽 생산량의 92%를 독점한 국제아연신디케이트, 국제아연제련소협의회 등이 있다.
철강분야에는 독일과 벨기에, 프랑스 등의 철강기업들의 신디케이트로 결성된 국제철강기업소유주카르텔, 미국철강트러스, 베들레헴철강회사, 쿤롭철강회사 등으로 결성된 국제철강협의회,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미국, 멕시코, 영국의 납제조업자들이 만든 국제납생산업자협의회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독일의 알게마이네전기, 미국의 제너럴전기, 영국의 톰슨, 프랑스의 휴스톤전기 등에 의해서 결성돼 세계 전기기업네트워크를 형성한 국제전기카르텔, 국제염화석회카르텔, 국제아교제조카르텔, 국제붕산염카르텔, 국제카바이드신디메이트, 국제화약 카르텔, 국제등유카르텔, 유럽원유생산카르텔, 국제면직업카르텔, 국제직물카르텔, 국제유리제조업카르텔, 국제도자기카르텔, 국제제지카르텔, 국제석재업카르텔, 국제점토업카르텔, 국제고무제조카르텔, 국제코코아카르텔, 스탠다드오일트러스트, 카네기철강트러스트, 모건의결권트러스트, 국제구리생산자트러스트, 국제바나나트러스트, 국제송수관트러스트, 국제금속트러스트, 국제과일생산자트러스트, 미국주식금융트러스트 등 전세계는 카르텔과 트러스트를 결성하기 위한 협회, 협의회, 연맹 등을 결성하고 가장 강력한 M&A를 추진하는 열풍이 몰아 닥쳤다.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는 가장 강력한 독점지배가 형성된 시기다. 시장독점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영국의 로스차일드 그룹이나 미국의 모건 그룹과 같은 거대한 투자금융회사가 있었고, 가장 국제화된 투자금융제국들에 의해 강력한 국제 카르텔이나 국제 트러스트가 만들어져 국가권력보다 힘의 우위를 점하는 세상이 됐다.
세상이 바뀌자 세계 각국에서는 국제 금융자본트러스트가 결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국제경제계는 집단적소유지배체제가 형성돼 국제금융황금기(Golden International of Finance))의 시대가 된다.
현대에도 민간업자의 사모펀드와 국가권력의 연금 및 기금이 거대 다국적기업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M&A전쟁에 돌입하고 있다.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의 사례를 정밀 분석해 다가오는 M&A전쟁에서의 생존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로스차일드-록펠러의 대립
"1960 년대 들어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를 배경으로 달러화의 신인도가 급격히 저하되어 달러화의 불안정이 고조되었던 상황을 말한다. 1958 년 이후 준비통화국인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는 악화된 반면 일본 등 각국의 국제수지는 흑자로 돌아서 달러보유고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각국은 미국에 금태환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이 이에 원활히 대응하지 못하자 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국제금융시장에서는 금가격이 폭등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달러 가치는 커다란 하락압력에 직면하였다. 결국 미국은 1971 년 닉슨선언으로 달러의 금태환보증을 포기하게 되었고 달러가치 안정에 기초한 고정환율제도는 점차 변동환율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515&docId=48950&mobile&categoryId=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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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얼마나 어렵나를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이가 독일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이다. 에르하르트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케인즈 학파와 달리 하이에크 자유주의 학파 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독일 경제 부흥을 낳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때, 에르하르트 자유주의 정책에 반해 노조와 정치권이 일제히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에르하르트는 이겨내었다. 예서, 에르하르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 그 뒷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항한 최초의 국유본 귀족 반역 사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케네디도 독일 방문한 직후 에르하르트 감세 정책에 감동했던 것이다.
하면, 에르하르트는 어떤 반역 정책을 내놓았나. 당대 소련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한 에르하르트는 국유본에게 담대하게 제안했다. 서독이 소련 경제를 책임지겠으니 대신 독일 통일을 시켜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모두가 순진하다고 웃었다. 허나, 모두가 황당하다고 웃은 것이 아니다. 1961년, 브레진스키가 빌더버그에서 미국이 동유럽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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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빅터 로스차일드 권력이 위기를 맞아 여기저기서 권력 공백 상태가 나타나고, 여기에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 CFR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와중에 데이비드 록펠러가 취한 조치는 소련과 유럽 국유본 귀족들 조심스런 회유였던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빅터 로스차일드를 충성을 서약하고 대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입니다.
로마 클럽은 1965년 데이비드 록펠러의 사유지인 이탈리아 Bellagio에서 열린 "세계 지배의 조건 - The condtions of World Order" 란 컨퍼런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68년 이 그룹은 1968년 데이비드 록펠러 후원으로 로마 클럽(Roma Club)으로 명칭하고, "성장의 제한: Limits to Growth"이란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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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hebrewpill.wordpress.com/2012/01/15/power-money-what/
Power, Money, What?
Jan15 by jbrew0807
A little over 30-years ago, John D. Rockefeller III joined the invisible choir after an automobile accident–a head-on collision at the family estate in Pocantico Hills, New York…
http://en.wikipedia.org/wiki/John_D_Rockefeller_III
Considering that the driver of the other vehicle was 16-year old David Lowe–the nephew of chief Rockefeller agent in Zambia at the time, U.S. Ambassador Steven Lowe–it’s difficult not to consider the accident ironic…
http://www.peterdavidbeter.com/docs/all/dbal36.html
And…
http://en.wikipedia.org/wiki/Zambia
JD Rockefeller III had interests in several things, such as the Rockefeller-controlled Foundations and operations concerned with Africa, as well as Asia–with an emphasis on Japan. He was also quite focused on a “Second American Revolution”–a revolution which nothing to do with restoring the work of the original founders of the American Republic.
http://www.rarenonfiction.com/si/23706728.html
With regards to Japan, it has been suggested, along with many other suggestions, that SONY was not a Japanese name or acronym; rather, it stood/stands for Standard Oil of New York.
http://www.snopes.com/business/names/sony.asp
Even though Snopes argued against any Rockefeller connection with SONY, and even though an alternative explanation was provided for the acronym, there still remained the admission that Sony’s Akio Morita was a member of David Rockefeller’s Trilateral Commission.
http://www.prouty.org/letter11.html
Above is a link to Fletcher Prouty’s view as to why SONY stands for Standard Oil of New York.
Anyway…
At the time Dr. Beter was recording Audio Letter 38, he didn’t intimate that there was a conspiracy in connection with the Rockefeller’s auto accident; that being said, on January 26, 1979, 6-months later, the mysterious death of another Rockefeller (Nelson) occurred in conjunction with some pretty strange circumstances.
By this time, Beter was reporting about a Rothschild coup effort against the Rockefeller interests, and that the death of John D. Rockefeller III could very well have been the coup’s opening move.
Now, he was getting suspicious.
http://www.peterdavidbeter.com/docs/all/dbal42.html
Eighteen years passed, and in 1996, another suspicious death took place within the Rothschild family, leading many to wonder if this wasn’t a Rockefeller reply for 1978.
From Sherman Skolnick in Brian Redman’s Conspiracy Nation:
http://www.book-of-thoth.com/archives-article-8205-page2.html
“July 1978, John D. Rockefeller III, murdered near upstate New York estate. Made to look like car accident. Small car allegedly crashed into his even though security car always preceded his car.”
Also from Sherman Skolnick in Conspiracy Nation:
http://www.textfiles.com/conspiracy/CN/cn08-51.txt
“In July, 1978, right after a Bilderberg meeting, the head of his family empire, John D. Rockefeller III, was murdered, made to look like an accident. Likewise, in July, 1996, the one about to be named head of *his* family banking empire, Amschel Rothschild, was found hanged in Paris — some say murdered. He was head of Rothschild Asset Management, Ltd., a unit suffering huge losses because of terrible miscalculations. The Rothschilds are facing a financial shipwreck of almost a trillion dollars. (Both the Rockefeller and the Rothschild were killed on about the same day in July. To send a message, assassins like an anniversary.)
“We raised questions in 1978. We are raising questions now. Neither the Rockefellers nor the Rothschilds are strangers to political assassinations. To protect their oil and other properties, the Rockefellers have used the American CIA to murder insurgent leaders worldwide…”
From a different Skolnick article on Rothschild:
http://www.supremelaw.org/sls/email/box035/msg03571.htm
“ITEM: In July, 1996, Amschel Rothschild was murdered, just as he was about to become the new head of the Rothschild worldwide banking empire, tied to the Vatican. Most of the American press were silent: some said it was a heart attack; others, a suicide. He was found with a bathroom cord tied around his neck, connected to a towel rack. In checking it out, however, the Paris police discovered the rack came right off the wall! Hence, it was murder, not suicide…”
http://www.theforbiddenknowledge.com/manipulation/index.htm
“The Rockefeller Empire is based on oil, largely the Standard Oil company set up by John D. Rockefeller in 1853. (Part of this is now more familiar as Exxon and Esso.) Its influence on the political arena has been fairly open and obvious…
“J.D. Rockefeller III set up the Population Council in 1952 which, ever since, has been advocating zero population growth in the US. In 1972 this sentiment was echoed by Lawrence Rockefeller (CFR, Bil, TC) who was appointed by Nixon to lead a commission into population growth…”
A son of John D. Rockefeller III is currently the Senator from West Virginia, John D. Rockefeller IV, or “Jay” as he likes to be called.
http://en.wikipedia.org/wiki/Jay_Rockefeller
From Webster Tarpley, 3-20-08:
http://tarpley.net/2008/03/20/rockefeller-trilateral-bilderberger-boss-joe-nye-camaigning-for-puppet-obama/
“Today, Senator Jay Rockefeller (Senate Intelligence Committee chairman who backs Bush on the FISA bill) is campaigning for Trilateral Commission puppet Obama in West Virginia. Jay Rockefeller is the son of genocidalist John D. Rockefeller III, the founder of the Population Council. Jay Rockefeller is also the nephew of the late Nelson Rockefeller, and of David Rockefeller, the founder of the Trilateral Commission with Zbigniew Brzezinski in 1973. Jay Rockefeller’s desperate bid to deliver the poor and blue collar voters of impoverished West Virginia for the arrogant elitist Obama is likely to fail, but it should leave no doubt about whom the Wall Street banking establishment and the Rockefeller faction of the CIA are supporting…”
- 루즈벨트 부유세는 포드를 소멸시키려고 해던 것
1930년대 금융 공황의 와중에 새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부유세’를 도입하였다. 그러자 부유한 계층은 더욱 소득을 숨기기 시작하였다. 루스벨트가 밴더빌트의 요트에 초대되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부호들은 호화 요트를 구입하고 사실상 탈세를 시도해 카리브해의 면세국(택스헤이븐)에 소득을 은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치하에 실시된 뉴딜 정책은 대재벌을 소멸시키고자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유산 추정액 10억 달러에 대해 91%라는 높은 상속세를 매겼다. 나아가 1941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직후부터 기업에 대한 소득세율이 50% 전후로 대폭 인상되었다. 조금씩 빈곤 계층에 유리한 민주적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제정된 세입법이 최초의 대중세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 제도’라는 미명 아래 자택 수영장,호화 요트,렘브란트(Rembrandt)의 그림 같은 미술품 등은 수입을 발생시키지 않는 자산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자산가는 거기에 투자함으로써 면세 혜택을 누려 온 것이다.
- 맥아더 랜드사 록펠러
랜드 사는 레밍턴 암스(Remington Arms Co.)가 전후에 해군업계의 스페리랜드(Sperry Rand Corp.)와 합병하여 레밍턴랜드(RemingtonRand Corp.)가 되어, 해군과 공군의 잠수함이나 미사일 방위의 두뇌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 사장을 지낸 이가 일본 점령군 총사령부(GHQ)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이다.
부사장에는 맨해턴 계획의 책임자로서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레슬리 그로브스(Lesile Richard Groves) 장군이 취임하였다. 이것이 조직 개편을 통해 랜드 코포레이션이 되어 펜타곤의 중추적인 두뇌 집단으로 활동하면서 록펠러 재벌의 지배를 받아왔다.
- 시티은행
1812년 창업한 시티 은행은 1865년 내셔널시티 은행으로 개명하여 윌리엄 록펠러가 투자를 계속하면서, 1893년 스틸먼이 은행장으로 재임시에 뉴욕에서 1위로 올라섰고, 스탠더드 뱅크로 불리었다. 1909년에는 모건 상회가 대주주가 되어 1912년 JP 모건 주니어(통칭 잭)가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편 1863년에 창업된 뉴욕 퍼스트내셔널 은행(First National Bank of New York City)에서 1912년까지 은행장과 회장을 역임한 조지 F. 베이커(George F. Baker)는 ‘월가의 스핑크스’로 불리며 모건 상회의 철도 이권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지켰지만, 체이스내셔널 은행 5만주를 구입한 모건과 스틸먼의 친구였다. 그의 손녀 이디스는 월가의 로스차일드 계 대은행가인 제이콥 헨리 시프(Jacob Henry Schiff)의 손자와 결혼했으며, 이 은행의 대주주이자 임원을 맡은 이가 밴더빌트 일가의 페인 휘트니라는 식으로 얽혀 있었다.
이리하여 1955년에 앞에서 말한 내셔널시티 은행과 합병해 뉴욕 퍼스트내셔널시티 은행이 되었다. 1976년에 개명해 지금의 시티 은행이 탄생했으며, 이름 표기도 시티 은행(City Bank)에서 시티뱅크(Citibank)로 바뀌었다. 이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의 3대 재벌인 로스차일드,록펠러,모건이 합친 금융 기관임을 알 수 있다.
- 부시-해리먼-클린턴 가문
처칠 총리의 아들 랜돌프 처칠(Randolf Churchill)의 부인이 바로 남성 편력으로 유명한 파멜라 딕비(Pamela Digby)였다. 파멜라는 그와 이혼하고 또 하나의 철도왕 가문에 속하는 W.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로 인해 나중에 해리먼 미망인이 된 그녀는 1992년 민주당 전국의장이 되어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Bill Clinton)을 대통령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클린턴 정권에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에 취임하였고 1998년에 사망하였다.
해골종단은 해리먼 소유
- 페리 가문
그들이 형성한 보스턴의 재벌 페리 가문의 자손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가 1994년 1월부터 클린턴 정권의 국방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즉시 북한 핵 의혹 위기를 부추기며 미,일 신 가이드라인 성립을 위한 군사적 긴장을 조장했고, 1997년 1월 장관 퇴임뒤에도 1999년까지 북한 핵 의혹 문제를 둘러싼 정책조정관으로서 한국, 북한, 일본, 중국을 정력적으로 오갔다. 그는 가이드라인 성립 뒤에 “북한은 혐의가 없었다”며 무책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페리는 군수 기업인 GTE 실베니아(GTE Sylvania) 임원을 맡은 뒤 스스로 ESL이라는 군수 기업을 창업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 록펠러-멜런 - 하딩, 쿨리지, 후버
록펠러 가의 경쟁자이자 협력자로서 같은 석유 재벌을 형성한 가문이 멜런 가였다. 걸프 석유를 창업하여 텍사스 주, 오클라호마 주 등 남부의 석유를 지배한 멜런 가는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이 스스로 금주법 시절 재무 장관에 취임했고, 외아들 폴 멜런(Paul Mellon)은 멜런 내셔널 은행(Mellon Naitonal Bank)의 임원이 되었다.
멜런은 솜씨를 발휘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0년에 걸쳐 하딩, 쿨리지(Calvin Coolidge), 후버의 3대에 걸친 공화당 내각에서 재무 장관을 맡으면서 “멜런 발치에 세 대통령을 거느렸다”는 평을 들었다. 멜런은 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예상대로 자신들 부유층의 자산이 보장될 수 있도록 즉각 세율을 낮추었다. 그 때문에 “멜런에게 재무 장관을 시키는 것은 카사노바에게 여학교 교장을 맡기는 것과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0년대 초에 세율은 세 번이나 인하되어 백만장자들에게 부과되는 최고 세율이 25%까지 제한되었고, 중산층은 거의 비과세나 다름없었다.
- 로스차일드-모건-클리블랜드
JP 모건이 투기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유명한 사건은 금본위제가 공포되기 전인 1893~1895년에 걸쳐 일어났다.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 시절에 경제 위기가 닥쳐, 금과 은의 빈번한 교환 때문에 재무부의 보유 금이 바닥나면서, 국가 비상 사태가 야기되었다. 이 때 어거스트 벨몬트와 런던 로스차일드 가가 움직여, JP 모건이 백악관을 직접 찾았다. 그리하여 각료들에게 지시가 내려지고, 삼자 제휴 플레이를 통해 금을 동원함으로써 미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마저 조종하게 된 JP 모건 부자는 증권 투자를 독점, 금융 트러스트를 형성하였다. 당시 록펠러의 석유 트러스트를 따라서 담배 트러스트,소금 트러스트,설탕 트러스트,술 트러스트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와중에서 JP 모건은 트러스트의 트러스트라 불린 모건 제국을 이룩하였다.
- JP모건의 유산은 로스차일드에게?
1843년 조지 피보디 상회(런던) 설립 → 1854년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 파트너가 됨 → 1864년 개편해 JS 모건 상회(런던) → 1900년 로스차일드 일족의 에드워드 그렌펠이 지배인이 됨 → 1910년 개편해 모건 그렌펠
이상하게도 1913년 사망한 JP 모건의 유산은 놀라울 만큼 적었다고 모든 기록에 쓰여져 있다. 미술품 수집 1억 달러, 부동산 7,000만 달러, 기타 현금이나 신탁기금 등의 유산이 합계 3,000만 달러 밖에 없었다고 한다.
JP 모건이 사망한 반년 뒤에 개인소득세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부동산왕 애스터, 철도왕 밴더빌트, 죽음의 상인 듀퐁, 곡물왕 카길,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금융왕 모건, 석유왕 록펠러, 담배왕 듀크, 광산왕 구겐하임, 석유왕 멜런 등의 재벌이 모두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과세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 인구통제와 록펠러 3세: 프린스턴대, 노사관계 연구(러드로 학살), CFR, 인구통제정책, 일본
In addition to his interest in philanthropy, Rockefeller made major commitments to supporting organizations related to East Asian affairs, including 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the Asia Society, and the Japan Society. He was also a major supporter of the Population Council.
- 나치 독일, 공산당과 BIS
1) 러시아 혁명
당대까지 국유본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영국귀족이 팽팽한 세를 형성한 시기였다. 로스차일드가문은 1880년대가서야 독점자본을 구축하여 영국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에서 독점적인 지위에 올랐으나 프리메이슨과 영국귀족 지지를 받는 베어링 가문이 동인도회사 파산뒤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국 이외에서 베어링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국가 중 하나가 러시아였다. 러시아황제 상당한 자금이 베어링회사에 있었고, 관련 자료가 베어링 파산 이후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해서, 러시아혁명은 베어링가문과 프리메이슨 영향력을 상당 부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취하는 가장 큰 이득이었다. 유대인 문제는 부수적이었다. 로스차일드가문은 유대인이었지만 카르타고유대인, 서유럽유대인이었고, 동유럽유대인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했다. 당대 동유럽유대인은 시칠리아인(남부이태리인), 아일랜드인과 함께 유럽인이지만 유럽인으로 취급받지 못한, 흑인이나 동양인에 가까운 천민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카르타고유대인은 예외였다. 심지어 2차대전에서는 자신들 기획을 위해 동유럽유대인 학살을 방조하기까지 했다.
당대 국유본 핵심기관은 300인위원회였고, 주요한 세력은 영국귀족들이었고, 로스차일드는 이들에 대해 이익을 제공하는 대신 권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국유본 중심이 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가 빌더버그를 세운 뒤 1973년까지다.
해서, 영국귀족 중심 300인위원회에서 최대 관심사는 당시 세계중심이던 유럽 재배치였다. 이는 수백년에 걸친 영국 외교정책이었다. 영국 외교정책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마저도 영국 이해에 대립되니 미국을 분단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는 링컨과 로스차일드 가문에 의해 좌절되었다.
1차 세계대전 등 유럽전쟁은 유럽 주요국 국력을 약화시키고 영국 부를 강화시키고 국유본 귀족들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타삼피였기 때문이다. 허나, 2차 세계대전은 그간 별 피해없던 영국마저 큰 피해를 입어, 정확히는 영국귀족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어 빅터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황제가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다만, 빅터 로스차일드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전쟁이 끝난 직후 2차세계대전에 모든 돈을 쏟아부어 파산했다고 소문을 내었다. 허나, 파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유본 황제에 올랐다.
세번째는 러시아 석유. 아제르바이잔. 바쿠 유전 때문이다. 스탈린이 로스차일드상점에서 알바했던 것은 음모론계에서 유명한 일이다. 당시 스탈린집권세력 상당수가 스탈린과 함께 바쿠,아제르바이잔출신이라는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당대 석유업계 고민은 석유가 너무 흔해도 너무 없어도 문제였다. 적당하게 재고가 있어야 석유값을 보전할 수 있었다. 헌데, 당대 러시아 석유가 너무 많았다. 지금도 많지만. 해서, 석유값이 똥값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노벨, 로스차일드, 록펠러로 석유문제에 연구해보길.
중요한 건, 당대 록펠러 석유회사는 로스차일드가 적극 견제하느라 분할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록펠러 부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당대 록펠러는 록펠러 의지보다 로스차일드에 투항한 상태였던 것이다. 귀족이 제국에 투항한 뒤에 유력한 제국귀족이 되었던 것이다.
국유본제국에서 변방상인에서 백작급 귀족으로 성장한 것이 1910년대 록펠러이다.
해서, 당대 석유문제는 록펠러 이해가 우선이 아니라 국유본 이해와 로스차일드 이해가 우선인 셈이다. 국유본 300인위원회 > 로스차일드 > 록펠러였던 셈인데, 이 관계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300인위원회 영향력이 오늘날 빌더버그 정도로 위축되면서 빅터 로스차일드와 록펠러가문 뒤로 밀려났다.
로스차일드는 1880년대에 최강에 올랐으나 잔존 세력(?)들을 처리하는데 40여년이 걸렸고 록펠러는 1973년 이후로 지금까지 40년 넘게..... 그래요. 세계권력인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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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취해진 조치로, 록펠러-로스차일드 기업연합과 그들의 제휴 은행가들(Schiff, Warburg, Morgan 등)은 계속해서 1917년의 볼셰비키 공산혁명을 자금을 대가며 후원했다. 그들의 꼭두각시 레닌과 스탈린은 얼마 안있어 광대한 소비에트 러시아 제국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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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계의 큰손 야곱 시프는 러시아 혁명 당시 로스차일드가의 대리인으로 활약한다.
시프는 1913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시프는 약 2천만 달러를 혁명 세력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된 동기는 러시아 동방정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도 러시아 공산당을 돕는다.
1919년 미국 의회 속기록에 정황 증거가 나온다.
공모 대상은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트로츠키다.
트로츠키는 도피 당시 뉴저지주 록펠러가 저택에서 공짜로 머문다.
1917년 귀국 때는 특별여권과 여비 등을 지원받는다.
뭉칫돈도 수시로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규모는 모른다.
워낙 은밀하게 거래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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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레닌은 록펠러-로스차일드 기업연합의 명령에 따라 바쿠에서 행동에 들어갔다. 볼셰비키 군대들과 비정규병들은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여 정복한 뒤 바쿠에 총력을 기울여 맹공을 가했다. 수십만의 거주민들이 살육을 당했으며, 특히 노벨 오일 컴퍼니의 경연진들과 기술자들, 주요 노동자들의 가족들에게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들의 호화로운 대저택들과 가정들이 약탈되었고, 아내들과 자녀들은 강간당하고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그 뒤 바쿠의 유정탑들과 시설들에 불이 붙여졌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방화였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공동 창설자 레온 트로츠키이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유대인들이었다.
세계 최고의 원유 생산 지역 중 하나가 즉시로 휙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벨 형제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시 고국 스웨덴으로 달아났고, 그들이 입은 재정적 손실은 실로 막대했다. 당연히 로스차일드와 록펠러의 바쿠 원유 자산들도 상실되었지만, 이것은 순전히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 계획에는 러시아가 공산주의 시대 동안 세계 원유 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바쿠 유전 폐쇄로 국제 유가는 즉시 천문학적으로 ‘뛰어올랐다.’ 록펠러와 로스차일드는 그들의 바쿠 자산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것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덕택이다.
바쿠의 석유회사 경영진들과 기술자들은 볼셰비키들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 레닌은 공식적인 “약탈주간”을 선언했고, 그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고, 유전들이 방화되고, 가정들과 대저택들이 약탈당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강간당하고 살해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레닌의 공포정치는 결국 6천6백만 명의 희생자들을 소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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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약발은 공산국가 건설 이후 곧바로 나타났다.
록펠러 소유의 스탠더드 오일이 독점 혜택을 누린다.
러시아 석유를 유럽에 팔아 막대한 수익을 낸다.
러시아를 부정하는 미국 하원이 1932년 비밀거래를 지적했으나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정관계 곳곳에 검은돈으로 형성한 인맥 덕분이다.
러시아 지원 의혹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루이스 맥파든 의원이다.
주미 러시아 무역기구 장부를 들춰보면 전모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발언도 한다.
폭로는 휘발성이 컸는데도 흐지부지 끝난다.
맥파든 의원이 석연찮은 사고로 죽은 탓이다.
2. 한국전쟁 소련 정치군사위원회
빅터 로스차일드 케임브리지 스파이링
3. 베트남 전
호치민은 충직한 모스크바 시녀였다. 모스크바에서 지령한대로 당을 꾸렸기 때문이다. 허나, 인도차이나 전쟁 때에 이르러 모스크바 발언권이 약화하는데, 이때 호치민을 지원한 세력이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호치민은 미국 OSS의 협조하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호치민이 남북 분단 협정에 조인하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호치민이 왜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였나 할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국유본이 분단을 원했기에.
국유본은 베트남 전쟁 중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쳤다.
한국전쟁 때 압록강 이북 중국 진지를 파괴할 수 없다는 지령은 약과다.
국유본은 베트남 전쟁 때 월맹군에게 수시로 미군 작전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아예 폭격을 금지했었고, 북베트남군이 공세를 펼칠 수 있도록 미군 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 각종 금제를 가했다.
미군은 1975년에 월남에서 철수했다. 이때, 소련 태도가 무엇인지 아는가? 굉장히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통일하지 않은 것이 낫다는 것이 기본적인 소련 태도였다. 왜? 전쟁을 지속해야 그만큼 소련에 국유본 물자가 지원하니 소련 정권이 안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 소련 정권이 역대 최고로 안정화한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소련 정권은 정권 유지에 혈안이 되었다.
4. 냉전
구소련의 외무부 장관이 '장기집권'을 했던 이유는 이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연락책에 불과했기 때문이듯이(구소련의 외무부 장관은 1918년부터 1923년까지 Georgy Chicherin가, 1930년부터 1939년까지 막심 리트비노프가, 1939년부터 1949년까지, 또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Vyacheslav Molotov가, 1957년부터 1985년까지는 Andrei Gromyko가 '장기집권'했다), 미국 연준의 의장들도 기본적으로는 록펠러 가문의 봉에 불과하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임기와는 무관하게 매우 오랜 세월 '장기집권'을 해왔다.
이유는 국유본, 혹은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연락 관계 때문이다. 유태인 리트비노프, 몰로토프, 그로미코, 세바르나제 등. 이들 임기가 서기장 임기보다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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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
하여간, 흥미롭게도 후르시초프는 1964년 록펠러 방문 이후 실각한다
국유본은 국유본 이익을 위해서 연합군이던 소련을 적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소련을 적국으로 만들기 위한 방편 중 하나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동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국유본은 그간 국유본과 열심히 협력하던 스탈린을 제거하고 후르시초프를 옹립한 것이다. 해서,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까지 끌어낸 이후로 국유본은 냉정하게 후르시초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냥개는 또 다른 사냥개를 위한 제물이므로.
헌데, 중소분쟁이 발생했다. 이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핵심은 간단하다. 1958년 소련이 약속한 중국 원조 계획을 소련이 이행하지 않아서다. 도와주겠다고 한 넘이 침묵하면 아쉽잖아. 처음에는 중국이 조용히 소련에 항의했는데, 소련이 지속적으로 병쉰 색희들아, 나도 돈 없어, 제발, 재촉하지 마, 라고 싸인을 보내자 중국이 그럼 우리끼리 한다? 라고 소련에 대항한 것이 중소분쟁인 게다.
국유본은 이 문제를 풀어주어야 베트남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일, 중소분쟁의 원인, 후르시초프를 죽여라. 이, 후르시초프가 막판에 미친 척하고 에르하르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미연에 방지하자. 삼, 중국을 새로운 변수로 받아들여 새로운 전쟁은 중동전쟁으로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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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체이는 대서양 경제위원회를 30년 가까이 이끄는 동안 조반니 아넬리 ( Giovanni Agnelli) 의 피아트 자동차회사의 최고경영자였다. 아넬리는 같은 이름의 이탈리아 검은 귀족 가문의 멤버이면서 300인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회원이었다. 그는 소련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존록펠러Jr와 조지마셜,데이빗록펠러와 시카고학파,스탠더드오일,체이스맨하탄-고문[지아니아넬리-Fiat-알파로메오,리콴유,헨리키신저,로열더치셸,재무부(더글라스딜런,조지슐츠)]-소련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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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와 나치 독일, 공산당 커넥션
보고서에 따르면 1939년1월부터 1945년6월30일 사이 나치독일은 4억달러(현시가 39억달러) 상당의 약탈금괴를 스위스 중앙은행에 팔아 전비를 조달했다.
소련 당시에는 동서 무역의 지불 창구가 중립국 스위스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전후에 국제 금융 마피아의 본거지인 BIS(국제결제은행, 별칭 바젤 클럽)가 소련의 금괴를 접수하는 창구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지난 70년에 걸쳐 공산당의 자금이 운반된 루트를 알고 있는 관료들이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신흥 재벌로 거듭난 인맥-별칭 모스크바 마피아-이 되었다.
러시아 기업의 다수가 자금을 해외 은행에 맡겼는데, 은행 계좌의 대부분이 스위스 취리히나 제네바에 있었다. 산업계의 대표 빅토르 체르노미딘(Viktor Chernomyrdin) 총리나 공산당의 대표 예프게니 프리마코프(Evgenii Primakov) 총리도 이들 러시아의 신흥 재벌을 택스헤이븐으로 이끌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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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중국’을 만든 것은 미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1950년대 미국에 ‘매카시즘’ 선풍을 일으켰던 조셉 레이먼드 매카시입니다. 1950년 그는 미 국무성에 잠입한 공산당원의 명부를 입수했다고 발언, ‘빨갱이 검거 선풍’을 일으켰던 장본인인데, 1995년에 공개된 ‘베노나 문서(미군 첩보부가 해독한 구 소련 정보부의 비밀문서)’에서 그것이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매카시에 따르면, 전후 세계가 미소 냉전시대가 된 것은 ‘조작’이며, 그 배후가 록펠러 석유재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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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크플랜 214페이지 적과의 거래 中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북베트남에 물자를 공급하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미국의 거래는
실로 증가했다. 이는 CFR의 또 다른 목표였다. 1961년, 삼각위원회의 창립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동유럽을 경제적으로 원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대외관계>>에 기고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196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 그런 거래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해 9월 12일자 <<시카고 트리뷴>>에 따르면 "체이스맨해튼은행 사장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존슨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 지도자 니키다 후루시초프와 면담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시간에 걸친 만남에서 후루시초프는 '미국과 러시아의 교역을 늘려야 한다'면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장기차관을 연장해 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록펠러는 전했다."
...
>1966년 10월 13일 동유럽으로 400개 이상품목의 수출제한 철폐
>1966년 10월 27일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북베트남 10억달러 원조합의
>1970년대 50억달러의 소련 카마강 공장 설립에 미국이 자본과 기술전수(이공장에서 군수용 차량 생산)
미국의 체이스맨하튼은행의 데이비트 록펠러에 의해 소련과 동유럽에 자본과 기술이
전수되었고 이런 자금과 기술이 북베트남으로 꾸준히 지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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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평화재단: 록펠러, 아이젠하워, 포스터 덜레스, 알져히스(UN창립, 공산주의자), iBM 회장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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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를 거쳐 5만명에 달했던 미국 공산당에서 유대인은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으며 이들에 있어 입당자의 숫자는 항상 탈당자의 숫자를 상회했다. 다른 민족출신들에 비해 인구비례상 유대인의 공산당 입당율은 10배가 넘는 것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비슷한 숫자의 유대인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좌경급진주의자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다.” (Nathan Glazer, The New Left and the Jews, 1969)
1920년대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 특히 급진적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던 유대계 지식인들은 소련을 인류역사 초유의 이상적, 진보적 사회로 선전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을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홀로 외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 묘사하는 것은 가장 상투적인 표현법이었다. 1934년 미국의 한 유대인 공산주의자는 그가 지은 詩에서 소련을 “러시아에 내려온 천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이 국가사회주의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했듯이, 이들 유대인들에 있어 소련은 국제사회주의야말로 반유대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입증해 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따라서 이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유대인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으로부터 1941년 6월 독-소 개전 전까지의 기간만 제외하고 서구의 유대인들은 전후에도 소련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공산권의 존재가 유대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1920년대 초반부터 미국 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미국 내에서 소련의 입장을 옹호하고 소련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지하에서는 소련 비밀경찰의 지령에 따라 미국에 대한 간첩임무도 수행했다. (1947년 소련에 원자폭탄 비밀을 넘긴죄로 처형된 유대인 로젠버그 부부 역시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심어놓은 공산주의 지하세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1947년 스미스 법안에 의해 기소된 공안사범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유대인의 운동이었던 공산주의를 만인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미국 공산당의 유대인 수뇌부는 간부들을 상대로는 그들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외부의 눈에 띄는 직위에는 항상 지방출신의 비유대계 인물을 배치했다. 이 때문에 자신이 본질적으로는 유대인 정당과 다를바 없는 조직의 포장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비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의 탈당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Source: H. Klehr, Communist Cadre, 1978; N. Glazer, The New Left and the Jews, 1969; K. Kann, Joe Rapoport, 1981; Klehr, Haynes & Firsov, The Secret World of American Communism, 1995; A. Liebman, Jews and the Left, 1979)
5. 록펠러와 카스트로
애비 록페러
The eldest and most rebellious daughter, she was drawn to Marxism and was an ardent admirer of Fidel Castro and a late 1960s/early 1970s radical feminist[36] who belonged to the organization Female Liberation, later forming a splinter group called Cell 16.[37] An environmentalist and ecologist, she was an active supporter of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6. 록펠러로의 권력 교체 이후 소비에트
그러나 1973년의 '권력교체'로 소비에트에서도 더 이상 영국계 사람들이나 유태인들을 외교부에 기용하지 않게 된다. 대신 록펠러 자본에만 의지하게 된다.
Writing in the Jewish Sentinel (Sept. 28, 1978), Goldmann recounts an interesting interview with Soviet Foreign Minister Andrei Gromyko.
CIA 위원회를 조직한 형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미망인 마가레타 머리(Margaretta Murphy)가 1970년대 소련으로 곡물을 대량 수출한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Daniels-Midland Co., ADM) 임원이 된다.
A notable achievement was the setting up of the first branch of an American bank at One Karl Marx Square, near the Kremlin, in the then Soviet Union, in 1973. That year Rockefeller also traveled to China, resulting in his bank becoming the National Bank of China's first correspondent bank in the United States
(한국JP모간의 역사는 1967년 JP모간체이스은행의 전신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외국계 은행인 체이스맨하튼은행 서울지점 개설로 시작되었습니다.)
Rockefeller has been able to act as bridge to various interests around the world—even controversial leaders such as Fidel Castro, Nikita Khrushchev, Mikhail Gorbachev and Saddam Hussein.
In 1992, he was selected as a leading member of the Russian-American Bankers Forum, an advisory group set up by the head of the Federal Reserve Bank of New York to advise Russia on the modernization of its banking system, with the full endorsement of President Boris Yeltsin
옐친 대통령의 차녀 타치아나(Tatiana Yeltsin)를 농락해 에어로플로트 항공(Aeroflot Russian Int'l Airlines)의 자금을 유용한 CIS(독립국연합) 사무국장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oris Berezovskii)도 공산당 관료를 비판하면서 그 자신이 스위스를 통해 돈세탁에 정신을 팔았다. 그 결과 1,500억 달러(18조 엔)라는 거대한 대외 채무를 지게 된 러시아는 1998년 말까지 상환 유예를 선언한 모라토리엄(moratorium)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채무 금액은 해외로 도피한 외화 액수와 거의 같다.
7. 중국
미국 장제스 대신 마오쩌둥을 지원
헨리키신저, 중국 등소평 개혁개방
사드와 중국내 미국 CIA 소련 미사일 탐지 기지 허용한 덩샤오핑;등소평과 카터 모두 뉴라이트,국유본은 한국전쟁 성사위해 모택동중국혁명을 지원했고 중국경제성장을 지원 사드논쟁도 알파오메가게임에 불과
8. 북한
- 1991년 5월 4일 한겨례, 버클리대 스칼라파노, 러셀 필립스 록펠러기금 부총재 미북 접촉 / 1991년 6월 26일 한겨례, 북한, 미 연락 사무소 추진 [록펠러 재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62600289101006&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6-26&officeId=00028&pageNo=1&printNo=961&publishType=00010
- JP모건 북한금거래 신청(시크릿오브코리아 안치용)
https://www.scribd.com/doc/168227706/
- MI6와 CIA의 커넥션In Blade on the Feather, the character of Professor Jason Cavendish, a former British spy, is based partly on Kim Philby, the spy who trained James Jesus Angleton.
Angleton, who was of the pro-Israel faction in the CIA. He was head of Counter Intelligence at the CIA from 1954 – 1975.
There is a theory that the key people in the CIA have always worked on friendly terms with the key people in the KGB and the key people in Mossad.
According to Haaretz, “Every appointee to the American government must endure a thorough background checkby the American Jewish community.”
(American Jews eye Obama’s ‘anti-Israel’ appointees – Haaretz)
James Jesus Angleton worked for the CIA.
He may also have worked for Mossad.
He may, or may not, have realised that Mossad worked with the KGB.
A Spotlight report, of 21 November 1977, claimed that Angleton conspired with Israel to attack the USS Liberty.
(USS Liberty)Reportedly, Angleton believed the sinking of the Liberty could be used as a “Pearl Harbour” type of incident to turn Americans against the Arabs.
(aangirfan: The US government tried to sink the USS Liberty)
It was Angleton who negotiated an agreement whereby Israel and America agreed not spy on each other.
(Book Reviews: Every Spy a Prince)
(The agreement was nullified by Admiral Stansfield Turner, when he was Jimmy Carter’s CIA director. But, Mossad contined to work closely with the CIA.)
Terence Hawkes wrote that Angleton’s friendship with Mossad “gave him a major role in preserving Israel’s secrecy in respect of Suez.”As the officer in charge of the Israeli ‘account’, he supported the Israeli atomic bomb programme.”
(James Jesus Angleton by Michael Holzman reviewed by Terence Hawkes TLS)After Angleton died, a memorial to him was erected in Jerusalem.
James Jesus Angleton’s father, according to a closefriend, Max Corvo, was “ultra-conservative” and a fascist sympathizer.
(James Angleton)It was during World War II that James Jesus Angleton became a spy.
Reportedly Angleton helped set up Operation Gladio, which involved CIA militias carrying out acts of muderous terrorism in Italy.
“Angleton built on family and business connections in Italy to lay the basis of Gladio…
“He also helped notorious Nazi/fascist mass-murderers such as Junio Valerio ‘Black Prince’ Borghese elude justice at war’s end.”
(Cached) Philby, friend of the KGB and MOSSAD.
In 1943 Angleton was sent to London to be trained by MI5 officer Kim Philby, who turned out to be a friend of the KGB and Mossad.
(James Angleton)In 1951 Angleton was sent to Israel where he helped to set up Mossad.
According to Eustace Mullins (CHAPTER FIVE – The CIA – 3):
While CIA station chief in Rome, the CIA’s Angleton “worked closely with the Zionist terrorists Teddy Kollek and Jacob Meridor, and later became chief of the Israeli desk at the CIA, helping Philby to set up the lavishly funded international Mossad espionage operation, all paid for by American taxpayers.”
Kim Philby www.myjacobfamily.com
In 1951, the CIA was investigating Kim Philby, the top MI6 agent working in Washington.The CIA director, Walter Bedell Smith, asked Angleton and William Harvey to write separate reports on Philby.
(James Angleton)Harvey concluded that Philby was a Soviet spy.
Angleton defended Philby.
Smith took the advice of Angleton.
Philby escaped to the Soviet Union in 1963.
Reportedly, Kim Philby was assisted in escaping to the Soviet Union by the Israeli Mossad
(Sunday Telegraph, April 16, 1989 – Cached.)
Angleton provided information to the Warren Commission.Some people have claimed that Angleton was involved in covering up the CIA’s involvement in the assassination of John F. Kennedy.
Golitsin
Angleton interviewed Anatoli Golitsin, a KGB agent who defected to the CIA.
Golitsin suggested that W. Averell Harriman had been a Soviet spy, while he was the U.S. Ambassador to the Russia during the Second World War. (James Angleton)
According to Eric Margolis, Angleton “became an active ‘asset’ or at least very close ally of Israel’s Mossad, and a champion of Israel’s cause in Washington.” (FOREIGN CORRESPONDENT, by Eric Margolis)
Clare Edward Petty, of the CIA’s Special Investigation Group (SIG), concluded that there was an “80-85 percent probability” that Angleton was a Soviet spy. (James Angleton)
In 1973, James Schlesinger temporarily became Director of the CIA.
Angleton gave Schlesinger a list of people that he thought were Soviet agents.
This list included Harold Wilson, the British prime minister,
Olof Palme, the Swedish prime minister,
Willy Brandt, chairman of the West German Social Democratic Party,
Averell Harriman, the former U.S. ambassador to the Soviet Union,
Lester Pearson, the Canadian prime minister
and Henry Kissinger, the National Security Adviser and Secretary of State under President Richard Nixon.Schlesinger thought Angleton was suffering from paranoia.
In mid 1973, William Colby became the Director of the CIA.
Colby was not impressed with Angleton.
Colby said he could not find any evidence “that we ever caught a spy under Jim”. (James Angleton)
- 록펠러-CIA-MI6 커넥션
Rockefeller also reportedly has connections to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As well as knowing Allen Dulles and his brother John Foster Dulles — who was an in-law of the family [14] since his college years,[15] it was in Rockefeller Center that Allen Dulles had set up his WWII operational center after Pearl Harbor, liaising closely with MI6 which also had their principal U.S. operation in the Center.
- 부시-CIA 국장-스위스의 마약기지-빈라덴--유태계 마피아
The newspaper Scotland on Sunday reported, on 16/9/ 2001, that Osama bin Laden made his fortune in part by working with Jewish-Russian mafia operations in Qatar and Cyprus. (Mafias)
According to Wayne Madsen, “The Bin Laden drug network … intersects with Geneva-based financial entities established by George H. W. Bush while he was CIA director and Vice President and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 (aangirfan: Bush, Bin Laden, Drugs…. )
Reportedly, “Angleton had an alliance with … the Mafia, dating from 1944 when he was an O.S.S. officer in Italy.
“‘Operation Gladio’ … was based on Angleton’s fascist-Mafia connections, and employed … the Mafia to assassinate some who couldn’t be bribed, e.g. Prime Minster Aldo Moro.” (Cached)
This article was first published on aangirfan.blogspot.ca.
http://www.morganstanley.com/about/press/articles/6f1f431d-0da8-11de-a964-7958d88da836.html
- Nobuyuki Hirano Elected to Morgan Stanley Board of Directors
미쓰비시 / 록펠러
- 록펠러와 마셜플랜의 마셜He spent much time as a child at the family estate Kykuit, where, in his memoirs, he recalls visits by powerful associates of his father, including General George C. Marshall,
- 록펠러와 신종플루
록펠러펀드가 후원하는 Partnership for New York City (PFNYC)와 신종플루 백신 - 후원명단엔 오바마와 골드만삭스, 루퍼트 머독도
http://www.bibliotecapleyades.net/ciencia/ciencia_influenza61.htm
Reuters and FOX News, the services that broke President Obama's Declaration of National Emergency for H1N1 swine flu, maintain grossly conflicting interest with the vaccine makers.
More shocking evidence proves the media moguls allied with agencies funding global depopulation. This evidence of genocide indicts The Rockefeller Brothers Fund and David Rockefeller's Partnership for New York City (PFNYC) - the world's leading biotechnology trust and white collar drug ring partnered with New York State and the US Federal Government.
"Murdoch and Glocer are the world's most powerful business leaders caught bloodied by vaccination intoxications and mass media mind manipulations for population reduction," Dr. Horowitz said.
Disbelievers are shocked by the revelation that Barack Obama's Science Czar, John Holdren, called for massive global depopulation using sterilizing vaccinations in his 1977 book, EcoScience.
The Obama administration encourages David Rockefeller's PFNYC, with Co-Chairmen, Lloyd C. Blankfein of Goldman Sachs, and Rupert Murdoch with his media empire.
All the above are advancing massive human intoxication for population reduction through H1N1 recombinations with currently circulating viruses.
Dr. Horowitz has laid out a reasonable and compelling thesis predicting H1N1 expected mutation. It is a new unstable laboratory engineered virus used that is shed up to 3 weeks following vaccinations, especially from FLUmist recipients. These viruses are expected to recombine with other circulating viruses, including H5N1 that kills more than half of humans infected.
In fact, authorities worldwide have expressed this common concern. Now this concern has become a suspicion of genocidal operations and profitable business partnerships revealed by investigative journalist Sherri Kane and Dr. Horowitz.
The Kane-Horowitz revelations jibe with popular upstate New York WGY radio personality, Al Roney, who broke the news last week of Linda Daines, wife of New York State Health Commissioner Richard Daines, profiting from the States H1N1 vaccine purchases. Mrs. Daines is a manager of private client services for the Wall Street institutional finance firm Goldman Sachs.
The firm, directed by Blankfein, was the largest shareholder in a deal they brokered in 2007 for the $15 billion sale of vaccine giant MedImmune that produces AstraZenecas' Flumist.
Flumist is the H1N1 nasal spray vaccine given mostly to children who shed the live active laboratory-engineered unstable virus for up to 3 weeks, putting non-vaccinated persons at risk of infection and worse. These shed lab-made viruses more readily recombine with other circulating viruses easily prompting recombinations and potentially more severe outbreaks.
More deadly viruses circulate in peoples bodies, birds, animals, or the environment that shed H1N1 virus genetics can enjoin. This is what experts and officials expect, and the real cause for the declared National Emergency, according to Dr. Horowitz.
Partners in the PFNYC includes Safeway's owner Kohlberg Kravis Roberts (KKR) whose CEO, Steven Burd, heads the Coalition for Accelerating Health Care Reform (CAHR) pushing Senator Jay Rockefeller's Democratic legislation.
Lloyd C. Blankfein of Goldman Sachs and Burd are the two highest paid CEOs in America. Both are high profile corporate members of the most powerful Business Council in the world, and both maintain tight connections to the drug-ring implicated in creating and circulating the 2009 H1N1 pandemic, according to documents discovered by Kane and Horowitz.
The influence of these indicted persons and organizations is unknown to most people, and unprecedented. Glocer's Reuters and Murdoch's FOX News, feeds all major news sources, co-engineers most of what people think about the pandemic, and how everyone is reacting. Thus, the modern mindset is adequately influenced to advance the vaccination campaign on behalf of Wall Street investors.
The PFNYC includes leaders of global banking and the Federal Reserve Board.
The BusinessCouncil.org directed America's transition out of the Great Depression, advising Congress to advance,
•the Security and Exchange Act
•the Banking Act
•the Social Security Act of 1935
These groups' influences are capable of accomplishing ANYTHING, including depopulation via vaccination.
This is like the end of a team monopoly game, Dr. Horowitz concludes. Now since the Rockefellers' and their Royal-Rothschild financiers in Europe have won the global game, they are simply rearranging the board and getting rid of the players they no longer want around.
Given all the evidence, now showing on YouTube thanks to Dr. Horowitz, you'd have to be a complete idiot, or ignorant fool, to get vaccinated.
NOTE TO JOURNALISTS:
Now that you know you cannot trust the mainstream media for information about H1N1 vaccines, the world's most complete source of H1N1 Swine Flu Pandemic truth is awaiting your perusal at FLUscam.com.
This site includes FLUscam.TV, a 24 hour news channel devoted to covering this genocide. It features the latest breaking news and educational programs to educate everyone on everything from A-Z regarding the Swine Flu, including FLU To Dos that are simple, readily available, and life-saving ways, other than risky vaccinations and deadly antibiotics, to stay well naturally.
For more visit http://www.tetrahedron.org
Return to Influenza - Virus H1N1 - Unintentional Contamination or Bioterrorism?
Return to Viruses - An Instrument in World Depopulation
Return to The Investigations of Leonard G. Horowitz
Return to Killer Vaccines - Vacunas Que Matan
- 로마클럽과 반문화
로마 클럽의 예상된 대응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탈산업화' 아이디어를 꾸며내어 널리 퍼뜨리고 이를 반문화운동에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마약, 로큰롤, 섹스, 쾌락주의, 악마주의, 마술, 환경보호론 등이다.
타비스톡 인간관계연구소 (Tavistock Institute), 스탠퍼드 연구소 (Stanford Research Institute), 사회관계연구소 (Institute for Social Relation) 등 사회정신학에 관련된 광범위한 연구조직들은 로마 클럽에 대표나 자문위원을 보내고 '물병자리 음모 (Aquarian Conspiracy) 를 채택하기 위한 NATO 의 계획에 지도적 역할을 해냈다.
- 카길(월마트)-체이스맨해튼-클린턴 가문
카길에 자본을 제공한 체이스맨해턴 은행의 CIA 커넥션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이 은행의 회장을 지내고 지미 카터를 대통령으로 밀어준 이래 꽤 뚜렷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자본은 다른 한편에서 CIA 위원회를 조직한 형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미망인 마가레타 머리(Margaretta Murphy)가 1970년대 소련으로 곡물을 대량 수출한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Daniels-Midland Co., ADM) 임원이 되어 산하에 버드와이저(Budwiser)와 패권을 다투는 쿠어스(Coors) 맥주의 자회사인 쿠어스 식품까지도 소유하는 메커니즘으로 성장하였다. 그 ADM 회장 드웨인 안드레아스(Dwayne O. Andreas)가 카길의 전 부사장이기도 하였다.
록펠러 재단이 ‘녹색 혁명’으로 불리는 밀 개량의 성과를 올리고 카길이나 ADM과 공동으로 아시아 전역의 농지를 지배하게 된 것은, 초대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딸이 미국의 농경기계를 지배한 발명가 사이러스 맥코믹(Cyrus H. McCormick)의 아들과 결혼해 인터내셔널 하베스터(International Harverster, 현재 나비스타인터내셔널 Navistar International)라는 곡물 제국의 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 식품 무역 상사와 연결되는 것이 소매업계이다. 소매 연쇄점 월마트(Wal-Mart)의 창업자 샘 월튼(Samuel M. Walton)은 1992년에 사망하기까지 미국 제일의 부자로서 오늘날의 빌 게이츠와 같은 존재였고, 그 자산은 지금도 남아 있다.
아칸소 주에 있는 월마트 본사에는 주지사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소문난 변호사가 임원을 맞고 있었다. 그녀 뒤에는 역시 아칸소 주가 배출한 식품 회사로서 미국 제일의 치킨업자인 타이슨 후즈(Tyson Foods)도 있었다. 업계에서 타이슨이 미국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사업을 미국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카길의 곡물 사료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식품 회사를 매입해 치킨 붐을 타고 아칸소에서 시카고 거래소로 가는 치킨 수송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체이스’가 자금을 제공하고, ‘나비스타’가 농기계를 농민에게 팔자, 소매 체인점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서 판매하는 일련의 콘체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의 아칸소 주지사가 윈슬럽 록펠러, 후계자가 빌 클린턴, 현재 부지사가 윈슬럽 록펠러 주니어이다.
- 데이비드 록펠러와 CRR
1949년, 최연소 CFR국장으로 활동
카네기평화재단: 록펠러, 아이젠하워, 포스터 덜레스, 알져히스(UN창립, 공산주의자), iBM 회장 왓슨
1967년부터 포브스지와 함께 The Business Committee for the Arts, Inc. (BCA) 운영
- 록펠러와 세계은행
어쨌든 간에 뭐 인제, 그리고 인제 He War님께서 아주 중요한, 자료를 제보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스티븐잡스 공식 전기를 쓴 삼극위원회 회원이 월터 아이작슨이 쓴 책이 있습니다. The Wise Men이라고, 여기서 인제 여섯 명의 사람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한 명, 존 맥클로이를 부각시켰는데요. 아!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He War님이 이런 거 잘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인제 자료를 그 저 위키, 위키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인제 존 맥클로이가 CFR 회장이었다고 했죠? 1954년부터 70년까지. 그럼 1954년 이전에는 누가 했죠? 네. 데이비드 록펠러가 5년 동안 48년에서 53년까지 5년간 했었죠. 그리고 존 맥클로이는 체이스맨해튼은행도 맡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은행도 하고요. 그리고 여기 보면 포드 재단이 나오는데요. 이 포드 재단도 록펠러 쪽으로 간 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나중에 인제 인드라가 말할 기회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포드가 인제 화병으로 망했잖습니까? 그 헨리 포드가. 네, 근데 그래가지고 그 때 인제 운영했던 사람이 맥나마라가 있는데, 그 사람이 그 어떤 그 업적을 포드 일 처리를 잘해가지고, 민주당 정권 때, 노예민주당 정권 때, 그 존슨 때인가? 그 때, 전쟁장관? 그런걸 맡았고, 나중에 세계은행 총재도 되고 그랬습니다. 다 이쪽 인맥이거든요. 세계은행. 이 쪽 인맥입니다. 그리고 그거 아시죠? 인드라가 얘기했죠? IMF는 유럽계가 임명하고 독점하고 그 다음에 인제 세계은행은 미국인이 독점한다. 이런 공식이 있다. 아 이렇게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일단 오늘은 록펠러 관련해서는 여기까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드라였습니다.
- 록펠러 브라더스 펀드/체이스맨해튼-키신저
In Henry Kissinger, Rockefeller found a political operative with an international and domestic perspective similar to his. They first met in 1954, when Kissinger was appointed a director of a seminal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study group on nuclear weapons, of which David was a member.[10] The relationship developed to the point that Kissinger was invited to sit on the board of trustees of the Rockefeller Brothers Fund. Rockefeller consulted with Kissinger on numerous occasions, as for example in the Chase Bank's interests in Chile and the threat of the election of Salvador Allende in 1970,[11] and fully supported his "opening of China" initiative in 1971 as it afforded banking opportunities for the Chase Bank.[12]
- 클린턴의 FTA는 데이비드 록펠러의 아이디어
In 1992, at a Council sponsored forum, Rockefeller proposed a "Western Hemisphere free trade area", which subsequently became the Free Trade Area of the Americas in a Miami summit in 1994.
His and the Council's chief liaison to President Bill Clinton in order to garner support for this initiative was through Clinton's chief of staff, Mack McLarty, whose consultancy firm Kissinger McLarty Associates is a corporate member of the Council, while McLarty himself is on the board of directors.[26]
- 힐러리의 외교안보고문은-브레진스키의 수제자 홀부르크-광주사태/코소보회담
<2006년도 뿌리에서부터 흔들린 미국의 군사위기, 경제위기는 2008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한꺼번에 몰려왔나. 미 백악관, 국방부, 국무부와 그물처럼 얽혀있는 군산복합체, 유대계의 핵심인물 중 리처드 홀부르크ㅡ브렌트 스코크로프트-헨리 키신저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을 수가 없다.
오바마 당선자는 힐러리 클린턴을 미 국무부 장관으로 내정했다. 국무부 장관 후보에 올랐던 리처드 홀부르크는 힐러리 클린턴의 외교안보상임고문 중 한 사람이다. 리처드 홀부르크는 오바마 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담당특사에 임명될 것으로 유력하다고 언론이 보고 있다.
1999년 3월 24일, 유고연방 전역에 대해 나토군의 폭격기와 순항미사일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직전 3월 23일의 코소보 평화회담을 결렬시킨 마지막 조정자는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로 파견된 리처드 홀부르크였다.
그전부터 발칸의 인종청소가 시작되었고, 유고 평화회담 결렬을 핑계로 미국군과 영국군이 주축인 나토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홀부르크는 후에 미국 유엔(UN)대사로 승진한다. 그의 진짜 명함은 원래 월스트리트에서 유대계 로스차일드 재벌의 투자 은행 리먼 브러더스를 운영하던 이사였다. 카터 정권 시절에는 국무부 차관보로서 칼루치 CIA 부국장과 밀실에 박혀 이란 대사관 인질구출작전에 관여했다. 대통령선거에서 카터의 참모를 맡아 조지아주 땅콩 농장 주인 카터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공적이 있었다.
유고의 또 다른 연방내 공화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움직임으로 3년 넘게 내전이 계속되어 2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홀부르크의 지하공작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에서는 러시아 군부의 개입이 열쇠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옐친 대통령의 경제문제로 약점으로 잡으면서 미 재무장관 루빈과 홀부르크의 지하공작이 진행되었다. 결국 미군의 대규모 보스니아 파견이 이루어졌다.
루빈과 홀부르크는 공적인 직함을 빼고 보면 골드먼 삭스와 리먼 브러더스 출신의 족벌 상업 은행가다. 유고분쟁과 유고 전범 국제법정에 역시 같은 족벌의 조지 소로스가 막대한 자금원조를 하고, 리먼 브러더스의 임원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가 나토지상군을 유고에 투입하라며 전쟁의 수렁으로 이끄는 위험한 주장을 펼쳤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세계화'를 주창한 자이다.
리먼 브러더스 출신 족벌 상업은행가 리처드 홀부르크와 오바마 당선자의 사적인 외교분야 고문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부시 아버지 대통령의 외교정보자문위원장)는 2007년 후반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2008년 들어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제이피(JP)모건에 매각된 것을 시작으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메릴린치 매각, 에이아이지(AIG) 구제금융 신청 등을 거쳐 전 세계 경제위기로 번지는 것을 눈앞에서 쳐다 봐야했다.
홀부르크는 원래 오바마 의원의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지지해왔다. 그의 문하생이 현 6자회담 미국쪽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다. 힐 차관보는 유고연방의 갈등과 내전이 진행되던 1990년대 내내 남부 유럽 외교에 깊숙이 개입한다. 힐 차관보는 1994~96년 국무부 중남부유럽과장, 리처드 홀부르크 보스니아 특사의 수석보좌관을 맡았고, 이어 1996~99년 주마케도니아 대사 겸 코소보 사태 담당 특사, 1999~2000년 NSC 남동유럽담당 선임보좌관을, 2000~2004년 주폴란드대사, 2004년 8월12일 주한 미대사로 부임했다. 힐은 27년 뒤 자신의 스승인 홀부르크가 27년 전 맡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자리를 맡아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로 있다. 그는 보스니아 평화협정에 대한 공로훈장(?) 등을 수상했다.
리처드 홀부르크는 1980년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시절, 이남의 광주를 진압한 책임이 있다. 그의 문하생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1995년 유고에서 홀부르크의 수석보좌관을 하고 있었다.>
- CIA와 포켓몬고
지금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마트폰 게임으로 등극한 포켓몬 고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몇 가지를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시기인 것 같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필자의 주장 같은 것이 아니다. 필자는 포켓몬 고가 나쁘다거나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창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게임에 관한 몇 가지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제시하려는 것뿐이다.
우선 그간의 역사를 살펴보자.
2001년으로 돌아가 보면, 존 한케가 키홀(Keyhole, Inc)을 설립한다. 한케는 미 정부에서 외교 업무에 종사했던 사람이다. 키홀이란 이름도 오래 된 감시용 군사 위성의 이름을 딴 것이다. 초기에 키홀의 핵심 후원업체 중 한 곳은 인큐텔(In-Q-Tel)이란 곳이었다.
인큐텔은 CIA의 벤처캐피털 회사이다. 맞다. 미국 중앙정보부다. 대부분의 자금은 미 국토지리원(National Geospatial-Intelligence Agency, NGA)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NGA는 미 국방부의 전투 지원을 담당하고, NSA와 CIA에 정보를 제공한다.
키홀의 잘 알려진 공개 제품은 어스(Earth)이다. 구글이 2004년 키홀을 인수한 이후 구글 어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2010년에는 키홀의 설립자 존 한케에 의해 구글 내에 나이언틱 랩(Niantic Labs)이 설립됐다.
그 다음 몇 해 동안 나이언틱 랩은 두 가지 위치 기반 앱과 게임을 개발했다. 첫 번째는 필드 트립(Field Tip)이란 스마트폰용 앱으로, 사용자가 걸어다니면 물건을 찾는 앱이다. 두 번째는 인그레스(Ingress)란 SF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의 위치 간을 걸어다니는 게임이다.
2015년 나이언틱은 구글로부터 분사해 독립적인 회사가 된다. 그리고 포켓몬 고를 개발해 출시했다. 이 게임의 플레이 방식은 사용자가 스마트폰을 들고 서비스에서 제시하는 실제 세계의 위치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게임에서 액세스하는 데이터
이제 포켓몬 고가 액세스하는 정보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 회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염두에 두기 바란다.
우선 포켓몬 고를 안드로이드폰에 설치하면, 다음과 같은 정보에 게임이 액세스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ID
- 디바이스에서 계정 찾기
연락처
- 디바이스에서 계정 찾기
위치
- 정확한 위치(GPS 및 네트워크 기반)
- 대략적인 위치(네트워크 기반)
사진/미디어/파일
- USB 스토리지의 콘텐츠 수정 또는 삭제
- USB 스토리지의 콘텐츠 읽기
스토리지
- USB 스토리지의 콘텐츠 수정 또는 삭제
- USB 스토리지의 콘텐츠 읽기
카메라
- 사진 또는 동영상 촬영
기타
- 인터넷으로부터 데이터 수신
- 진동 제어
- 블루투스 디바이스와의 페어링
- 블루투스 설정에 액세스
- 완전한 네트워크 액세스
- 디바이스의 계정 사용
- 네트워크 연결 보기
- 디바이스의 대기 모두 금지
사용자 디바이스와 사용자 정보에 대한 액세스를 기반으로, 또 게임의 설계와 연결해 포켓몬 고는 시작부터 다음과 같은 정보를 아무런 문제없이 파악하고 저장할 수 있다.
- 사용자의 현재 위치
- 사용자의 이전 위치
- 사용자의 두 위치 간 이동 경로
- 각 위치에 있었던 시간
- 현재 바라보고 있는 것
- 과거에 바라보고 있었던 것
- 사용자의 모습
- 사용자 디바이스에 있는 파일과 이들 파일의 전체 내용
-
필자는 모든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관련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하지만 권장하고 싶은 것은 포켓몬 고가 액세스하는 데이터의 목록을 살펴 본 다음, 이 글의 앞쪽으로 가서 이 회사의 이력을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다. editor@itworld.co.kr
Read more: http://www.itworld.co.kr/news/100444#csidx4ba54f1a7dea68ba0b595a1a5fdea93
- 1975년 1월 6일 동아일보 CIA 특조위에 록펠러 각계시민 8인으로 구성 / 포드-키신저-록펠러-로널드 리건(레이건 정부 재정부장관) . 911조사위원회에 딕체니가 임명된 것과 비슷?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060020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06&officeId=00020&pageNo=1&printNo=16388&publishType=00020
- 오바마 백악관 비서실장에 윌리엄 데일리 JP모건 체이스 중서부 지역담당 회장
1999년 10월 2일 JP모건 아시아 기업인수합병 시장 1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00200099105004&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9-10-02&officeId=00009&pageNo=5&printNo=10486&publishType=00010
- 제이 록펠러와 워렌 버핏의 4번의 빅딜 (2000년 이후~)
제이 록펠러와 워렌 버핏은 아주 각별한 사이 입니다.
록펠러 가문은 프랑스 남부 출신 위그노파 인지, 독일계 유대인 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록펠러 가문의 공식 집필가는 앨런 네빈스이며,
1980년대이후 데이비드 프리먼 호크, 버니스 커트 , 클래리스 슈타츠 , 론 처노 등이 록펠러 가문에 관련된 책을 내 놓았습니다.
이중 론 처노의 부의 제국 록펠러 1,2 는 본인이 소장중에 있습니다.
워렌 버핏의 경우, 프랑스 위그노파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이 록펠러는 워렌 버핏과 4번의 빅딜(2000년 이후~)을 하였습니다.
첫번째, 2001년 엔론 파산으로 인한 엔론 그룹의 핵심 회사인 노던 네추럴 가스를 워렌 버핏이 인수.
두번째, 2008년 워렌 버핏가 대주주인 월스 파고 은행의 와코 비아은행 인수.
세번째, 2008년 워렌 버핏이 골드만삭스 지분 5억달러 투자.
네번째, 2011년 워렌 버핏이 BOA 지분 50억달러 투자.
이렇게 워렌 버핏은 제이록펠러 황제와 4번의 빅딜을 합니다.
첫번째빅딜, 2001년 노던 네추럴 가스 컴퍼니의 워렌 버핏 인수를 자세히 설명을 해보면,
엔론 그룹(2000년 미국 대기업 7위)이 분식 회계를 통한 2001년 파산을 하게 됩니다.
엔론 그룹의 파산 배경에는 , 무리한 차입을 통한 M&A 으로 재무 재표가 튼튼하지 못했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분식회계를 했습니다.
자료: http://ryanplee.blog.me/140100919867
그런데 엔론 그룹의 파산의 진짜 배경은 , 록펠러 가문과 부시 가문의 대립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차기 황제인 제이 록펠러의 골드만삭스가 2000년 전세계 석유 가스 상거래 시장의 30%이상의 거래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1998년부터 엔론 그룹에서 가스 상거래와 석유 전자 상거래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면서,
전세계 가스 상거래에서 엔론 그룹이 차지하는비중이2000년 20%수준까지 상승을 했습니다.
엔론 그룹은 볼세비키 후손 기업으로 볼수 있으며, 2000년 당시 CEO는 케네스 레이 였는데요,
부시집안과는 선조 때부터 아주 친분이 두터운 사이 였습니다.
즉, 부시가문이 칼라일 그룹산하 방위 사업부와 헤지 펀드 사업부, 이외에 에너지 사업부를 키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엔론 파산에 주도한 은행은 당연히 시티은행, 메를린치, 골드만삭스 입니다. 그리고 아서 앤더선 컨설팅업체 까지.
시티은행이 엔론 그룹 대출관련 주거래 은행이었습니다.
2002년 엔론 파산 처리후 핵심 자회사였던 노던 네추럴 가스 컴퍼니를 워렌 버핏의 회사인 미드 아메리칸 에너지 홀딩스 컴퍼니로 매각하게 됩니다. 당연히 매각 주간사는 시티은행과 골드만삭스 입니다.
두번째빅딜, 2008년 워렌 버핏의 회사 웰스 파고 은행(미국 자산 기준5위권)이 와코비아 은행(미국 자산 기준4위)를 인수하는 사건이 발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와코비아 은행은 원래 시티은행으로 인수 될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워렌버핏은 와코비아은행를 싼 값에 인수를 할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연히 제이록펠러의 사람들 (헨리 폴슨, 제이미 다이먼, 티모시 가이트너)의 작품입니다.
즉, 시티은행(데이비드 록펠러)이 와코비아은행을 인수하면, JP모간체이스가 가지고 있는 연방준비위원회 (뉴욕, 시카고 연방 은행 총재 임명권) 과 비슷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제이록펠러의 사람들이 방지 하기 위해서 시티은행의 모기지 관련 이중 회계 장부 폭로를 통한 시티은행 흔들기 와 동시에 와코비아 은행 인수를 웰스 파고 은행으로 하게 하였습니다.
제이 록펠러와 워렌버핏은 밀약은 이렇습니다.
웰스 파고 은행이 와코비아 은행을 인수 하는 대신, 모노라인(미국 지방채)에 대한 워렌 버핏이 8000억달러 보증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자료 연쇄하는 대폭락 78P)
그리고 제이 록펠러는 웰스 파고 은행 (본사 샌프란시스코)에게 개인 금고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기존의 스위스 UBS 금고, 록펠러 재단 금고, 캔터키주 포트녹스 금고 (이 세곳의 금고는 데이비드 록펠러 금고임) 이외에
제이 록펠러 자신만의 금고를 샌프란시스코 웰스 파고 은행 본사에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웰스 파고 은행은 1850년대 골드 러쉬때 금을 보관하고, 금을 운송했던 것으로 유명한 은행입니다.
세번째빅딜, 2008년 골드만삭스 지분 5억달러 워렌 버핏 인수
2008년말 워렌 버핏이 골드만삭스 지분 5억달러 어치를 시장 평가 금액에 따라서 인수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2008년말 미국 금융 위기상황에서 미국 시민들과 전세계 시민들에게 골드만삭스는 안전하다는 홍보용 지분 매입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당시 , 미국 투자 은행 순위(1위 골드만삭스, 2위 모건스탠리, 3위 메를린치, 4위 리먼브라더스, 5위 베어스턴스)였습니다.
이중 골드만삭스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부실 채권으로부터 안전 하지 않았는 소문이 월가를 중심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것을 단번에 불식시키는 사건이 워렌 버핏의 골드만삭스 지분 인수 입니다.
네번째빅딜. 2011년 워렌버핏의 BOA 지분 50억달러치 인수
BOA는 미국의 최대 상업은행 중 하나입니다.(미국 4대 상업은행, JP모건, 시티은행, BOA, 웰스파고 2011년 자산과 점포수 기준)
2011년 BOA 를 지분을 1주당 매입가 7달러 수준에서 우선주 50억달러치 워렌버핏이 인수를 하게 됩니다.
BOA는 미국의 3대 투자은행인 메를린치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 재무부 채권 주 거래자 이기도 합니다.
이런 BOA는 미국 재무부장관(티모시 가이트너)과 FRB협력 없이는 2009년 미국 정부로부터의 자본 확충을 받을수 없었으며,
BOA의 경영권은 제이 록펠러가 미국 재무부 장관을 통한 사실상 실력을 행사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한편, 워렌 버핏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의 지분 18% (1대주주), 를 소유하게 된 것 또한,
제이 록펠러와 연관이 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디스의 2대 주주는 데이비스 가문, 3대 주주는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입니다.
네번의 빅딜로 보면, 워렌 버핏은 제이 록펠러의 사람인것은 틀림 없습니다.
[출처] 제이 록펠러와 워렌 버핏의 4번의 빅딜.작성자 희양산인 카일라스
- 역외환 시장
예서, 역외환 시장을 주목한다. 역외환(NDF) 환율 시장이 지난 금융위기 시에는 일거래액이 100조원 가까이 되었으며, 이후로는 50조원대로 급감했다. 예서, 우리는 두 가지를 파악해야 한다. 하나, 역외환 시장에서 100조원 가까이 치솟았다가 절반으로 급감했다는 것은, 이 시기 국제유태자본의 하위단위인 헤지펀드가, 특히 유럽계 네오콘부시 자본이, 한국에서 해처먹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 해서, 여전히 50조원대인 역외환 시장을 양성화시켜서 기관만이 아닌 남아공 달러나 홍콩 탈러나 멕시코 페소화처럼 개인들도 거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FX마진거래와 같은 시장이다. 한마디로 양성화하자는 것이 인드라 제안이다. 국유본은 인드라의 이 제안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역외시장 석유
- 브레진스키 교황
한 관측에 의하면 교황은 바티칸 은행을 통해 바웬사가 이끈 폴란드 자유노조에 5000만달러를 지원했다고 한다. 따라서 1980년대에 워싱턴과 바티칸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협조가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로스차일드 미테랑
1987년 2월 7일 동아일보. 유럽사회정책지출이 세입의 절반 능가. 보편적 복지의 문제점. 프랑스 로스차일드 미테랑 국유화정책에 반발 8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프랑스로 귀환
- 새뮤얼 헌팅턴, 리처드 홀부르크, 브레진스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060020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06&officeId=00020&pageNo=1&printNo=16388&publishType=00020
- 록펠러가문 내분
1977년 7월 8일 경향일보 <록펠러 재단 기금 관리권 둘러싸고 내분 한창. 넬슨/로렌스 록펠러 vs 데이비드 록펠러>, 79년 2월 17일 넬슨 록펠러 의문의 죽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70800329203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7-08&officeId=00032&pageNo=3&printNo=9777&publishType=0002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2170032920603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2-17&officeId=00032&pageNo=6&printNo=10271&publishType=00020
79년 8월 1일 넬슨 록펠러 정사 중 복상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8010032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8-01&officeId=00032&pageNo=2&printNo=10410&publishType=00020
- 카스트로-빌더버그
원본 기사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08..
기사 원제: 카스트로, 빌데르베르크 그룹 소개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유력인사들이 모여 지구촌 현안을 논의.결정한다는 악소문으로 유명한 '빌데르베르크 그룹'에 대해 광범위하게 소개해 주목된다.
빌데르베르크 그룹은 1954년부터 매년 1번 유럽과 미국에서 영향력있는 인사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치, 경제, 환경 등 문제를 토론하는 비공개 회의를 주관해 왔다.
제1회 회의가 네덜란드의 빌데르베르크 호텔에서 열림에 따라 이름이 주어진 그룹 회의에서는 지구촌의 정치, 경제문제는 물론 물론 문화의 흐름까지 유도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카스트로는 18일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의 전체 8면 가운데 3면에 이르는 칼럼에서
빌데르베르크 그룹의 폭로본으로 유명한 다니엘 에스툴린의 '빌데르베르크 그룹의 비밀들'의 중요 부문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그림자 정상회의'로 통하는 빌데르베르크 그룹의 음모(?)에 접근했다.
카스트로는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극도로 자제하면서 저자 에스툴린이 정직하고 현안에 정통한 저자라고 칭찬하고 그의 책은 "판타스틱한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카스트로는 에스툴린의 책이 "사악한 집단과 빌데르베르크 로비스트들이 대중을 조종하여 국경을 초월하고 아무에게도 책임을 지지않은 세계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음모를
파헤쳤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카스트로가 소개한 부분 가운데는 지난 1950년대에 사회주의 계열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록펠러 가문과 협력하여 대중이 민권문제와 사회적인 부당성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록음악이 유행하도록 조장했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 동안 언론취재를 거부하는 등 폐쇄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빌데르베르크 그룹은 웹사이트에서 회원들이 1년 3일간만 모여 비공식적으로 기록에
남기지 않고 현안을 논의할 뿐 그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아무런 음모도 없으며 보다 좋은 정책 개발을 목표로 서로 협력하기 위해 매년
회합을 개최해 왔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빌데르베르크 그룹의 존재는 1970년대에 와서야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는 데 소수 유력인사들이 지구촌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식의 어두운 이미지가 강하다. 회의에는 록펠러 집안 인사, 헨리 키신저 그리고 미국과 유렵 국가들의 고위 관리 그리고 국제경제계와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란-콘트라 사건 상원 청문회에서 그림자 정부의 존재를 폭로하는 대니얼 이노우에 하와이 연방 상원의원
Senator Daniel K. Inouye in 1987 Chaired the Senate Select Committee on Secret Military Assistance to Iran and the Nicaraguan Opposition, which held public hearings on the Iran-Contra affair.
- FED 구제금융과 JP모건체이스
제레미 다이아몬드 JP모건체이스 FED로부터 구제금융 116 tillion 중 300 billion loans received, FED 이사회에서 물러나야한다, 6 out 9 은행가 FED 미국 법, 60% 미국 국부 2% 만 소유, 2010 93% 수입 went to top 1%, 부의 불평등 세계화, 기술변화, 6대 은행 2/3 미국 부 소유
- 브레진스키와 부시정권
He was also a member of the President’s Chemical Warfare Commission (1985),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Defense Department Commission on Integrated Long-Term Strategy (1987–1988), and the President’s Foreign Intelligence Advisory Board (1987–1989). In 1988, he was cochairman of the Bush National Security Advisory Task Force, and in 2004, he was cochairman of a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task force that issued the report Iran: Time for a New Approach.
- 포클랜드 전쟁
대처는 그 막대한 전비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급상승해 정권연장에 성공했으며, 덕분에 노동당은 길고 긴 야당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에 대해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막대한 전비는 안 그래도 힘든 역구 재정에 직격타를 날렸으며, 영국 경제가 막장화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전쟁이기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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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의 원인 후안 페론? - 왜 뉴욕 타임스는 아르헨의 후안 페론을 비판했는가
학문/음모 2014.08.1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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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비판[편집]
대한민국의 언론은 일명 '포퓰리즘'으로 대표되는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다고 평가를 한다. '페론주의'에 따라 이루어진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이다.[12]
아르헨티나 경제의 파탄의 실질적 책임은 후안 페론에 있지 않고,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와 군사정부가 도입한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무분별하게 외자 유치를 했고, 자신들의 집권에 협력한 다국적기업을 불러들였다. 어느 정도 실속을 챙긴 해외자본과 기업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자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13]
페론 집권 시기의 산업화와 경제 업적을 재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했다. 페론은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티나가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가는 데 이바지 했다.
페론 집권 기간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층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의 재분배 현상이었는데, 이는 60%에 가까운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했다. [14]
1943년 쿠데타에 참여하여 입각한 점과 재임기간 언론탄압을 행한 점은 비판받고 있다.
- BP 사태는 대체에너지 및 대중동 석유비중을 줄이기 위한 자작극?
(1) 골드만 삭스의 BP 주식 대량 매각
미국 동부 해안 멕시코만에서 BP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지난 4월 20일 이었지요. 그 전에 골드만 삭스는 1월~3월까지의 1 사분기에 BP 주식의 43.7 퍼센트를 처분했습니다. 금융기관이 주식 사고 파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그 규모와 시기가 석연치 않아서 의혹의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골드만 삭스가 BP 기름 유출 사고를 미리 알고 매각한 것이 아닌가. 골드만 삭스가 왜 BP 주식을 대량 매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대량 매각 사실조차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인터넷에 올린 것은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의 사이트인 democraticunderground.com 입니다. 주요 언론들은 골드만 삭스의 BP 주식 대량 매각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 사이트에 접속이 안 됩니다. 저의 브라우저에 문제가 있는 건지 사이트에 문제가 있는 건지 오늘 하루종일 접속을 시도하는데 안되네요.
두번째로 이 사실을 인터넷에 올린 것은 로스토리 (Rawstory.com) 입니다. 두 사이트 모두 6월 2일에 골드만 삭스에 관한 글을 올렸습니다. 로스토리는 원래 골드만 삭스에 확인 전화를 한 후 기사를 올릴 생각이었으나, democraticunderground.com 이 먼저 글을 올리자 다른 사이트에게 더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급하게 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로스토리 기사에 의하면, 올해 1 사분기에 BP 주식을 처분한 기관은 골드만 삭스 말고도 미국 유수의 은행 ‘웰스 파고’가 관리하는 Wachovia 와 스위스 은행 UBS 가 있으나 (각각 98 퍼센트와 97 퍼센트 매각), 그 총액은 골드만 삭스에 비해 새발의 피입니다. 이 시기에 BP 주식을 산 단체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빌 게이츠 자선재단입니다. 역시 빌 게이츠는 인드라님 말씀대로 실세가 아닌 듯 합니다^^.
이어서 같은 날 세번째로, David Icke 라는 영국 음모론자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회원 게시판에 골드만 삭스의 BP 대량 매각 사실을 증명하는 링크가 하나 달랑 올라왔습니다. 아래 링크가 그 링크입니다. 골드만 삭스를 비롯한 각 기관들의 1 사분기 BP 주식 거래 기록이 나옵니다.
http://moneycentral.msn.com/ownership?Holding=Institutional+Ownership&Symbol=BP
David Icke 라는 인물을 검색해 보았는데, BBC 텔레비전의 스포츠 해설가 및 녹색당 대변인으로 널리 알려져 존경 받았던 인물이랍니다. 그러다가 1990년에 어느 심령술사로부터 “당신은 이 지구를 구하러 온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고서 인생이 조금 변하고, 1991년 4월에 BBC 방송에 나와 발언한 “나는 신의 아들이다. 지구는 곧 쓰나미와 지진으로 파괴될 것이다” 에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하룻밤새 영국 국민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뉴에이지 음모론자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그가 운영하는 음모론 사이트는 굉장히 인기가 있습니다.
그는 6월 27일에 올린 뉴스레터에서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 글이 인터넷 여기저기 사방팔방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골드만 삭스의 BP 주식 대량 매각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주로 David Icke 의 6월 27일자 뉴스레터를 링크한 여러 글들을 통해서 입니다.
(2) BP 최고경영자 토니 헤이워드의 BP 주식 매각
6월 5일자 영국 텔레그라프지는, 영국 BP의 최고경영자 토니 헤이워드가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한달 전인 3월 17일에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BP 주식의 3분의 1을 매각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 언론에 보도되는데, 왜 골드만 삭스의 BP 주식 매각은 주요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까요.
(3)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 동부 해안 석유/가스 탐사 허용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20일 전인 3월 31일,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년 간 묶여있던 미국 동부 해안 연안의 석유/가스 탐사 규제를 풀었습니다. 출처는, 3월 31일에 벨로나 웹사이트에 올라온 글입니다. 벨로나는 노르웨이에 기반을 둔 비정부기관 국제환경단체입니다.
오바마의 이 조치 덕분에 BP의 멕시코만 인근 석유 탐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중동 석유에 집착한 것과 달리,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한달 후인 2009년 2월에 미국의 대(對) 중동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겠다고 언급했습니다. 미국 동부 해안의 석유/가스 탐사 허용은 이러한 선상에서 나온 조치.
(4) 할리버튼의 부츠앤쿠츠 인수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18일 전인 4월 12일, 멕시코만 석유 탐사 관련업체 중의 하나인 할리버튼은 부츠앤쿠츠 회사를 인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부츠앤쿠츠는 유출되는 석유/가스를 제거하고 시추시 발생하는 폭발 사고를 수습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회사입니다. 마치 유출 사고가 날 줄 미리 알고 부츠앤쿠츠를 인수한 것 같은.
할리버튼은 세계 2위의 원유 굴착장비업체로, 부시 행정부 시절 딕 체니가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5) 골드만 삭스가 사기 혐의로 피소됨
4월 16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골드만 삭스를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 관련 사기 혐의로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 고소했습니다.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4일 전의 이 피소 사건, 과연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6)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
지난 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을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동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1967년 이후로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 약 100 개의 정착촌을 건설해 현재 약 50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는데, 국제법상 불법입니다.
지난 3월 9일, 미국 부통령 조 바이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재개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이스라엘 내무장관이 예루살렘 동쪽의 라맛 쉴로모 구(區)에 1,600 개의 주택을 새로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듣고 팔레스타인이 평화협상을 철회한 것은 당연지사.
4월 29일에 영국 가디언지가 단독기사를 내보냈습니다. 1주일 전 (즉 4월 20일 무렵) 미국 특사 데이비드 헤일이 팔레스타인 대통령 압바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네탄야후 수상이 라맛 쉴로모 정착촌 프로그램을 적어도 당분간은 진행시키지 않을 거라고 확언했다며, 만약 이스라엘이 다시 도발적으로 정착촌 건설을 시작하면, 미국 정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스라엘 제재를 허용하도록 언약했다는 내용입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을 다시 평화협상에 앉히기 위해 이 무조건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는 미국이 유엔의 이스라엘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기권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지 역시 팔레스타인 대통령 압바스가 위와 같은 내용의 문서 편지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가디언지는 팔레스타인 소스를 통해 확인한 결과, 미국이 기밀유지를 이유로 구두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6월 23일에 미국 침례교 목사 Carl Gallups 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서 말하기를, 미국이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등 돌린 결과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 것이랍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일은 1948년 5월 14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건국일을 우리나라 음력에 해당하는 유대 달력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매년 건국일이 다르고, 올해 건국일은 4월 19일이었답니다. 4월 19일 이스라엘 건국일에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등 돌리자, 다음 날 4월 20일에 그 심판으로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겁니다.
이 동영상을 열심히 소개하는 것이 “월드넷데일리”, 미국 최대의 보수적 뉴스 사이트이고, 이런 허접한 동영상을 소개한다며 월드넷데일리를 씹는(^^) 것이 “마더 존스 매거진”,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진보 잡지입니다.
정리하면,
(1) 1월~3월에 거쳐 골드만 삭스는 BP 주식의 43.7 퍼센트를 대량 매각.
(2) 3월 17일, BP의 최고경영자 토니 헤이워드가 BP 주식의 3분의 1을 처분.
(3) 3월 31일, 오바마 대통령이 20년 동안 묶여있던 미국 동부 연안 석유/가스 탐사를 해제시킴으로써 멕시코만 인근의 석유 탐사가 가능하게 됨.
(4) 4월 12일, 할리버튼이 석유/가스 유출 처리 회사 부츠앤쿠츠 인수에 합의.
(5) 4월 16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골드만 삭스를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 관련 사기 혐의로 고소.
(6) 4월 19일, 이스라엘 독립기념일. 이 무렵, 미국이 팔레스타인에게 유엔에서의 이스라엘 무조건적 지지 철회를 구두언약함.
(7) 4월 20일, 멕시코만 석유 유출 사고
6월 2일자 CNN 뉴스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
“이번의 멕시코만 재앙은 안전을 무시하고 위험한 지름길을 택한 일꾼 혹은 회사의 실수로 판명될지 모르나, 미국이 화석 연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우리의 후대를 위한 비전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지구 표면 6 킬로미터 아래에서 시추하는데 늘 위험이 내재함을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석유 추출이 힘들수록 위험은 더 증가한다."
CNN 뉴스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이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를 빌미로 대체 에너지를 밀고자 하는 것이라고 논평하고 있네요.
골드만 삭스와 BP 는 대체 에너지에 여러모로 투자한 것이 많아서 오바마의 ‘탄소 배출권 거래제’ 법안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미국 식민지
<니토베 이나조>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가장 부정하는것 무사도는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개뻥이라는 것임
처음 무사도 얘기를 꺼낸것은 니토베 이나조로 그가 1899년 미국에서 출간한 영어로 된 책
1393351017_vZLHj9CM_Bushido-the-Soul-of-
[The Soul of Japan]에서 처음 등장한 말로
당시 벨기에의 학자가
종교교육 없는 일본에서 무슨 도덕 교육을 시킴?
하며 묻자
니토베 이나조는 말을 잇지 못했고
곰곰히 생각하다 아 그래 무사도
일본에는 무사도가 있다라고 대충 넘겼다고함
거창해보이지만
서양의 기사도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참고로
어릴때 어렴풋이 듣던 말과 유교적 덕목을 대충 섞어 만든
그냥 저 일본인이 만들어낸 신조어였을뿐이다
그런데 그 책은 발간되자마자
유럽+미국에서 베스트샐러로 떠올리고
서양인들 머릿속엔 아 일본하면 무사도지 하고 착각하게 세뇌시켜버린거임
만약 진짜 그런정신이 있었다면
왜 서양물먹은 일본인이 먼저 영어로된 책을
출간하면서 그런 단어가 처음 나오는걸까?
없거든 대충 지어내 그럴뜻하게
이미지 메이킹 해야하거든
//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데 밑거름이 된 일본 파쿠리(표절) 문화의 역사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데 밑거름이 된 일본 파쿠리(표절) 문화의 역사 관련 시리즈 나머지 동영상들 볼수 있는곳
http://www.youtube.com/channel/UCJqQUEwPY-Aec1Ibl6HTWww
이 7개의 동영상은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데 밑거름이 된 일본 파쿠리(パクリ 표절) 문화의 역사를 잘 꼬집은 동영상
들입니다. 시리즈로 제작되어 있어요 첫번째 동영상이 서양의 제품과 서양의 콘텐츠 들을 그대로 배낀 일본 제품 일본
콘텐츠 들을 신랄하게 꼬집은 동영상이고 두번째 동영상은 서양의 자동차(차)들을 그대로 배낀 일본 자동차(차)들을
신랄하게 꼬집은 동영상입니다. 나머지는 서양을 따라하고 흉내내고 모방하는 일본의 이것저것 수많은 제품들과
사람들 컨셉들 같은것을 신랄하게 꼬집은 동영상 들이에요
현재 일본이 아시아 제일의 경제 대국 산업 대국으로 선진국의 모습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서 그런것일까요?
패전후 과거 일본도 지금의 산업 대국으로 있기 까지 이렇게 수많은 표절 상품 출시가 이루어졌다것을 아시는 분들이
의외로 생각보다 많이 없으시더라구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막 경제 발전 산업화를 시작했을때 일본은 잘나가는 모습만 전 세계에 보여주고 있었고
아시아 최강의 선진국 경제 대국 강대국의 위용을 오랫동안 자랑하고 있었다보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일본의 수많은 것들을 오랜 세월 매번 벤치 마킹의 대상으로 삼아오고 소름 끼칠정도로 그동안 일본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온게 많고 하지만 (참고로 요즘엔 중국이 한국을 그런 대상으로 봄)
일본 또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めいじ いしん)) 이후 일본의 국가 지침이 유럽 선진국의 문물을 모조리 베끼자는
거였고 패전 후에도 오랜 세월 특히 미국과 독일등 서양 선진국들의 이것저것을 그대로 빼끼고 모방한 끝에
오늘날 현재 일본이 문화 산업 컨텐츠 면에서 많이 우수하고 방대한 영역을 자랑 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아주셧으면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본도 이런 수 많은 표절 상품을 거쳐 질타와 비난 속에 창작의 반열로 오른것이다 이말이죠
어떻게 보면 이 표절 이라는 자체가 분명 잘못 된 것은 사실이고 원작자에 대한 무례이자 큰 실례인것이지만
창조의 기반에 있어 큰 계기와 작용을 하는 만큼 어찌보면 조금은 필요악 으로서 존재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 이유 때문에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데 밑거름이 된 일본 파쿠리(パクリ 표절) 문화의 역사를 봐도 우리나라
도 할말이 없고 얘들을 까는데 까는 자료로 쓸수가 없는것이지요 왜냐구요? 현재에 들어서는 이 파쿠리(パクリ 표절)
문화의 역사 바톤을 우리나라와 중국이 버젓이 계승하여 일본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남발 하고 있으니까요
쉽게 말해서 요새는 좀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동안 일본의 이것저것을 우리나라가 많이 배껴서 선진국으로 가는데
많이 적용시켜 왔기 때문에 그렇다 이말입니다.
모방을 통해 창조가 탄생한다는 것은 사실인 만큼 이걸 따지고 보면 정말 필요악으로서 언젠가는 이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 할 날이 올 듯 합니다. 그래서 씁쓸한 생각이 드는것을 멈출수가 없네요
거기다 이 첫번째 동영상 마지막 말이 맞네요
모방 -> 저 품질 조잡한 물건으로 점유율 높임 -> 기존에 있던 상품을 시장에서 밀어냄 -> 고 품질화
한국 중국도 이런식으로 크는거라고 꼬집고 있네요
지금까지는 서양(미국, 유럽) 제품 -> 일본 -> 한국 -> 중국 이런 패턴으로 파쿠리(パクリ 표절) 문화의 역사 바톤이
계승 됐는데 이제는 한국도 주도적으로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독자적으로 많이 창조해 내는 날이 꼭 왔으면
합니다.
모방 카피 표절을 해도 일본 처럼 뭔가 돈이 되도록 플러스 기능을 달아서 내놓는것이면 더 좋았을텐데
(예: 차 보조석이나 뒷자석에 달려있는 측방 손잡이)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진짜 아무것도 없이 그냥 뻔뻔할 정도로 그대로 그동안 일본것을 배낀게 정말 많지요
아무튼 일본도 이러한 사실은 돈을 벌게 될때부터 얘기고 처음엔 엄청 조잡하고 어설프게 카피해서 수출 많이
했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서구 서양인들한테 메이드인 재팬이 지금의 메이드인 차이나 이미지였고
그래서 이에 견디다 못해 일본에선 아예 메이드인 재팬을 다른걸로 바꾸자고 의논 까지 했었다고 하네요
근데 싸게 팔리면서부터 돈좀 버니까 카피의 수준이 상승해서 한국처럼 이미지 개선됐고 모방 카피를 하더라도
뭔가 돈이 되도록 기능을 더 플러스 하고 개량 시켜서 내놓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하네요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데 밑거름이 된 일본 일본 파쿠리(パクリ 표절) 문화의 역사 이 동영상을 봐도 알수 있지만
나라가 잘살고 부강해 지려면 우리보다 더 잘사는 다른 나라 배끼고 모방하는것은 어쩔수가 없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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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일본 지원
49-53년 까지 미국의 일본 원조금은 12억달러이고 현재가치로 11조원입니다. 그당시 엔화로치면 더늘어나겠지요. 한국은 5억달러를 지원 받았고요.
하지만 53년~60년엔 미국이 한국에게 25억달러 일본에겐 1억달러를 지원해줍니다. 그후로부턴 일본은 원조를 하는 국가가되었고 한국은 70년대후반까지 추가로 25억달러를 지원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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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로 인해 일본의 경제상황이 일거에 바뀌게 됨. 한국전쟁으로 주일 미군을 주력으로 한 국제연합군이 일본에서 조달한 군수물자와 서비스, 즉 특수가 발생함. 한국전쟁1년 째(1950년 6월~51년 6월)의 특수는 엔화가치로 환산하면 약 1.184억 엔으로 1950년도의 국민총생산 3조 9,467억엔의 3%에 달하며, 2년 째의 특수는 51년도 국민총생산의 약 2.1% 정도로 국민총생산에 대한 비중은 크지는 않았음
그러나 닷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로서는 가뭄에 단비같은 추가수요의 발생이었고, 무엇보다 특수가 주로 달러로 지불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큼. 1949년 수출액은 5억 970만 달러 수입액은 9억485만 달러로 3억 9515만 달러의 수입초과였으며, 외화부족이 필요물자의 수입을 제약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달러수취를 수반한 특수가 일본 경제에 미친 효과는 컸음.
또한 1949년 9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아 군사력의 강화를 검토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 전쟁 발발 후 바로 대규모의 군비 확장계획을 결정하고 서구 각국에도 군비 확장을 요청함. 세계 적인 군비 확대 속에서 세계 경기는 불황에서 호황으로 전환되게 됨. 군비 확대로 인해 엄청난 초과 수요가 발생하게 된게 원인이었고, 일본의 섬유품, 금속, 기계등의 수출이 급속도로 확대됨.
닷지 불황에서 일변하여 특수붐이 찾아왔고, 생산이 급속도로 확대되서 1951년에는 패전 전 수준을 넘어서게 됨. 실질적인 국민총지출, 개인소비지출도 패전 이전 수준을 웃도는 규모로 회복되었음.
또한 한국 전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여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51년 5월에 [아시아에 있어서 합중국의 목적, 정책, 행동방침]을 정하였는데 이 방침에서 대일 정책도 확정되었음. 미국의 세계 전략 속에서 일본은 자위력을 가지는 동시에 저급 군수품의 수출능력도 갖춘 동맹국으로서 자리잡게 됨.
...
1950년 당시 전체 직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500명이 거리로 나앉었고, 경영진은 총사직했다.
이런 도요타가 도산 직전에 기사회생한 것은 한국의 6.25 전쟁 덕분이었다. 전쟁으로 미군의 군용차 수요가 폭발하면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앞서 소개한 미쓰비시중공업, 샤프도 6.25 전쟁이 벼랑 끝에서 살려낸 기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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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中
- 내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만담은, 말하자면 미국에서 들어온 수입물이었다. 엔타쓰 아차코에서 시작해 아쓰미 기요시와 하기모토 긴이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대표적인 코미디언 대부분이 '록좌', '프랑스좌', '일극 뮤직홀' 등의 스트립 극장 출신이다. 나도 스트립 극장에서 출발했는데, 처음에는 그런 스타일의 쇼가 일본 고유의 것인줄 알았다.
하지만 원천을 더듬어 보니 브로드웨이의 이웃에 있는 '벌레스크(Burlesque)'에 이르렀다.
벌레스크는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무희들이 경쾌한 춤을 추고 무대 뒤에 들어간 사이 코미디언들이 나와 희극을 보여주는 일종의 극장식 쇼이다. '로렐과 하디'나 '애봇과 코스텔로' 콤비도 그런 벌레스크 코미디언들이었다. 애봇과 코스텔로의 유명한 <메이저리그>가 태평양을 건너와 엔타쓰 아차코에게서 <소케이센(와세다 대학과 게이오 대학의 야구 경기)>의 소재가 된 것이다. 넌센스 트리오도 내 스승인 후카미 씨도 애봇과 코스텔로의 소재를 사용했다. 일본 고유의 스타일인줄 알았던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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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합의
것이 19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자문기관인 '국제협력을 위한 경제구조조정연구회'가 내놓은 <마에카와 보고서>이다. 보고서 이름은 연구회 회장을 맡은 마에카와 하루오 전 일본은행 총재의 이름에서 땄다. 보고서의 주제는 일본 경제를 수출롸 생산 주도에서 내수아 소비 주도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개방, 규제 완화 등 기본적으로 일본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바람직한 방향이었으나 실제로 이후 일본 정부의 정책은 시장개방이나 규제 완화보다는 주택 공급, 저금리처럼 국민들이 과소비를 부추니느 정책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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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을 당시 코다마 요시오.
고다마 요시오(일본어: 児玉誉士夫 こだま よしお, 1911년(메이지 44년) 2월 18일 ~ 1984년(쇼와 59년) 1월 17일)는 일본의 극우 운동가이자 CIA 요원이었다.[1][2][3] 폭력조직 금정회(후의 도천회)의 고문이었으며[4] ‘정재계의 흑막’(政財界の黒幕), ‘해결사’(フィクサー, fixer), ‘우익의 거괴’(右翼の巨魁)라고 불린 거물이었다.
어려서 불우하게 살다가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에 건너가 경성산업전문학교를 졸업, 일본으로 돌아와서 초국가주의자가 되어 현양사의 도야마 미쓰루 밑에서 배웠다. 여러 우익단체를 전전하다 국회 삐라살포 사건, 이노우에 쥰노스케 장관 협박사건을 일으키고 투옥되었다. 1932년에 석방되자 만주에 건너갔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항공대에 물자를 납품하면서 각종 스파이 활동을 했다. 1946년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연합군에 체포되었으나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1948년에 석방되었다.
1950년대에는 일본 미군정 참모제2국(소위 G2)과 야쿠자 조직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서 폭력단으로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총리대신의 임용 등에도 간섭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으며,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대연정 결과 거대 공룡정당 자유민주당이 탄생할 때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정치권의 흑막으로 군림했으며, 1960년대에는 야쿠자들을 동원해 아이젠하워 방일을 반대하는 안보투쟁 투쟁원들을 와해시킬 음모를 꾸몄다. 또한 한국 대통령 박정희와도 만주 시절 인맥을 쌓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도 세지마 류조와 함께 적극적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뒷세계의 큰손으로 군림하던 고다마는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탈세 및 외환법 위반으로 기소당했고, 1984년에 자신이 CIA 공작원이었음을 고백한 뒤 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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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 CSIS 가상 싱크 탱크 [ 편집 ]
日本経済新聞社と米国戦略国際問題研究所CSISとで設立された日経・CSISバーチャル・シンクタンクに民主党の前原誠司 、 長島昭久 、 近藤洋介 、 玄葉光一郎 、 みんなの党の浅尾慶一郎 、自民党の林芳正 、 西村康稔 、 斎藤健 、 岩屋毅等と共に、政治フォーラムとして在籍している。 일본 경제 신문사 와 미국 전략 국제 문제 연구소 CSIS 로 설립 된 닛케이 · CSIS 가상 싱크 탱크 에 민주당 의 마에하라 세이지 , 나가시마昭久 , 콘도 요스케 , 겐바 고이치로 , 민나노 당 의 아사오 케이이치 자민당 하야시 요시마사 , 니시무라康稔 , 사이토 켄 , 동굴 이순신 등과 함께 정치 포럼으로 남아있다. 上級アドバイザーは石破茂が務めている。 수석 고문은 石破茂 가 맡고있다. CSIS上級顧問兼日本支部長であるマイケル・グリーンはCSIS在籍時に秘書として従事した上司であり、直接指導を徹底的に施して小泉を親米派として作り上げることに成功した人物であると評論家の中田安彦は解説している[12] 。 CSIS 선임 고문 겸 일본 지부장 인 마이클 그린 은 CSIS 재적시에 비서로 근무하는 상사이며, 직접지도를 철저하게 실시하고 고이즈미을 친미 주의자로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인물로 평론가 나카타 야스히코는 설명하고있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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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버블기 미일무역적자 기간 이용 국유본은 글래스스티걸법 폐지 추진. 그린스펀 FRB 의장도 찬성.
초상현상
강령술을 통해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 대수도원을 발견했으나, 진상을 밝혀 부인으로부터 이혼당하고 사회로부터 매장당한 프레드릭 블라이 본드
Extreme Surprise III - GHOST
[이 이야기의 요약]
◇ 영국의 한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였던 '프레드릭 블라이 본드'라는 사람이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대수도원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발굴을 하다가
대수도원을 찾지 못해 난관에 봉착했는데 '요하네스 브라이언트'라는 수도사의 도움으로
글래스턴베리 대수도원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며
그러나 그 수도원이 이미 사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영국인들은 그의 이런 주장이 말이 안되는 일이이라고 말했다.
◇ 유능한 고고학자들도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글래스턴베리 대수도원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가 짧은 기간에 글래스턴베리 대수도원을 찾았는지에 대해서는 불가사의하다.
◇ 프레드릭 블라이 본드는 영적 능력을 사용하는 '강령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동료들에게 강령술로 글래스턴베리 대수도원의 위치를 찾아 보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강령술에 의해 출연했다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요하네스 브라이언트 수도사라는 것이다.
요하네스 브라이언트 외에도 여러 명의 수도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 글래스턴베리 대수도원에서서 유령을 봤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여럿 있어서
그가 생전에 했던 말이 재조명되고 있다.
◇ 프레드릭 블라이 본드의 발굴 이야기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 글래스턴베리 <Glastonbury> -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주에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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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셀레스트 호의 처음 이름은 '아마존 호'였으며, 군함이나 어선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역선으로 건조된 범선이었다.
이 배는 1861년에 캐나다의 노바 스코샤 주의 스펜서 섬에서 조슈아 데위즈(Joshua Dewis)라는 사람에 의해 건조되었다. 그런데 배가 건조된 이후 처음으로 항해를 하다가 출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코 앞에 있던 어선과 충돌, 배가 일부 파손되는 사고를 겪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아마존 호'는 다시 항구로 되돌아와서 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수리하는 도중에 정체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렇게 배는 처음부터 뭔가 불길했다.
결국 천신만고끝에 수리를 끝내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배가 출항한지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선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선원들은 선장을 수장시키기로 결정하여 배를 멈추고 줄로 관을 엮어 바닷속으로 던지기로 했다. 그런데 관을 바닷속으로 던지는 과정에서 항해사가 관과 연결되어있던 밧줄에 엮여 같이 빨려들어갔고 항해사도 사망했다.
결국 선원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이 저주받은 배는 겨우겨우 항구로 되돌아왔다. 이후로도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두 번째 선장이 지휘한 최초의 항해는 메인 주 앞 바다에서였는데, 고기잡이용 시설과 충돌하여 선체가 일부 훼손되었고, 수리중에는 배의 중앙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 후, 세번째 선장 때는 다른 배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충돌한 상대 배는 침몰했다. 네번째 선장 때는 케이프 브레턴 섬에서 암초에 걸리는 바람에 배가 좌초했다. 이쯤 되니 주위 사람들은 '아마존 호'가 저주받은 배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선원들도 이 배를 타기 꺼려했다.
결국 '아마존 호'는 여러 선주의 손을 거쳐 마지막으로 J.H.윈체스터란 사람[1]에게 팔렸다. J.H.윈체스터는 배에 관련된 저주를 의식해서인지, 배의 이름을 메리 셀레스트 호로 바꿨다. 그리고 배의 밑 부분 일부가 썩어있는 걸 보고 뱃바닥 부분에 구리판을 깔고 갑판의 선실을 길게 하는 등 배를 튼튼하게 개조했다.[2]
이렇게 아마존 호는 메리 셀레스트 호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경험이 아주 풍부한 벤자민 브리그즈 선장을 메리 셀레스트 호의 선장으로 임명했다. 메리 셀레스트 호는 알코올 원액을 잔뜩 싣고 제노바까지 갈 계획이었다. 1872년 11월 7일 브리그즈 선장의 지휘 아래 메리 셀레스트 호는 뉴욕을 출항했다.
그러나 이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메리 셀레스트 호는 제노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의 궁금함과 두려움은 증폭되었다.
2 사건 발생 ¶
2.1 배의 발견 ¶
http://members.chello.nl/e.n.secasiu/Index%20files/mary_celeste(1).jpg
메리 셀레스트 호가 출항하고 한달이 지난 후인 1872년 12월 5일의 평온한 오후. 영국 상선 디 그라티아 호는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사이의 북 대서양에서 두 개의 마스트를 단 수상쩍은 범선을 발견했는데, 이 배는 뱃머리의 삼각돛대와 앞 돛대의 스테이 세일만을 펼친채 달리고 있었다. 배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보았어도 이상했을 것이다.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그 배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배는 바로 메리 셀러스트 호였다. 참고로 디 그라티아 호의 데이비드 모어하우스 선장은 메리 셀레스트 호를 알고 있었는데 브리그즈 선장과 개인적으로 술자리도 가진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배를 발견하고 이 배가 가던 목적지가 여기와 상관이 없던 곳이라 매우 놀랐다고 한다.
디 그라티아 호의 일등항해사 올리버 데보(Oliver Deveau)는 선원 몇몇을 이끌고, 그 정체불명의 배에 올라탔다. 배에는 6개월치의 물과 식량이 있었으며, 선원들의 개인물품도 그대로였다. 선내에는 어떤 폭력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토브는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었고,… 주방 용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올리버 데보
2.2 의문점 ¶
배는 상당한 양의 물이 차 있었지만 여전히 항해에는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세 개의 물펌프가 꺼내어져 있었는데, 두 개는 고장이었고 하나는 발견된 순간까지도 작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시계, 나침반, 육분의와 같은 항해도구는 모두 부서지거나 사라진 상태였으며, 선장의 항해일지를 제외하면 일체의 종이류도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항해일지는 11월 25일까지만 기록되어 있었다. 메리 셀러스트 호에는 한 척의 구명정이 실려 있었어야 했지만 이 역시 사라져 있었다.
한편 화물인 알코올은 잘 정돈된 상태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이는 지브롤터에서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보고내용이며, 실제 제노바에서 알코올들을 하역하기 시작하자 그 중 아홉 통이 비어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빈 드럼통은 붉은 오크로 만들어진 것이고, 하얀 오크통에 들어있던 나머지 알코올들은 멀쩡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메리 셀러스트 호는 11월 25일 이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진 채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유령 같은 항해를 했던 것이다.
메리 셀러스트 호에는 브리그즈 선장과 7명의 선원 외에 브리그즈의 아내 사라와 2살 된 딸 소피아 마틸다도 타고 있었다. 모어하우스는 그들이 배를 포기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난감해졌다. 데보 일등 항해사는 디 그라티아 호에 두 선원을 파견하여 메리 셀레스트 호를 지브롤터로 인도할 것을 제안했다. 모어하우스는 기분이 나뻐서 그냥 가려고 했다. 하지만 데보가 조난당했어도 멀쩡한 배를 예인해오면 기본으로 5천 파운드라는 큰 돈을 보상금으로 받을 수도 있고 배를 그냥 놔두고 가면 더 비난받을 것이란 충고를 하여 내키지 않는 동의를 하게 되었다.
결국 두 척의 배는 6일 후에 지브롤터에 입항했다. 그러나 데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의 관료는 메리 셀레스트 호를 즉시 억류했다.
영국은 즉시 메리 셀러스트 호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2.3 진상조사 ¶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가 배에 걸린 보험금을 노리고 한 자작극이라고 생각했다.[3] 그러나 그 자작극 혐의는 곧 풀렸다. 그렇게 자작극을 한다고 하더라도 배를 팔아서 오는 이득보다 더 돈을 못 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자작극이라도 그렇게 사람들이 귀신같이 없어질 수는 없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의 항구에 브리그즈 선장 일행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그들의 흔적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조사관 중 한 사람은 메리 셀레스트 호는 모어하우스 일행과 만나서 가볍게 술자리를 나누다가 싸움이 벌어져 살해당했으며 모어하우스 일행이 시체들을 바다에 처넣고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으로 위장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물론 모어하우스 일행은 분노했고 증거를 대보라고 반발했다. 그 어디에도 뒤엉켜 싸운 흔적이 없었거니와 모어하우스에 대한 수사에서도 돈이 그리 급하지도 않았으며 빚도 없던 게 드러났다. 결국 모어하우스 일행이 저지른 짓은 아니라고 결정났다. 하지만 모어하우스 일행을 범인으로 의심하던 조사관은 죽을때까지 그 의심을 버리지 않았기에 모어하우스 일행은 그 조사관을 죽도록 싫어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다국적으로 이뤄진 선원들이 각자 국적에 따라 다툼이 벌어져 반란이 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7명 선원들은 독일인 4명, 덴마크인 1명, 미국인 2명으로 이뤄져 있었고 가장 수가 많은 독일인들이 의심받았지만 조사결과 선원들의 반란 가능성은 역시 없었다. 발견당시 도끼 자국과 더럽혀진 칼, 약간의 혈흔이 발견되었지만 혈흔은 정말 약간이라 반란이 있었다고 보기엔 힘든 수준이었고, 특히 내부가 매우 잘 정돈되어있어, 그 어떤 반란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몇 달간의 수사 끝에 결론이 나왔다. 불명. 즉 "도저히 알 수 없음" 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생긴 선상 불명 사고였다. 한편 선주 측은 보험사를 통하여 구조비로 5천 파운드를 모어하우스 선장 일행에게 지불했다.
3 사건 이후 ¶
그 이후 메리 셀러스트 호에 탔던 선장과 선원, 선장의 가족들은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J.H.윈체스터는 겁에 질려 즉시 배를 처분했고 그 이후에도 메리 셀러스트 호는 여러 선주들의 손을 거쳤지만 이후에도 사고는 끊이질 않았다. 13년동안 17명의 선주가 거쳐갔고 배는 초라한 꼴로 변해버렸다.
메리 셀러스트 호의 마지막 선장이었던 길먼.C.파커 선장은 이 배를 굴려서 도저히 이득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파커 선장은 이 저주받은 배를 보험 사기의 희생물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메리 셀레스트 호의 저주는 아직 계속되었으니... 파커 선장이 아무리 배를 암초에 내몰아도 메리 셀레스트 호는 침몰할줄을 몰랐다. 애매하게 부서져서 항해만 곤란하게 되어버린 메리 셀레스트 호에 이번에는 불을 질러 보았지만 타고 남은 잔해마저도 꿋꿋하게 물에 떠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이 녀석 이전에도 유령선이 될지언정 침몰하지는 않았잖아, 안될거야, 아마...
결국 파커 선장은 메리 셀러스트 호를 가라앉히는 것을 포기하고 있지도 않은 화물을 추가해서 보험을 신청했는데 그만 덜미가 잡혀버렸다. 망했어요.[4] 하지만 파커 선장의 재판은 시행되지 않았는데 메리 셀레스트의 과거의 불운한 기록들을 감안하여 관계자들을 풀어줬기 때문이었다. 그 후, 파커 선장은는 재판 이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그의 부하 한 명은 미쳐버렸고 또 한 사람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후 메리 셀레스트 호는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고, 1923년 바다에서 스스로 침몰할 수 있도록 대양 한가운데에 버려졌다. 아마 지금까지도 바다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이 배를 소유해서 이익을 얻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쯤되면 정말 저주받은 배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4 가설 ¶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다. 하나는 사고설인데, 메리 셀러스트 호 선장의 딸은 돌고래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메리 셀러스트 호에도 선장의 딸이 돌고래를 구경할 수 있는 또다른 갑판을 배의 외곽에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가설로 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위에서 돌고래를 구경하다가 갑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서지면서 전부 사망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도 구멍이 있는게 아무리 돌고래가 신기하다고 배의 모든 인원이 갑판에서 구경을 할만큼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의 반론이다. 실제로 항해 중에는 최소 배를 항해할 항해사나 선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게 기본상식이라고 한다.
또다른 가설로 자메이카에서 1916년 어느 선원이 목격한 일화인데 자신이 메리 셀러스트 호의 선원이란 노인을 어느 술집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메리 셀러스트 호는 항해하던 어느날 표류하던 어느 배를 발견했는데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은 병으로 다 죽어있었고 배 안에는 금괴가 가득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다들 그 금괴를 나눠갖고자 메리 셀레스트 호에서 내렸고, 그 배를 타고 가고자 메리 셀레스트의 화물인 알콜을 뜯어 소독했다는 것이었다. 실제 메리 셀레스트 호의 화물인 알콜중 9통은 뜯겨져서 내용물이 비어있었다. 하지만 금괴가 가득 실린 배에 소독만 하고 먹을 것이나 물은 죄다 놔두고 갔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는데 그 노인은 그 배에 먹을 게 통조림으로 있었고 물도 밀봉되어서 한동안 견딜 수 있었기에 차라리 메리 셀레스트를 포기하고 다 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던 선원은 웃으며 그럼 40년 넘게 당신은 뭘했냐고 하자 알 것 없다며 그냥 나갔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비어있는 9개의 드럼통과 관련된 또다른 설명으로 화물인 알코올이 폭발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붉은 오크로 만든 드럼통은 흰 오크로 만든 드럼통보다 액체를 쉽게 머금고는 하는데, 메리 셀러스트에서는 알코올 원액을 머금어 버렸다는 것이다. 드럼통을 유지하는 철제 밴드가 서로 부딪히면서 순간적인 불꽃을 만들어내어 이 알코올을 점화시키면서 시밤쾅! 했다는 논리[5]. 이 굉음을 듣고 브리그스 선장이 아, 배가 폭발하는구나!하고 사람들 대피시켰으나, 메리 셀러스트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떠나갔다는 슬픈 이야기. 나는 전설따윈 믿지 않아.
가장 신빙성있는 가설로는 당시 메리 셀러스트 호의 승무원들은 항해 중 돌풍과 같은 천재지변을 만나 적화하고 있던 알코올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통속에 가스가 발생해 압력으로 말미암아 폭발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구명보트로 철수하지만, 구명보트와 선박을 줄로 연결하는 것을 잊어 (혹은 돌풍으로 그럴 틈이 없어) 그만 비바람에 삼켜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배의 상황이나 구명정이 함께 사라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가설이 가장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밖에 1953년 북중미 어느 무인도에서 표류하던 프랑스 국적 선원들이 섬에서 해골을 발견했는데 해골의 헐거워진 옷에 꽂힌 이름표에 '벤자민 브리그즈'라는 이름이 쓰여서 또 화제가 된 바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진짜인지는 누구도 확증할 수 없었고 진짜라고 해도 그 벤자민 브리그즈인지 알 수 없다.
식량으로 실었던 빵에 핀 곰팡이가 승객들의 환각을 유발시켰다는 설, 해적들, 특히 바르바리 해적들이 그들을 습격했다는 설[6]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UFO의 외계인에 의해서 납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먹을 것이나 물을 죄다 두고 사라졌다는 점에서 외계인이 납치한게 아니냐는 것이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SF소설에 불과한 이야기다.
5 관련 작품 ¶
코난 도일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을 쓴 바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온 설정들을 진짜 사건에도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항해일지에 마지막으로 "아내 써니가..."라고 적혀있다든지, 주방에는 음식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세면실에는 면도한 수염이 붙어있던 면도칼이 그대로 있다든지.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 소설 속의 허구들로 실제 사건에서는 전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1978년에 만들어진 영국 괴수영화 워로즈 오브 아틀란티스[7]에선 1890년대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메리 셀러스트 호 승무원들이 바다 밑에 있는 아틀란티스 제국에 납치되어 노예로 일하는게 나온다.
영국의 유명 SF 드라마인 닥터후에서 1965년 6월 5일 방영된 "Flight Through Eternity"에서는 닥터 일행을 쫓아온 달렉들을 본 선원들이 겁을 먹고 바다로 뛰어든 것으로 나온다.
소년탐정 김전일 소설판 2권인 유령선 살인사건이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을 배경에 깔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6 서프라이즈 방영 ¶
2012년 12월 23일 방영분에도 관련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여기선 '보험사기'와 위의 '가설'들을 싸그리 씹어드시고 억울하게 죽은 흑인 노예의 '저주'가저주할테다 이 배에 저주를 걸어 사고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서 코난 도일이 '콘힐'이라는 잡지에 '제이 하버쿡 젭슨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메리 셀레스트호의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했을때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을 사실로 믿어 백인을 증오하던 흑인이 배를 탈취한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프라이즈는 2002년 9월 15일 역시 관련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방영한 내용의 위의 내용과 완전히 다른데 당시 방영내용은 메리 셀러스트 호에는 한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고 한다. 위의 사고설을 어느정도 차용하고 있는데 조금 다르게 나왔다. 당시 방영내용은 역시 딸을 위해 전용 갑판을 만들었었다. 그런데 선원 두명이 수영 시합을 벌이는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상어떼가 나타났고 당황한 사람들이 갑판에 모였다가 부서져 떨어져서 상어밥이 되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살아남아 죽기 전에 그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8]
서프라이즈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같은 사안인데도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원래 이런 것으로 유명하니 과신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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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에도 뉴욕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는 회사의 창업주다.
[2] 2개의 마스트와 길이 103피트, 폭 25피트, 288톤급에 다다르는 대형 선박이 되었다.
[3] 모어하우스 선장과 브리그즈 선장은 서로 친한 사이였고 출항 전날 뉴욕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4] 당시 외양에서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면 교수형이었다.
[5] 실험에 의하면 에탄올은 워낙 낮은 온도에서도 불이 붙기 때문에 드럼통을 전혀 그슬리지 않고도 폭발할 수 있다고 한다(Wiese, 2005). 영문위키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Mary_Celeste
[6] 그러나 바르바리 해적 자체는 19세기 초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대대적인 공세와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으로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다가 위에서 설명한것처럼 선박 상태가 상당히 깨끗한 편이라 신빙성은 낮다.
[7] 한국에서는 환상의 섬 아트란티스이란 제목으로 비디오가 나왔다. 배우들 연기나 줄거린 허접하지만 수공업으로 만든 괴수들이 상당하며 무엇보다 괴수들이 여러 종류로 많이 나오기에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는 명작으로 호평받는 작품이다.
[8] 이 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나온 세계상식백과라는 책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 책에서는 이 설이 아벨 포스디크라는 알려지지 않은 생존자의 증언이라고 한다. 이 설은 책에 따르면 1913년에 런던에서 제기되었다고 한다. 앞에 나온 또 다른 생존자의 증언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다만 책에서는 증언에 오류가 있음을 들며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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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요한’은 지난 30년간 전 세계 불치
병 환자들을 치료해왔다. 그는 과거 유명
했던 의사와 성자 등 30명 영혼들의 힘
을 빌려 치료한다고 한다.
그는 수술할 때 영혼 30명의 힘을 빌린다고 한다. 과거에 살았던
유명한 의사들. 솔로몬 왕 등 현자들의 영혼을 수술 직전
에 자기의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그 순간 몸이 갑자기 틀어지
고, 심지어 눈동자 색깔까지 변한기도 한다.
“수술 중에 저는 완전히 무의식 상태가 됩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
면 제가 누구에게 무슨 수술을 했는지조차 모름니다,”
그는 의사 면허증도 없이 환자들을 치료한 혐의로 투옥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역경이 있어도 소명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건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스러운 영혼들이 하는 일이죠,
전 그져 몸만 빌려주는 거예요.”
돌파이가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는다.
“사람들을 1~2년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30년 이상
속일 수는 없어요.”
미국의ABC-TV는 환자들이 그에게 치료받는 과정을 정밀 취재
했다. 한 환자는 뇌종양이 너무 커져서 미국 병원에서는 수술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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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렌드는 그 세계에 대해 잠시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덴고의 벗은 가슴 위에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자기, 영어의 lunatic하고 insane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 그녀가 물었다.
"둘 다 정신에 이상을 일으킨다는 형용사지. 자세한 차이까지는 모르겠어."
"insane은 아마 천성적으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야. 그에 비해 lunatic은 달에 의해, 즉 luna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빼앗긴 것. 19세기의 영국에서는 lunatic이라고 판정받은 사람은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그 죄를 한 등급 감해줬어. 그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다 달빛에 홀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법률이 실제로 존재했어. 즉 달이 인간의 정신을 어긋나게 한다는 걸 법률적으로도 인정했던 거야."
-- 출처: 무라카미 하루키 <1Q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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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이봉원이 사후세계 경험담을 밝혀 화제다.
이봉원은 지난 27일 방송된 KBS2 ‘세대공감 토요일’에 출연해 사후세계를 경험 해 본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이날 방송에서 이봉원은 “이건 꿈도 아니고 잠도 아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내가 어딘가를 가고 있었다. 산속을 걸어다녔는데 주변엔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 틈에서 내 동생을 만났다. 사실 내 동생은 몇 년 전에 죽었다”고 밝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이봉원은 동생에게 “너 여기 왜 있어 너 죽었잖아”라고 물었더니 “형은 안죽었어? 죽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내가 왜 죽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전했다.
이봉원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돌아왔다. 꿈이 아니었다. 잠깐 혼이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봉원 사후세계 경험담을 접한 네티즌들은 “이봉원 사후세계 경험, 그냥 꿈 아닐까”, “이봉원 사후 세계 경험, 동생이 너무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봉원 사후세계 경험, 일단 섬뜩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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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귀신출몰지역
1) 미도로연못(Mizoro-ga-Ike)
(미도로 연못의 모습)
사쿄구의 북쪽에 있는 작은 늪지대로 고대부터 원생림에 둘러싸여 원초의 쿄토의 생태계가 보존되고 있는데
이런 좋은 면이 있는 모습안에 어두운 사연이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비가 내리는 밤, 1대의 택시가 병원 전부터 한 명의 여자를 태워 미죠로가이케(Mizoro-ga-Ike) 목표로 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항상 입을 다물어, 단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운전기사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려려니 하고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미죠로가이케에 가까워졌을 때, 문득 백미러를 봤더니, 여자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닌가…. 놀란 운전기사는 경찰에 통보해 대대적인 수색을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후일 알았지만, 그 밤, 쿄토대 병원에서 미죠로가이케 주변에 살고 있던 여자가 죽었다고 했고 운전기사는 뭔가에 시달리듯 괴로워 하다 얼마 못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나자 미죠로가이케는 신문·주간지에도 다루어져 일본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 #46124;고
택시 업계에서는 '밤에 미죠로가이케에 관련되는 여성 손님을 태우지 말아라' 라는 주의마저 냈다고 합니다.
(- 택시업계 사장까지 태우지 말라할 정도라니..)
귀중한 생물의 생식지로서 천연기념물에도 지정되어 있는 미죠로가이케.
그러나 그 표의 얼굴과는 별도로, 그 연못은 헤이안 시대보다 한층 더 옛부터, 사람들에게 마의 입구로서 두려워 해 온 장소라고 기록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미죠로가이케에 관련되는 이상한 소문을 들면 끝이 없다고 합니다.
·일찌기 결핵이 불치의 병이었을 무렵, 많은 결핵환자가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투신을 하다록 강요를 당해 죽었고..
·수천년에 걸쳐 형성된 깊은 진흙은, 빠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기에. 그때의 시신들이이 아직도 깊은 진흙의 바닥에서 자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6년경에 대형 버스가 사고로 미도로 연못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 했는데 나중 버스는 발견 & #46124;지만 시신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사해 보니 사고 당시 버스의 탑승자는 운전자를 포함 해서 3명 이였는데 그들의 시신은 끝내 발견 되지 않았습니다..
2) 기요타키 터널(Kiyotaki-Tunnel)
(기요타기 터널의 모습..뭔가가 보이는것 같지 않나요)
쿄토의 니시하타, 사가노의 산중엔 낮이라도 사람을 접근하지 않는, 독특하고 이상한 분위기를 감돌게 하고 있는 터널이 있습니다.
터널의 폭은 가늘고, 차1대가 겨우 통과할수 있는 넓이 때문에 이 터널의 앞에 신호가 설치되고 일방통행이 되어 있습니다.
심령 스포트로서의 조건을 갖춘 이 터널에는 몇개의 기분 나쁜 소문이 있습니다.
·터널의 신호가 파랑이었던 경우, 그대로 터널을 통과하면, 여성의 유령을 만났다고 한다.
·이 터널 공사는 수굴였기 때문에, 몇 사람이나의 작업원이 사망했고 그 작업원들의 원한이기 때문에인가, 사고가 다발하고 있다.
·갈 때와 돌아올 때로, 터널의 거리가 다르다.
·터널을 차로 달리고 있으면, 여성의 유령이 차의 보닛에 떨어져 내린다.
이 터널을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주행한 가헤에란 일본인의 말에 의하면 '20대 후반의 여성 귀신이 갑자기 차위에 떨어졌는데,
갑자기 차가 제멋대로 움직였다고 조종간이 말을 안들었고 무서웠지만 나는 꾹 참고 정말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다며,
저곳은 터널이 아니라 저주의 공간이었다.' 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기요타키 터널 주변에게는 아직 다른 스포트가 있는데, 그 하나가 '아래로 향한 밀러' 입니다.
그것은 터널옆의 길의 고개에 있지만, 이상하게 아래쪽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밀러를 보았을 때에
거기에 비추어진 머리카락의 긴 여성을 봐 버리면 반드시 죽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사고를 당해, 그리고 그 바로 밑을 향한 밀러가 장착되었다',
'(고개의 정상이므로) 반대로부터 올라 오는 차를 확인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등의 설이 있지만,
키요타키 터널처럼 아래로 된 커브밀러를 만든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3) 파라오의 저주
1922년 11월 26일,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손에 든 촛불로 투탕카멘의 무덤 안을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 보았다.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안은 온통 황금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카터와 그의 후원자인 카나본 경의 위대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그 무덤 안의 엄청난 보물과 황금 마스크 그리고 황금 관. 모두 값으로는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덤 안의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이런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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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저주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
투탕카멘은 이크나톤 왕의 후계자였다. 이크나톤 왕은 새로운 곳에 수도를 건설하여 이크타톤이라고 명명하였다. 왕은 유일신을 숭배했는데, 신하들은 이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이크나톤이 젊은 나이로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사위라는 설도 있음) 투탕카멘에게 넘겨졌다. 그는 종교를 원래대로 복원하고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겼다. 그는 20살이 채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위 높은 승려 중에 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투탕카멘의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미망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는 4년도 못 되어 평민출신의 호렘헵이라는 장군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 이집트의 왕이 된 호렘헵은 독재자로 변했다. 그는 아크나톤과 투탕카멘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려 했다. 또 그는 태양신을 모신 대사원의 돌을 운반해 테베의 피라미드 축조에 이용했다. 게다가 그는 아이왕과 투탕카멘 시대의 신하들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파헤치지 않았다. 호렘헵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손대지 않고 남긴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은 카나본 경은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그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파라오의 저주가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본 경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 노파 점쟁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노파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무서운 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본 경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 발굴에 착수하게 된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이듬해인 1923년 4월 5일,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던 카나본 경은 원인 불명의 죽음을 맞는다. 무덤에 손을 댄 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조사한 의사들은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합병증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뺨에 물린 자국과 투탕카멘 미이라의 왼쪽 뺨에 벌레 물린 자국이 일치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카나본 경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본 경의 개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의 죽음 이후 1929년까지 무덤의 발굴에 관여하였던 21명이 생을 마감했다. 1923년 9월 카나본 경의 조카 오베리 허버트가 갑자기 죽음을 당했다.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이집트의 방사선 사진기자 투탕카멘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 아티볼트 더글라스 라이드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국의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무덤에 들어갔던 그 다음날 아침 고열을 앓다가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무덤의 현실 벽을 마지막으로 깨뜨린 카터의 조수였던 미국의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는 어느날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다. 이집트인 알리 케멜 화미 베이는 무덤을 본 후 자신의 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조지 방디트 역시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사망했으며, 카나본 경의 부인도 벌레에 물려서 1929년에 사망했다. 카터의 비서 리처드 베텔은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그의 아버지 웨스트베리 경은 무덤을 보지는 않았지만 투탕카멘의 유물을 몇 가지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사망한 후 곧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를 운반하던 영구차에 8세의 아이가 치여 죽기도 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검사한 두 의사 중 한 사람인 더글라스 데리 교수는 1925년에 죽었다. 또 한 사람의 의사인 앨프리드 루카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이집트 학자인 라플 교수와 화이트 교수도 의문의 자살을 하고 말았다. 카나본 경의 비서와 발굴 당시 초청 인사였던 사람들도 모두 죽어갔다. 모두 하나 같이 원인 불명의 병이나 사고로 죽어갔다. 과연 편안히 잠든 어린 파라오를 깨워 그의 저주가 실현된 것인가?
카이로 박물관의 고대 유물 부분의 책임자 네레트 박사는 '저주'라는 말을 일축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인생의 전부를 파라오의 묘와 미라 연구에 바쳤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저주가 근거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레트 박사는 그 말을 한 지 4주일 후에 폐허탈로 급사했다. 1969년,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대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애덤슨이 영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은 한 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어 본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또한 그 사고 이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부인이 죽었고 아들도 등뼈를 다쳤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가정에 닥친 모든 불행이 파라오의 저주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1972년 투탕카멘의 유물을 영국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송 작업을 지휘하던 가멜 메레즈도 파라오의 어리석은 전설을 믿지 않는다고 공언한 후 그 날 밤 갑자기 사망하였다. 유물들을 영국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6명은 그 후 5년 사이에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며 지금까지 약 30여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발굴단의 사인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3000여 년 동안 벽에 붙어서 기생하던 곰팡이 혹은 박테리아가 공기를 통해 사람의 폐로 들어 왔기 때문이라던가 무덤 안의 강력한 독이 피부에 스며들어 죽었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완벽하게 뒷받침하지 못했다. 어떤 학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방사선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묘지 바닥이 우라늄을 포함한 돌이거나 아니면 방사선을 내는 바위로 무덤의 끝손질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 역시 문제점이 있었다.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에 관련된 1500여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어 자연사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조차 파라오의 저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증거로는 무덤의 개봉 당사자인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하였다.
사실 파라오의 저주가 존재한다면 제일 먼저 사망했어야 할 사람이 바로 카터였다. 또한 카터와 카나본 경과 함게 무덤을 열거나 유물을 옮겼던 사람들도 평균 26년 후에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언론계와 카나본 경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은 발굴 자금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런던의 신문인 타임즈지를 상대로 발굴에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제공한다는 약속을 하고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는 엄청난 특종을 눈 앞에 두고도 다른 신문사를 거쳐야 기사를 쓸 수 있었던 전 세계 언론의 거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카나본 경이 일찍 죽게 되자 감정이 좋지 않던 언론에 의해 '저주'는 과대포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파라오의 저주는 우연의 일치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보다. 파라오의 저주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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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메다르 교회의 기적
http://en.wikipedia.org/wiki/Convulsionnaires_of_Saint-M%C3%A9dard
1700년 대에 파리의 성 메다르라는 교회에서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다. 그 기적은 파리의 부신부 프랑수아 드 파리의 매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프랑수아 드 파리 부신부는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을 치유하는 힘을 가진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의 관이 성 메다르 교회의 무덤 속에 안치되자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꽃을 던졌다. 그런데 오른발의 근육이 힘을 못쓰는 병에 걸린 어린아이가 관 위로 넘어질 뻔하였다. 놀란 사람들이 아이를 부축해서 교회의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 아이가 근육이 전혀 없던 오른발은 왼발처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절름발이, 문둥병, 곰사둥이, 장님 등이 차례로 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이 기적을 전혀 믿지 않던 '몽제룽'이라는 판사는 그의 친구 '페주'와 함께 성 메다르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 방문 이후 그는 그 기적을 부정하기는 커녕 투옥조차 감수하게 된 것이다. 성 메다르 교회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믿기 어려운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는 여자들도 있고, 남자들에게 참혹하게 구타당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세 정도의 소녀가, 인간의 오물을 먹는 장면이었다. 또 십자가에 박혀도 피가 나지 않는 등,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이 그곳에서는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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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한 부부가 밤마다 출몰하는 유령들이 무서워 동화 속의 집 같은 19세기풍 저택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고.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은 잉글랜드 체셔주(州) 프로드셤에 사는 프랑스 음악가 장 마르크 마리올(64)과 샤를롯 마리올(53)이 불운의 주인공이라고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들은 밤마다 집안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공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형체가 떠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폐쇄회로 감시 카메라에도 잡혔다.
식겁한 부부는 집에서 나와 인근 호텔에 머물며 지금까지 숙박비로 3000파운드(약 550만 원)나 썼다.
현재 퇴마사에게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라고.
부부가 지난해 4월 프로드셤 저택으로 이사한 지 4주 후 이처럼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침대 시트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고.
그러니 수개월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낸 것은 당연지사. 너무 무서워 한밤중에 집 밖으로 뛰쳐나온 일도 비일비재했다.
마리올 부부가 프로드셤 저택을 꾸미는 데 쓴 돈만 1만8000파운드. 이후 호텔 방을 전전하느라 남은 돈이 별로 없는 실정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 출신인 샤를롯은 어느날 욕실에서 세수하다 갑자기 창과 문이 닫혀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끔찍한 일도 경험했다.
바람 한 점 없었던 그날 샤워 커튼이 절로 열렸다 닫혔다 했다고.
남편 장 마르크는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목 뒤에서 누군가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고 말했다.
어느날 밤 부부가 잠자리에 든 뒤 공중 부양하는 침대 시트를 보고 기겁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에서 45년 간 살아온 장 마르크는 “잠 한 번 편히 자보는 게 소원”이라며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프랑스로 떠날 생각”이라고.
과학철학
美 연구진 "과다섭취로 매년 165만명 사망" vs "적으면 오히려 유해"
(워싱턴 AFP·뉴욕=연합뉴스) 문정식 기자 박성제 특파원 = 하루 적당 소금섭취량이 얼마인지를 두고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과다 섭취하면 심장질환 위험이 높다는 게 대세인 가운데 하루 3.0그램(g) 이하를 섭취할 경우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13일(현지시간) 미국 하버드 대학과 터프츠 대학 연구원들이 뉴잉글랜드 저널을 통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10년 현재 전세계의 하루 평균 소금 섭취량은 3.95g으로 세계보건기구(WHO) 권장량 2g의 약 두 배에 달한다.
이번 연구는 세계 66개국, 205건의 소금 섭취량을 조사한 결과를 취합해 분석한 것이다.
소금 섭취량은 모든 국가에서 권장량을 상회했으나 지역별로 편차가 있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섭취량은 하루 2.18g으로 가장 낮았고 중앙아시아는 5.51g으로 가장 높았다.
미국인의 섭취량은 정부가 권장하는 2.3g을 웃돈 3.6g이었다.
두 대학 연구원들은 보고서에서 소금의 과다섭취는 심장질환의 주요인인 고혈압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소금 과다섭취가 전세계적으로 매년 165만명이 심장질환에 의해 사망하는 것과 연관돼 있는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연구를 주도한 터프츠 대학 프리드먼 영양학·정책대학원의 다리우시 모자파리안 교수는 "미국과 전세계에서 소금 섭취를 줄이는 강력한 정책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앨라배마 대학의 수전 오파릴 교수는 같은 저널에 실은 사설을 통해 이 연구가 "고급 데이터의 부족에 의한 수많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며 자료 분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소금을 적게 섭취하면 인체에 더 해로울 수 있다는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17개국에서 10만명 이상을 3.7년동안 추적한 결과 하루에 3.0g 이하를 섭취한 사람들이 이 기간에 사망하거나 심장마비, 심장발작 등을 겪은 비율이 3.0∼6.0g을 섭취한 사람들보다 27% 높다는 것이다.
3.0g 이하를 섭취한 사람 가운데 4.3%가 사망하거나 심장질환에 시달린 데 비해 3.0∼6.0g은 3.1%, 6.0∼7.0g은 3.2%, 7.0g이상은 3.3%로 각각 나타났다.
이 조사결과는 소금섭취량과 질병과의 인과관계를 밝히지 못하고 연관성만 보여주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적당한 소금섭취량이 얼마인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파릴 교수는 "소금 섭취량을 줄이는 것이 해롭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라고 말했다.
미국 의학연구소(IOM)도 지난해 소금 과다섭취가 심장질환 위험을 높인다는 다수의 증거가 있지만 소금 섭취량을 미국 정부가 권장하는 수준으로 줄인다고 해서 심장질환 위험을 낮춘다고 확언할 연구결과는 충분치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뉴욕에 있는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의 발렌틴 푸스터 진료부장은 미국인의 소금 섭취량 가운데 약 50%는 빵, 가공육, 피자, 수프, 샌드위치, 스낵, 치즈를 먹는데서 비롯된다며 가공식품을 치우는 것이 건강개선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jsmoon@yna.co.kr
su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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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조작된다.
또한 훈요십조엔 왕위의 형제상속을 정당화 하려는 조항이있는데 문종을 전후로 형제상속이
성행하고 있다. 그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던 신라계승론이 활발할때 위작되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렇듯 훈요십조는 백제계 축출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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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건강검진에서 의대 교수에게서 암이 발견되는 비율이 일반인보다 3배가량 높게 나온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에서 최근 7년간 검진을 받은 서울대 의대 교수는 314명. 그중 10명에게서 암이 발견돼 암 진단율은 3.18%였다. 같은 기간, 같은 검사 항목으로 시행한 일반인 검진에서 암 진단율은 0.98~1.09%였다.
확률상으로 검진센터에 일반인 100명이 오면 그중 한 명에게서 암이 발견되는데 의대 교수 100명이 오면 3명에게서 암이 나오는 셈이다. '서울대 의대 교수 암'은 갑상선암·위암·폐암·직장암 등이었다.
사립대 S의대의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 15년 동안 S대병원 검진센터를 이용한 의대 교수는 709명. 이중 암이 발견된 교수는 26명으로 암 진단율은 3.67%이다. 같은 기간 일반인의 암 진단율은 평균 1%이었다.
이처럼 의대 교수들에게 암 발생이 많은 이유로는 우선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가 꼽힌다. 진료, 수술, 연구 논문 작성, 의대생 수업, 학회 활동 등으로 하루 일정이 빡빡하다. 정기적인 운동 등 세심한 건강관리에 나서기 어려운 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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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승리자들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을유문화사
701쪽, 2만3000원
독일 시사주간지 슈테른의 주필을 지낸 저자 볼프 슈나이더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6년 전 나왔던 『위대한 패배자』(을유문화사) 때문인데, 그 새 21쇄를 찍었으니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 무슨 매력 때문일까? 최후의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 대한 은근한 반작용이 아닐까? 볼프에 따르면 “그나마 세상이 참을만한 건 위대했으나 패배했던 이들의 주는 울림 때문이다.”
1876년 전화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에 5년 앞서 특허를 땄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는 ‘명성을 도둑질 당한’ 케이스이고,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에 작품 한 점 못 팔았던 위대한 패배자였다는 식이다.
『만들어진 승리자들』은 독일에서 『위대한 패배자』보다 먼저 선보였는데, 우상 파괴의 언어로 가득하다. 우리 시대 문장은 예외 없이 드라이한데, 그는 특유의 현란한 수사(修辭)를 동원해 역사 인물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노출한다. 풍부한 인문 교양과 박람강기(博覽强記)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책의 메시지는 “백과사전 인물정보를 믿지 말라”로 요약된다. 그들은 “명성의 로또에 당첨된 극소수”(659쪽)일 뿐인데, 막상 혐오스러운 유형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테면 작곡가 J S 바흐는 인색한데다가 성격까지 못 됐다. 분류컨대 “나쁜 이웃”(15쪽)이라는 게 저자의 독설이다. 바흐뿐일까?
역사 속의 승리자들은 유리한 환경에 태어나는 등 단지 재수가 좋았거나, 자기 포장 능력이 뛰어난 냉혹한(漢)일 가능성도 크다. 작곡가 모차르트의 경우 집안의 17번째 아이로 태어났는데, 우리시대라면 태어날 기회조차 잡지 못했으리라. 자기포장의 달인은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그 중 나폴레옹의 경우 유배지에서 『세인트헬레나 회상』을 펴냈는데 자신을 프랑스대혁명 이념의 집행자이자, 휴머니즘의 사도인양 그렸다.
가히 “왜곡이 하늘을 찔렀으나, 사람들은 그걸 믿는다”(557쪽). 어떤 인물들은 치부를 털어놓는 절묘한 방식으로 명성을 얻곤 하는데, 대표선수 감은 『에밀』의 저자인 루소가 그렇다. 그는『참회록』에서 한밤에 성기를 꺼낸 채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수음(手淫) 일화까지 털어놓는 ‘전략적 솔직함’을 선보였다. 철학자 니체의 천재성에도 한번은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니체는 스무 살 무렵 쾰른에서 매독에 걸렸다. 생애 만년 이후 매독은 진행성 마비단계로 발전했는데, 이게 특유의 광기를 낳았다. 오해 마시라. 볼프의 역사인물 뒤집기는 반(反)영웅의 허무주의로 빠지지는 않는다. 니체의 광기는 정상인에게 찾기 힘든 다이아몬드 같은 투명한 정신으로 발전해 최고도의 명료함과 도취의 철학을 낳았다는 평가가 곁들여진다.
무수한 사람과 일화가 등장하기 때문에 ‘뒤집어본 서구문화사’로 읽힌다. 그럼 이 책의 노림수는 무얼까. 허명이거나 우연일 수도 있는 역사적 위인의 무거운 관(棺)을 당신의 머리에 떠메고 다니지 말라는 건 아닐까. 네 스스로가 위대해지고 주어진 삶의 승리자내지 주인공이 되라는 노회한 권고다. 그래서 『만들어진 승리자들』은 고급반용 읽을거리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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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칸트주의 -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구분 / 토론보다는 타고르 시낭송이 철학을 잘 표현한다 생각한 비트켄슈타인
http://www1.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q=&p=&masterno=189245&contentno=730932
현대의 철학사상은 이미 19세기 중엽의 헤겔 철학에 대한 반동에서 서서히 태동하였고, 1930년대를 전후하여 그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었다.
신칸트주의
낭만적 형이상학의 사변(思辨)이 유행하고 있을 무렵, 비판적 사고의 가치를 되찾기 위하여 ‘칸트로 돌아가자’는 구호와 함께 일어난(1865년경) 신칸트주의는 I.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토대에서 인식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서남독일학파와 마부르크학파로 나뉘어 발전한 신칸트주의는 모두 칸트의 사상을 출발점으로 한다. 서남독일학파의 W.빈델반트는 철학을 보편타당한 가치에 관한 비판적 과학이라고 하여 자연과학적인 관찰방식과 역사적인 관찰방식을 대립시키고 자연과학이 법칙설정적인 데 비하여 정신과학은 개성 기술적(個性記述的)이라고 하면서 정신과학의 의미를 더 중요시하였다. H.리케르트도 문화업적에 실현된 가치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구분을 제창하였다. 이들 사상은 현대의 과학방법론에 대한 중요한 이론근거를 제시하였다.
마부르크학파의 대표자들은 코엔, P.G.나토르프, 카시러 등이며 칸트의 인식이론적인 관념론을 더 심화시켰다. 이들은 칸트가 인식할 수 없다고 한 물자체(物自體)를 부정하며 사물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카시러는 인간의 정신적인 작용에는 인식하는 것 외에 언어와 신화적인 사고가 우리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고 말하여 언어와 문화연구에 대한 현대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 신칸트주의 철학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공격과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특히 H.라이헨바흐, 카르납, 빈학단의 M.슐리크와 O.노이라트는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지식론을 발전시켜 칸트의 선행주의를 반박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식론은 경험적인 인식이론과 수학에서 개발된 논리학을 기초로 삼는다. 이같은 대립은 아직도 현대철학의 중요한 논쟁대상이 되고 있다.
http://www.google.com/imgres?imgurl=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6/23/00910000312005062328-1.jpg&imgrefurl=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5/06/009100003200506232007001.html&usg=__oyYeNPbEveE73awHPPlUOQdvJw4=&h=457&w=260&sz=25&hl=ko&start=18&zoom=1&um=1&itbs=1&tbnid=uEkdlz9sLPO3QM:&tbnh=128&tbnw=73&prev=/images%3Fq%3D%25EC%258A%25A4%25EC%258A%25B9%25EA%25B3%25BC%2B%25EC%25A0%259C%25EC%259E%2590%26um%3D1%26hl%3Dko%26safe%3Doff%26tbs%3Disch:1&ei=32VtTdqrGpDQcZiMocQF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가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
20세기 초 철학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뉴턴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그리고 프레게와 러셀 등에 의해 발전된 새로운 기호논리학과 힐버트 등에 의해 진행된 수학기초론 논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 종합의 대표적 지식이었던 뉴턴 역학이 참이 아님이 밝혀지자 신칸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상대성 이론과 지식 일반의 조건을 새롭게 규정지으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 과정에 새롭게 등장한 기호논리적 분석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비트겐슈타인과 슐릭, 카르납 등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시도를 20세기의 중요한 철학적 흐름으로 완성시킨 철학자들이었다.
유럽 큰 부자 집안의 아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26일 빈(비엔나)에서 자수성가한 유대계 철강사업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당시 유럽을 통틀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로 음악을 비롯한 예술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집안이었다. 브람스, 말러, 쇤베르크, 요제프 요하힘, 파블로 카잘스, 부르노 발터 등 당시 음악계의 최고 유명인사들이 자주 비트겐슈타인의 집을 드나들었고 집안의 아이들은 모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는 대신 음악을 하길 원하다 결국에는 자살로 비극적 삶을 마감한 맏형 한스와 1차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뒤 라벨로부터 왼손만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헌정받아 연주한 파울이 있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자신 철학의 많은 부분은 언어를 통해 ‘말하는’ 쪽보다는 음악이나 건축과 같은 다른 예술장르를 통해 ‘보이는’ 쪽이 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1차대전 참호에서 ‘논리철학 논고’ 초안
“언어란 사실의 논리적 구조를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해주는 매체”
비트겐슈타인은 자식의 교육에 매우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로부터 교육받았고, 그 뒤에는 히틀러가 퇴학당한 린츠의 레알슐레(실업학교)에 입학하여 공학을 공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공학교육은 물리학에 대한 탄탄한 기초교육을 강조했고, 덕분에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지식의 구조와 성격에 대해 착실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볼츠만에게 가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볼츠만의 죽음으로 1908년 영국 맨체스터로 가서 항공공학을 공부하게 된다. 이즈음에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시작된, 그 당시로는 최첨단의 기호논리학과 수학기초론 논의를 접하고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1911년 예나로 프레게를 찾아갔지만 이 당시 이미 충분히 독창적이었던 비트겐슈타인과 노년의 대학자는 서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러셀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했고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해 캠브리지로 러셀을 찾아가 연구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러셀의 회고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어느날 강의가 끝난 뒤 찾아와 자신이 바보가 아닌지 알려달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왜 그러냐는 반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에 러셀은 그에게 방학동안 철학적 에세이를 한 편 써 오도록 주문했고, 비트겐슈타인이 제출한 에세이의 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그에게 철학을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비트겐슈타인이 현대 영미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러셀을 포함한 캠브리지의 학자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은 너무도 분명했고 러셀은 자신이 추구하던 철학적 작업을 충실하게, 자신이 다하지 못한 바로 그 지점에서 더 진전시키려는 비트겐슈타인에 매혹당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비트겐슈타인의 연구 결과가 결집된 <논리철학 논고>는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참호 속에서 적은 노트에 기초하여 1922년 출간되었고, 즉시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논의대상이 됐다. 당시 빈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던 일군의 철학자들도 <논리철학 논고>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는데, 1927년에 잠시 빈에 머물던 비트겐슈타인이 이 빈 모임(비엔나 서클)에 참석하여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과 후일 논리실증주의자로 알려질 비엔나 서클 학자들 사이의 토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슐릭과 카르납은 지속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번에도 자신의 견해가 곡해되고 있다고 불편해했고 철학적 토론보다는 타고르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검증 할수 없는 주장은 배제
논리적 구조를 경험만큼 강조
토론보다 타고르 시 낭송 즐겨
<논리철학 논고>는 90쪽이 약간 넘는 얇은 책으로, 장 구별도 없이 2.1.4 식으로 번호가 매겨진 잠언투의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제시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핵심은 흔히 언어에 대한 ‘그림이론’이라 불린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언어는 세계를 그려주는 명제로 구성되어 있고 명제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인데 이때 사고란 사실의 논리적 구조에 대응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란 세계에 대한 사실의 논리적 구조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그려주는(표현해주는) 매체가 된다. 이때 ‘그림’이란 정물화처럼 세계의 사실과 시각적으로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과학이론의 용수철 모형처럼 추상화된 형태로 세계의 ‘논리적’ 특성을 올바르게 잡아낸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상언어에서는 사실의 논리적 구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기에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철학적 ‘해명’ 작업이 필요하다. 이 ‘해명’을 통해 과거 철학자들이 중대한 철학적 문제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언어의 ‘혼동’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해낼 수도 있다. 이 점을 강조하듯 ‘논고’의 마지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이다.
논리실증주의는 흔히 어떤 주장이든 그것이 언제 참이 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는 ‘검증원리’로 대표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또한 경험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기존 철학의 초월적 논증을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하며 그런 논의 자체를 철학에서 제거하려 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자들 사이의 연관은 분명하다. 이들 사이의 연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이 탐구했던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일종의 철학적 분석도구로 삼아 세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가지는 다양한 논리적 구조를 탐구하려 했고, 논리실증주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전체적으로 철학적 작업에서 논리적 분석이 차지하는 역할을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만큼 강조했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 모두 철학의 본연의 임무를 경험과학처럼 세계에 대한 구체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이 가능해지는 조건과 다양한 주장들을 서로 비교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일종의 메타적 ‘해명’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의 철학을 그것이 태동한 20세기 초 빈이라는 구체적 맥락과 분리시켜 일종의 ‘개념적 진공’에서 파악하려 할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프레게만큼이나 쇼펜하우어나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논리철학 논고>는 언어의 논리적 성격에 대한 탐구만큼이나 윤리적 본성에 대한 탐구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해석은 <논리철학 논고>를 자신의 논리적 분석의 후속작업으로 평가한 러셀의 서문에 비트겐슈타인이 격렬히 항의하고 출간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며 결국 그 때문에 러셀과 단교했다는 사실에서도 힘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카르납의 저작은 모든 지식을 확고한 경험적 토대 위에 세우려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칸트의 선험적 종합에 대한 생각을 새로운 물리학 이론에 입각하여 재론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해석이 이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카르납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실용주의적 영향을 받고 쓴 <세계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영문판 서문 내용이 비엔나 서클 당시 썼던 독어판 서문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암살
국정원 직원 4명 시국선언문 - 김대중 정권, 정몽헌 타살됐다
http://blog.naver.com/oh99/140150292959
정몽헌의 죽음은 타살이다.
글쓴이 : 강력통치
조회 : 3,552
현대 계동빌딩에는 업무차 수없이 많이 드나들어 구조를 잘 안다.
현대 계동빌딩 창문으로는 혼자서 뛰어내릴 방법이 없다.
적어도 두놈이 한사람을 잡고 들어올려서 강제로 떠밀어야
창문 아래로 투하가 가능한 구조이다.
정몽헌의 죽음은 100% 타살이다.
수사기관이 날조된 발표한 것이다.
정확한 비유를 해 드리지요.
말티즈 아시지요! 다 자라도 3킬로 안되는 작은 개입니다.
말티즈 전용 개집에 성인 남성이 들어가서 잘 수 없지요!
공간이 작습니다.
구조상 사람이 들어가서 잘 수 없겠지요.
이런 것을 사이즈를 자로 재서 알려줘야 압니까!
한 가지 더 예를 들지요.
공병삽으로 인간이 밥 떠서 입에 넣어 먹을 수 있나요.
안되겠지요!
이게 정확한 비유입니다.
공병삽 사이즈를 입사이즈와 대보고 그 사이즈 치수를 공개해야 알아듣는 사람도 있나요!
현대계동사옥은 1층만 제외하고 전체 층이 모두 창문구조가 동일합니다.
몇층이 몇미터니 하는 말장난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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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최고 권력 가까이에까지 접근 가능했던 전직 정보부원 존 콜먼은 이탈리아의 알도 모로 총리가 P2(P2는 리시오 겔리가 만든 비밀조직으로서, 이탈리아 내
극우 폭력 조직을 움직이고 바티칸과 마피아의 더러운 거래를 주선하기도 함) 메이슨의 사주로 암살당했다고 밝혔다.
암살 목적은 이탈리아가 로마 클럽과 빌더버그 클럽의 뜻을 따르게 만들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알도 모로 총리 이외에도 존 콜먼에 따르면, 키신저는 파키스탄의 알리 부토
대통령도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 부토는 1979년 파키스탄 내 미국외교협회(CFR) 책임자인 지아울 하크 장군에 의해 합법적으로 살해당했다.
부토가 살해당한 것은, 그가 추진한 핵에너지 프로그램이 성공했더라면 파키스탄이
수년 내에 근대 산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부토의 민족주의적
야심이 빌더버그 클럽의 ‘제로’ 성장 정책에는 직접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은 빌더버그 클럽이 미 전역에 완벽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과 캐나다 수상, 자유세계의 주요 언론들, 정치가들, 주요 금융가와
저널리스트들, IMF와 세계은행, 유엔 등에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소름 끼치는 수많은 실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신세계 질서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그 위상의 크고 작고를 떠나서 언제든 부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존 론슨은 저서 ‘극단주의자와의 모험(2001년)’에서 영국 정부가 포클랜드 전쟁
동안 아르헨티나에 국제적 제재를 가해 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썼다가 ‘험난한 시련’을 겪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빌더버그 클럽은 성장률 ‘제로’의 후기 산업 사회 건설 계획이 침몰하고 있음을 느끼고
“아르헨티나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교훈을 주고자 했다. 민족주의나 독립적이고 총체적인 주권 확보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상을 아르헨티나로 고른 것은 이 나라가 중남미에서는 가장 부국이었으며,멕시코에도 핵 기술을 제공해 주고 있었던 바, 그런 사실들이 빌더버그 클럽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이처럼 막후에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빌더버그 클럽은 NATO 지도자들의 지배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NATO는 그림자 속 세계정부가 유럽 정책을 좌지우지할 슈퍼 기구를 만들기로 하면서 타비스톡 연구소의 주창으로 발족한 기구이다.
또한 이 연구소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몰락시키는 데 사용된 방법론에 대해 상세한
자료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그 자료는 ‘타비스톡 연구소: 미 정책을 통제하는 영국’이 탄생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타비스톡 연구소의 테러 전술과 세뇌 전술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그걸 통해 미합중국 대통령까지도 제거할 수 있었다.
참고로 타비스톡 연구소가 설립되기 그 전부터 존재해 온 빌더버그 클럽 산하 조직인
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는 타비스톡 연구소를 설립한 영국 여왕을 위해 움직인다.
RIIA는 영국의 대외 정책을 운용하였으며, 영국 왕실의 대외 정책을 총괄하는 오른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빌더버그 클럽의 영향력에 비해 세계 주요 언론을 다 뒤져 보아도 빌더버그와 관련된 기사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2002년 빌더버그 회의에 참석했던 언론조차 이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실제로 가장 불협화음이
컸던 회의는 2002년 회의였다.
이에 대해 런던에서 발행되는 ‘이코노미스트’ 전직 기자인 앤서니 홀더는 이렇게 말했다. “몇 해 전, 빌더버그 클럽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저 윗선으
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이처럼 언론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한 배경에는 바로 록펠러 가문이 있었다.록펠러
가문은 상당수 언론 매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대중의 무지를 조장하는 매스 미디어가
세계 정부의 미래 통치 계획에 대해 한 마디의 언급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데이비드 록펠러에 따르면, “지난 40년간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 ‘타임 매거진’을 비롯한 기타 주요 언론사들이 빌더버그 클럽 회의에 참석했으며 침묵의 약속을
준수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빌더버그 클럽이 주요 언론 매체를 활용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위한 우호적
여론 형성을 위해서이다. 언론을 이용해 뉴스를 유포시킴으로써 정치권과 일반 시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빌더버그 클럽 이외에도 세계 5대 언론 매체들은 미국외교협회(CFR), 삼각위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인 대다수가 정보를 전달하는 미국의 5대
텔레비전 방송사가 과연 독립적인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이미 언급한 사실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동기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음모론의 하나로 치부해 버리고, 경멸하고, 결국 잊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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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을 도왔던 전력이 있는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
뇌물 약발은 공산국가 건설 이후 곧바로 나타났다.
록펠러 소유의 스탠더드 오일이 독점 혜택을 누린다.
러시아 석유를 유럽에 팔아 막대한 수익을 낸다.
러시아를 부정하는 미국 하원이 1932년 비밀거래를 지적했으나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정관계 곳곳에 검은돈으로 형성한 인맥 덕분이다.
러시아 지원 의혹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루이스 맥파든 의원이다.
주미 러시아 무역기구 장부를 들춰보면 전모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발언도 한다.
폭로는 휘발성이 컸는데도 흐지부지 끝난다.
맥파든 의원이 석연찮은 사고로 죽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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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 8일 경향일보 <록펠러 재단 기금 관리권 둘러싸고 내분 한창. 넬슨/로렌스 록펠러 vs 데이비드 록펠러>, 79년 2월 17일 넬슨 록펠러 의문의 죽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70800329203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7-08&officeId=00032&pageNo=3&printNo=9777&publishType=0002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2170032920603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2-17&officeId=00032&pageNo=6&printNo=10271&publishType=00020
79년 8월 1일 넬슨 록펠러 정사 중 복상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8010032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8-01&officeId=00032&pageNo=2&printNo=10410&publishType=00020
1996년 7월 8일에 벌어진, 암셸 로스차일드의 '의문의 자살'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암셸은 로스차일드 족벌 금융제국의 회장으로 사망 당시 41세였다.
로스차일드 가의 장남인 암셸은 1990년 로스차일드 에셋 매니지먼트의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1993년에는 회장직에 취임했다. 아버지 빅터 로스차일드에 의해 진로를 강요당한 그는 은행제국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거북함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가 구성원들이 그의 사업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루머도 심심찮게 떠돌았다. 언론인 샐리 스미스에 따르면, 암셸이 경영한 회사는 그가 죽기 1년 전 500만 달러의 손실을 냈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이블린 로스차일드가 중국 제2의 은행과 합작 투자회사를 세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기이기도 했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암셸은 일가의 광범위한 사업들을 통합해 280억 달러 규모의 세계적인 기업을 세우려고 계획했다.
암셸 로스차일드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호텔 방에 딸린 대리석 목욕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바닥에서 불고 5피트 위에 설치된 타월 선반 아래에 누워 있었는데, 이 때문에 "신장 6피트의 남자가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테리 천으로 만든 로브만 몸에 걸쳤고, 로브 허리끈의 한 쪽으로 목을 감았다. 허리끈의 다른 한쪽 끝은 타월 선반 가로대에 매달려 있었는데, 나중에 한 조사관이 실수로 이 가로대를 벽에서 뽑아버렸다.
처음에 언론은 사망 원인을 심장마비로 보도했지만, 곧 질식에 의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정정했다. 경찰의 보고서는 일반적인 경로를 무시한 채 곧바로 프랑스 내무부 장관 앞으로 보내졌다. 이런 예외적인 처리 방침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로스차일드 일가의 요청을 따른 것이 명백하며, 정부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드러난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고 유서도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암셸의 사망 원인 가운데 자살은 가장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둘러싼 의문과 정황과, 세계 은행업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암셸의 이름은 뉴스 매체에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사망 원인이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을 때도 의문 제기나 논평이 전혀 없었다. 1997년판 <브리태니커 연감>은 그의 죽음에 단 한 문장만을 할애했다. <경제 분야 : 은행> 항목 속에 파묻혀 있는 내용은 이렇다. "7월, 로스차일드 가문의 상속자로 자산관리사 CEO 및 런던 지부의 투자를 맡은 암셸 로스차일드가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맡아 영국 은행업계는 동요했다." 의문의 죽음에도 이에 대한 치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하기 때문에 대중매체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오히려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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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paper Scotland on Sunday reported, on 16/9/ 2001, that Osama bin Laden made his fortune in part by working with Jewish-Russian mafia operations in Qatar and Cyprus. (Mafias)
According to Wayne Madsen, “The Bin Laden drug network … intersects with Geneva-based financial entities established by George H. W. Bush while he was CIA director and Vice President and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 (aangirfan: Bush, Bin Laden, Drugs…. )
Reportedly, “Angleton had an alliance with … the Mafia, dating from 1944 when he was an O.S.S. officer in Italy.
“‘Operation Gladio’ … was based on Angleton’s fascist-Mafia connections, and employed … the Mafia to assassinate some who couldn’t be bribed, e.g. Prime Minster Aldo Moro.” (Cached)
This article was first published on aangirfan.blogspot.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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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1년, 이란의 Mohammed Mosaddeq가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르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지난 수년 간 외국 국가들과 협상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란의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우리는 국가 예산 충당은 물론, 국내의 고질적인 문제들인 빈곤, 질병 그리고 후진성을 퇴치할 수 있다."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해 할 것은 영국 기업들을 몰아 냄으로써 지금까지 국운을 좌우해 온 부정부패를 추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란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겁을 상실한 것입니다. 영국과 미국의 정부는 물론 그의 "의견"에 반대했고, 당시 CIA의 근동 및 아프리카 지부(Near East and Africa Division)를 총괄하고 있던 Kermit Roosevelt Jr.(미국의 26대 대통령, Theodore Roosevelt의 손자)를 급히 파견합니다. 당시 Roosevelt의 행적은 "Clandestine Service History - Overthrow of Premier Mosaddeq of Iran - November 1952 - August 1953 (비밀 작전사 - 이란 Mosaddeq 총리 정부의 전복)"이라는 CIA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Operation Ajax"로 명명되었습니다.
당시 CIA는 Roosevelt의 주도 하에 Mosaddeq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Moaeddeq에게 무자비한 독재자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을 부추겨 국민들을 선동했습니다. 일부 시민들을 매수하여 Mosaddeq의 지지자로 행세하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머슬림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도록 하는 공작까지 펼쳤습니다.
< Kermit Roosevelt Jr. >
CIA의 이같은 비밀 작전은 주효하여 결국 300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하게 되고, Mosaddeq는 실각하여 1967년에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꼭두각시인 Shah가 이란을 장악하고, 그들은 이란의 석유판매를 통해 얻게 되는 수익을 그대로 챙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Shah의 쓸모가 다한 후, 1979년에 Ayatollah Khomeini를 다시 앉히게 되죠. Roosevelt는 1979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Counter Coup: The Struggle for the Control of Iran"을 통해 당시 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전문 시위꾼들(말하자면, 프락치죠...)을 돈으로 매수한 에피소드까지 자랑스럽게 털어 놓았습니다...
< Omar Torrijos >
2. 1968년, 파나마 군부 출신의 Omar Torrijos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됩니다. 중산층과 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Torrijos는 정권을 잡은 후 미국과 매부 좋고 누이 좋게 지내며 국가를 파탄으로 몰아 넣었던 기존의 정치 세력들을 청산하고, 파나마의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고 파나마 운하를 국민들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결국 1977년에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귀속시키는 협약을 이끌어냈습니다 (카터 대통령 시절). 미국은 당연히 꼭지가 돌았습니다. 그리고 1981년, 그는 자신이 타고 가던 군용기가 공중에서 폭발을 하는 바람에 사망하게 됩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할 John Perkins씨의 얘기에 따르면, Torrijos는 미국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합니다).
3. 1979년에 에쿠아도르 대통령 자리에 오른 Jaime Roldos Aguilera... 그 역시 집권 후 자국 내에서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던 미국의 석유 회사들을 내치려 했고... 위에 언급한 Torrijos보다 3개월 전에 "비행기 공중폭발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역시 의문사입니다. John Perkins씨에 따르면 그가 탔던 비행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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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식] 9/11 당시 활약했던 구조대원들, 테러리스트 명단에...
http://blog.naver.com/krysialove/150107418228
[미국 소식]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9/11 고발자들...
http://blog.naver.com/krysialove/150093724735
[미국 소식] 다양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9/11의 영웅들...
http://blog.naver.com/krysialove/150114508113
[네덜란드 소식] WTC7 건물 붕괴의 진실을 파헤친 전문가, 교통사고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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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 8일에 벌어진, 암셸 로스차일드의 '의문의 자살'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암셸은 로스차일드 족벌 금융제국의 회장으로 사망 당시 41세였다.
로스차일드 가의 장남인 암셸은 1990년 로스차일드 에셋 매니지먼트의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1993년에는 회장직에 취임했다. 아버지 빅터 로스차일드에 의해 진로를 강요당한 그는 은행제국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거북함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가 구성원들이 그의 사업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루머도 심심찮게 떠돌았다. 언론인 샐리 스미스에 따르면, 암셸이 경영한 회사는 그가 죽기 1년 전 500만 달러의 손실을 냈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이블린 로스차일드가 중국 제2의 은행과 합작 투자회사를 세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기이기도 했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암셸은 일가의 광범위한 사업들을 통합해 280억 달러 규모의 세계적인 기업을 세우려고 계획했다.
암셸 로스차일드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호텔 방에 딸린 대리석 목욕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바닥에서 불고 5피트 위에 설치된 타월 선반 아래에 누워 있었는데, 이 때문에 "신장 6피트의 남자가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테리 천으로 만든 로브만 몸에 걸쳤고, 로브 허리끈의 한 쪽으로 목을 감았다. 허리끈의 다른 한쪽 끝은 타월 선반 가로대에 매달려 있었는데, 나중에 한 조사관이 실수로 이 가로대를 벽에서 뽑아버렸다.
처음에 언론은 사망 원인을 심장마비로 보도했지만, 곧 질식에 의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정정했다. 경찰의 보고서는 일반적인 경로를 무시한 채 곧바로 프랑스 내무부 장관 앞으로 보내졌다. 이런 예외적인 처리 방침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로스차일드 일가의 요청을 따른 것이 명백하며, 정부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드러난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고 유서도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암셸의 사망 원인 가운데 자살은 가장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둘러싼 의문과 정황과, 세계 은행업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암셸의 이름은 뉴스 매체에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사망 원인이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을 때도 의문 제기나 논평이 전혀 없었다. 1997년판 <브리태니커 연감>은 그의 죽음에 단 한 문장만을 할애했다. <경제 분야 : 은행> 항목 속에 파묻혀 있는 내용은 이렇다. "7월, 로스차일드 가문의 상속자로 자산관리사 CEO 및 런던 지부의 투자를 맡은 암셸 로스차일드가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맡아 영국 은행업계는 동요했다." 의문의 죽음에도 이에 대한 치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하기 때문에 대중매체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오히려 두드러져 보인다.
59. 이중성
원래 동아시아 공동체는 마하티르가 90년대부터 주장해왔습니다 유태자본까지 거론하며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반미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순종적인 편입니다.
마하티르 “아브라모프에게 120만달러 줬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104024.html
마하티르-소로스 ‘앙숙의 화해’
http://blog.naver.com/naebon/150012243353
...
라즈니쉬(오쇼), 스와미 묵타난다, 초감 트룽파 린포체의 섹스 스캔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2/03/20/201203200500006/201203200500006_5.html
이 시기에 이루어진 종교 간 만남은 근대 이전의 문명 교류 과정에서 흔히 목도되던 타자에 대한 노골적 폭력에서 벗어났다. 그런 덕분에 동양 종교는 종교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한 미국에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양 종교의 미국 진출은 개인적인 원망(願望)의 투사, 과도한 이상화, 동서양 문화의 차이로 인한 갈등, 구루와 신도의 인간적 불완전함 등이 함께 어우러진 냉혹한 드라마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자.
‘미국이 기다리던 메시아’ 라즈니시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인물은 바그완 스리 라즈니시(Bhagwan Shree Rajneesh·1931~1990)다. 후일 오쇼(Osho)로 개명한 그는 인도 출신 구루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특히 라즈니시는 동서양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타고난 달변, 명쾌한 논리, 인간적 카리스마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폭발적 인기를 반영하듯 라즈니시의 아시람이 있던 인도 푸나(Poona)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르침을 듣고자 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라즈니시의 가르침은 책을 통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나 유명세에 비해 그가 미국에서 일으킨 스캔들은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라즈니시는 1931년 인도에서 태어났다. 번뜩이는 지성과 재치를 가진 병약한 소년이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광범위한 독서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우울증, 만성적인 허리 통증, 당뇨와 같은 질병이 그를 평생 괴롭혔다. 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했고, 스물한 살이 되는 해, 치열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스물아홉 살인 1960년 모교인 자발푸르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직을 얻었지만, 거침없는 발언으로 인해 결국 6년 만에 대학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 라즈니시는 간디를 마조히즘(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받고 고통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에 빠진 성도착자로, 테레사 수녀를 사기꾼으로 비난해 후일 그가 일으키는 커다란 논란을 미리 살짝 보여주기도 했다. 사직한 후 그는 영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구루로 나선다.
그의 가르침은 ‘종교 없는 종교(religionless religion)’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윤리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억압하는 모든 낡은 종교를 혁파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영적 탐구와 성적 에너지의 자유로운 충족을 결합해 ‘지금 이곳’에서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탄트라(tantra)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즐거움에 초점을 둔 라즈니시의 종교 공동체는 역설적으로 괴로움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초창기 그는 노동이 곧 영적 수행이라는 주장을 실현하고자 30여 명의 제자를 가족 소유의 농장에 보내 일을 시켰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과도한 노동과 영양 부실 때문에 몇몇 제자가 건강을 크게 해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외에도 공동체 내부의 자유로운 성생활은 지역 주민의 비난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고, 외국에서 온 수행자들과 주민들 사이의 갈등도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됐다. 그럼에도 라즈니시의 아시람은 한때 6000명이 동시에 머물 만큼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주민과의 마찰 역시 점증했고, 결국 400만 달러 상당의 세금을 추징하려는 지방 정부와 갈등하는 사태마저 빚어졌다.
곤란에 직면한 그는 제자들의 권고에 따라 미국에 진출한다. 1981년 신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미국에 도착한 그는 공항에서 ‘나는 미국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미국에 온 라즈니시는 오리건 주에 넓은 목장을 마련하고, ‘라즈니스푸람(Rajneeshpuram·라즈니시의 도시)’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곳 역시 인도의 아시람처럼 큰 성공을 거둔다. 그 단적인 예로 공동체는 1981~85년 4년 동안 1억2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라즈니시는 이곳에서 마치 왕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수집벽으로 유명했던 그는 무려 93대의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사들였고, 이 차를 타고 신도들이 늘어선 공동체를 주기적으로 퍼레이드했다. 심지어 신도들은 그가 날마다 다른 차를 탈 수 있도록 365대의 롤스로이스를 마련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적적인 성장 중에 라즈니시는 재발한 우울증과 허리 통증으로 자신이 좋아하던 강연조차 그만둔 채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교단의 운영은 제자이자 여비서였던 마 아난드 쉴라(Ma Anand Sheela)에게 주로 맡겨졌다. 그러나 교단의 폭발적인 성장과 힘의 집중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모금에 혈안이 된 교단은 신도들을 병에 걸렸다는 거짓말로 그들의 부모에게서 돈을 타내게 부추기는가 하면, 질서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신도에 대한 도청과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인도에서처럼 공동체와 지역 주민들의 관계는 점차 악화됐고, 이 과정에서 교단은 허위로 투표인단의 수를 늘려 안티로프(Antelope)라는 지역 명칭을 아예 라즈니시푸람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또 지역 주민과 갈등하면서 방화, 공무원 폭행 사건이 벌어졌으며, 심지어 살모넬라 균을 지역 식당에 살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화생방 테러다. 비슷한 사례로 1995년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12명을 사망하게 만든 옴진리교의 화생방 테러가 있다.
‘비밀스러운 삶’을 산 구루 묵타난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당국은 교단을 수사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쉴라는 1985년 19명의 동료와 함께 독일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곧바로 붙잡혀 미국으로 송환됐다. 그는 재판을 거쳐 이민사기, 도청, 살모넬라 균 살포, 방화, 폭행 등의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자 라즈니시는 모든 잘못을 쉴라 탓으로 돌리면서도 쉴라의 전체주의적 교단 운영이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즘을 경험해 자유의 참된 가치를 알려주려는 자신의 계획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는 별개로 그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버뮤다로 탈출하려다 이민법 위반으로 공항에서 체포됐다.
붙잡힌 라즈니시는 사법 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40만 달러의 벌금과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는 5년 안에 재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85년 미국에서 추방됐다. 인도인들에게 라즈니시의 추방은 동양 구루에 대한 서양의 탄압으로 여겨졌다. 그는 인도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1990년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쳤다.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 1908~1982)는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스승인 니탸난다(Nityananda)를 만나고 영적인 여정에 오른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여러 스승을 사사한 끝에 탄트라(tantra)에 입문한 그는 수행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묵타난다는 회음부에 위치한 쿤달리니(kundalini)의 에너지를 정수리에 있는 차크라로 승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쿤달리니 요가를 가르쳤다. 그는 라즈니시와 마찬가지로 성적 에너지의 종교적 중요성을 강조한 탄트리카(tantrika·탄트라 수행자)였다. ‘구루를 선택할 때에는 구루의 인품과 행동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자들의 권고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 역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제자들과 그를 만난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남의 영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고,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직접 체험했을 소지도 매우 컸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 에너지 탓에 그는 커다란 스캔들을 야기한다.
묵타난다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성적 결합이 아닌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줄곧 가르쳤다. 영적 에너지를 성적 만족이 아닌 깨달음을 얻는 데 쏟으라는 주장이었다. 성관계는 당연히 금지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런 그가 많은 여성 신도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얘기가 1970년대 말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그에게 실망하고 교단을 떠난 측근들이 비밀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스탄 트라우트(Stan Trout)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묵타난다가 매일 저녁 어린 여성신도들을 침대로 유혹했다고 폭로했다.
이 폭로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윌리엄 로다모르(William Rodarmor)는 취재와 인터뷰를 거쳐 ‘스와미 묵타난다의 비밀스러운 삶’이라는 기사를 묵타난다의 사후에 발표한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충격적 사실들이 기사를 통해 자세하게 밝혀진 것이다.
기사의 초점은 묵타난다의 비밀스러운 성생활이다. 1981년 73세이던 묵타난다가 탄트라 요가에 입문시킨다는 명목으로 20대 초반의 여성을 유혹해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야기에서부터 1978년 인도의 가네스푸리(Ganeshpuri)의 아시람에서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미국 여성의 체험까지, 엄격한 금욕 수행자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성적 에피소드가 소개됐다. 익명의 보고자에 따르면 묵타난다는 어느 날 저녁 젊은 여성을 그의 방으로 따로 불렀다. 옷을 벗으라고 한 후 그를 산부인과 진료대와 흡사한 침대에 눕히고, 탄트라 수행이라고 설명하면서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보고자는 발기불능이었는데도 억지로 관계를 시도했다는 등의, 실제 경험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세부적인 내용도 언급했다. 묵타난다와 그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갔고, 묵타난다는 관계를 마친 후 돈과 보석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교단을 떠난 후 교단 관계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은 마이클 딩가(Michael Dinga)는 진료대 모양의 침대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구루에게 바쳤다고 후일 인정하기도 했다.
기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딩가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묵타난다의 실제 삶은 그가 신도들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금욕 수행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다. 묵타난다는 주변의 모든 여성을 성적 유혹이나 추행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런 행동은 그가 미국에 오기 훨씬 전인 인도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도 가네스푸리의 아시람에는 그가 묵던 방에서 여성들의 기숙사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부모가 교단에 관리를 위탁한 열세 살 소녀를 그가 처녀성을 검사한다는 핑계로 성추행했다는 폭로마저 이어졌다. 게다가 폭로 내용은 성적 추문에 그치지 않았다. 공동체 내부에서 질서 유지라는 이름의 공공연한 폭행이 있었고, 이 일을 전담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또 불법적인 총기 소유에서부터 ‘봉사’라는 이름의 강제 노역까지 묵타난다의 공동체는 라즈니시 공동체와 놀랍게도 흡사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묵타난다는 이런 폭로가 예수를 비롯한 많은 성인(聖人)이 겪게 마련인 근거 없는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은 떠난 신도들을 되돌아오게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묵타난다의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명상 프로그램 참여 비용으로 한 주 동안 25만 달러를 벌어들인 적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탈세 목적으로 수표나 신용카드는 일절 받지 않았다. 내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묵타난다 역시 스위스 은행에 1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입금해두었는데, 이 역시 라즈니시의 경우와 유사하다. 묵타난다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지만, 폭로 기사가 나오기 전인 1982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기사가 나간 후 신도들의 탈퇴가 줄을 이었고, 이 스캔들을 계기로 깨달은 동양 구루들이 왜 이렇게 흡사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스캔들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실들
동양 구루들이 일으킨 스캔들의 원인을 묻기 전에 스캔들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동양 구루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과 음모, 신도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 의도된 연출,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면 으레 겪게 마련인 종교적 수난 등으로 해명했다.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지만, 라즈니시의 비서 쉴라가 사법 당국의 수사를 거쳐 공무원 폭행, 방화를 비롯한 폭력, 살인 미수의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고, 라즈니시 역시 쉴라의 공소 내용을 인정하고 미국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라즈니시의 입국과 체류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추방을 미국의 음모라고 폄하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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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타난다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교단을 떠난 사람들의 일관성 있는 증언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주장하듯이 모든 폭로를 하늘이 종교적 성인인 그에게 내리는 수난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요컨대 두 사람을 둘러싸고 난무하는 얘기들이 모두 다 진실인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이런저런 정황을 볼 때 많은 부분이 사실일 공산이 크다.
둘째, 스캔들의 주인공이 모두 인도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 인도 구루들을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스캔들의 원인을 인도 종교 내지 인도인의 특성에서 찾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티베트 불교의 깨달은 스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초감 트룽파 린포체(Chogam Trungpa Rinpoche·1939~1987)와 그의 교단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서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룽파는 서양에 티베트 불교의 금강승(金剛乘·vajrayana) 전통을 전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정식 인가된 최초의 불교 학교 ‘나로파(Naropa) 대학’을 미국에 세운 인물이다. 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에서 공부했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연구했으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트룽파는 환속하기 전부터 술과 담배의 남용, 그리고 학생들과의 성관계로 인해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환속한 후인 1970년 미국에 건너온 그는 ‘미친 지혜(crazy wisdom)’로 일컬어지는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억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라 할 만한 지도 방식을 택해 자주 논란거리가 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여전히 코카인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무절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는 1987년 알코올의존증에서 기인한 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그는 1975년 자신의 교단에서 열린 핼러윈 파티에 참석한 머윈(W. S. Merwin)이라는 시인과 그의 여자 친구를 강제로 옷을 벗겨 교단의 ‘나체 파티’에 참석하게 만든 사건으로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교단이 얽힌 더 심각한 스캔들은 트룽파가 후계자로 지목한 오셀 텐진(Osel Tendzin·1943~1990)이 일으킨 것이었다. 오셀 텐진은 최초의 서양 출신 티베트 불교 계승자로도 유명했지만,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여러 남녀 신도와 성관계를 맺었고, 그 가운데 한 명을 에이즈로 죽게 만들었다. 이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인도 구루들만이 스캔들을 야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셋째, 텐진의 사례처럼 당시 미국에서 일어난 종교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모두 동양 구루였던 것은 아니다. 악명 높던 짐 존스(Jim Jones·1931~1978)의 인민사원(Peoples Temple) 사건을 보자. 1978년 존스를 포함한 913명이 그의 이름을 딴 존스타운(Jonestown)에서 집단 자살했고, 인민사원 역시 동양 그루들의 그것처럼 성추문, 금품 갈취, 폭력, 노동 착취 등의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인민사원이 기독교 종파라는 점에서 당시의 종교적 스캔들이 모두 동양 종교나 동양 구루에 의해서 빚어졌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종교 스캔들은 오히려 권위주의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헌신적인 신도 사이에서 생기는 일반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양 구루들이 야기한 스캔들에 소위 ‘문화적 특수성’은 없었을까? 다시 말해 동양 구루가 서양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스캔들이라는 점에서 문명의 교류와 충돌이라는 프리즘이 이 사건들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지는 않을까?
‘깨달은 자’에 대한 수요와 공급
동양 구루들이 미국에서 일으킨 스캔들은 문명의 상호 교류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 점에서 어느 한쪽에 모든 책임을 지우기는 힘들다. 오히려 구루들의 인간적인 결함, 무비판적이고 헌신적인 신도, 문화의 이질성, 동양 종교와 구루에 대한 과도한 이상화, 서양 종교에 대한 뿌리 깊은 실망과 같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마치 요철(凹凸)처럼 두 문명이 맞물리는 과정에서 스캔들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닐까. 문명의 교류 혹은 상호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스캔들의 원인을 조금 더 자세하게 규명해보자.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던 구루 모두가 ‘탄트라’적 가르침을 전했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인간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의 충족을 종교적으로 승인해 준 탓에 미국에서 크게 성공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성적 욕망을 위시해 인간의 욕구 전체를 부정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실망하고 있었다. 프로이트(Freud)가 날카롭게 지적했듯 서양은 성(性)을 위험천만한 것으로 간주했고, 그 억압은 주로 성(聖)스러움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덧붙여 미국에서 위세를 떨치던 근본주의적 기독교는 특히 인간 이성에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공립학교가 다윈의 진화론을 교육할 수 있는지를 두고 제기된 1925년의 ‘원숭이 재판(monkey trial)’은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인간 이성을 얼마나 불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론과 상충하기에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될 수 없는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인해 세속 영역이 점점 더 커지는 미국에서 인간 욕망과 인간 이성의 종교적 승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고, 바로 이때 탄트라를 강조하는 구루가 무리 지어 등장했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불교, 힌두이즘 같은 동양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닌 오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체득을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믿음이 아닌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목표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수행을 통해 체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추론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 동양 종교의 이러한 합리적 성격이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동양 종교의 탄트라는 성(性)과 성(聖)의 길항관계를 상정하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파격이기도 했다. 성(性)을 불편해하는 기독교에 비해 힌두이즘과 불교의 탄트라 전통은 성적 에너지의 종교적 승화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인간 욕망 자체를 종교적으로 승인해주었던 것이다.
탄트라야말로 그가 주장한 ‘종교가 없는 종교’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강조한 라즈니시나, 쿤달리니 에너지가 곧 성적 에너지이자 종교적 에너지라고 주장한 묵타난다가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했다. 또 남녀가 성교하는 합환불(合歡佛)을 깨달음의 상징으로 삼는 티베트 불교의 초감 트룽파가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것 역시 자연스러웠다. 탄트리카인 그들은 종교에서 비롯된 성의 억압을 ‘종교적’으로 해방한 것이다. 라즈니시, 묵타난다, 트룽파는 무조건적 믿음과 일방적 은총이 아닌 수행을 통한 개인의 깨달음 체험을 강조했고, 인간 성(性)의 종교적 승화 가능성을 설파했다. 나아가 종교적 구원이 현세적 기쁨의 부정에 있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그 점에서 동양의 탄트라는 해방의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청교도적 금욕주의에 힘겨워하던 미국인들은 동양 탄트라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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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동양 구루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것에 크게 고무됐다. 한때 동양인의 운명을 쥐락펴락했던 서양인들이 그들의 발밑에 엎드려 그들을 살아 있는 붓다로 떠받드는 것은 좀처럼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서양인들의 숭배를 받게 된 그들의 자아(ego)는 그야말로 무한히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그들에겐 미국이 그야말로 새로운 약속의 땅이었다. 마치 요철이 서로 맞물리듯 근본주의적 기독교에 환멸을 느낀 적지 않은 미국인이 보내주는 헌신과 숭배에 동양 구루들은 거대한 성취감과 자존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구루들은 이내 그들의 성공 비결을 깨달았다. 그들은 성욕을 위시한 내면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충족시킬 것과 바로 그것이 진정한 영성의 구현이라고 더욱 힘주어 설파했다. 특히 라즈니시는 서양인이 봉착한 대부분의 문제가 바로 성적 만족이 좌절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고 자유로운 섹스가 이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가르쳤다. 덧붙여 물질적 부유함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 역시 영적인 목적과 부합한다는 주장을 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묵타난다 역시 물질적 부의 향유가 영성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대열에 곧장 합류했고, 부유한 서양인을 신도로 영입하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티베트에서 온 트룽파는 자유분방한 미국 젊은이들처럼 술, 담배, 섹스, 마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양 구루와 신도들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과도한 이상화는 구루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고, 결국 구루의 인간적 결함이 여과 없이 증폭되도록 만들었다. 이제 구루는 깨달은 자에서 절대적 힘을 지닌 신으로 거듭났고, 사랑과 자비가 아닌 지배와 전면적인 복종이 구루와 신도들의 관계를 규정했다. 라즈니시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개개인의 에고를 철저하게 깨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구루에 대한 ‘굴복(surrender)’이 으뜸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묵타난다 역시 ‘구루보다 더 높은 신은 없으며, 구루의 은총보다 더 높은 성취는 없고, 구루에 대한 명상보다 더 높은 상태는 없다’는 말로 자신을 드높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트룽파 역시 인간의 자아가 깨달음에 가장 큰 장애물이므로, 스승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통해 개인의 아집을 깰 것을 강조했다. 신도의 무조건적 복종이 성적인 추행, 폭행, 노동력과 금전의 착취, 남용으로 귀결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고한 깨달음을 얻은 자와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각종 스캔들이었다.
경험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인간에게 경험은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지혜를 체득한다.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직접 경험한 사람과 지켜본 이에게 지혜를 주는 계기였다. 이제 미국인들은 동양 구루를 예전과 같이 과도하게 이상화하지 않는다. 또한 동양 종교를 이전처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동양 구루와 동양 종교가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노라면 실상을 제대로 보지 않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진다.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 불타는 연애 기간이 끝나고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면 상대의 장점만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첫 만남에서나 가능한 과도한 이상화는 관계가 거듭될수록 힘들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기독교는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교다. 그리고 동양 구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사람의 수는 당시에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동양 종교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동양 구루와 동양 종교가 당시 미국 지성인, 젊은이가 가지고 있던 종교의 개념을 뿌리째 뒤흔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동양 종교를 통해 비로소 개인의 체험이 종교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또 인간의 성(sexuality)이 종교적 성스러움과 근친 관계일 수 있다는, 그들로서는 참으로 ‘불경스러운’ 사실도 명백하게 알아차렸다. 이런 깨달음의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미국에 진출한 동양 구루와 동양 종교를 마주하게 된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즈음의 미국과 유럽은 한발 더 나아가 한때 그들이 동양 종교에만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들을 그들의 종교 전통에서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비주의, 서양 비의주의(esotericism), 오컬트(occult) 전통 등 그들의 종교 문화에서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것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인들은 카를 융(Carl G. Jung)의 충고를 따라 동양 종교의 무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그들에게 적합한 종교성을 재발견하려 시도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시도는 동양과 서양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어느 한편을 우월한 위치에 놓아두려는 과거의 이분법을 넘어선 것임에 분명하다. 즉 그들 속에 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기억하고 발견해 ‘지금’ ‘이곳’에서 그것들을 구현해낸다는 의미다. 그 점에서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여러모로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 지혜를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로 다른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 역시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이기에 갈등과 긴장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특히 문명의 교류는 서로에게 거대한 크기의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렇지만 만남의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나와 타인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상처의 경험은 모두에게 새로운 자기 이해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쓰라리지만 소중한 경험이다. 즉 어떤 문명이나 종교든 만남의 과정에서 자신 혹은 타자를 절대적으로 이상화하거나 폄하한다면, 그 만남은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요컨대 동양 구루의 스캔들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특히나 여러 종교가 역동적으로 얽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
진짜 네이버 뉴스 메인에 오를만한 사이코패스 사건이다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 어려보이는 사람이 밥 먼저 받아 기분이 나쁘다.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 일본인은 다 불공대천지수라고 여기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임 국제시대에 불필요한 왜곡된 민족주의
3번의 공판에서 김구의 진술에 차이점이 있다. 1차 신문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다고, 2차에서는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가기에 강변까지 쫓아 따라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하여 죽였다. 3차에서는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후 모든 투숙객이 분격하여 함께 찔러죽였다고 하였다.
-> 진술을 자주 뒤엎는 거짓말쟁이
'금액량은 잘 모르게,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 다섯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 가량으로 안다.'(김구)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하였는가?'(신문)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8백 냥은 점주에게 맡겼다.'(김구)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읍니다'(주막 주인)
-> 살인 후 돈까지 훔침 (특수강도살인)
백범일지 외에 쓰치다가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일본 기록에 약장수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또 사건 10년 후 쓰치다의 유족은 대한제국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이게 우리 시대에 벌어졌으면 민족영웅은 커녕,
식당에서 어린 놈이 먼저 받아 분개해 강도살인한 사이코패스로 뉴스 한면을 장식하고 있었을 거임.
김구는 이후에도 이 일을 반성하고 않고 백범일지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소름끼치는 백범일지 서술 내용
'내 발에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검광을 번쩍이면서 달려들었다. 나는 면상에 떨어지는 칼을 잽싸게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거꾸러뜨리고는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았다. 칼이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 칼을 집어들고, 왜놈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마구 난도질을 쳤다. 피가 샘처럼 용솟음쳐 마당에 흘렀다. 나는 손으로 피를 움켜 마시고, 얼굴에다 처발랐다.'
Kim 'The Hannibal' Goo
근현대사 민족주의 서술로 가장 과대평가된 인물을 뽑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김구를 뽑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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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좌파 샌더스의 호화 별장 구매
http://www.hankookilbo.com/v/0054c4f3203142ae981924159eda3058
https://www.youtube.com/watch?NR=1&v=JGWUQeRbCec
첫 장면부터 어처구니 없어 하는 아마디넷자드 대통령.. 그 표정이 ㅎㅎ
그게 말이되나 ? 어디서부터 육백만 유대인이 학살되었단 말로 바꾸느냐 ? 러시아에서는 어땟느냐 ?
미국은 인권을 수호할 의지나 있느냐? (영감: 오브 코올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등 전 세계 20여 개국을 점령해서 짓밟고 학살한게 너희들이야.
인디안들은 또 어떻고..
나중에는 아마디넷자드 대통령이 (여기까지 와서 지금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느냐는 듯..) 너털 웃음을 짓고
유태하수인 앞잡이 영감은 일단 인터뷰를 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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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3/sep/29/malcolm-gladwell-david-and-goliath-interview
May Malcolm Gladwell increasingly be seen by the discerning masses as the shameless corporate shill he has actually been for many numbers of years. The evidence of his long-time corporate and establishment servitude is voluminous and irrefutable; his excuse-making is predictable and tiresome. Gladwell is, in the end, an unoriginal and dangerous double-dealer.
He was "trained by the tobacco-funded far-right National Journalism Center, and throughout his career has inserted pro-tobacco, pro-banking industry and pro-PHARMA messages into his books and articles. Gladwell can earn $1 million a year as a paid corporate speaker, sometimes from the very same corporations and industry groups he happens to promote and defend in print.
"Gladwell has yet to disclose a list of his corporate clients and how much they pay him. Here is a partial list compiled from various publicly available sources:
Philip Morris
Lehman Brothers
Microsoft
AHIP (health insurance lobby)
Bank of America
SHRM (union-busting lobby group)
Genentech
PricewaterhouseCoopers
Hewlett-Packard
Retail Real Estate Industry
http://shameproject.com/profile/malcolm-gladwell-2/
Please, Guardian journalists, tell the who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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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대구 청년과 삼겹살 토크 발언들…"이스라엘 지지 않자 악의적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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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은 자연파괴자였다
인디언은 생태주의자 / 세파드 크레치 지음
“북미대륙에서는 인디언들이 자연과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울창한 산림은 사라졌고 버팔로는 멸종위기에 처했다. 따라서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디언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환경운동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게다가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 ‘늑대와 춤을’은 이런 메시지를 강력하게 퍼뜨려서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 들인다. 하지만 브라운 대학의 인류학자 세파드 크레치 교수는 인디언들이 엄청난 자연파괴자였다고 주장한다.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인디언은 이미 많은 동물을 멸종시키는 등 대규모 자연파괴를 감행했다. 어떤 부족은 자연상태를 크게 변경시키기도 했다. 아리조나에 살았던 호호캠 부족은 관개농업을 했는데 결국 토양에 축적된 염분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을 제멋대로 개발한 탓에 망한 것이다. 16-17세기에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산불을 질러 경작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 이를 반복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유럽인들이 들어 오기 전에도 북미 인디언들에게는 각종 전염병이 많았다. 부족 전체가 전염병으로 몰사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유럽인들이 들어온 후에는 전염병이 더 창궐했다. 북미의 자연이 남아 난 것은 인디언들이 자연친화적이라서가 아니고 인디언 인구가 질병과 영양실조로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은 사냥을 하거나 다른 부족과 싸울 때 큰 산불을 놓았다. 18세기에 백인들은 인디언이 놓은 산불로 인해 황폐화된 산천을 자주 목격했다. 북미대륙에 무진장으로 많았던 버팔로는 인디언의 좋은 식량이었다. 인디언들은 버팔로를 스포츠 삼아 죽이기도 했고, 맛있는 부위만 베어내고 그대로 버리기도 했다. 어느 부족은 임신한 암컷 버팔로를 죽여 태아만 꺼내 먹었다. 버팔로 숫자가 급속히 줄어 들어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주로 인디언 때문이다. 백인들은 단지 버팔로 학살의 마지막 단계에 가담한 것이다.
인디언들은 가죽과 모피를 얻기 위해 사슴과 비버를 대량으로 학살했다. 백인들이 사슴가죽과 비버 모피를 사들이자 인디언들의 사냥은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인디언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이용해야 했으나 자연에 대한 그들의 자세는 오늘날의 생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동물의 생명을 결코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동물의 혼을 화나게 하면 더 이상 동물을 사냥할 수 없게 된다는 미신을 믿었을 뿐이다.
저자는 근래에 환경운동가들이 인디언을 생태주의자로 미화시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저자는 또한 환경문제에 위기를 느낀 현대인들이 산업사회 이전의 상태를 그리워하고, 인디언을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모델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이상돈·중앙대 법학과 교수 2000/08/0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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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누구지?
내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분명 그건 화들짝하던 닭갈비 가게에서, 아니면 밤의 모임에서였을거야.
나는 인파에 둘러싸여 묘하게 쓸쓸했지.
아니, 그 때는 쓸쓸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쓸쓸했던 것처럼 느껴지는군.
...
그리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性.
...
네가 학원봉고차에서 보여준 거 있지?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약올렸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너는 그런걸 왜 나한테 보여준 거지? 너무 이상했기 때문에 14년 전 일인데도 생생해. --- 2000
정준영, 자전거. 우리가 멀어진건 순전히 내 잘못이야. --- 2001
피아노, 해리포터, 새하얀 얼굴의 소녀. 너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지?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네 얼굴이 정말 새하얗다는 것만 기억나. 마치 만화 속에 나올 법한. --- 2003
시크한 테드. 그 옆의 변호인. 나는 너희들을 좋아했어. 심술궂은 원어민은 제외하지. --- 2004
묵과 철봉. 너의 시크함은 지금도 여전한가? 피부의 점은 아직도 남아있던가?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난 널 기억하지. --- 2004
다분히 싸가지가 없는 심... 그러나 붙어있었던 것은 묘한 마조히즘. 인간의 이중성. --- 2006
스티브, 바지로 내 껌을 받아! 코너, 젠장! 수줍음이란 무서운 병이야. 젠장! 젠장! --- 2007
버스, 비누냄새. --- 2011
눈이 동그랗던 장발의 소년. 친해질 수 있었지만 못 친해졌다. 강박증이란 무서운 병이거든. 매우 이상하게도 오늘 처음으로 니 얼굴이 떠올랐어. 너는 긴머리가 잘 어울리니 유지하라고. --- 2012
금발, 곱슬머리, 근사한 청바지. 5천 피트의 거리였던가? 그보다 덜하진 않았을 꺼야. --- 2012
호텔보이 --- 2012. 6. 22
호텔 보이 서로이웃공개 1
2012/06/2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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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묵을 닮은, 향수 냄새가 났던,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던 호텔 보이가 떠오른다.
어떤 날에(6/23일, 7/8일, 7/28일 통합)
2011년의 어느 날 나는 버스에서 잘생긴 백인청년 앞에 앉았다. 나는 그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의 옷과 몸 구석구석에서 풍겨나오는 청결하고 깔끔한 비누냄새가 좋았다. 그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으나 우리는 동성인 관계로 어쩔 수가 없었다.
2012년의 어느 날 나는 버스에서 리버 피닉스와 닮은, 잘생기고 어딘가 공허한 눈빛의 청년 옆에 앉았다. 그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너, 리버 피닉스랑 닮은 것 같은데..."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나, 그럴 기회를 놓치고 그 청년은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그 뒤로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2013년 1월 31일, 이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 비오는 밤 나는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어떤 청년을 주목했는데, 그는 세련된 목도리에 올블랙 정장이 돋보여 사람들 속에서 단연 빛을 내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내심 무심한 척 했지만 나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그의 얼굴을 계속 주시했다. <우파니샤드>에 길을 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별을 보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곧 신의 창조행위에 동참하는 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는 도저히 그 파릇파릇한 청년이 발산하는 자연스럽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불어권 청년인지,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francophone같은 느낌이 났다. 프랑스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가 갖고 있는 자유분방하고 세련된 아름다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류처럼 통했는지, 그도 노트북을 쓰면서 몇 번 내 쪽을 바라보며 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 날 안경을 안 썻기 때문에 느낌이 다소 부정확하겟지만, 나는 그가 나의 과도한 시선을 쑥스러워하거나 겸연쩍어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상대방도 아마 은연 중 나의 뜨거운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괜한 자존심과 동성애자라는 수치스러움, 그리고 나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계속 그를 보지도 못하고, 내 집 앞에 왔을 때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사실 그 청년 앞에 앉아있던 여자 아이의 불편한 시선이 신경쓰이기도 했다(그 여자애도 그 청년을 좋아했던 걸까?).
다소 자조하듯 말하자면, 나는 평생 얼마나 전기에 감전된 듯한 지릿지릿한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또 그런 감정을 느낀다 해도 얼마나 그런 상대와 연이 되어 맺어질 가능성이 있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그 횟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한들, 에토스(이성), 파토스(감성), 에로스(육체)를 모두 만족시킬만한 '운명의 사람', 또는 '잠재적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눌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그 청년을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그에 대한 이미지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희석될지도 모른다. 영화 <시민 케인>에 어떤 노인이 과거 애틀랜틱 호를 타며 보았던 어떤 소녀에 대해 회상하듯이…. 이 날의 일은 과거를 회상할 때만 어쩌다 수면 위로 새록새록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옷깇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다음 생 어느 문턱에서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어쩌면 다른 성별, 인종, 사회적 위치로, 그러나 변치 않을 감정으로. 그런 생각이 약간의 위안이 되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한다.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최대 모티프이자, 최대의 비극이다.
2013년 6월의 어느 날, 나는 새벽 5시 30분 경에 일어나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7시 30분 경 집에 돌아오던 중(오르막길로 올라가던 중) 어떤 청소년을 보았다. 그의 오똑한 코와 큰 키, 캐주얼식의 옷차림과 청바지는 나를 잠깐 주눅들게 하면서도 사랑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를 뒤쫓아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조금 낯설고 민망할지라도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두는 것이었는데. 인생은 후회와 회한의 연속이다.
2013년 7월 6일, 나는 오사카의 니혼바시역에서 하얀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잇던 훤칠한 키의 청년을 보았다. 그는 요즘 일본 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오카다 마사키와 생김새가 닮았는데, 일본의 지역색이 반영된 듯한 청초한 느낌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애인으로 보이는 여성의 손을 꼭 잡고는 지하철을 기다렸는데, 마치 나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그 때문에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재빠르게 움직여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게 만든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 선남선녀를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빠졌고, 급기야는 여행을 중단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나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만큼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로서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평생 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현재 내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서 오는 소외감이 무엇보다 참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신을 정말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그리고 나는 이 짧은 조우를 뒤로한 채 씁쓸한 마음으로 갈 길을 떠났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것이 흔히 동성애자들이고 천재들이라지만, 이럴 때면 나는 개, 돼지처럼 살더라도 무리에 어울려 살고 싶어진다. 인기의 중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짝을 찾고서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성인군자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세련된 목도리. 너는 나를 알아봤지. 그렇지만 나는 그 날 하루종일 우울했어. --- 2013. 01. 31.
2013년 1월 30일: 화려한 색깔의 목도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미소년이 떠오른다. 아, 내 사랑.
그 뒤 많은 기억들….
오전 7시 아파트 앞. 새벽부터 기분이 우울해지더군. --- 2013. 06.
니혼바시역.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 2013. 07. 06.
자전거 탄 녀석. 산책길이 우울해지더군. --- 2013. 08.
정장과 영화관. 힐끔 보는 건 좋지만 오래 못 있던 건 유감이야. 너는 어딜 그리 바삐 가는거지? --- 2014. 7.1
버스매표소… 눈이... 언제나 이럴 땐 씁쓸해. --- 07.
나를 빤히 쳐다본 소녀. 귀여운 녀석... --- 08. 05
택시와 버스정류장. 머리만 쓰다듬지 말라고, 가슴 아프잖아! --- 08. 05
횡단보도에서 오똑한 코에 뚜렷한 생김새의 훈남이 여자친구와 키스하고 택시로 배웅해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검은색 블라우저에 흰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입고있는 검은색 바지는 약간 통이 커 보였다. 그의 뒷머리는 약간 옆으로 퍼져 있었고, 이마의 어깨는 넓지도 좁지도 않고 적당했다. 나이는 20대 중, 후반쯤 되었을까? 난 그들의 애정행각을 보고 분한 마음에 신호등을 건넜고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나를 추월하더니, 힐끗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 걸었다. 왜 내게 시선을 준 것일까? 그는 나를 추월하더니 우측의 횡단보도를 건너 그 쪽 인도로 영영 사라져버렸다. 난 비통한 기분으로 계속 그를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새벽 5:30분이었다. --- 08. 27
2호선 홍대입구를 탔다. 그런데 합정 쯤에서 매우 잘생긴 청년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쪽이 찢어진 청바지와 흰색 면티를 입고 있었는데 달콤하면서도 남성적인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찢어진 청바지에 그의 가느다란 털도 약간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매우 섹시했다. 그는 이어폰을 꽂고 아이폰을 보고 있었고 시종 내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둘의 바지가 부딛쳤을 때 나는 쾌감과 동시에 불안을 느껴 목구멍을 여러번 삼켜야 했다. 나는 한동안 나의 바지를 그의 바지에 밀착했다. 영등포구청에서 내려야 할 때쯤 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아이폰을 보는 척하며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완벽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교실에서 잠깐 보았던 그 눈이 동글동글하고 코가 오똑한 동급생과 닮았다. 예상외로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영등포구청에서 내렸는데, 나갈 때 다시 보여준 그의 옆모습은 더없이 완벽했다. 나는 얼른 그를 따라내려 그의 뒷모습을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걸으면서 얇은 청바지의 엉덩이선이 윤곽이 잡히며 실룩거리는 모습이 야해 보였다. 게다가 그의 큰 키는 그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당장 그를 쓰러뜨리고 청바지를 핥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정신없이 애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환승을 해야 했기에, 또한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오랜 산책 끝에 깔끔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용기를 내서 그와 대화할 기회를 놓쳤다. 아침 8:30분의 일이었다. 나는 지금 그것을 후회한다. 앞으로는 미친놈으로 불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름이 뭔가요?" 따위의 말을 붙여 이상형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오래 남기도록 해야 겠다(아무런 이벤트 없이 떠나버리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니, 미친척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를 떠나보낸 뒤 7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계속 괴로워하고 있다. 이제 그만 놓아버리자. 동성애자의 짝사랑은 너무 고통스럽다. --- 8.27
오전 11시경 달라라마에서 보았던 단발머리의 상큼한 소년. 눈이 마주쳤다. --- 9.07
자전거를 타고오던 금발의 서양 청년. 약간 피버 피닉스랑 흡사했다. 그 아이 생각에 다음 수업을 못 들었다. --- 10.24
ㄱ금발 백인애. 길거리에서 봄. 베이지색 바지. 완벽한 옆선 배우같은 모습/ 5/8
사랑고백 차였다. 백인. 7월달
원주역 그 야리한 꽃미남 시선마주침. 화장품 가게 두리번 거렸음.
해운대 거리 앉아있던 콧날 있는 미남. 여자친구와앉아서 음악듣던 미남.
원주로 돌아오던 길에 버스정류장에서 보았던 미소년.
- 해운대 여행. 7.28일
롯데리아 여자친구랑 같이 서 있는 훤칠한 키, 흰 피부의 미남. 윤한별이 생각남.
따라가보니 화장품 가게 앞에서 여자친구랑 같이 들어감. 옆모습만 봄.
8.02일
엑소 카이 닮은 남학생 되돌아 나를 쳐다보다
8.26
심리학 교실 - 흰색옷 남학생(나를 쳐다보다)
서점 - 남학생1 / 남학생2(나를 쳐다보다 시선 돌림)
벤치 - 남학생 (나를 빤히 쳐다보다)
커플.
9.01
지하철 키 크고 머리 가르마탄 청바지입은 세련된 남자애
훈훈하게 생긴 코 오똑한 고딩
집에 돌아올 때 보았던 양복입은 남자애 (나를 쳐다봤다)
9.02
같이 발달심리학 수업을 듣는 남자애 (규현을 닮음)
법학구관 발달심리학 수업 들어가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뭔가 말을 하려던 여드름있는 남자애
이 아이 때문에 미치는줄 알았다
9.08
새벽 3시 어떤 여자애가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하자,
"네에"하고 귀엽고 시크한 목소리로 말했던 긴 머리 잘생긴 청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가는척 하면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더 쳐다보아야 하는데, 그는 택시는 타고 가버렸다.
9.11
훈 고딩.
고대 돌아갈 때 본 미소년. 오후 5시.
청바지가 섹시.
긴 일자머리 오똑한 코 하얀 피부
거리를 걷다 뒤를 돌아 나를 봄.
내가 다가가 이어폰을 빼라고 재촉했지만 처음에는 무반응.
"동원 글로벌 아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
뭔가 말을 더 붙이고 싶었는데 유감.
9.17
의왕역으로 면접보러 가던 날
되돌아올 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훈남
긴 머리카락에 오똑한 코, 이어폰 꽂고 자기 일에 집중
반바지에 살짝 다리가 보이는게 섹시 (서 있었다)
빨고싶고 박고 싶었다.
금정 역에서 나도 내릴 수 있었는데 왜 안 내렸지 뭇내 후회막심
내릴 때 비친 그의 모습은 더 잘생겼다.
9.31
의왕역 가던 길에 본 키가 훤칠한 모델포스 훈남.
검은색 정장 자켓을 입고 있었다. 너무 빛났다.
코도 오똑하고.
키가 훤칠한 회사원.
마지막으로 마스크끼던 때 내 옆에 앉았던 청년
청바지 입고 머리 붉게 염색 까리하게생겼다
박고 싶었다
청바지가 살짝서로 맞닿았다
내가 힐끔힐끔 쳐다보는걸 본인도 느낀듯
정차할 때쯤 멀리 가버림
10월 20일
동대문에서 본 매장직원 훈남 나랑 시선이 마주쳤다
// 다른 남자들과 함꼐 앉아 있던 꽃미남 상인.
투블럭으로 염색.
콧대가 높았다.
말하고 싶었지만 일하러 자리를 뜸.
10월 23일
훈남 커피숍 직원/
담배피는 훈남 내 동네 앞에서
말걸고 싶었는데 좀 더 뻔뻔해져야 겠다고 결심.
10월 25일
발달심리학 수업 끝나고
본 미소년.
눈이 인피니트 엘 닮았다.
친구들ㅇ랑 얘기하고,
어떤 여자애랑도 얘기함.
노래방 꽃미남 코가 오똑
안경쓴 뚱뚱한 친구랑 같이 옴
원빈처럼 미간도 높음. 남성적인 코.
튀는 의상. 구두 신음.
내 쪽으로 몇번 시선을 돌리긴 했음.
차이더라도 번호를 딸걸 아쉽다.
10월 27일
건대입구
고기집 알바 꽃미남
11월 11일
태민 닮은 잘생긴 남고딩
그 하얀피부에 오똑한 코의 옆면을 보고 더 쳐다보고 싶었지만
여고생들 눈치를 보느라 근처로 가지 못하고 그냥 쓸쓸히 제 갈길 갈 수밖에 없었다.
11월 19일
조국교수를 닮은 코가 오똑한(특히 옆선이 예술) 훈남이 고대 게시판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친구랑 같이 안암 5가 거리를 걸음.
11월 24일
산책 도중 본 잘생긴 남자애. 윤한별과 살짝 비슷? 코가 오똑하고 짜임새가 훌륭했다.
키가 훤칠. 머리는 붉은색 염색.
고려대병원이 어디냐고 물었다.
다음 번에 훈남을 보면 길을 묻고, 쓸데없는 말을 덧붙히며 반응을 관찰해야지.
12월 10일
동대문 산책하다본 꽃미남. 훤칠한 키에 청바지, 하얀셔츠, 오똑한 코 잘 어울림.
앞모습은 약간 변요한 닮은듯?
쫓아갔으나 놓쳤고, 다시 기적적으로 조우.
고대병원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글쎄 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답함.
다음번에는 여자친구있냐, 잘생겼다, 이런 식으로 좀 더 길게 말해야지!
12/18 오전 4시 경
8월 16일 일산에서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공덕역)에서 봤던 앳되고 반듯한 인상의 아이. 짧은 청바지에 긴 머리, 청순한 인상. 따먹고 싶었다. - 8/16/16
아아, 기억이란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구나.
진실로 모든 걸 소유할 수 있었던 칭키스칸이 부럽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길.
1) 도덕은 존재하는가?
1. 선과 악의 상대성: 다양한 풍습. 얼마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배우. 채근담.
이타적 진화론. 파리는 왜 죽이는가. 진화론적으로 문제가 없기 때문.
본능이 이기적이라면 왜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안되는가. 자연주의적 논증오류긴 하지만.
2. 낮은 본능과 높은 본능
선과 악의 이분법(dichotomy) 자체가 문제.
인간에게는 선과 악, 두개의 본능이 모두 내재. 이기적과 이타적 예. 음과 양. 의식의 만다라 지도 켄 윌버. 차크라.
선을 따르면 선이 생기고, 악을 따르면 악이 생김. 뇌의 창발적 특성.
3. 그러면 보다 상위의 본능이란 무엇일까?
제러미 러프킨,뇌내혁명 - '완전'과 '불완전(결핍)'. 권력욕과 사이코패스에서 볼 수 있는 뇌.
결론: 기독교 변증론자나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도덕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도덕은 있다.
2) 왜 천재들은 동성애자들인가
케임브리지
일부러 도발적인 제목.
질병, 범죄, 모두 반박 (진중권).
자연주의적 논증 오류긴 하지만...
인드라.
3)
잘난 사람은 없다. 잘난 환경이 있을 뿐.
개츠비
개인적 귀납오류
카르마의 기원.
인간이데아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 생물학 r/k이론,
역사적 기후변화 발해, 한반도 고대사, 산업혁명, 1만시간의 법칙, 386세대
서양인들주체
송듀율 내재화
범죄심리학시대정신3, 유전자와 단백질외모
천성성격 무시할수 없다, 이원성의 해소
환경 말콤 글래드웰에 대한 핑커의 비판
4) 일드 트릭 분석: 전통문화의 현대화
5)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부모 하루키
다른 세계
6) 신자유주의와 GDP(경제성장)의 함정
- 참조: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이지 않다
룰라
소재
1. 친하게 지낸 형제. 항상 같이 붙어 다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죽자, 나머지 사람도 시름시름 앓더니 죽게 된다. 유언으로 형제 무덤의 3m 반경에 자기 시체를 묻어 달라 하였다.
2. 명황제 주원장에게 철이 아닌 때 멜론이 났다하여, 이를 경사스런 징조라고 보고한 장씨. 그는 하사금을 받는다. 나중에 그의 동생은 억울하게 반역죄로 억류되었는데, 이러한 행위의 부당함을 호소하던 장씨마저 감옥에 수감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유배지에서 처형당한다. 장씨의 아들인 리는 죄인의 아들로 유배지에서 힘든 생활을 꾸려 나가고, 예전에 백년가약을 맺었던 색시의 도움으로 꿋꿋하게 삶을 이어나간다(그 색시의 아버지는 예전에 장씨 집안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것을 취소하려고 하였으나, 사람은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딸의 설득에 동해 결국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들이 낳은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실로 훗날 장원급제를 하여 장씨 일가의 명성을 되찾게 됬다. 인생사 새옹지마.
3. 순결을 지키다 죽은 전통적인 여성. 순결을 비웃다 죽은 모더니스트 여성.
4. 두 남성을 짝사랑한 여성. 그러나 사회적 신분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한이 맺혀 죽은 여성.
6. 다름 아닌 할머니로부터 여성차별을 받은 소녀.
7. 순수한 소년. 그렇지만 세상에 이리저리 치여 냉소적인 시각을 가진 인간으로 자라난다. (흑의 계약자 주인공?) 재즈 음악.
8. 진시황의 무덤을 축조했던 장인. 그 예술혼으로 유례없이 웅장한 무덤을 만든다. 그러나 무덤을 완성하자마자 건축의 비밀이 새어나갈 것이 두려웠던 진시황에 의해 암살당한다.
9. 조선시대 과거시험 경쟁. 소과 대과
10. 서울 4대문. 간츠.
11. 출생시 뒤바뀐 운명
12.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의 풍속은 사람을 잘 죽이는 것을 담용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살인을 많이 하는 자는 비록 저잣거리의 천한 사람일지라도 그 명성이 드높다… 그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즐겨하는 풍속이 이와 같다.” (책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저)
1607년(선조 40년) 단오절(5월 5일)에 에도(지금의 도쿄)에 있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다짜고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칼과 창으로 서로 마구 베거나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조차 일반적이지 않은 풍습이었던만큼 진기했던 이 사건은 조선통신사의 기록에 의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멀리에서도 장정들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다. 그들은 창과 칼을 메거나 들고 시위를 벌인 다음, 수천 명씩 떼를 지어 진을 치고 대치한다… 각 편은 정예를 내보내 칼싸움을 한다.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는데 서릿발 같은 칼날이 부딪쳐 불꽃을 튀긴다. 서로 앞다투어 죽이고, 죽는 사람을 봐도 굳세게 나아간다… 죽은 자가 많게는 40여 명에 이르렀다. 그 밖에도 어깨가 잘리고 다리를 베여 상처를 입고 돌아온 자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 싸움은 죽인 자의 숫자로 승부가 정해진다.” (책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저)
기록에 따르면 일본 전 66주에서 서로 싸움을 했다고 한다. 교토만이 예외였는데, 싸움 대신 무늬 선반을 이용한 연극 놀이를 했다. 당시 조선통신사들이 묵고 있던 숙소 근처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는데, 일본 측 관리들이 외국 사절단에게 이런 광경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요란스럽다면 금지하겠다고 물어보았다. 조선통신사는 “나라의 풍속이므로 금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답했다. 이 역시 우리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13. 이탈리아 포메글리아
이곳은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현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귀신섬으로 불리는 포베글리아에는 1968년까지 정신 병원으로 이용된 시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의사는 환자를 주기적으로 칼로 죽였으며 결국은 자신도 건물의 종탑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포베글리아의 어두운 과거는 심지어 더 어두워지고 있다. 흑사병의 한 형태인 선페스트와 흑사병이 돌았을 때는 환자의 격리 수용소로도 이용됐었다. 160,000명이 넘는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는데, 대부분의 시체는 화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포베글리아를 단체로 방문한다는 소문이 간혹 들리지만 관광객에게는 물론이고 지역 주민에게도 이곳은 완전히 금지된 구역이다.
14. 런던 화이트 신사 클럽
화이트 신사 클럽은 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고급의 회원제를 자랑하는 클럽일 것이다. 회원은 모두 남성이고 다수의 영국 왕족이 이 클럽 회원이었다. 찰스 왕자도 그중 한 명인데 다이애나비와 결혼식 전에 주류 회사 볼랭저가 주최한 총각 파티도 여기서 열렸다. 당구장, 바, 식당이 따로 위치하며 "가을에는 뇌조, 회색 다리 꿩 등 다양한 야생 동물 메뉴"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이 클럽의 회원들은 도박을 좋아하기로도 유명한데 모든 내기는 책에 기록된다고 한다. 1816년에 알바니 경이 친구와 3,000 파운드(약 511만원. 지금도 엄청난 금액이지만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내기를 했는데 창문에 붙은 빗방울 중에 어느 게 먼저 아래로 떨어질 것인지를 맞추는 것이었다. 화이트 신사 클럽을 방문하려면 회원의 초대가 있어야 한다.... 행운을 빈다.
15. 노스 센티널 섬
파란색 바다로 둘러싸인 이 아름다운 섬은 관광객이 출입할 수 없다. 하지만 정부에서 이러한 결정을 한 건 아니다. 노스 센티넬 섬에는 약 50~250명의 원주민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언론인, 도움 단체 등 누가 되었든 활과 화살로 방어를 한다. 이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드시 방문하고자 해도 지형이 위험하기 때문에 일 년에 약 두 달만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구글맵으로 여행할 수 있음에 위안삼아야 할 것 같다. (구글맵 보기 클릭!)
16. 이탈리아 로마 교황성의 비밀문서
소설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 정도가 아니라면 교황청 비밀문서 기록 보관소에 출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연간 약 1,000명 정도의 연구자들에게만 도서관이 공개된다. 이곳에는 다양한 공문이 소장되어있는데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선언 요청문, 과학자 갈릴레오의 판결 서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문서 등 책 선반의 길이만 83km라고 한다. 문서 보존원들은 현재 보관소 내에서 발견된 미켈란젤로의 편지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으로 바쁘다. 다빈치 코드에 나올 법한 일이다.
17. 16세기 진흙 고층도시 시밤
18. 가을연가 출생의 비밀, 신이시여 조금만 더 오해 -> dramatic irony의 활용
우연, 오해 -> 중경삼림, 가을연가, 신이시여 조금만 더
19. 부모-자식 형사소송
20. 박정희 경호실장
21. 문세광, 일본에 이용당함
22.
저는 밴드증후군으로 오른손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현재 중학교 졸업 이후 학교 밖으로 나와 전국을 유랑하며 여행을 다니거나 때론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고, 싱어송 라이터가 되기 위해 음악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목공예 공방
23.
Rare baseball cards found in Ohio attic could work million dollars
http://www.foxnews.com/us/2012/07/10/baseball-cards-found-in-ohio-attic-could-be-worth-millions/
DEFIANCE, Ohio – Karl Kissner picked up a soot-covered cardboard box that had been under a wooden dollhouse in his grandfather's attic. Taking a look inside, he saw hundreds of baseball cards bundled with twine. They were smaller than the ones he was used to seeing.
But some of the names were familiar: Hall of Famers Ty Cobb, Cy Young and Honus Wagner.
Then he put the box on a dresser and went back to digging through the attic.
24.
지옥도 - 제니게바를 모티브로 최악의 현실을 가정. 카이지 참조. 헬조선의 극단적 형태. 아, 소박하고 꿈꿀 수 있던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이 좋은 것이었다. 뭐든지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노력하는 것이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길일 뿐.
25.
한국사에 등장하는 '역관'의 외교 및 무역활동에 관한 창작 시나리오 개발
(예: 유길준, 한국의 지정학적 외교학적 위치, 중인 중산층, 연암의 청기행 청문물에 대한 압도적 경이)
26.
의기를 지녔던 마지막 왕족 의친왕.
가난하게 사는 독립운동가들.
- 손병희:
한편 이 때 의친왕은 도쿄에서 손병희를 우연히 만났다. 손병희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가 마침 의친왕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하였는데 이 때 시종관이 영어로 무언가 의친왕에게 아뢰자 손병희가 "내 나라 국왕을 모시는 놈이 어디 감히 외국말로 아뢰느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의친왕이 "그대가 옳다."며 다독였고, 이러한 손병희의 의개에 감복해 통교하게 되었다.1911년 봄에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했다. 이어서 8월에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하였고, 그 이듬해에 봉황각을 세웠다. 봉황각은 바로 3.1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 1915년 의친왕은 신한혁명당[8]이 고종황제를 베이징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위반사건[9]에도 연루되었다.
-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제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로 임병찬 등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 1919년 11월 9일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려던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3.1 운동 직후인 4월 13일,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해임시정부를 창설한다. 이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아직 미약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해임시정부에게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대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친왕 망명을 계획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조선 황족의 입을 통해서 조선인들은 마음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선전전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게다가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의친왕의 성명에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황족 되기를 원치 않는지라.”라고 언급했다
- 경주 최 부잣집 12대 마지막 부자로 알려진 최준을 돕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무역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나섰다는 것이다.
-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공족으로서의 작위와 전 재산을 장남인 이건(李鍵)에게 넘겼다. 이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그런데 정작 장남 이건과 사이가 나빴다는 증언이 있다.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차남 이우는 총애했음에도 이건은 미워했다"고 술회했다. 술을 마시면 이건에게 "일본으로 가서 살라"며 화를 냈으며, 이우가 귀국할 때는 직접 서울역으로 마중 나가놓고 이건이 귀국할 때엔 일부러 피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대우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만큼, 일제에 부정적이었던 이우와 달리 일제에 순종했던 이건이 미덥지 않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건은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하거나 1945년 8월 12일 황족회의에서 히로히토를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족한 것이 있었다”라 하였으며, 어떻게든 조선인 박찬주[13]와 결혼한 이우와 달리 일본인 마츠다이라 요시코[14] 결혼한데다,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성으로 다이쇼 일왕이 묻힌 모모야마(桃山)를 성으로 정하며 “아버지와 연을 끊고 싶어 귀화했다”고 하는 등 노골적으로 자신을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여겨 아버지인 의친왕과 사이가 나빴던 인물이다.#
- 이우는 1945년 6월 일본 육군 중좌(중령)로 진급해 일본 본토 전출을 명받고 8월6일 말을 타고 히로시마를 지나다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 숨졌다.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 사실 대한제국의 황실 인사 중에는 의외로 자동차를 좋아하던 인물로,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 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게 바로 위에 적힌 대로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의 행적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 이전에는 자전거 광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탔다고 알려진 차는 미국의 오버랜드
- 고종황제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국제 감각과 경험이 많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면이 있어 보이지만, 일제 하에서 감시라는 명목하에 사실은 어느정도 보호받고 대우받으면서, 즉 호의호식하면서 호색한으로 살았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조선은 망했어도 왕조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침략에 저항했다면 광복 이후, 왕실의 대우가 그리 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이 왕조를 싫어했어도 개인적 감정으로만 왕조를 배척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이승만에게 왕실의 무책임함은 왕족들을 배척하는 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 결국 왕실은 일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신망을 잃어 갔고, 그런 왕조에 실망한 양반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상당수가 아나키스트로 급진화된다. 의친왕이 과연 그런 왕조의 무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적어도 의친왕이 천수를 누리고 14명의 비공식적인 여자들에게서 12남 9녀의 자손을 낳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3년상을 치러내면서 ‘도대체 이 의식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가치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낙선재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갔어요. 낙선재는 대한제국 시절 가장 불행했던 조선 황족들이 기거했던 곳 아닙니까?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일본에 볼모로 갔다 정신병을 얻어 돌아온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모두 그곳을 거쳐 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명할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오르더군요
- 3남 이방은 후손 없이 1951년 폐렴으로 숨졌다. 친족에게 알려진 바로는 왕궁이 싫어 청계천 밑에서 걸인들과 생활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한다. 4남 이창 역시 서울 상도동에서 어묵장사를 할 정도로 힘겹게 살다 사망했다. 5남 이택은 장면 총리 시절 구황실재산관리사무총국장을 지냈다. 1979년까지 청와대 옆에 있는 칠궁에서 11남 이석 씨와 함께 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7남 이광은 1948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란갔다 1952년 해운대에서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익사했다. 8남 이현은 평생 수원의 평화수녀원에서 그림을 그리며 독신으로 살았다. 1996년 2월17일 수원시 장안구 평화양로원에서 숨졌다. 10남 이갑 씨는 미국에 생존해 있다. 그의 아들 이상협(45) 씨가 지난해 황사손으로 추대된 이원 씨다.
27.
-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최초의 증권은 미두를 이용한 선물이었다. 채만식의 탁류에 나오는 미두(米豆)는 쌀 선물 거래. 이 미두 거래로 흥했던 인물로 반복창이라는 사람이 있다. 미두 중매점 종업원으로 알음알음 미두 시장에 대해 알아간 그는 결국 1920년 한 해에 엄청난 거금을 벌어 40만원(오늘날 돈으로는 400억 가량)이라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1919년 그가 처음 미두시장에 뛰어들 때의 자본금이 500원(현재 돈으로 5천만원 가량)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수익률(80000%)이다. 이 돈으로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당시 조선 최고의 미녀라는 김후동과 결혼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미두로 흥한 그는 미두로 망했다. 정점에 올랐을 때 손을 털었어도 괜찮았을 터인데, 미두 예측이 계속 빗나가자 2년 만에 모든 재산을 떨어먹고 사기를 쳐서 감옥에 갔다오게 된다. 돈 보고 결혼한 아내는 당연히 이혼하자고 했고, 크고 아름다운 집도 당연히 남의 것이 되었다. 결국 30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정신이상까지 일으켜 비참하게 살다가 4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반복창이 ‘미두왕’이 된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의 흉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미두 시장을 조작하는 것은 결국 총독부였으며, 결정적으로 미두 시세를 결정하는 곳은 미두 시장이 열린 인천이 아니라 일본 오사카였다. 총독부는 미두 시장에서 조선인의 돈을 긁어 모으기 위해 반복창을 미끼로 활용했고, 속아서 모여든 조선인들은 제2의 반복창을 꿈꾸며 미두 시장에 돈을 쏟아부었고 그 돈을 총독부가 쓸어 담아갔다. 그리고 단물을 다 빨아먹은 후 토사구팽으로 반복창의 돈까지 다 가져간 것이다. 출처, 반복창을 아직도 꿈꾸는가 그 외에 반복창에 대한 다른 평들을 살펴보면 독립운동이나 자선 사업 등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일제에 협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망한 것 자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공했다고 해도 대한민국에 긍정적으로 공헌하기보다 자본을 등에 업고 악행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높았다. 참고기사, 미두왕 반복창의 인생유전 (총 8페이지)
28.
황해진
- 사업을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어렵고 답답한 시간이 몇 개월 째 흐르고 있을 때 기적같이 기회가 찾아왔다. 프랑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몸으로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 인생의 모진 어둠을 밝히려는 듯이 기적같이 찾아온 한 줄기 빛, 그것은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무수한 명함들에는 하나같이 특징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명함은 소형 활판 인쇄물이었다. 흰 종이에 검정 글씨가 다였다. 디자이너를 불러 슬라이드 자료실에서 분야별 필름 박스를 가져오라고 했다. 전자 회사는 전자제품 사진을, 컴퓨터 회사는 반도체 칩을, 자동차 회사는 그 회사 자동차 사진을 이미지 컷으로 사용하여 고급 오프셋 인쇄로 컬러이미지명함샘플을만들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렇게 오프셋 인쇄로 제작된 컬러이미지 명함은 명함 시장을 확 바꿔 놓았다.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주요 일간지는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신문과 잡지에 기사화되었다. 흔한 말로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말을 실감했다. 매스컴의 위력은 대단했다. 본래 있던 광고 사업부와 인쇄 사업부보다 명함 사업부가 몇 배나 더 커졌다.
- 사업 도산 마무리는 살벌하다. 결국 돈 문제다. 큰돈이든 작은 돈이든 돈 앞에서 사람은 예민해진다. 부모 형제도 몰라보게 하는 것이 돈이다. 손해가 예상될 때는 가슴을 후벼 파는 말만 골라서 한다. 어제까지 오간 정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돈이 인품이고, 진리이고, 정의가 되는 순간이다. 사업 실패자는 죄인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정확하다.
- 마지막 날이었다. 사무실 집기, 컴퓨터, 공장 기계 등 밀린 임대료로 주고, 아내와 둘이서 문을 닫았다. 19년 전 처음으로 회사 문을 연 날도 아내와 둘이서 열었고, 그 문을 완전히 닫은 날도 아내와 둘이서 닫았다. 파란만장했ㄷ너 19년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서던 그날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의 허망함과 절망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통곡을 하며 몸부림쳤다.
- 생식사업을 하며 전단지를 뿌렸다. 소형 현수막을 제작하여 골목 전봇대에 매달아놓았다. 불법으로 하는 일이라 밤 12시가 넘어 새벽까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작업을 해야 했는데, 담 넘어 개 짖은 소리가 가장 무서웠다.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당할까 봐서였다. 한번은 아들이 입시 공부해야 할 시간에 밤을 새워 이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 약간은 서글프면서도 애틋한 추억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험한 일도 많이 겪었다. 병원 병실을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뿌리다가 경비원에게 몽땅 뺴앗기기도 했고, 한번은 사무실까지 끌려가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고 서약서도 써야 했다. 그뿐인가? 새벽시장이 열리는 동네문 의류도매시장에서 전단지를 뿌리다가 나이 어린 경비원들에게 전단지를 빼앗기고, 아파트 경비원에게 일장 훈계를 듣기도 했다.
나는 동대문 의류 상권에 불을 붙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동대문에 대형 의류타운이 들어설 때 맨 처음 들어온 회사의 오픈 광고를 내가 직접 이끌었다. 그 회사가 크게 성공하는 바람에 오늘날 동대문 의류타인이 생기게 되었다. 크게 성공한 그 의류타운 회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고, 수년간 광고 일을 하는 동안에는 겨비원들에게 90도 인사를 받았다. 그랬던 내가 불과 몇 년 만에 입구에서 그 아이들에게 붙들려 일장 훈계까지 듣게 된 처지가 된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러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전단 광고를 멈출 수는 없었다.
29.
유토피아 교육
30.
* 강명화와 장병천
* 김우진과 윤심덕 - 예술가의 비극
* 나혜석
* 김원주 (일엽스님) 과 오타 세이조
김원주와 백성욱 (동국대 총장)
* 김명순과 이응준 (최초의 육군참모총장)
* 홍옥임과 김용주 - 동성
* 허정숙 - 붉은 전사. 후일 공산당 총비서
* 박헌영과 주세죽
31.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 압바스 왕조 5대 칼리파로, 천일야화에 가장 자주 등장한다. 조선왕조 세종대왕처럼 성군으로 칭송되며, 아랍 제국 최고 권력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재위(786~809년)는 가끔 몰래 거리로 나오는 습관이 있었다.
32.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여러분은 왕좌를 위해세금을 가중시킵니다. 여러분이 공포한 법을 조심하십시오. ㅕ러분이 짓누른 고통당하는 다수를 조심하십시오. 눈을 내려 여러분의 발밑을 보십시오. 오, 위대한 분들이여, 보잘것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한 자들은 죽어가면서 고귀한 분들을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중단입니다. 밤이 오면 누구도 낮의 끝자락을 지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에고이스트입니까? 타인을 구하십시오. 배의 파멸은 특정한 승객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난파를 당한다는 것은 모두의 일이니까요. 오! 심연은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웃음은 두 배로 커졌으며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위해서는 이야기가 정상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외면은 코믹하고 내면은 비극적인 것, 그보다 더굴욕적인 것은 없다. 그보다더 화가 나는 것은 없다. 괭플랜은 그의내면에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속에서작용하기를 원하였고, 그의 얼굴은 또다른 의미 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끔찍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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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거림의 카오스에서 불분명한 탄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르고노스의 얼굴!" "그게 무슨 얘기지?" "의회를 습격하라!" "수치다! 수치야!" "폐회하라!" "안돼! 그가 마치게 해라!" "말해라, 광대여!"
뼈 속 마디마디에, 천길 낭떠러지로 이어진 아가리를 벌린, 추락의 검은 한기를 늰 사람, 그런 사람은 괭플랜이 느꼈던 것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그는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청중은 절벽과도 같았다.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는 한 마디를 하는 사람이 언제나 존재한다.
스카스데일 경은 모인 사람들의 인상을 하나의 외침으로 요약했다. "이 괴물이 여기 뭐하러 온 거요?"
괭플랜은 정신을 잃고 분개하였으나 심한 경련 속에서도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그들을 매우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하러 왔느냐고 하였나요? 나는 무섭게 하기 위해 왔어요. 내가 괴물이라고요? 아닙니다. 나는 백성이지요. 내가 예외적인 인물이라고요? 아닙니다. 나는 평범한 인물이에요. 예외는 당신들이지. 당신들은 꿈이고 나는 현실입니다. 나는 남자에요. 나는 무섭게 생긴 웃는 남자입니다. 누구 때문에 웃을까요? 모두 당신들 때문이지. 그의 웃음은 무엇일까요? 당신들의 죄, 그의 고통. 그는 당신들 때문에 그 죄를 던지고, 그 고통을 뱉고 있습니다. 나는 웃어요. 나는 웁니다."
33.
576년 신라의 화랑제도 이전에는 사다함이 존재. 16세의 나이로 전쟁에 참가 공을 세워 토지를 하사받음. 가야인 포로를 풀어줌. 무란광이 죽자 7일 뒤 17세의 나이로 죽음.
34.
-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 조정과 관련된 이슬람인들이 많이 이주해 오거나 관리로 파견되었다. 예를 들어 충렬왕의 아내인 제국공주가 자신의 시종으로 데려 온 이슬람인 삼가는 충렬왕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고려에 귀화하여 덕수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밖에도 이슬람인이 개경 인근에 집단촌을 건설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쌍화점이란 고려가요의 쌍화는 이슬람인들을 의미한다는 사실 등은 서역과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35.
-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지만, 무속신앙은 여전히 번창하였다. 조선초에는 무속을 관장하는 관청인 활인서를 설치하였는데, 이 활인서는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국무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토록 하는 무속과 의료의 기능을 함꼐 가지고 있던 관청이었다. 그리고 마니산에 단을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도 조선시대부터이다. 이 밖에 산신과 연관해서 암석을 숭배하는 신앙이 토착화되었으며, 가택 안에 많은 신들이 등장하여 편안과 장수, 무병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36.
- 새해 첫날 새벽에 복조리를 사는 풍속. 조리는 남보다 먼저 사야 복이 많다고 해서 이른 새벽에 사는 것. 여기 엿이나 성냥, 돈 등을 담아 벽에 걸어 두는 것으로 일종의 기복행위.
- 설날 저녁에는 소발과 야광귀 쫓기의 풍속이 행해진다. 소발이란 머리를 빗을 때 빠지는 머리털을 1년 동안 모아 두었다가 설날 저녁에 태우는 것. 야광귀는 설날 밤에 하늘에서 내려와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다고 한다. 야광귀에 의해 신을 잃은 사람은 그해에 재앙이 따르게 된다고 하여 설날 저녁에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고 자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 설날 대문에 갑옷을 입은 장군의 그림을 붙이거나 역귀를 물리치는 신인 종규가 귀신을 잡는 그림을 붙이는 풍습.
- 삼재를 쫓기 위해 세 마리의 매를 그려붙이기도 한다.
- 1월 14일 밤에도 액운을 쫓는 여러 가지 행사가 행해진다. '제웅'이라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개천에 버리는 풍습.
- 상원 날(15일)을 전후해서 답교와 지신밟기가 행해진다. 저녁에 거리에 나가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자기의 나이만큼 다리를 건너면 1년 동안 각질이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데서 유래한 풍습.
- 10월은 상달이라 해서 가장 신성한 달로 여긴다. 10월에는 각 가정에서 성주제를 지낸다. (개천절)
37.
- 연애혼은 중매혼과 달리 남녀간의 사랑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자료가 많다. 신라사히ㅗ에서 연애혼이 유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로 김춘추와 아지의 혼인설화를 들 수 있다.
38.
<삼국사기> 제4권 진흥왕 14년조에 의하면,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황용사라 이름을 지었다.
39.
기생 정칠성
금죽이라는 기생 이름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1924년에는 여성 해방운동을 위한 조선여성동우회를, 25년에는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삼월회를 결성했으며, 27년에는 항일 여성 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장이 되는 등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에 몸을 던져 활동했다. 이후 그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월북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국내파(남판) 인물이라는 이유로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여성들의 계몽에 강력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여성이었다.
http://www.culturecontent.com/board/boardView.do?board_id=BOARD006
- 홍길동과 오키나와
고구려계 당나라 장군으로 서역(파미르 산맥까지)을 평정한 고선지 장군; 고구려인의 피는 못속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46533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나폴레옹보다 낫다"
[한국 고대사 속속들이 17편] 고선지의 소발율국 정복기
11.04.04 13:07l최종 업데이트 11.04.04 15:43l
김종성(qqqkim2000)
망국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당나라는 물론, 저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명성을 날린 고선지(?~755년).
그는 한민족의 DNA에 내장된 대륙에의 욕구를 맘껏 분출한 인물이다. 고구려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면, 그가 그런 족적을 남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고선지가 활약한 서기 8세기. 이 시기에는 이슬람권과 당나라의 대결이 격렬했다. 문명의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기의 접전이 벌어졌다. 서아시아를 장악한 이슬람권은 자신의 문명을 동쪽으로 전파하려 했고, 동아시아를 제패한 당나라는 자기의 문명을 서쪽으로 전파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트가 이슬람권과 제휴했다. 또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권과 티베트 편에 가세했다. 이슬람권과 당나라의 중간 지역이 대거 이슬람 편을 지지함에 따라 당나라의 안보는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위기이기도 했다.
이런 국면에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출현한 인물이 바로 고선지였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 '고선지 열전'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것으로 보이는 고사계(高舍鷄)의 아들로 태어난 고선지는, 20대 초반에 중국 서북부에서 유격장군에 특채되어 장군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인접한 지역에서 장군의 반열에 오른 탓에, 그는 중앙아시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책임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권 및 티베트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이슬람권 및 티베트와 동맹을 맺은 70여 나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니, 그렇게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의 성공 비결은?
고선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고선지 열전'에서는 "고선지는 용모가 수려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날래고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성공을 일군 또 다른 특성이 있다. 그것은 1999년 미국 영화 <식스 센스>에 못지않은 '반전(反轉)의 연출력'이다.
서기 747년, 고선지는 티베트 편에 가세한 소발율국을 응징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소발율국은 지금의 카슈미르 서북부에 있었다. 이 나라를 치기 위해 그는 1만 병력을 꾸렸다. 또 소발율국 언어를 구사하는 병사들도 확보했으며, 특수 작전에 사태에 대비해 소발율국 군복도 확보했다. 그뿐 아니라, 사령관 자신만이 아는 특수요원들도 부대 안에 잠입시켰다.
-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도 8살 때 교황 궁의 조각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갔었다. 그때 그가 로마로 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 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사람에게 '떠남'은 내면에 숨어 있었던 창의적인 자의식을 깨우는 중요한 경험이다.
나는 석파정이 간직한 이야기를 지금의 사람들과 나누고 미래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런 생각의 마지막에는 어쩌면 석파정이 처음부터 나에게 오기로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운명론자적인 믿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차례 주인이 바꿔가며 일 년 반이 지난 뒤에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도 선택권이 넘어온 것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이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찾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 김기창
-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게재해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쓰고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를 고발했다. <이혼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당시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토로 되어 있다.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흐트러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 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 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 튀겨 보라, 해~
그가 태어난 날 듕귁인들이 튀김요리를 둘러싸고 싸우고 있었고, 그 때 오간 말이 "이 재료 한번 튀겨 봐라 해" 였다고 한다. 이 말이 잘못 전해저 튀코 브라헤가 되었고, 아이의 부모는 아무 생각 없이 이 이름을 아이에게 주었다 카더라. 이는 카더라 통신이 전한 것이므로 매우 정확하다 카더라.
생김새[편집]
그를 다른 과학자들과 구별하기는 매우 쉽다. 그는 청소년 때 어찌나 막장 생활을 했던지 그의 코가 삐같이 되어 합금으로 코를 때워넣었다.? 참으로 괴상한 생김새에 괴상한 정신상태이니 언뜻 보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헷갈릴 만 하다.
업적[편집]
그의 관측기록은 매우 정확했다. 그는 이 기록으로 천동설을 지지했는데, 백괴스럽게도 이 기록은 그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지동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한 자료를 상반된 내용의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다니 과학자들은 참으로 백괴스러운 종족이며 감히 제자가 스승을 반박하다니 정말 막장이다.
게다가 그가 죽은 뒤에 그의 관측기록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하지 않아서 결국은 케플러를 도둑이 되게 했다. 이정도의 사제관계는 거의 막장에 가깝다.
사망[편집]
그의 인생은 죽을 때도 막장이었다. 그는 잔치집에 갔다가 체면을 차리느라 오줌을 참았다. 덕분에 방광이 터져? 죽고 말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과학시간에 화장실에 갈 변명거리가 생겼으니 그것만은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편집]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브라헤는 삶이 온통 막장으로 가득 찬 막장 과학자이며, 그와 요하네스 케플러와의 관계 또한 막장이다.
- 마종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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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9년 1월, 일본의 동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성 사람으로 서울에 유학하여 보성중학교와 중앙중학교를 다녔고 ‘항일학생운동’에 참여하셨다. 그후 정학, 퇴학을 당하는 수난을 겪던 그는 16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다시 시작할 정도로 조숙하고 진보적인 분이셨다. 당신은 식민지 이후의 조국의 앞길에 ‘어린이계몽운동’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어린 나이에 동화를 집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일본 생활의 은사인 소설가 기쿠지와의 인연으로 일본의 월간 잡지 『문예춘추』의 창간 편집위원이 되고 그후 독립된 월간 잡지 몇 개를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다.
어머니는 경남의 마산여고를 졸업하고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에 감동하여 일본에 가서 서양무용 공부를 한 한국인 최초의 발레리나셨다. 일본 무대에도 자주 서고 영화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으며, 외국 공연 여행 등 활발한 무용 활동을 했던 어머니는 「조선인의 긍지를 지키는 무용가」라는 제목으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그 글은 육사의 문학 전집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어머니는 결혼 직전에 무용을 그만 두셨다가 귀국 후 1950년대 중반에 이화여자대학교에 한국 최초의 무용학과를 창설하시고 20여 년간 학과장으로 한국 무용 발전에 공헌하셨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고전 음악을 들어야 했고, 책을 많이 읽어야 했고, 르네상스 이후의 그림들을 책으로 보고 미술 전시회로 자주 끌려다니며 학교 공부만큼 중요한 것이 예술을 올바로 감상할줄 아는 것이라고, 그래야 세상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해방 되기 1년 전에 귀국한 우리는 어머니의 고향이던 경남 진영에서 반 년쯤, 아버지의 고향인 개성에서 2년을 살았다. 다시 서울로 이사 와서 혜화초등학교에 정착하고 놀기 좋아하는 모범생 노릇을 하다가 6학년 때 한국 전쟁을 맞았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장면, 무더기로 죽어 있는 시체를 본 것도 다 그 시절이었다. 중공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우리는 외할머니가 사시는 마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우리는 하루 두 끼도 찾아먹기 힘든 고달픈 피난민 생활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나는 중학 입시 고사를 치르고 서울중학교에 합격한 후 내가 살고 있던 마산의 마산중학교에서 위탁 학생 신분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대구에 계시던 아버지의 주선으로 영남일보와 대구 매일신문에 학생 시를 발표했고, 학생 잡지『학원』이 창간되고 난 후 시를 실으면서, 1, 2, 3회 연이어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중학교,고등학교 학생으로 문예반, 신문반에서 과외 활동을 하여 전국 백일장 등에서 수상하여 학교 안팎에서도 유명 학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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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무렵, 나는 한동안 갈팡질팡거리다가 무시험 특차로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다. 학교 성적은 좋았지만, 물리, 화학, 수학만 되풀이되던 학교 생활은 나를 답답하고 따분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나는 문과대학의 박두진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연세문학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박선생님을 따라 등산도 하면서 예과 생활의 따분한 기분을 조금은 떨칠 수 있었다.
이런 대학 예과 시절에 나는 박두진 선생님을 통해 『현대문학』지에 세 차례의 시 추천을 받은 뒤 등단이란 것을 치뤘다. 그러나 가뜩이나 발표 지면이 적은 상황에서, 나 같은 신출내기에게 청탁을 해주는 곳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단지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서 선배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내 시에 대해 몇 줄의 칭찬을 해줄 때는 그런대로 시를 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1963년, 어느 신문에 김수영 선생님께서 쓰신 그해의 시단 총평 중 “올해의 수확은 마종기 시「정신과병동」이다”라며, 시 전문을 글 말미에 넣어주셨던 일과 그후 어떤 기회로 대학 선배가 되시는 그분과 둘이서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시시콜콜 내 문학을 격려해주시던 것은 아직까지도 참으로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63년 초,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공군 군의관이 되었고, 공군 본부와 공군사관학교에 근무하다가 선배 문인 한 분이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재경문인 한일회담 반대선언인' 명단에 내 이름을 넣은 것이 문제가 되어 군인사법에 걸려 치도곤을 맞고 영창 구류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천만다행으로 나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었고 그 8개월 후 의사 수련 5년을 목표로 미국의 오하이오 주로 떠나오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 생활한 첫 몇 해는 짧은 영어와 형편없는 의학 실력 때문에 무척 힘들고 바쁜 나날이었다. 문학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시인 김영태가 고맙게도 여기저기 시를 발표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준 덕분에 나는 미국에 살면서도 고국에 사는 것같이 자주 고국의 문예지에 시를 발표할 수가 있었다. 실제로 내가 미국에 온 후 10년 이상 김영태가 시를 써 보내라고 닦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 문학의 길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3인 시집을 1968년, 1972년에 각각 내게 된 것도 그 두 친구의 그런 고마운 배려라고 믿고 있다.
1976년에는 시인 최하림씨를 통해 세번째 개인 시집을 출간했다. 그 시집으로 ‘한국 문학 작가상’을 받게 되었지만 돈도 시간도 없어서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이후 내가 고국을 떠나기 전부터 가까운 친구였던 김병익, 김주연, 황동규, 정현종이 어울려 있던 계간 『문학과지성』이 발간되자 그곳에 작품을 수시로 발표할 수 있었고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내 네번째 시집『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처음으로 인세를 받고 출간하게 되었고 이후 시집은 출판사 덕에 많이 팔려서 20여 쇄나 찍을 수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1년에 평균 여덟 편 정도의 시를 고국의 문예지에 발표했고 그것을 모아서 5년에 한 번 꼴로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시집을 냈고, 그 시집은 또 출판사 덕분에 예외 없이 스테디셀러가 되어주어서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_‘편운문학상’ 수상 소감: 비틀거린 내 시의 40년(199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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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쓰기의 시작은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을 첫째로 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부모님은 피난 생활의 와중에서도, 그리고 정신없이 바쁘던 초,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 공부만큼 중요한 것이 예술 전반에 걸친 교양과 예술을 바르게 감상할 줄 아는 눈과 귀와 머리를 가지는 것이라며 그 방면에 관심 가지기를 바라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주위 친구보다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글쓰기 정도여서 여기저기 학생 잡지에 얄팍한 감상문을 발표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대학 초년병 때까지 이어져서 화집을 통해 겉핥기로 좋아했던 마티스나 세잔에 대한 단상, 판으로만 듣고 좋아하던 드뷔시나 라벨에 대한 인상을 시로 써서 멋을 부리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나마도 따라오지 못하던 주위 친구 앞에서 목에 힘을 주던 지지리도 부끄러운 문학청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의 그 부끄러움을 기억하기 싫어서인지 나는 아직도 전람회, 연주회에는 가지 않고 CD만 들으면서 음악을 아는 척하는 소위 예술 지식인을 존경하지 않는다.)
내가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내가 몹시도 망설이며 즐겨하지 않았던 의과대학의 본과 학생이 되면서, 특히 해부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부터였다. 내 앞에 통째로 누워 있는 시체를 찢고 자르고 만지면서 인체의 세부를 눈과 손과 가슴으로 느껴야 했던 그 새로운 경험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깊게 만들었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내 문학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시가 천천히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에서, 시쓰기와 시 읽기가 내 실생활에 거의 유일한 위로가 되어서 필요불가결의 조건이 되고 시를 쓴다는 것이 내 허영의 소산이 아니고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깨닫게 된 것은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 생활을 마친 후, 낯설고 물 설은 외국 땅에 와서 무지막지한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미국의 병원에서 보내준 비행기표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 중서부의 한 한적한 중소도시에 도착한 나는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고된 의사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영어도 서툴고 의술도 형편없었던 내가 돌보던 환자들 중, 그 첫날밤에 여섯 명의 환자가 숨졌는데, 그 중 80여 세의 백인 할머니의 죽음은 아무래도 내가 심전도를 잘못 읽고 잘못 시술을 해서 죽은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37년이 지난 이즈음까지도 그 조용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1년에 걸친 이런 인턴 생활이 내게는 지금껏 살아온 60여 년 중에서 제일 긴 한 해였고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이 시기가 내 문학의 새로운 시작에 결정적인 역할로 작용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바쁜 말직 의사 노릇을 하면서 어떤 때는 너무 바빠서 한 달씩이나 코앞에 있는 내 아파트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그 한 해 동안 나는 또 100명이 넘는 내 환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고, 삶과 죽음의 난간에 서서 고통의 마지막 신음과 삶에 대한 절절한 열망과 숨을 거두면서 어김없이 얼굴을 적시던 환자의 눈물을 보아야 했다. 비록 자라온 환경이나 인종이 다르기는 했지만 인간의 조건은 다 같은 것이어서 환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해주다 보면 어느새 서로의 속사정도 털어놓게 되고 가끔은 그들과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친구가 된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직접 할 수 밖에 없는 부검은 내게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환자의 부검률은 사상자 수의 7할 정도에 이를만큼 아주 높았고 병원의 권유로 많은 환자 가족이 부검을 허락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정치나 자기 애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친구를 죽은 후까지 내가 만나야 하는 부검은 나같이 허약한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이고 슬픔이었다. 담당 인턴은 부검의 전 과정을 꼭 지켜보아야 하고 부검 과정을 돕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며칠 전까지 키득거리며 머리를 쓰다듬던 그 친구의 머리뼈를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뇌를 집어내어 검사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철판 부검대 위에 묵묵히 누운 그 친구의 몸을 열고 폐, 심장, 간, 신장을 떼어내어 다시 세밀하게 자르고 끝도 없이 몸 주위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물로 씻어내면서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의사가 되려고 태연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마의 진땀이 먼저 알아보고 내 온몸을 적시고 머리가 어지러워 안간힘을 쓰던 날들, 그 어지럼증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시간만 있으면 시를 찾아서, 그리운 모국어의 단어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곤 했다.
물론 이와 반대로 사경을 헤매던 어린이를 며칠간 정성껏 돌보아준 끝에, 건강한 모습의 그 아이가 고맙다며 나에게 안길 때, 혹은 두 달 반 동안 200여 명의 산모들의 출산을 도와서 탯줄을 끊어주며 듣는 새 생명의 울음 소리는 내 문학의 밤잠을 자주 깨워주었다. 그 신비한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소름끼치게 느끼면서 그런 신선한 흥분을 날것 그대로 시로 쓰고 싶어서 안달한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환자를 보내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없이 지켜보면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자주 영혼의 옷깃을 보는 듯했고 그래서 외롭게 죽어간 수많은 친구 환자를 위해 무엇인가 더 해줄 수 있겠다는 느낌이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따뜻한 위로로 전해졌다. 모국어도 없고 가까운 친구도 하나 없는 외국에서 일상의 외로움에 오금을 움츠리고 공포와 슬픔과 환희의 절정을 매일 오가면서 살았던 몇 해 동안의 내 의사 수련은 엉뚱하게도 내 문학의 확실한 물꼬였고 내 시의 본향이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외국에 나와 사는 칠칠한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고국의 시인 노릇도 오래 즐기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는 것이다. _『문화예술』 11월호: 내 삶의 물꼬를 트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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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혹 교수님들이 시를 쓰는 건방진 놈이라고 미워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시를 썼다. 내가 주로 만나던 대학의 동기나 선후배에게 내 시가 실린 잡지를 읽어보라고 들이민 적도 없을 뿐더러 출판된 내 시집을 기증해도 그 중 열에 아홉은 책 속의 시 한 편 읽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 친한 친구나 주위 사람은 여느 문필가의 경우와는 다르게 내가 시인인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나와 30년 이상을 같이 산 아내도 내 시 한 편은커녕 시 한 줄 외우지 못하는 것을 안다. 나를 격려해주기 위해 시집이 나오면 축하해주고 강연 같은 것이 있으면 따라 나서주지만,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내 세 아들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나 잘 자라주었고 공부도 잘해서 지금은 집을 떠나 의사로, 변호사로 또 사업가로 큰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 똑똑하게 잘 자란 세 아들이 내 시를 한 줄도 못 읽고, 내가 한국의 시인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시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을, 내가 섭섭해하거나 탓할 것이 못 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국의 시를, 세계의 현대시를 자주 읽거나 쓰거나 또한 관심을 가진 친구가 내 주위에 없기 때문에, 일 년 열두 달, 낮에는 미국인 동료를 만나고 밤이나 주말에 한국 친구들과도 만나 술 한잔 나누면서도 그 중 단 한 번, '시'라는 단어로 화제가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남의 시들을 읽고 혼자서 뜯어보고 되새김질해보고 또 혼자서 시를 쓴다. 아무데서나 공연히 넋 놓고 시를 생각하다가는 정신 나간 놈, 공연히 고상한 척하는 놈으로 낙인찍히기가 쉽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무척 나를 외롭게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그런대로 살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아무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보물단지 같은 것을 혼자 음미하고 혼자 흥미로워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져 즐거움까지 느끼며 살고 있다. _『마종기 깊이 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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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2년 6월 말로 미국의 의사 생활에서 은퇴를 하였다. 몇 해 빠른 내 은퇴의 이유는 간단했다. 한평생의 외국 의사 활동은 그 정도로 끝내고 한국의 시인으로 활동 무대를 바꾸어보려는 것이다. 미국의 의사로 살려면 고국에 자주 가거나 오래 머물 수 없고, 어차피 의사가 남아도는 고국에서는 의사보다는 글쟁이로 내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생각해보면 20대 후반부터 60대 초반에 이른 미국에서의 의사 생활은 보이지 않는 누구의 극진한 도움의 연속이어서 내 자신,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밖엔 말할 수 없겠다.
외국 의대 출신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던 좋은 대학 병원에서의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수 있었고 어렵다는 전문의 시험에서 골치 썩이지 않고 재수 좋게 단번에 합격한 것, 나를 가르쳐준 교수 한 분이 나를 괜찮게 보아서 미국 영주권도 없는 내게 인근 도시의 의과대학 병원에 조교수 자리를 만들어준 것, 미국 의학계에도 잘 알려진 그 교수의 특별 배려로 교수 방법 수련에 몇 주 간 참석해서 좋은 교수가 될 수 있는 터를 닦을 수 있었던 것, 그 덕택에 미국 교수직 첫 해부터 내가 가르치는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인기 좋은 교수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교수직 4년째에 의대 졸업반 학생이 뽑은 ‘황금사과상(그해의 최고 교수상)’을 졸업식장에서 깜짝 발표로 받게 된 것도 다 내 운이 좋았던 탓이었다. (이 상은 교수에게는 최고의 상일 수밖에 없는데 외국 의대 출신 교수에게 처음으로 주어지고, 내과나 외과의 교수가 아닌 방계과인 방사선과 교수에게 주어져서 한동안 그 도시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의대 교수직은 즐겁고 보람 있었지만 개업 의사들에 비해 수입이 적어서 자라는 세 아이의 교육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내가 살던 도시에서 제일 이름있고, 그 권위가 미국 전역에 알려져 있던 의사들이 큰 방사선과를 개업하면서 같이 일하자고 제의해왔다. 정말 재수 좋게도 나는 그 그룹의 개업 파트너가 되면서 대학의 임상 교수직도 겸하게 되었다.
교직 때부터 내가 주관해온 소아방사선 판독 집담회는 자연히 대학에서 개인 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과, 가정의학과, 소아과, 방사선과의 수련의, 개업의, 대학교수들과 심지어 작은 도시에 사는 의사들은 집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두세 시간씩 드라이브를 하는 등 집담회는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서 참석하는 많은 의사들을 위해 장소를 병원의 대강당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내 개업 파트너들은 모두 유명한 대학 병원에서 수련 받은 백인 의사들이지만 서로간의 신뢰는 두터운 것이어서 그룹 의사 30여 명과 방사선기사와 사무 요원 등 모두 합해 100여 명의 그룹에서 유독 유색 인종인 내가 회장직을 제일 오래 맡아서 잘 꾸려나갔던 것도 재수가 좋았던 때문이었다.
1995년에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소아방사선과 전문의 시험에, 좀 넘치는 나이이기는 했지만, 첫 해에 합격을 해서 병원 당국을 기쁘게 해주었고, 얼마 전에는 내 은퇴 소식을 들은 세계적인 패션모델이 달려와서 내게 키스를 퍼붓는 장면과 사연이 도시의 ABC, CBS, NBC 등 TV의 저녁 뉴스 시간에 나와서 또 병원 당국을 신나게 해주기도 하였다.
사건의 줄거리는 이렇다. 지금은 세계를 돌아다니는 한 유명한 모델이 이 도시에서 컸는데 어릴 적에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아서 여러 소아과 의사들의 진찰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효험이 전연 없었다. 피 검사, X-ray 검사까지 모두 정상으로 나와서 부모의 걱정이 더 커지자 마침 이 아이의 이모이고 나와 같이 일하던 방사선과 기사가 한번만 X-ray를 봐달라고 내게 부탁을 해왔다. 들고 온 X-ray 사진을 보고 피 검사에 나타나기 전에 X-ray에만 나타나는 희귀한 초기의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자 혼비백산한 이 어린이의 가족이 뉴욕의 암 전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고 그곳의 암 전문의사가 어떻게 이런 초기에 그러한 진단이 가능했는지 가족에게 묻고 그 바람에 내 도움이 가족에게 크게 알려졌다. 조기 발견이 되어서 완치가 가능했던 이 아이는 그후,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서 성공을 했던 것인데, 내 은퇴 소식을 듣고 내게 고마운 인사를 꼭 하겠다고 온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달려온 것. 고향 땅은 이 모델의 유명세 때문에 들썩했고 나보다 키가 휠씬 큰 그녀가 내게 키스를 하며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라고 추켜세우는 바람에 TV의 앵커들은 더 들떠서 아름다운 은퇴에 대한 근사한 멘트를 더해 모델을 울리기까지 한 작은 에피소드도 생각해보면 그 처녀와 내 운이 함께 좋았던 것일 뿐.
내 은퇴를 축하하는 파티들도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흐뭇하게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이 의사 저 의사가 개인적으로 이별을 아쉬워해준 파티들. 또 여기저기서 오랫동안 같이 살던 한국 사람, 친구들과의 파티들도 그렇지만 그보다 내가 일하던 소아병원의 방사선과 기사와 간호사들이 주동된 200여 명이 참석한 엄청 큰 파티에서는 나를 껴안고 우는 여러 명의 순진한 방사선과 기사들. 비행기를 타고 온 옛날의 기사, 간호사들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게 밤새껏 아쉬운 정을 나눈 파티. 60여 명이 참석한 의사 파트너 부부의 파티에서는 젊은 의사들이 나와서 나와 같이 일하던 에피소드부터 당신 때문에 한국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인사, 심지어 태극기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는 인사까지 하다가 어린아이처럼 나를 잡고 우는 백인 의사 부인을 보고 같이 참석했던 집사람이 오히려 무안해하기까지 했다. 의과대학 교수 때 내게 배운 제자 의사들이 열어준 파티. 그리고도 상당히 큰 파티가 세 개쯤 더 있었다. 여러 늙은 의사 친구들은 아마도 이 도시에서 의사가 은퇴할 때 이렇게 많은 파티를 열어준 일은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절대 없으리라고 입을 모아 놀라워들 했다. 은퇴 축하 파티는 결국 내 은퇴날인 6월 30일이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아서 7월 말경에야 파티들을 마무리하고 오래 정들었던 오하이오 주의 톨레도라는 중소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건방진 생각인지는 몰라도 나는 은퇴를 전후한 몇 달 동안 내 주위의 많은 의사, 기사, 간호사 또 병원 관계자들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은 내가 35년 동안, 어릴 적에는 꿈도 꾸지 않았던 미국이란 땅에서 의사 생활을 한 것이 헛것만은 아니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는 고국에서 의사 생활을 한 것보다 그 보람이나 의미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의사라는 전문인으로서는 몸과 마음이 더 편안했을 것이라는 생각, 내 모국과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았다는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외국 생활 수십 년, 외로움까지 더 심하게 타는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이끌어주고 감싸 안아준 분이 바로 하느님이셨구나 하는 믿음 또한 확실히 갇게 되었다.
이제 나는 오래 떨어져 있어도 못내 사랑을 끊을 수 없었던 모국어를 다시 만지며 겸손한 마음으로, 남아 있는 내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시를 빗고 문학을 만들어보려 한다. 내 재주가 부족해서 바라는 만큼의 문학은 못 하게 되겠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는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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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69711
<8뉴스>
<앵커>
일본제국주의 광풍이 몰아치던 1900년대 초반에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목숨까지 내던진 사람들, 그 중에 놀랍게도 '일본인'들도 있었다는 사실 아십니까?
SBS 취재진에 의해 처음 밝혀진 '일본인 독립투사들'의 이야기, 이병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339202
나이지리아서 ‘아기 생산 공장’ 충격적인 현장
나이지리아 경찰, 임신한 10대 소녀 17명 신생아 11명 구출
스팟뉴스팀 spotnews@dailian.co.kr 2013.05.14 16:04:17
조이 엘로모코 나이지리아 경찰 대변인은 “구출된 소녀들에게는 하루 한 끼의 식사만 제공됐고 소녀들은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편 나이지리아 동남부에서는 지난 2011년에도 ‘아기 생산 공장’이 적발돼 충격을 줬다.
경찰 조사결과, ‘아기 생산 공장’을 통해 매매된 아기들은 불법 입양되거나 아동 노동 또는 성매매를 위해 팔려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장기 적출을 위해 살해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난한 나이지리아의 미혼모들은 한 명당 6400달러(약710만원)에 팔려가는 ‘아기 생산 공장’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것으로 전해졌다.[데일리안 = 스팟뉴스팀]
- http://ca.news.yahoo.com/blogs/trending-now/stranger-generosity-changes-teen-life-employment-status-180812301.html
Jhaqueil Reagan of Indianapolis, Indiana, was walking down the street on his way to interview for a minimum wage job. He happened to cross paths with Art Bouvier, who was laying rock salt on the ground outside his restaurant, Papa Roux, after an ice storm had hit the area earlier in the morning.
Bouvier said the 18-year-old approached him and asked how far it was to 10th and Sherman. Bouvier said the distance was at least six or seven miles, so he told Reagan that he would be better off taking a bus instead of walking, especially considering the freezing temperature. Reagan said "thank you" and kept on his way to the job interview.
Later, Bouvier and his wife were driving to grab coffee, and they came across Reagan again--still walking, so they offered him a ride. Reagan shared with the couple that he was on his way to a thrift shop to interview for a job, and he did not have money for bus fare. Reagan also shared that his mother had passed away and he was left to care for his two younger siblings. After his mom died a couple of years ago, he ended up dropping out of high school and obtaining his GED.
After hearing the teen's story, Bouvier told Reagan that even if he was offered the thrift shop job, he would hire him and double his salary. Bouvier was impressed with the teen's ambition and work ethic. Reagan accepted the job, and his first day was Monday. He cannot believe how everything turned out for him saying, "My heart’s just racing right now. I’m just too excited, just excited to start."
Bouvier wanted to share the encounter with his friends, so he wrote about it on Facebook. The story is going viral, with more than 15,000 likes so far. People are applauding the teen's work ethic and Bouvier's generosity.
One person wrote, "you are a blessing from above, and some good will come to you." Another added, "so kindness does exist? Warms my heart!"
In addition, IndyGo, the local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gave Reagan a free one-year pass.
[Related: Top 10 Mistakes People Make in Job Inter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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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publicity for restaurant. Seems like a win win.. Owner gets a hard working employee and the guy gets exactly what he set out to get- a job! Hard work does payoff and sometimes in the way you least expect.
- http://ca.shine.yahoo.com/blogs/shine-on/man-romantic-balloon-gesture-results-felony-charge-florida-193454434.html
Anthony Brasfield, 40, might have thought he had master-minded one of the most romantic stunts ever for his girlfriend, but when the state troopers showed up, he probably had doubts.
What was intended to be a sweet gesture might now land the Florida man in jail.
Brasfield was with his girlfriend, Shaquina Baxter, in the parking lot of a Motel 6 in Dania Beach on February 17th, when he released 12 heart-shaped Mylar balloons into the sky.
While the awestruck couple watched the balloons soar in the name of love, a nearby Florida Highway Patrol trooper watched the balloons soar in the name of environmental crime.
Also see: Man’s marriage proposal goes terribly wrong: Police, machine guns and a lost ring
Under the Florida Air and Water Pollution Control Act, Brasfield was charged with pollution to harm animals, a third degree felony, the Sun-Sentinel reports. He now faces up to a maximum of five years in prison.
Apparently, the balloons can harm several endangered bird species that live in John U. Lloyd State Park, about 1.5 miles from the motel.
According to the Florida Department of Law Enforcement, only 21 people were charged under the little-used statute between 2008 and 2012.
Also see: Boyfriend shaves head for his girlfriend fighting cancer
Jenny Erikson of The Stir doubts Brasfield will end up in jail.
"This whole scenario is ridiculous, and I’m thinking it's likely that Officer No Love got dumped over Valentine’s Day," she writes. "Seriously, how hard would it be to give the couple a warning and inform them of the law? They obviously weren't intentionally trying to wreak havoc on the environment, and there's no proof that they even did in this case. They were just trying to share a romantic moment."
For the sake of his girlfriend, however, at least he didn't express his love by tattooing his name on her face.
- yonnie「 히카루 클럽의 꿈 」
최근 '라이브도어' 스캔들로 발칵 뒤집힌 일본 매체에 '히카루 클럽(光クラブ)' 사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동경대 출신의 유망한 엘리트가 세상을 속인 사건"이라는 공통점에서인 것 같다. 히카루 클럽 사건의 중심인 '야마자키'라는 사람을 조사해 보니, 대단히 독특한 인물이었다.
야마자키 아키츠구(山崎晃嗣)는 1922년 치바현, 유명한 의사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일본 최고의 학부인 동경대 법학부에 진학했다. 학도병으로 입대하나, 상사의 죄를 뒤집어쓰고 군물자 은닉 혐의로 징역1년6개월 복무한다. 출소해 보니, 약속했던 물자는 이미 분배가 끝나 있었다. 그의 '의리'는 보상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오만, 비열, 사악, 모순 투성이. 고로, 나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용하지 않는다"는 인간관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는 합리주의를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동경대 법학부의 톱 클래스 성적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20과목 중 17과목에서 "우수" 평가를 받았지만, "전과목 우수"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교수의 취향, 변덕에 의존한 성적의 구분에 전생활을 거는 것은 어리석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야마자키는 스스로 머리가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표를 변경, 1948년 학생 신분으로 "히카루 클럽"이라는 회사를 세운다. 업종은 상인 중소기업 등으로부터 단기차입한 돈을, 일반 융자를 통해 불린 뒤 채권자에게 고리로 배당하는 금융업. 동경대 학생이 경영하는 금융 회사라는 존재가 독특하기도 했으나, 차입금 1만5천엔 전액을 창업 초기 광고비로 지출하는 등 경영 방식에 있어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전망은 적중했다. 히카루 클럽은 이목을 집중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4개월만에 주주 400명, 자본금 600만엔, 직원 30명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 긴자로 진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듬해 혹독한 시련에 맞닥뜨린다. 그는 7월 출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된다. 처분 보유로 방면되나, 이후 신용을 잃어 채권자의 원금 변제 요구로 현금 상황이 급격히 악화한다. 변제 금액은 3천만엔에 달했다. 채무 이행 예정일 하루 앞둔 앞둔 12월24일 밤11시48분 사무실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다. 27세의 짧은 인생이었다. (사진은 그가 목숨을 끊은 '히카루클럽' 사장실 내부) 1년4개월의 짧은 기간, 그는 일본 최고의 재력가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극과 극의 궤적을 그렸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青の時代>의 모델이 되는가 하면, 영화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합리주의자'라 칭했던 야마자키의 삶은 위악과 냉소의 극치였다. 체포당한 뒤, 취조관과 법률논쟁을 벌였다는 그. 구치소에서의 매체 인터뷰에서는 "인생은 극장.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주연을 맡는다"고 말해, 세상을 경악케 했다. 자살에 앞서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기 때문에, 또는 죽음으로써 채권자들에게 속죄하기 위해 등의 센티멘탈리즘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합리주의에 따르면, 계약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구속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물체이므로 계약이 적용되지 않음. 나는 사정변경의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 죽는다. 내가 물체로 변경되어야 이론적 통일 하에 계약이 종료된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11시49분까지 기록이 이어지는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주의할 것. 검시를 하기 전에는 사체에 손을 대지 말 것. 법의 규정에 따라 쿄바시 경찰서에 우선 통지하고 검시가 끝난 뒤, 법에 근거해 해부해야만 한다. 사인은 독물. 사체는 몰모트와 함께 소각할 것. 유골은 비료로 농가에 매각. (이 비료를 치는 나무는 돈이 열릴 것인가, 돈을 먹는 나무라면 괜찮군)"
그의 일기에는 고교 시절 쇼지 군, 토시오 군과의 동성애 관계나, 여섯 명의 정부와의 성적 탐닉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자는 도구다"라는 그의 여성관도 자주 도마 위에 오르는데, 35세의 연인 토모코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글도 있다.
"토모코가 월경이 없다. 임신한 것 같다. 임신시켰던 적은 아직 없었다. 새로운 경험은 인생의 기쁨이다. 태연하게 곤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유쾌하다. 우선 낙태에 만반을 기하자. 실패한다면, 여자를 충동해서 자살시켜도 좋다. 인생은 지루하다. 지금 내게 흥미가 있는 것은, 27과목 모두 '수'를 받는 것, 우수한 성적으로 고시에 합격하는 것. 성교를 즐기는 것. 젊은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것. 이상"
일본 범죄역사상, 야마자키의 "히카루 클럽 사건"은 패전 이후 허탈감에서 비롯된 반사회적 행동으로 치부되고 있다. "야마자키의 정당성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지만, 비운의 인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합리주의'든 '악마적 인간성의 신봉자'이든, 천박한 배금주의에 따라 움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 야마자키를 매력적인 인물로 보이게도 한다. 그가 진실로 '합리주의'의 궤변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또는 위선투성이 세상에 대한 배신감에 살 의욕을 잃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최근 TV에서 야마자키의 어릴적 친구였으며 모 법률협회 부회장을 지낸 노장에 대한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합리주의를 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가 교활하게 세상을 속였다고들 말하지만, 교활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의 사고를 믿는 순수한 사나이였다. 그것은 순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은, 위법 행위로 몰렸다고는 하지만, '히카루 클럽'은 투자를 받아 배당금을 돌려주는, 지금의 방식으로 보자면 '펀드' 사업이었다. 그러니 내게는, 범상치않은 통찰로 시대의 행운을 거머쥔 풍운아를 포용하지도, 인내하지도 못하는 사회의 채찍을 맞았다는 인상도 강하다.
'히카루 클럽'와 라이브도어의 공통점을 굳이 찾고 싶지는 않다. 우선, 이번 스캔들의 핵심인물, 호리에 다카후미가 야마자키처럼 "가치관"에 근거해 인생 기획 게임을 벌인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라이브도어 스캔들도 젊은이의 천방지축을 묵인하지 못하는 사회의 징벌 심리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IT붐 이후 젊은 졸부의 경거망동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느끼고 있었던 불편함과, 60년전 젊은 동경대 학생이 긴자를 뒤흔드는 떼부자가 된 일이 패전의 우울증에 빠져 있던 일본 사회에 던졌을 동요가 겹쳐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 최근 일본에서는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하는 어머니를 지키고 싶다’며 가족과 함께 살던 소년이 결국 남성의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5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사건은 지난 22일 오전 나고야 메이토구 소재의 시영 주택에서 발생했다. 피해자는 중학교 2학년 핫토리 마사미(14)다. 소년은 이날 어머니(37)의 남자친구인 사카이 쇼지(37)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사카이 용의자가 폭행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핫토리의 친척들에 따르면 소년은 올해 9월까지 나고야 미즈호구에서 어머니와 초등학교 6학년인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이 집에는 가해자인 남성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지난 1일 메이토구로 이사할 당시 친척들은 남성의 폭행을 염려해 핫토리에게 동생·엄마 등과 떨어져 할머니의 집에 살도록 권유했지만 소년은 “어머니가 폭행을 당할 수 있다”며 “어머니를 지키고 싶으니 계속 있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 신혼여행에서 천재지변 '6종 패키지' 겪은 부부
신혼여행에서 평생 다 겪기도 어려운 천재지변을 6번이나 겪었다면?
신혼여행 하면 달콤하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스테판과 에리카 스반스트롬 부부에게는 악몽이었다.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인 이들 부부는 지난해 12월6일 갓난아기와 함께 4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신혼여행에 나섰다.
평화로운 여행을 기대했던 부부는 상상도 못했던 재난을 겪어야 했다.
첫 목적지로 선택한 독일 뮌헨에서 유럽을 강타한 폭설을 만나 한동안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두 번째 목적지 호주에 겨우 도착한 스반스트롬 부부는 가는 곳마다 자연재해를 맞았다.
케언즈에서는 사이클론, 브리즈번에서는 홍수, 그리고 퍼스에서는 숲이 모조리 타버린 화재와 싸웠다.
케언즈에서는 쇼핑센터 지하 시멘트 바닥에서 2천500명의 피난민과 함께 하루를 꼬박 지냈다.
스반스트롬은 "나무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큰 가지들이 온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몸서리를 쳤다.
다음 여행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와 일본 도쿄에서 부부는 지진과 마주쳤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하니 규모 6.3의 강진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였다.
도쿄에서는 지붕이 뜯겨 날아가고 건물이 앞뒤로 통째로 움직이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 마지막 목적지인 중국 여행을 끝으로 3월 29일 고향인 스톡홀름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스반스트롬은 "결혼을 하면 여러 가지 위기를 겪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신혼여행에서 평생 겪을 어려움을 다 이겨낸 느낌"이라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더 강해졌다 는 것"이라고 말했다.
- http://sistina.tistory.com/category/천재%20예술가%20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가 뛰어난 조각가인 베르톨도 문하에서 배우기 위해 '산 마르코 정원'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역시 미래의 조각가로 선발된 또 다른 학생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피에트로 토리자노(1472-1522)였다.
피에트로는 미켈란젤로가 갖지 못한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귀족가문 출신이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했으며, 대단히 미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보다 재능이 뛰어났다. 두 소년은 격렬한 예술가의 자존심을 갖고있었다. 다시 말해서 둘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숙명적인 싸움은 미켈란젤로가 도착한 직후에 일어났다. 둘이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예배당에서 그곳의 예술품을 스케치하고 있을 때 미켈란젤로가 피에트로의 데생을 놀려댄 모양이다. 화가난 토리자노는 힘껏 팔을 휘둘러 미켈란젤로의 코를 가격했다. 그런데 너무 세게 때리는 바람에 미켈란젤로의 코뼈가 내려앉고 말았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그후 평생동안 그렇게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면서도 그 자신은 코가 납작 찌그러진 은퇴한 권투선수처럼 보였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아끼는 젊은이의 얼굴이 망가진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토리자노를 당장 피렌체에서 추방시키기까지 했다.
그 전에도 별로 잘생기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그때부터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이 되었다. 그는 외모때문에 실연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낭만적인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애써 피하여 일과 성공에 몰두하는 방법으로 열등감을 극복했다. 그는 점점 더 완벽주의자와 이기주의자가 되어갔다.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허세를 부림으로써 자신의 깊은 열등감을 감추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평생동안, 이 허세의 겉포장을 뚫고 그 밑에 숨어있는 고독하고 예민하고 사랑에 굶주린 몽상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은 불행히도 몇몇의 절친한 친구와 동료 뿐이었다.
- 코넬리아 디란지 증후군입니다
울거나 웃으면 식도가 막혀서 죽는병
감정기복이 심한사람이나 이별후 혼자 옛생각을 떠올리며 울거나 웃거나 하는사람들은
주의해야함
웃으면 죽는 희귀병에 걸린 아기의 사연이 공개되어 가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15일자 영국 선지는 생후 11개월 된 에드워드 데이비드란 아이가 코넬리아 디란지 증후군이란 희귀병을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에드워드 데이비드가 앓고 있는 희귀병은 웃거나 울을 때 폐와 연결된 기도가 막혀 숨을 거두게 되는 병으로 영국에만 400명이 이 질환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가 웃음을 지으려고 입가에 미소만 띠어도 부모는 긴장을 하고 아기를 주시하며 이를 제지해야만 하는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부모는 "사랑스러운 아기"라며 치료할 수 있는 약이라도 사용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밝힐 만큼 아직 이 병에 대한 치료법은 발견되지 않았다.
언젠가 웃거나 울다가 기도가 막혀 질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데이비드의 기막힌 사연에 영국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해외 네티즌들도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며 성원의 메시지를 남겨주고 있다.
- 아내와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 밖에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남자는 누구를 구해야 할까. 남자는 아내를 구하고 아들을 떠나보냈다. 뉴질랜드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아내의 자동차가 강에 빠지면서(plunge into a river) 남편 스테이시 호튼은 고뇌에 찬 결정을 내려야(have an agonizing decision to make) 했다. 아내를 구하느냐, 아니면 10대 아들을 구하느냐(rescue his wife or their teenage son).
아내 베네사는 차에서 빠져나와(escape from the car)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struggle to keep her head above water) 도와달라고 울부짖고(cry for help) 있었다. 아들 실바(13)는 가라앉는 차 안에 아직 갇혀 있는(be still trapped inside the sinking vehicle) 상태였다.
오직 한 사람 밖에 구할 수 없는 시간을 갖고(with time to save only one) 호튼은 강물로 뛰어들었다(dive into the river). 저녁 어둠 속에(in the evening darkness) 차는 이미 물밑 3피트(약 90cm) 쯤에 있었고(be already three feet below the water) 차 앞부분이 물속을 향해 빠르게 가라앉고(sink fast nose first) 있었다. 후미등 불빛(the glow of the tail-lights)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fade into the darkness) 순간이었다.
“아래 쪽으로 내려가서 아들을 구해내려(try to get down and get my son)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무 깊었다. 아내도 가라앉고(be going under) 있었다. 우선 아내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기로 결단을 내리고(make a call to pull my wife to safety) 뒤를 돌아보니(look back) 아직 후미등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멀어 어쩔 수가 없었다.”
호튼은 “아내와 아들의 목숨에 내 목숨까지 거는 위험 대신에(instead of going down and risking my life as well as my wife and son‘s) 아내를 살리는 것을 선택할(choose to take my wife back)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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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민영휘가 1904년 광성의숙을 세우자 1906년 고종은 직접 민영휘의 이름을 따 휘문의숙이라는 학교이름을 내려 주었고 또한 민영휘 자신이 아직 살아있던 1927년 휘문 교정에 자신의 동상을 설립한 것은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일제시대 제작된 대부분의 동상들이 전쟁물자로 필요한 동 공출을 위해 파괴되었는데 조선총독부로 조선의 대표적인 갑부이자 귀족인 민영휘 동상에는 감히 손대지는 못한 모양이다. 한편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순종의 어진을 그리기도 한 이당 김은호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한 민영휘의 동상은 근대기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이라고 하니 당시 민영휘는 왕의 자리가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이런 그에게 양자 민형식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민형식은 1907년 을사오적 암살계획 소식을 듣고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가 발각되어 법정에 서기도 할 만큼 양아버지 민영휘와 는 전혀 달랐다. 따라서 첩 소생의 아들들인 대식, 천식, 규식이 민영휘의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받아 현재 민영휘를 포함해 4대까지 그 부를 누리고 있다.
현재 남이섬은 바로 첫째 아들 민대식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보도에 의하면 셋째 민규식의 후손들은 종로의 노른 자위 땅에 일제 때 세운 건물과 토지를 놓고 서로 법정 싸움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민규식은 일제 때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중추원의 참의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는가 하면 인촌 김성수의 동생이자 삼양사를 설립한 친일 매판기업인 김연수 그리고 역시 일제시대 화신백화점을 세우고 현재 서울 신림동 광신상고 설립자인 친일 기업인 박흥식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에 제일 많은 기금을 제공하여 대를 이어 친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배경
중세시대 로망스
아라비아 로망스
대도시 로망스 - 뉴욕
멸망의 나라
일본 도시 전설 - 요코미조 세이시 인습, 에도시대 미유키, 빨간 마스크, 고베 살인사건
중국 도시전설: 모엔
한국 도시전설: 여고괴담, 학교 전설, 편차치 명문고 부잣집 딸과 후진고 가난한 아들(타이타닉), 편의점
이상한 앨리스 거울
태엽감는 새 하루키 통로
나니아 연대기 방
냉장고
명언
覆水不收(복수불수)
엎지른 물은 거둘 수가 없고
破鏡不照(파경부조)
깨진 거울은 비추지 못한다.
相思不忘 (상사불망):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그리워서 잊지못함.
愛別離苦(애별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져야하는 고통.
戀戀不忘(연연불망): 그리워서 잊지를 못함.
진중권의 주장. "입증의 책임(onus probandi)은 그것을 주장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onus probandi
눈앞을 보기 때문에 멀미를 느끼게 된다. 몇 백 km 앞을 보라. 바다는 기름을 제거한 것처럼 평온하다.
나는 그런 장소에 서서 오늘을 지켜보고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 손정의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오르텅스 블루 <사막>
'두 번은 없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누구나 준비 없이 와서 연습도 못하고 살다 떠난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젊을 때는 젊음의 광채를 갖고서, 늙어서는 늙음의 광채를 갖고서, 그렇게 매순간 영원히 빛나고 싶다.
** 손정의가 떠오른다. 한번 뿐인 인생 무언가 큰 뜻을 이루고자 경주했던 그 기업인.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세상이 미쳤는데 근엄하면 무엇하리
적당히 이름이나 감추고 술집에서 죽으리
아이가 태어나서 울기만 하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한번 세상에 떨어지면 만 가지 시름 다 겪는다네
- 조선 후기 시인이었던 하원 정수동의 <하원시초>에 나오는 <무제>이다.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Latin ad infinitum 무한반복
쿠자누스 docta ignorantia 비운상태서 참된 앎
쿠자누스 coincidentia oppositorum
경계없음 seamless
elan vital
De gustibus non "입맛은 변론할 것이 못 된다."
Novous Ordos Seclorum 신세계질서
deification 신격화
구작자(겁 많은 까치 선생)
장오자(키다리 오동나무 선생)
대각
망량(옅은 그림자)
unknowing 앎을 버림
희랍어 thaumazen 타우마젠 "경이의 념", 인간의 원초적인 알려는 마음
daemon 육감 뱃심 gut
재전 (본래의 바탕을 온전히 지킴)
안불의 (의심없는 얼굴)
불지류(不知類, 무엇이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알음)
히브리어 네피쉬 = 영혼
산스크리트어 아트마 = 영혼,
카라카 = 운명성
좌망, 심재(齋는 고르게 하다), 물화
오상아
맘몬(황금신)
제일, 제동, 여일
samatha(사물에 대한 직관, 통찰), 비파샤나(vipasyana)
prajna(반야)
정혜(눈이 밝아짐)
망가, 망기(자기초월),
하늘의 퉁소,
지도리(도의 still point),
산스크리트어 tathata(정말로 그러함, suchness),
interpenetration (상호침투성), interrelatedness (상호연관성) = 편재
metanormal capacity
화이불창, 나서서 주장하는 일 X
희랍어 Kairos '때를 따름'
불언지교 (말이 아닌 것으로 가르침)
Mens Sana Corpora Sano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Impossible은 I'm possible이다.
희랍정교 apophasis
evolution vs. involution (회선)
산스크리트어 싯디 siddh. 신유, 초능력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 (Rudulf Oto) 엄청나면서도 매혹적인 신비
the numinous 거룩한
Unground 근원
라틴어 aseitas '스스로에 의함' 도, 自存
always in beta = 끊임없이 전진하라
세계 의식(das WeltbewuBtsein),
게슈탈트(Gestalt),
절대정신(absoluter Geist: 헤겔철학의 중심 개념 중 하나로 절대자는 정신이라는 말),
총체예술(Gesamtkunstwerk: 악극(Musikdrama)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음악·미술·연극·무용 따위가 맞물려 하나로 합쳐진 종합예술을 일컫는 말)
천부경 일시무시일
관상불여심상
벽파정
진사이 - 천지일대활물
판타스마그리아 -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장면
구존동이
천강대임론 - 맹자 고자장
경허스님 - 만법귀일 일귀하처
아프리카 도곤족 - 상징이란 단어 "좀 더 낮은 이 세계의 말"
baptism -> 그리스어 밥티스모스(물로 씻음)에서 유래
콘트래리안 리더십(역발상의 리더십)
단어성역 제신취합 무일즉불능성성(伯族誠役 諸神樂合 一期不能成誠)
modus vivendi: 의견과 사상이 다른 사람, 조직, 국가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만든 협정
- 원래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줄여서 일일호일 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이라는 뜻입니다.
월월호일 月月好日 이라고 한다면, 달마다 좋은 날 이라는 뜻인데, 아마 월월호월의 오타가 아니까 싶습니다.
이말은 운문선사의 유명한 공안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운문선사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십오일(十五日) 이전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하지만 십오일 이후에 대해서는 어디 한 마디 해보아라.]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스승의 질문에 선듯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은 스스로 답했다.
[날마다 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다.]
천지팔양신주경 에서
일일호일(日日好日)이며 월월호일(月月好日)이며
연년호년(年年好年)이라
날마다 좋은 날이며 달마다 좋은 달이며 해마다 좋은 해로다
의 뜻입니다
- 나무묘법연화경: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 대학에 나오는 이야기로 옛날 은 왕조의 명군 탕 임금은 세숫대야에 아홉개의 글자를 새겨 매일 아침 세수할 때마다 그 글자들을 보고 수신과 정치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리하여 탕왕 시대에는 왕의 이러한 자세가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어 정치의 안정을 꽤하는 것이 가능했다.
인기아취 인취아여
남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남이 취하면 나는 포기한다
니가 지금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 라틴어 age. quod. agis.
"신앙의 수호자(보호자)", 즉 "Fidei Defensor"
노나라 미생지신
대몽대각
대플리니우스는 1세기에 쓴 저서 자연사의 8권에서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와을 가능성이 있는 문장을 썼다. Ex Africa semper aliquid novi. 아프리카에서는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온다.
오로지 전능한 신만이 모든 것을 sub specie aeternitatis, 즉 영원의 관점에서 훑어볼 수 있다.
Error circumflexus, locus implicitus gyris. 아무리 찾아봐도 돌고 돌 뿐인 미로여.
il faut souffrir pour etre belle = must suffer to be beautiful
= no pain, no gain
- 라플라스의 도깨비
라플라스의 도깨비는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1749년 3월 23일~1827년 3월 5일)가 상상한 가상의 존재이다. 1814년에 발행된 그의 에세이 “대략적인 혹은 과학적인 결정론의 표현”에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쉽게 말해 라플라스의 도깨비는 '현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유추하는 존재'이다. 만약 이 누군가가 전 우주의 모든 원자들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면 고전 역학의 법칙들로 그 원자들의 그 어떤 과거나 미래의 물리 값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후기의 전기 작가들이 이러한 능력을 지닌 존재를 일컬어 도깨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한국에서는 ‘라플라스의 악마’라고도 불린다.
- Apres moi, le deluge. 프랑스 말 " 아푸헤 무와 러 델리줘 " 내가 죽은 후에야 대 홍수가 온다라 는 뜻 ,. 즉 세상이 엉망으로 돌아가도 신경 안 쓴다는 거.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Et lux in tenebris lucet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sub specie aeternitatis
1. Dum spiro spero
I don’t remember where I read this one, but it has become part of the way I live my life. It means “While I breathe, I hope.” To me, this translates into never losing hope and faith for a better future. Never losing drive to achieve your goals.
2. Docendo discimus
Whenever I read something interesting, the first thing I do is either make notes or tell someone about it. When I tell a friend about a topic I’ve read about, I discover whether I’ve understood it entirely. I discover whether I’m passionate enough about that topic that I can speak about it in my own words and not fail to teach someone else about it. Docendo discimus means “By teaching, we le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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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Veni vidi vici
I’m sure you’ve heard of this one before: “I came, I saw, I conquered.” It originates from a letter that Julius Caesar wrote after his victory in the war against Pharnaces II of Pontus. How does this apply in my life? Whenever I set a goal, I do everything to achieve it. I set a goal, I work hard, I achieve.
4. Et cetera
I’m not sure if this is worthy of being on this list… It means “and other things.” To be honest, I just wanted to mention it so I can tell you all that pronounce this as “exetera”, it’s wrong. You’re pronouncing it wrong. It’s pronounced (phonetically) as “et setera”, “et ketera”, or as “et chetera” with the “ch” as in “Charlie”. I’m fun at dinner parties. Okay, moving on.
5. Natura nihil frustra facit
When you look outside, you see the sun shining which enables us to see when we’re outside, you see trees invisibly producing oxygen so we can continue to exist. Natura nihil frustra facit: “Nature does nothing in vain.” It means that – and this is going to sound cliché –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Everything happens of necessity. It reminds me that, even though I should enjoy life and enjoy as many fun activities as possible, I should also make sure that every task I undertake has some meaning or is somewhat significant. Which brings us to the next one…
6. Quam bene vivas refert non quam diu
“It is how well you live that matters, not how long.” Most of us are somewhat afraid of the inevitable that is part of being human: death. However, that fear is probably not associated with actually dying, but more with how you’ve lived your life. Did you accomplish all your goals and dreams before it was too late? Did you get married and had children? Did you get to travel and see the world? Death is inevitable and something you can’t control, but the choices you make during life are absolutely all up to you. It’s not about the number of years that you lived, but about the years spent truly living. Those are the ones that count. Speaking about the number of years that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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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heu fugaces labuntur anni
“Alas, the fleeting years slip by.” This one reminds me to not waste time. Don’t waste time overthinking things. Don’t waste time stressing over things you can’t control. Don’t waste time overanalyzing every single thing that happened during your day and has already passed. Let go and live in the Now. (It’s easier said than done, but we can try.)
8. Beati pauperes spiritu
I recently read the book Letters To A Young Poet by Rainer Maria Rilke, and my favorite passage is the following: “And if there is one thing more that I must say to you, it is this: Do not believe that he who seeks to comfort you lives untroubled among the simple and quiet words that sometimes do you good. His life has much difficulty and sadness and remains far behind yours. Were it otherwise he would never have been able to find those words.” It reminds me that no matter how happy everyone around me seems to be, every single one is battling his own war in his head. “Beati pauperes spiritu” is actually from the Bible and it means “Blessed in spirit [are] the poor.” The kindest people I’ve met in my life didn’t have many material possessions, but they had a lot of love, kindness, and compassion to give.
9. Marcet sine adversario virtus
To be honest, all I know about this one is that it belongs to Seneca and that it means “Valor becomes feeble without an opponent.” I don’t know the context of it in the essay that’s written by Seneca, but to me it means that you constantly need to challenge yourself to keep your life exciting. I can easily interpret “valor becomes feeble without an opponent” to “passion fades away without a challenge.”
10. Temet nosce
“Know thyself.” This has two meanings to me. First, even though the majority of the people perceives something as the truth, i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t is indeed the truth or the right thing to do. Make sure you stay true to yourself and choose what you think is the right choice. Second, make sure to be yourself no matter how others prefer to perceive you. True friends will like you for you, and not the you they prefer to see.
raison d' ete 존재이유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어렵다
스피노자 <윤리학>
백척간두진일보
100척(尺)이나 되는 장대 끝에 서 있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시방세계와 내가 한 몸이 되어 현하리라.
인샬라: 신의 뜻대로
알함두릴라: 알라께 감사를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den Enkelte’ 키에르케고르 스피노자
- 새옹지마
고진감래
화무십일홍
진인사대천명
달도 찰면
Kulturnation 문화민족
오블라디 오블라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부족의 언어로 '<wbr />인생은 흘러간다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쿠나 마타타
스와힐리어 말 그대로 옮기면 "잘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상기시키거나 경고하는 사물이나 상징
바니타스 Vanitas 덧없다는 뜻.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순진한 유지태는 울부짖었지만(봄날은 간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
찬란한 슬픔
찬란한 비극
찬란한 고독
소리 없는 아우성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산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은, 마치 달리는 백마가 틈 사이를 지나감처럼 빠르다.
- 장자
•오시마 스미츠키
맑은 달은 잠시 구름에 가린다 해도 나의 빛은 비치지 않는구나.
(澄む月の暫し雲には隠るとも 己が光は照らさゞらめや)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하면 덮을 수 있는 이불처럼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부모인 것 같다.
- 김한길
가마우지
강물 위의 섬 하나
가마우지 짝 지어 꺼억꺼억 울며 날 제
해맑은 작은 소녀 내 마음에 살포시
깨끗한 푸른 물품 이리저리 흘려들 제
해맑은 작은 소녀 내 마음에 살포시
만날 방법 없으니 꿈에서도 못 잊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 주자라는 사내는 가마우지의 등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마우지는 서로 한 번 짝을 정하면 절대 바꾸지 않기 때문이라고. 군자와 숙녀의 정절을 상징한 것이라고. 이쯤 되면 이건 시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스스로 시적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맑은 물 속에서 흰 다리 위로 치마를 걷고 물풀을 헤집는 이름 모를 소녀에 대한 질투이며,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 저려 했던 풋사랑에 대한 문화적 해코지이다.
선의 두 끝은 서로 대립하는 듯이 보이나, 두 끝을 합치면 원이 되어 대립은 사라진다. 원을 확장해나가면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룬 완전한 형태의 구가 된다. 밀리칸이 말하기를 "우주적인 것은 구가 된다."라고 하였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원이 되고, 원은 모든 면에서 완성되어 완전한 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그것만 따로놓고 본다면 각기 고립되는 듯이 보이나, 궁극적인 한 점에 이르는 과정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마침내는 만물일체, 즉 하나라는 점에 도달한다.
당대 최고의 익살가였던 마크 트웨인이 죽음에 대해 남긴 명언이 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아주 정확히 이해를 했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 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도 준 적이 없다."
여자들은 정신적 승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넘치는 성욕으로 고통받는다.
근시의 남녀가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간 도수높은 안경을 주면 낫는 경우가 있다
애벌레에겐 물가의 돌이나 물조차 큰 인생의 역경이지만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갈때는 그것이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멈추지 않으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광의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과감해져야 한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어정쩡한 삶을 산 이들보다 훌륭하다.
- 테어도어 루즈벨트
embodied the saying that “the true test of a man’s character is what he does when no one is looking.”
Your life, young man, has been too short to contain anything of great importance.
- 몽테크리스토 백작 중
꿈은 하늘을 질러라. 그러나 발은 땅에!
가슴은 뜨겁게 하라. 그러나 머리는 차갑게!
꿈은 이루어진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었다면 애초에 자연이 우리를 꿈꾸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존업다이크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그 변화의 주체가 되세요.
이것은 내가 인생의 신조로 삼고 있는 말입니다.
- 오프라 윈프리
어떤 일이든 열정만으로 90퍼센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도널드 트럼프
세종대왕께서 말씀하시길, “그대의 자질은 아름답다. 그런 자질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해도 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대가 만약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 세종 22년(1440) 7월 21일
매년마다 꽃은 비슷하나 매년마다 사람들은 다르다.
- 당나라 시인, 유희이
천사들이 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너무 심각하게 생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내가 파고들 틈새는 존재한다.
"0과 1의 차이를 아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저의 가능성은 0퍼센트이지만 제가 여자들에게 쪽지를 하나라도 보내면 저의 가능성은 1퍼센트가 되는 거에요."
내가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는 가능성 0퍼센트의 사람이 되지만, 무엇이든 하나라도 시도한다면 1퍼센트의 사람이 된 것이고 그것을 꾸준히 지속하면 100퍼센트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을 것이다. - Henry Ford
남들이 비웃는 그 길에 정답이 있다.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디딤돌이다.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아무 시도도 않는 것이다 - 구리키 노부카즈
태풍을 만나면 돼지도 날 수 있다.
- 샤오미의 대표가 한 말
- "대나무는 곧으나 기둥으로는 쓸 수 없다" - 드라마 <추노> 대사 中 (대나무의 곧음은 목재로서 필요한 기능이긴 하나 기둥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 시대변화에 맞게 유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아 있으리..."
-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중에서
꿈은 하늘을 질러라. 그러나 발은 땅에!
(호설암 ver: 눈은 먼 곳에 두되 가까이에 있는 인연에 충실하다 보면 장차 드넓은 천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참조:
- Steven Katz 신비주의 전통 多
-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 첫머리
- 환원 불가한 마음: 21세기 심리학을 향하여(Irreducible mind: toward a psychology for the twenty first century)
(버지니아대 인지연구소가 집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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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2.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하루살다 죽을 것처럼 실천하라.
3. 이상없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현실 없는 이상은 존재할 수 없다.
4.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이다.
5. 서른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생겨나듯,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전에 드러나지 않은 세계가 필요하다. 어쩌면 신의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이 우주가 창조된 것은 아닐까?
6. 여성들이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은, 스스로를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둔갑시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합리화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7. 진리인 것은 평화를 가져다 주고, 진리가 아닌 것은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8. 어떤 사람이 듣는 음악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취향과 기호 나아가서 성격까지 알 수 있다. 시끄러운 헤비 메탈이나 록 음악을 듣는 사람은 항상 외부의 자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잔잔한 발라드나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인생을 음미할줄 아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서재에 어떤 책을 쌓아놓았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9. 예술은 기본적으로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모든 욕구의 표현이다. 때문에 심해의 바닥에나 있을 법한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예술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이 세계가 마음에 안들면, 자신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면 되니까.
10. 사실 에고는 무찔러야할 적이 아니라, 치유해야할 환자다.
11. 분노와 원망, 자책, 자기연민과 같은 감정들은 그 자체로는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충분한 만족감을 얻고 있기 때문에 이해와 용서의 수준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할 뿐이다.
12. 한번 부정을 거친 긍정이어야 더욱 철저한 긍정이 된다. 마찬가지로, 채워본 사람만이 버릴 수 있다.
13. 상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거다 하고 끄집어내어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이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건 대수로운 상처는 아니다.
14. 끝장을 보지 않아 해결이 안된 일체의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며, 똑같은 고통들을 다시 겪게 되어 있다. 싫은 사람으로부터의 탈출을 성공했다 하더라도, 싫은 유형은 다른 곳에서 비슷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문제에 대한 도피는 해결을 지연시킬 뿐이다.
15. 물리적인 우주에서는 무엇인가가 일어나면 반드시 다른 어느 곳에서 균형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반드시 무엇인가가 그 공간을 메꾸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메가는 반드시 알파와 바뀌게 되며, 어떤 사물이나 상태든, 영원히 오메가나 알파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창조가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고, 죽음이 있으면 창조가 있는 것이다.
16. 모든 인간에게는 희랍어에서 다이모스(Deimos)라고 부르는 파괴적 성격의 원기가 있다. 다이모스는 승리에 대한 사랑, 투쟁에 대한 사랑, 싸우고 싶다는 소원, 일종의 노여움 같은 격이 있다. 이 다이모스가 지닌 에너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다른 것에만 잘못 시선을 집중시켜왔다. 그러므로 몹시 부드럽게 보이는 사람이, 어떤 순간에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죽이거나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다이모스는 저급한 부분에 예속되지 않고, 사람을 행동으로 유혹하는 힘, 주의력 결핍, 우매함, 방황, 집착 등을 제어할 때 동원되어서 발산되어야 한다.
17. 문명의 진보는 언제나 영적 타락과 함께 상쇄되어 왔다.
18. 깨어진 관계는 결코 예전과 같이 회복될 수 없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이전까지의 관계는 점차 다른 양상을 띄며 변화해간다. 열정적이었던 만남도 어느새 시들시들해지고, 사랑도 우정도 조건화된다. 결국 예전과 같은 관계는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19. 현대 사회에서는 경쟁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없고 발전도 정체된다. 하지만 경쟁은 그 속성상 경쟁 상대의 불행을 즐거워함으로써 유지된다. 진 사람들이 원한을 품으면 품을수록 이긴 자는 행복해지는 구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모순이다.
20. 바닷물이 해안선 멀리 깊게 빠져나갈수록 쓰나미의 크기는 이에 비례하여 엄청나게 커진다.
21. 오늘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세상은 바뀐다.
22. 지금으로부터 백년 뒤,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이며 더 이상 어떤 아픔도 절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23.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24. 사람은 누구나 남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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