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시마 다케오는 본능을 감추고 사회적인 체면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내면의 진실에 따라 본능적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주제 앞에 후자의 손을 들어 준다. 그가 말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갈 것'이란 평생 그를 지배한 이념이었으며 그러한 점은 그의 죽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부녀인 연인 하타노 아키코와의 동반 자살이 그것이다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류리수 옮김,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이윤옥 기자, 2022.07.18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1878∼1923)라고 하면 1910년대 일본문학계를 이끌었던 소설가로 그는 2000년도에 아사히신문사가 뽑은 '1천 년(서기 1000년~1999년) 간 최고의 문인'으로 뽑히기도 한 인물이다. 아리시마 다케오는 한국 근대문학 형성기의 염상섭과 김동인이 일본 유학 당시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작가로 그의 대표적인 단편집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선언하다>, <태어나려는 고뇌>, <카인의 후예>가 지난 6월, 지식을 만드는 지식사에서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有島武郞 短篇集)>으로 출간되었다.
이를 번역한 류리수 작가는 한국외대에서 <아리시마 다케오와 염상섭 문학의 '근대적 자아' 비교 연구>(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2004)로 박사학위를 받은 아리시마 다케오 전문가다. 류리수 작가의 이번 책은 2019년 3월, 일본어판 <백범일지(白凡逸志)>(류의석 번역, 도서출판 하우)을 출판한 지 3년 만에 나온 역작이다.
사실, 일본어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건 영어나 다른 외국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일본어가 어려운 것은, 문장이 간단명료하지 않을뿐더러 주인공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다루는 것일수록 난해하고 복잡하기 일쑤여서 그러하다. 나 역시 일본어를 전공한 지 40여 년에 이르지만 소설 번역은커녕, 원서 그대로를 읽는 일조차 생소하고 어렵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사랑을 선언하다>, <태어나려는 고뇌>, <카인의 후예> 세 작품을 번역하여 책으로 내려고 생각한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 일에 밀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책으로 내놓게 되었습니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작품이 한국 독자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자문해 주신 오쿠다 고지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숙원을 풀어서 홀가분합니다. 번역에 힘은 들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저에게 진실, 사랑, 예술의 아름다운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충만한 시간을 갖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류리수 작가는 기자에게 책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아리시마 다케오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2004년이니 그가 말하는 '세월'이란 적어도 2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20년 동안 한 줄 한 줄씩 행간을 읽어 나가며 하나의 낱말에도 수없이 고민했을 역자의 노고에 고개가 수그러든다.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有島武郞 短篇集)>에는 세 개의 작품이 실려 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단편 <사랑을 선언하다(원제:선언)>을 비롯하여 <태어나려는 고뇌>, <카인의 후예>는 아리시마 다케오 전공자로서 류리수 작가가 특유의 언어적 감각을 되살려 번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친한 친구 사이인 두 청년 A와 B가 한 명의 여성인 Y를 놓고 벌이는 '사랑의 쟁탈전' 내용이 주를 이룬 <사랑을 선언하다(원제:선언)>는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삼각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에도시대의 가치관을 지닌 할아버지 대(代)부터 내려오는 정서와 정결한 심신을 요구하는 교회 신자라는 틀 속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폐병 환자 둘이 성욕을 인정하며 약혼자를 버리고 친구를 배신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아리시마 다케오는 이 작품을 통해 본능을 감추고 사회적인 체면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내면의 진실에 따라 본능적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주제 앞에 후자의 손을 들어 준다. 그가 말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갈 것'이란 평생 그를 지배한 이념이었으며 그러한 점은 그의 죽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부녀인 연인 하타노 아키코와의 동반 자살이 그것이다.
<태어나려는 고뇌>는 실제 화가인 기다 긴지로를 모델로 한 소설로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생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어부로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고뇌에 찬 예술가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카인의 후예>에서도 주인공 닌에몬은 아리시마 다케오가 지향한 '본능에 충실한 삶'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지주와 소작인의 삶을 그렸는데, 몸은 지주의 땅을 부쳐 먹지만 영혼만은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아리시마 다케오는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외국인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인 가정에서 자라며 영어를 배웠던 아리시마 다케오는 10살 때 당시 귀족 명문 자녀들만 다니는 가쿠슈인(學習院)에 입학하여 19살에 졸업한다.
그런 그가 <카인의 후예>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세기 말 일본에서 근대사상의 중심지였던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 현 홋카이도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이곳에서 소작인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하층계급의 삶에 눈을 뜨게 된다.
하층민에게서 '본능적 삶'을 발견한 아리시마의 애정과 관심은 이후 <쾅쾅벌레(かんかん虫)>(1910)를 시작으로 <카인의 후예>(1917), <태어나려는 고뇌>(1918)로 이어진다. 이러한 작품들은 단순히 머리로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대농장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실천에서 드러나며 그것은 곧 아리시마 다케오의 '내면의 소리대로 실천하는 삶'의 철학이 바탕을 이룬 것이다.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有島武郞 短篇集)>을 낸 류리수 작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외대에서 일본 문학을 강의했다. 그간 신인논문상(한국일어일문학회, 2004), 신인번역가상(새한국문학회, 2005)을 받았다.
200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예계간지 <문학과 현실>에 이어 <착각의 시학>에 꾸준히 일본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밖에 번역서로 <어느 멋진 하루>(원작 <신(神樣)>,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広美), 2009), <한 송이 포도>, <클라라의 출가>(<일본 명단편선>, 아리시마 다케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이 있다.
한편, 류리수 작가는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를 아버지(류의석 선생)가 일본어로 번역한 유고작을 보완, 수정하여 일본어판 <백범일지(白凡逸志)>(2019)을 출판하여 일본내 조선인학교에 기증한 바 있다.
이 시기는 일본 역사에서 메이지 11년으로 세이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 이후 정치와 사회의 혼란이 격화되어가던 그 시기에 부친 아리시마 다케시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성공적인 변신을 했다. 어머니는 야마우치 사치코, 네 살 때 아버지가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요코하마로 옮긴 뒤에 그의 화혼양재 교육방침에 의해 미국인 목사의 가정에서 생활했고 그후 요코하마영화학교 (현재의 요코하마에이와가쿠인)를 다녔다. 이 시절의 경험들이 훗날 <한 떨기 포도>라는 작품에 남겨진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외국인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인 가정에서 자라며 영어를 배웠던 아리시마 다케오는 10세에 당시 귀족 명문 자제들만 다니는 가쿠슈인에 들어가서 19세에 졸업한다.
가쿠슈인 시절의 다케오는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그 때문에 당시 황태자였던 다이쇼 덴노의 놀이친구로 선택되었다. 마침 둘이 서로 한살 차이이기도 했고.[2]
졸업 후 농학자가 되고자 삿포로농학교(현재의 홋카이도대학)에 진학하였다. 다케오의 부친이 다케오의 삿포로 행을 허락한 것은 삿포로농학교 교수로 있던 니토베 이나조 때문이었다. 그는 다케오의 어머니와 같은 모리오카 출신이었고 니토베 이나조의 양아버지의 주례로 두 사람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친척 같은 그에게 아들을 맡기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삿포로농학교의 교장 우치무라 칸조의 사상에 감화를 받은 아리시마 다케오는 1901년 삿포로 독립 기도교회에 입회했고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졸업 후 군대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해버포드 대학교 및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때에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휘트먼과 입센 등 서양 문학, 앙리 베르그송,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점차 범신론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유럽을 돌아보고 1907년에 귀국했다. 이 무렵에 그는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고 기독교를 떠났다.
귀국 후에는 다시 예비 견습 사관과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현 홋카이도대학) 영어 강사로 지냈다. 그 때 동생 아리시마 이쿠마(일본의 화가)를 통해 시가 나오야, 무샤노코지를 만나 동인지 시라카바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소설과 평론 분야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인지 『시라카바(白樺)』 창간에 참가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많은 소설과 평론을 발표해 시라카바 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3]
1916년에 아내 야스코가 폐결핵으로 죽고[4], 아버지마저 죽자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해서 <카인의 후예>, <태어나는 고통>, <미로>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작가로서의 양심 선언이라 할 만한 <선언 하나>라는 글을 발표함과 동시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당시 홋카이도 니세코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을 토지 공동 소유 형태로 소작인들에게 무상 증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이런 농원이 반드시 자본가에 의해 탕진되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도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의 1923년, 아리시마 다케오는 잡지 <부인공론>의 기자였던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 1894~1923)와 만나게 되는데, 유부녀였던 그녀와의 만남이 그의 삶을 파국으로 이끈다. 미인 기자로 유명했던 그녀의 출신지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으나,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도쿄 신바시의 게이샤의 딸이었다고 한다. 아키코는 아오야마가쿠인(현재의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18세 때 15세 연상의 남자와 결혼했다.
하타노 아키코와 아리시마 다케오가 처음 만난 것은 <빈사의 백조> 공연을 함께 본 뒤였다고 한다. 이후 아키코의 편지가 전해졌고 몇 차례의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아내의 죽음 이후 아리시마는 독신 생활을 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아키코와의 관계에서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키코의 적극적인 구애로 인해 애인 관계로 발전했다.
아키코는 앞서 설명했던 대로 아오야마가쿠인 여학교 시절에 15세 연상의 하타노 하루후사를 만났다. 영어 학원을 운영하던 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버지 없이 자랐던 아키코는 연상의 남자에게서 아버지를 보았고 그에게 응석을 부리듯이 행동했다. 결국 아내와 이혼을 한 하타노 하루후사는 18세의 아키코와 결혼을 했고 어린 여자에게 약해서 아키코가 학교를 졸업하고 부인공론의 기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5] 즉 아키코는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이었고 그녀 자신은 새장 속의 새처럼 고이 보살펴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리시마를 만나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간통죄가 존재했던 시절이라 두 사람의 사랑이 세상의 용서를 받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알게 된 남편 하루후사는 아리시마에게 1만 엔의 돈을 요구했다. 간통죄로 처벌하려 하면 오히려 그의 명성이 더 올라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간통죄로 감옥에 가야 한다면 가겠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돈으로 바꿀수는 없다며 아리시마는 거절했다. 이 때쯤에 아리시마는 친구에게 아키코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며 감옥에 갈 거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죽을 거라는 생각을 알렸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1923년 6월 4일 치바 후나바시의 여관에서 자고 5일 뒤인 6월 9일 오전 2시이후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그 전날 친구는 아리시마를 설득했지만 두 사람은 도쿄 신바시역에서 가나자와시로 가는 특급열차를 탔고, 비가 내리는 늦은 밤에 가루이자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별장에서 마지막 사랑을 나눈 뒤, 대들보에 목을 맸다.[6] 두 사람의 사체는 7월 7일에서야 발견되었고 장마철에 거의 한 달 동안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상당히 부패가 진행되어 유서로 본인을 확인했다.
전도유망한 작가와 당시로서는 드문 미모의 여기자의 정사(情死), 이것은 당시 일본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기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위대한 작가를 농락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으로 아키코를 비난했지만 이후 다케오와 아키코의 삶을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들의 정사가 반드시 아키코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
당시 이 동반자살 사건이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던 탓에, 아리시마의 스승이었던 문학가 겸 성서학자 우치무라 간조도 "만약 내 지인들 중에 아리시마의 자살을 칭송하거나 옹호하는 자가 있다면 그와 교류를 끊겠다"라고 천명했을 정도.
- 선언
- 카인의 후예
- 클라라의 출가
- 미로
- 탄생의 고뇌
- 어떤 여인
-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
- 내 어린 아이들에게
- 니세코역에서 걸어서 30분쯤 떨어진 곳에는 아리시마 기념관이 있다.
-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카루이자와가 무대인 단편 <향수 동반자살>을 보면 도도로키 경부가 카루이자와는 동반자살의 명소라면서 오래 전 여기서 고명한 문사가 동반자살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리시마와 아키코의 동반자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 뱀을 엄청나게 무서워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하타노 아키코는 뱀을 좋아해서 뱀 모양의 반지를 상시 착용하고 다녔다. 하지만 뱀을 무서워하던 아리시마와의 교제하게 되면서 더는 그 반지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고 훗날 발견된 두 사람의 시신에서는 반지가 없는 아키코의 손가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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