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因緣)과 인연 (人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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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 자주쓰는 인연이라는 글자의 정확한 한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용하는 문장에 따라서 인연 (人緣)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인연의 원래의 한자는 인연 (人緣)이 아니라 불교에서 기원한 인연 (因緣)이다.   윤회설에 기반해서 만물의 관계을 강조하는 불교방식이나 인본중심의 유교적인 방식은 기독교나 플라톤이후로 이어져 오는 서양철학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인연 (因緣)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기본 사고방식이나 문화에 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 지를 알 수 있다.  

그중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겟지요” 라는 문장을 예로 한번 설명해보자.  

문화적인 차이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가 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연이라는 단어가 영어에는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와 비슷한 단어를 찾기도 쉽지 않기때문에 직역은 사실은 불가능하다.  영어사전에 나오는 connection이나 relation이라는 단어 혹은 cause and effect 라는 숙어가 있지만,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be meant’ 를 사용한 ‘If we’re meant to meet again, then we’ll meet again.“ 혹은 ‘fate’로 만든 “Maybe fate have us cross path again.” 문장정도가 원래의 문장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자주 사용되는 문장정도로 인터넷에 소개되어진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근본적인 문제는  서양철학에서는 운명이라는 것이 과거의 연계성에 크게 주목하지 하지 않는 반면에 불교에서의 인연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영어로 된 이 두 문장의 의미와 한글문장의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라는 문장의 원래의 의미는 언제인가는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에,  영어의 두 문장에 사용되어진 “if” 혹은 “Maybe”라는 단어는 미래의 인연을 단지 가능성으로 열어둔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봐주기문화의 일부 이유가 이런 윤회설에 기반한 인연이라는 철학에 일부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불교색이 옅어진 우리나라에서 적극적인 불교에서의 의미로 인연이라는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의 정서속에서 완전히 업서졌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연을 人緣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동양적인 사고에 기반한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인연이라는 의미가 인연 (人緣)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날이 온다고 해서 봐주기문화의 관행이 더 심해지거나 아니면 덜 심해진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다음에는 시간이 있으면 이런 우리의 가치관의 변화가 사회전반에서의 생활방식에는 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지 한번 이야기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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