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재권와 데이비드 차머스의 '물리주의의 비환원적 견해': 현상적 정신 속성들은 기능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고로 환원불가능하다; 물리주의가 포착할 수 없는 마음(mind)의 측면이 존재한다.

 

김재권은 학자로서 활동하던 기간동안, 여러 가지의 심신이론을 옹호하였다. 1970년대 초 (심신)동일론의 여러 견해들을 옹호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수반관계에 강하게 연관된 '물리주의의 비환원적 견해'로 옮겨간다.

그 이후, 심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로서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엄격한 물리주의'를 거부하였다. 특히 그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5], 즉 에 관한 세밀하고 종합적인 신경생리적 설명이 여전히 '의식' 자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 문제가 (아주 엄격한) 물리주의적 맥락 하에서는 해결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물리주의에 대한 그의 논쟁은 다음 두 논문,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Mind in a Physical World)》(1998)과 《물리주의 혹은 거의 충분한 것(Physicalism, or Something Near Enough)》(2005)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2005년의 논문에서 김재권은 "그러한 물리주의(엄격한 물리주의)는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정신적 상태의 질적 측면 및 현상인 감각질이 물리적 상태 혹은 과정들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현상적 정신 속성들은 기능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고로 환원불가능하다"고 밝히고, "만약 기능적 환원이 감각질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로 물리주의가 포착할 수 없는 마음(mind)의 측면이 존재한다.

이후 '믿음'이나 '욕구'와 같은 의도적인 정신적 상태는 신경학적으로 환원가능하다는 논문을 옹호하기도 했으나, 질적인 것들 혹은 '느낌'과 같은 현상적 정신 상태는 환원불가능한 비물리적/부수현상적(epiphenomenal)인 것이라고 밝혔다. 2008년 3월 그는 여전히 물리주의가 다른 어떤 세계관과도 대체불가능한, 가장 종합적인 세계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2008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마음은 자연현상이며 자연현상은 시공간계의 법칙과 사건, 그리고 인과관계 같은 것을 통해 자연계 내에서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초자연적 존재나 초월적 힘에 의해 설명하는 것은 "한 수수께끼의 자리에 다른 수수께끼를 들여놓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그는 자연과학에서 나온 마음의 본성에 대한 어떤 올바른 설명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하드 프라블럼, 즉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는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 of Consciousness)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데이비드 차머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하드 프라블럼은 감각질(qualia)의 문제,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지각하면서 느끼는 기분이나 심상 등의 주관적 체험'이 뇌의 물리적, 화학적, 전기적 반응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 반해 이지 프로블럼은 물질로서의 뇌는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일련의 문제를 가리킨다. 의학이나 뇌과학, 생물학 분야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는 주로 이지 프라블럼에 대한 것이다.
 
대표적인 연구분야는 심리철학, 특히 의식이란 주제를 중점으로 다룬 철학자이다. 현대 심리철학에서 감각질 또는 퀄리아라고 하는 개념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각 경험을 뜻하는 것으로, 일인칭 시점에서 경험되기 때문에 삼인칭 시점 즉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경험할 때 신경섬유 C가 작용한다는 걸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아는 건 아니다. 이러한 감각질 개념과 그에 대한 논의는 사실 근대철학 때부터 있어왔다. 존 로크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했는데 여기서 제1성질은 크기, 수 등 수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성질을 뜻하며, 제2성질은 소리, 맛 등과 같이 주관적인 감각적 성질이다.[2] 로크는 어째서 제1성질에서 제2성질이 도출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졌는데,[3] 이것이 바로 감각질 문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 심리철학에선 로크를 데카르트와 함께 심리철학의 시초 격으로 간주한다.[4]

차머스는 물리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모든 물리주의적 입장이 의식이란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하면서 의식이란 철학적 주제를 보다 명료화하고 그 존재에 대한 논증을 제시함으로서 의식과 감각질 문제를 현대 심리철학에서 다시 부활시켰다.[5] 가령, 그 유명한 의식의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라는 개념을 도입한 철학자가 바로 차머스다.[6] 쉬운 문제란, 기억, 주의 등의 심리학에서 탐구하는 문제들이고 어려운 문제란, 바로 감각질과 관련한 문제들이다.
 

3.1.2. 범심론[편집]

차머스의 심리철학적 논의는 주로 현대과학이나 기존의 물리주의가 마음, 즉 의식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논증들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쉬운 문제(easy problem)와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라는 개념이 나온다. 차머스의 주장은, 우리가 쉬운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의식의 어려운 문제, 즉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 어려운 문제, 바로 감각질 문제이며 그동안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했지만, 모두 감각질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게 차머스의 생각이다. 가령, 대닛은 감각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각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많은 심리철학자들이 이러한 대닛의 입장과 비슷한 입장을 취해왔다. 반면, 처칠랜드 같은 철학자는 감각질 문제가 쉬운 문제를 풀다보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 보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는 서로 연관되었으며, 어려운 문제란 결국 쉬운 문제들이 얽혀서 우리가 아직 다 모르는 것이다. 즉, 과학이 더 발전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보았다.

차머스는 의식 또는 감각질이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논증하고 그 이유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다.[16] 차머스에 따르면,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공간, 시간, 물질 등이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맥스웰이 전자기 현상을 기존의 뉴턴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전자기에 관한 기본 법칙을 상정하고 전하를 그 법칙이 지배하는 기본 요소로 상정했다. 차머스는 의식에 관해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는 "의식을 기존의 기본 요소 - 공간, 시간, 물질, 전하 - 로 설명할 수 없다면 논리상으로 당연히 목록을 늘려야 한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은 의식 그 자체를 기본으로 자연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상정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테드강연

즉, 차머스가 의식이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건 현재의 과학적 한계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지 앞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차머스는 이렇게 의식을 우주의 근본적인 단위로 상정한다면, 그 다음 단계는 이 의식을 지배하는 기본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의식을 다른 기본 요소, 곧 공간, 시간, 물질, 물리 과정과 연결하는 법칙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차머스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자이지만, 마음이 근본적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다른 비환원적 물리주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거칠게 설명하자면, 비환원적 물리주의 입장 중 하나인 속성 이원론에 따르면 심적 언어와 물리적 언어가 같은 현상을 다르게 설명하는 언어이며, 이 둘은 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즉 이 두 언어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다. 또는 창발론에 따르면,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부터 창발되었지만 전자는 후자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차머스의 심리철학적 입장은 분명 이러한 비환원적 물리주의 입장들과는 차이가 있다.

마음이 우주의 근본 단위라는 점에서 차머스의 심리철학적 입장은 범심론이다. 차머스는 인간 뿐 아니라, 개, 쥐, 파리, 롭 나이트의 미생물, 소립자, 광자도 어느 정도의 의식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존재들이 인간과 같은 지능이 있다는 건 아니고, 만물이 "의식의 전조에 해당하는 원형을 갖고 있지 않을까"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Philosophical Zombie, P-Zombie

심리철학  형이상학의 고전적인 논제. 의식,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상적 의식인 감각질에 얽힌 사고실험이다. 역사상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발상은 여러 차례 제기된 적 있으나, 구체적으로 "좀비"라는 이름을 쓰는 형태의 현대적인 논증은 데이비드 차머스가 제안했다.

마음에 대한 물리주의를 논박하기 위하여 고안된 연역논증이다. 다만 연역논증의 특성상 설령 본 논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 결론을 부정함으로써 전제들 중 하나 이상을 부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좀비'?[편집]

창 밖을 보며 바깥 나무의 싱그러운 푸른 느낌을 경험하고, 초콜릿 바를 씹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오른쪽 어깨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고 상상해보자. 내 좀비 쌍둥이는 어떨까? 걔는 나와 물리적으로 동일하고 […] 기능적으로 동일하며 […] 심리적으로 동일한데다가 […] 기능적 의미에선 “의식적”이기까지 하다. 잠에서 깰 수 있고, 내적 상태의 내용을 보고하며, 여러 장소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는 그런 기능 발휘가 진정한 의식적 경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현상적 느낌이라는게 없다. 좀비가 되는 느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원문][2]

데이비드 차머스, 『의식적 마음(The Conscious Mind)』
차머스 본인이 명시적으로 밝히듯 철학적 좀비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연출되는 "좀비"와는 다르다. 왜냐면 철학적 좀비는 몸이 썩어들어가지도 않고, 말을 못하지도 않으며, (보통 사람이 그렇다는 가정 하에서) 식인을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의상 철학적 좀비는 보통 사람과 원자 단위, 분자 단위로 동일하기에 물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현대 분자생물학  신경과학을 신뢰하는 한, 이처럼 좀비와 사람이 물리적으로 구별불가능하다면 좀비와 사람은 인지, 행동 등에서도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좀비는 사람처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글을 읽고 말을 하고, 울고 웃으며, 찌르면 피가 나는 생물이다.

다만 정의상 좀비는 사람과 달리 감각질을 결여한다. 즉 "날 것인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좀비가 나뭇잎을 본다고 해보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뭇잎을 볼 때 가시광선은 좀비의 망막에 있는 시세포를 거쳐 전기 신호로 전환되고, 이는 시신경을 통해 대뇌 후두엽 시각피질을 거쳐 뭇 두뇌 영역에서 처리된다. 이를 바탕으로 좀비는 "나뭇잎이 보이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봄이 왔구나'라고 추론을 할 수도 있으며, 나뭇잎을 집으려 손가락을 뻗을 수도 있다.

다만 사람과 달리 좀비는 "초록색"이라는 바로 그 느낌은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물리적, 생리적, 행태적으로 사람과 모두 같지만 바로 그 주관적인 경험만큼만은 불가능한 것이다.

좀비 논증의 옹호자들은 결코 좀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면 현실세계에서 그런게 있다고 볼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관건은 그런 좀비가 존재하는게 가능하냐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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