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은 양성애자 왕인데다 부자 갈등, 원나라에서도 활약한 국제인, 학구적 기질,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이건 충선왕을 다룰려면 원 간섭기 자체를 언급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시기 자체가 어찌됐든 외세가 개입한 흑역사 요소가 있어 국민정서에 맞지 않아 시청률을 확보하기 힘든 탓도 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양성애자 왕인데다 부자 갈등, 원나라에서도 활약한 국제인, 학구적 기질,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이건 충선왕을 다룰려면 원 간섭기 자체를 언급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시기 자체가 어찌됐든 외세가 개입한 흑역사 요소가 있어 국민정서에 맞지 않아 시청률을 확보하기 힘든 탓도 있다. 또한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 시기 자체를 어물쩍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지도도 높지가 않고[40], 치세 후반기로 갈수록 암군의 면목도 보이기 때문에[41] 매력있는 스토리 짜기가 생각보다 힘든 편이다. 덕분에 퓨전 사극은 몰라도 정통 사극으로는 앞으로도 다른 소재 다 떨어지지 않는 한 나올 가능성이 그리 높진 않다.[42]
[38] 고려 왕조에 충선왕처럼 동성 연애를 한 기록이 남은 임금이 제7대 목종과 제31대 공민왕인데
세 명의 케이스가 조금씩 다르다. 목종은 여자에게 무심하고, 후사도 안 보며 잘생긴 남자들을 데려다 동성애에 빠졌던 반면
충선왕은 후사도 보고 후궁도 여럿두며 여성편력이 상당했고 원충 외에는 동성 애인을 둔 기록이 없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일편단심이었고, 이 점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으나 노국대장공주 사후 맛이 가서 여러 음행을 벌인 케이스이다. 케이스가 케이스인 탓에 사실상 왜곡되었거나 부풀려진 기록으로 보고 있다.[39] 4학사 중 한 명인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제자였으며 사위였다.[40] 애초에 충선왕 전후 시기 왕들 정도를 빼면 공민왕 전까진 원 간섭기 왕들이 대개 단명한 편이라 딱히 많이 쓸 것도 없다.[41] 오히려 양위 이후 만권당 운영할 때 다시 상승 포인트를 맞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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