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연산군 시대에 발명된 연은분리법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의 은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독도-다케시마 영유권 분쟁 중인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은 한 때 세계 은 생산량의 30%를 차지했는데,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명나라, 네덜란드와 영국, 포르투갈과 일본이 무역이 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막부가 은 수출을 조선에 제한하자, 조선에 경제위기가 몰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났다; 결국 일본이 생산한 막대한 은은 1700년대 수도 에도를 세계 최초 100만 인구의 거대도시로 만들었다; 이 은광을 독점했던 사쓰마번의 번주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척을 지게 되고 영지를 몰수당했는데, 막부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결국 1860년대 사쓰마와 막부 간 전쟁으로 재현된다; 한편, 스페인이 통치했던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í) 은광은 16세기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60%인 250톤의 은을 생산했는데, 막대한 은의 유럽유입으로 인한 인플레, 이른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4. 역사[편집]

옛 이름은 현 동부는 '이즈모(出雲)', 현 서부는 '이와미(岩見)'. 그리고 이 현 소속의 오키 제도는 '오키(隠岐)'로 불렸다.

일본 역사적으로는 의미가 깊은 지역인데, 고대에는 한반도중국과의 교역지였으며, 그 때문에 당시의 전설이 많이 남아있고 유적, 유물 등이 많이 출토되는 곳이다. 특히 현 동부인 이즈모 지역은 일본 신화에서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지역으로 비교적 일찍부터 국가가 형성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스사노오 신화처럼 한반도에서 넘어간 도래인 관련된 장소도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있다. 스사노오 문서 참조.

후에 야마토가 번성하면서 야마토에게 복속되었지만 그래도 고대 일본에서 이즈모의 위상이 상당했다고 할 수있다. 이즈모 방언과 도호쿠 방언 간 유사성을 들어 고대 이즈모 세력이 도호쿠에 와서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16세기경에 시마네현에서 엄청난 은이 매장된 이와미 은광[8]이 있었다. 덕분에 일본은 당시 세계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세계 2위 은 생산국이었던 적이 있었다.[9] 그러나 이 은광은 17세기 중엽부터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해 현재는 폐광됐다. 참고로 여기서 산출된 은은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거대한 은의 흐름 중 하나로서 세계 경제사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영국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소설가 코이즈미 야쿠모가 시마네현에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히로히토 천황항복성명을 발표하자 멘붕극우 세력들이 마츠에에서 마츠에 소요 사건이라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폭동 때문에 마츠에 곳곳이 불에 탔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까지 살해당했다고 한다.

 

1. 개요[편집]

일본 시마네현 오다시에 있는 은광 유적.[6]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일본 최대 규모의 은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은광의 전성기에는 전 세계의 연간 생산량의 1/15를 차지할 정도였다.[7][8] 참고로 이 당시 일본 전체 은 생산량은 150톤 정도로 추정되며 당시 세계 생산량의 30%을 차지했다.

비슷한 곳으로 볼리비아포토시(Potosí) 은광이 있으며 이쪽은 아예 도시 규모의 은광으로 16세기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60%인 250톤의 은을 생산하여, 막대한 은의 유럽유입으로 인한 인플레, 이른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이쪽도 이와미 은광처럼 초반엔 부진하다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법의 도입으로 막대한 생산량을 달성했다.

2. 역사[편집]

긴잔큐키(銀山日記) 등에 나타난 기록상으로는 14세기 초반부터 이미 일대에서 노천 채굴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광산 개발은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貞)가 스오우오우치 요시오키[9] 지원을 받아 1526년에 시작했다. 이후 조선연산군 시대에 발명된 연은분리법이 일본에 전해지는데 이 연은분리법을 이용하여 은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자 막대한 부를 생산해내는 이와미 은광을 노리고 주변에서 각종 전쟁이 발발하기 시작했다. 당장 1537년에 윗영지 이즈모아마고 츠네히사군대가 오우치 요시오키가 영지를 비운 틈을 노리고 쳐들어와 광산을 강제 점령한다. 2년 후 오우치 가문이 다시 은광을 탈환했지만 다시 2년 후 아마고 가문은 은광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최종 승리자는 오우치 가와 아마고 가를 모두 이기고 1561년에 주고쿠의 패권자가 된 모리 모토나리였다.

이와미 은광을 점령한 모리 가는 광산과 주변을 개발하며 약 20년간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모리 데루모토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미 은광 덕분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죽고 전국의 패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가자 데루모토는 히데요시에게 정복되었고 은광은 모리, 도요토미 가문의 공동 소유가 된다. 이로 인해 예상할 수 있는 결과처럼 이와미 은광은 임진왜란에 들어가는 군사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장악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세우면서 전국에 있는 금광과 은광을 모두 강제 몰수한다. 그리고 각 광산을 관리할 자를 보내는데 이와미 은광에는 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를 파견한다. 나가야스는 다시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할 사람을 두고 막부를 위해 본격적으로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7세기 초반에 이와미 은광은 최대 전성기를 맞아 매년 막부에 15톤 가량의 은을 공물로 바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에 은이 넘쳐나게 되자 이는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명나라, 네덜란드영국, 포르투갈과 일본이 무역이 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또한 무역 거래를 통해 조선에 흘러들어간 일본 은이 조선 후기 경제를 지탱하는 기축통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은이 무한대로 산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와미 은광도 17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점차 고갈되기 시작한다. 갱도를 더 깊이 파야됐고 그럴수록 채굴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생산량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갱도를 팠지만 폐쇄되는 갱도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럼에도 생산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 여파로 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유출되는 은을 군 막부가 통제한 것이 18세기 이후 조선 경제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일본이 세계 1위의 은 생산국이었던 시기는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 개설 초창기에는 이와미 은광 등지에서 산출된 은을 주요 결제수단으로 교역을 했으나, 은 생산량은 해마다 매우 불규칙했고, 오래지 않아 고갈되어 한동안은 막부가 보유한 금으로 무역 결제를 하는 등 임시적인 대응을 하던 중, 때마침 쿠보타 번(아키타 번)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인나이 광산)이 개발되어, 이후로는 구리가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 무역에서 일본의 주된 수출품이자 결제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명나라와 서양 국가들 또한 주화를 주조하기 위해 대량의 구리가 필요했으므로 은의 산출이 격감한 이후에도 명나라 상인들이나, 네덜란드 상인들이 나가사키를 찾을 충분한 유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66년에 일어난 조슈 정벌전쟁에서 막부군이 조슈 번에 패전한 여파로 은광은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어 대정봉환을 거쳐 메이지 시대가 열리자 새 정부는 이와미 은광을 민간에 넘겨 민영화해버린다. 운영권을 넘겨받은 회사는 이름을 오모리 은광(大森銀山)으로 바꾸고 재개발을 시도했지만 예전 같지 않은 채굴량[10]구리 개발에 나섰다가 입은 손실, 몇 번의 자연재해를 겪은 끝에 운영을 포기하여 이와미 은광은 1943년[11] 폐광되었다.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이와미 은광과 광산촌, 항구까지 은을 반출하기 위해 만든 가도(街道), 항구마을, 은광 개발 초기 쟁탈전 당시 축조했던 산성의 성터, 사원 등 14곳의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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