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떤 관계는? 한국어는 세계어가 될 수 있을까? 우리말의 기원을 찾아 장대한 여행! [위대한 여정, 한국어] (KBS 2004 방송)

 


 

 

 

인간FOX2P 유전자 단 두개의 돌연변이 - 영장류와 인간을 가르는 차이점

근육 세밀 움직임

-> 말하는 능력


18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출현.


오락가락하는 호모 사피엔스 출연연대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44612#:~:text=%ED%98%84%EC%83%9D%20%EC%9D%B8%EB%A5%98(%ED%98%B8%EB%AA%A8%EC%82%AC%ED%94%BC%EC%97%94%EC%8A%A4)%EC%9D%98,%EB%A5%BC%20%EC%83%88%EB%A1%9C%20%EC%8D%A8%EC%95%BC%20%ED%95%98%EA%B2%8C%20%EB%90%90%EB%8B%A4.

“인류 나이는 19만5000살” - 기존 16만년說 뒤집어

2005.02.17 18:00
현생 인류(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19만5000년 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16만 년 전보다 3만5000년 더 오랜 것으로 인류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하게 됐다. 미국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와 호주국립대(ANU) 연구진은 1967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오모 강 근처에서 발굴된 인간 두개골 화석 2개가 발견된 지점의 바로 밑 화산암을 아르곤 연대측정법으로 검사한 결과 이 암석이 19만6000년 전에 생성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르곤 측정법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고고학계의 대표적 연대 측정 기법이다. 이 같은 내용은 과학 학술전문지 네이처 최신호에 실렸다. 연구진은 두개골 화석이 포함된 퇴적물은 암석이 생성된 직후 쌓였다는 증거를 찾아내 이 두개골이 19만5000년 전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오차는 ±5000년이다. 또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가 현생 인류가 출현한 고향이며 여기서부터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는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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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판사, 윌리엄 존스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로마어 기원이 같다는 것

즉, 인도유럽어족 가설이 생김

1. 개요[편집]

영국언어학자이자 법조인, 법학자, 인류학자로, 산스크리트어고전 그리스어, 라틴어, 고대 페르시아어동계라는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여, 훗날 언어학의 하위 분과인 비교언어학의 시초가 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746년에 영국 런던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난 그는 수학자였던 아버지[1]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학구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언어학에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당시 그는 혼자서 고전 그리스어라틴어, 히브리어, 산스크리트어, 한문 등을 익혀서 도합 28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줄 알았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한 존스는, 번역가와 가정교사 일을 병행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대학 졸업 후에 20대의 나이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후인 1783년에는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지였던 콜카타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판사를 지냈는데, 이 와중에 인도의 문화에 대해 연구하다가 산스크리트어고전 그리스어, 라틴어의 문법과 어휘가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1786년에 자신이 근무지인 콜카타에서 창설한 왕립아시아학회에 연구 성과들을 소개했는데, 학계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783년에 당시 영국조지 3세 임금에게 기사 작위에 서임되었고, 1794년에 콜카타에서 사망했다.

3. 업적[편집]

산스크리트어고전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가 서로 친연 관계가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하였다. 비록 존스 본인은 이 연구의 최종 결과인 인도유럽어족의 존재를 입증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1816년에 독일언어학자인 프란츠 보프가 존스의 자료를 분석하여 인도유럽어족의 존재를 발견하여 학회에 제출하였고, 이는 비교언어학이라는 언어학의 분과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1] 아들과 이름이 같은 윌리엄 존스라는 인물인데, 원주율 기호를 그리스 문자 π로 표기한 최초의 인물이며,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었던 아이작 뉴턴이나 에드먼드 핼리와 친분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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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랄어족- 핀란드 출신 학자

구스타브 욘 람스테트

: 몽골어의 대가

한국어-알타이어 비슷한 어족 300개다.


동아시아 새석기: 러시아 바이칼 - 일본 홋카이도 모양 유사

공통조상의 가능성

알타이 - 가장 오래된 새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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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년 혹한기에 시베리아 새석기

따뜻하고 살기 좋은 것 떠나

한반도로

 

이홍규 서울대 교수: 당뇨 유전자.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에 좌우됨.

북방 유전형: 몸에 에너지 많이 생성. 마른 체형 유지. 비만에 안 걸린다.

인슐린 생산량 적게. 당뇨 적다.

미토콘드리아 대대로 이어짐.

 

북방: Y D A Z C G

남방: F B M7 Y1 E

한국인 70% 북방형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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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버 힐버트: 한국어 드라비다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

주어-목적어-서술어 구조

드라비다어는 인도 남부,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에서 사용되었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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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천손신화, 난손신화 겹치는 곳


천손신화 [기마] 스키타이족, 바이칼, 몽골 등지


난손(알)신화 [농경] 대만, 필리핀, 쟈바, 인도, 드라비다어

따뜻한 쪽, 벼농사

 

열대 쿠로시오 해류 타고 동남아에서 한반도로 건너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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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명 동아시아 유전자 비교

건국대 김욱: 미토콘드리아 한국인 40% 동남아 유전자형

B, F, M7 하플로그룹


이주경로?

기원전 8,9000년경

기원전 3,4000년경: SRY465 한국인 30%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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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만으로 인종 구분할 수 없다.

언어만 구분이 가능하다.

 

9.2. 하플로그룹으로 외모를 구분한다?[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100% 정확하게 구분할 순 없다.

하플로그룹으로 외모를 구분하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다인자 유전에 의해서 부계, 모계가 각각 짬뽕되기에 일반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계 혈통인 mt-DNA와 부계 혈통인 Y-DNA가 각각 존재한단 것은 다른 상 염색체도 따라온단 것이기에 어느 정도 중간 상관관계(0.4 ~ 0.6) 정도는 있다고 볼 수 있다.

외모는 단순히 얼굴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 어깨너비, 피부색, 두상, 신체비율 등 여러 외적으로 보이는 형질을 뜻한다.

외모에 영향을 끼치는 염색체와 유전자는 다양하므로, 외모는 다인자 유전의 성질을 띤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하플로그룹과 같이 Y염색체 미토콘드리아만이 외모에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다른 상염색체도 봐야 하기에 하플로그룹과 외모간 인과관계는 낮지만, 상관관계는 중간 정도는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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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시 시미즈: 쿠마모토대 전 언어학 교수

일본어, 한국어 5000개 공통어근, 기초어휘 공유

언어학적으로 같은 언어.

대륙한어 -> 반도한어 -> 열도한어

 

죠몬인과 다른 야오이인 특징

기원전 10~3세기 야오이인

163.4cm로 키가 크다 / 치아 크다 / 길쭉한 얼굴형 / 눈이 작다 / 광대뼈 돌출

야오이 큐슈일대 인골 북서쪽을 향하게 매장 - 고향에 대한 제사?

한반도 서남부 송국리형 주거지

일본과 유물 비슷

야오이인, 청동기 쌀농사 기술 일본 전수


Mark Hudson

https://www.shh.mpg.de/person/91522/25522

야오이인의 언어 = 일본어

한반도 북부 고구려 -> 야오이인 이주 이후 일본어로 정착

백제, 신라어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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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50070#home

 

한민족과 혈통 가까운 일본인… 유전자 분석으로도 입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중국인보다 일본인에 더 가깝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류가 중국과 한반도로 갈라진 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동했다는 추론이 유전자 분석을 통해 상당 부분 입증된 셈이다.

국립보건연구원 조인호 박사 연구팀과 생명공학 벤처회사인 디엔에이링크 이종은 박사팀은 3일 "세계 최대의 유전체 연구협의체인 미국 TSC연구팀과 함께 대규모 유전자 염기서열 연구를 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며 "앞으로 질병 유전자 발굴이나 관련 신약 연구 개발 등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한국인은 흑인과의 유전적 차이가 18.8%, 백인과 16.1%에 이르는 반면, 중국인(8.4%), 일본인(5.9%)과의 차이는 비교적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가 가장 비슷하다는 의미다.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8.6%였다.

조 박사는 "한국인과 다른 아시아 민족 간에도 이 같은 유전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질병 유전자 관련 연구에서 한국인의 특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공동 연구를 할 경우 중국보다는 일본과 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미국 TSC가 백인(유럽계 미국인), 아시아인(일본인.중국인),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5만5018개의 SNP(단일염기 다형성)를 측정하고 조 박사와 생명공학벤처회사인 디엔에이링크의 이종은 박사팀이 한국에서 3대 이상 살아온 한국여성 43명을 대상으로 8333개의 SNP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종합한 것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고밀도 인간 유전체의 단일염기 다형성 지도'라는 제목으로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인 '지노믹스' 8월 호에 실렸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54795.html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인보다는 일본인과 더 가깝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립보건연구원 생명의학부의 조인호 박사와 생명공학 벤처회사 디엔에이링크의 이종은 박사 팀은 질병이 없는 건강한 한국인 43명의 단일염기 다형성(SNP)을 조사한 뒤 이를 이 분야 세계적인 연구협의체인 티에스시(TSC)의 결과와 비교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3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 우리나라 사람과 도쿄 지방에 사는 일본인과는 보통 염색체는 5.86%, 성염색체는 4.74%의 차이가 있었으며, 중국인과의 차이는 각각 8.39%, 7.80%로 나왔다.
조 박사팀은 2001년 12월부터 2년 동안 43명의 8333개 단일염기 다형성을 분석했으며, 이를 다른 나라의 것과 비교했다. 다른 나라의 분석 자료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엠아이티(MIT) 등의 세계적인 유전체 연구 기관이 참여하고 있는 티에스시가 내놓은 것으로, 백인과 흑인은 각각 42명, 동양인 42명의 5만5018개 단일염기 다형성 자료이다.
이 유전자 분석 자료를 서로 비교하면 민족간 유전자 동질성 여부를 파악할 수 있어, 민족의 계통도 분류할 수 있다. 실제 민족간 유전적 차이 수치는 작을수록 동질성을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 박사는 “이번 연구로 그동안 매우 유사한 민족으로 추정됐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실제 증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도 단일염기 다형성 분야는 맞춤의학 시대의 핵심기술로 꼽히고 있다”며 “이번 연구 결과로 향후 질환관련 유전자 발굴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국 티에스시(TSC) 연구팀의 성과에도 포함돼 ‘고밀도 인간 유전체의 단일염기 다형성 지도’라는 제목으로 국제 학술지인 <지노믹스> 최근호에 실렸다. 김양중 기자 himtrain@hani.co.kr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D%94%8C%EB%A1%9C%EA%B7%B8%EB%A3%B9_O1b2_(Y-DNA) 

하플로그룹 O-M176 또는 하플로그룹 O1b2 인류 Y-염색체 DNA 하플로그룹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하플로그룹 O2b로도 불렸다. 가장 가까운 하플로그룹 O-K18(O1b1)과 함께 약 26,100년 ~ 30,600년 전의 최근공통조상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1]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만주족에 많이 보이는 하플로그룹으로 한반도, 만주 지역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분포[편집]

O1b2*-R220
O1b2*-R144
O1b2a-CTS3505
O1b2a1-47z
O1b2a2a-L682
O1b2a2b-F940
O1b2a3-CTS10687

하플로그룹 O1b2는 동북아시아에서 주로 나타나는 Y-DNA 유전 형질로 서쪽으로는 몽골 서부의 알타이산맥과 자흐친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 일본인: 약 36% (256/800)[2]
  • 한국인: 약 32% (190/677)[3][4]
  • 오키나와인: 24% (59/132)[5]
  • 만주인: 34% (96/505)[6][7]


계통[편집]

다음은 하플로그룹 O1b2의 하위 트리에 대한 2017년 9월 10일 ISOGG(ver.12.244) 조사이다.

  • O1b2 (IMS-JST022454, L272.2, M176/Page63/SRY465, M302, P49, F1942/Page92)
    • O1b2a (F1942/Page92)
      • O1b2a1 (CTS9259)
        • O1b2a1a (F3356)
          • O1b2a1a1 (CTS713, CTS11986): 유래는 일본 열도(Hammer 2006) 혹은 한반도에 보여진다.
            • O1b2a1a1a (CTS1875) 일본 열도 고빈도로 보인다.
              • O1b2a1a1a1 (CTS10682) 일본 열도
            • O1b2a1a1b (Z24598) 일본 열도
            • O1b2a1a1c (CTS203) 일본 열도
          • O1b2a1a2 (F2868, F3110, K4) 일본 열도
            • O1b2a1a2a (L682):는 한반도 혹은 만주 지역 유래로 여겨지며. 한국인 20%, 오키나와인 12%, 우데게족 10%, 나나이족 8%,-12 일본인 6%, 만주인 3%에게서 나타난다.
              • O1b2a1a2a1 (CTS723) 한반도
                • O1b2a1a2a1a (CTS7620) 일본 열도, 나나이족
                • O1b2a1a2a1b (A12446)
                  • O1b2a1a2a1b1 (PH40)
            • O1b2a1a2b (F940, F1912, F3390):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 유래로 여겨지며. 만주인 0-26%로 가장 고빈도 나타난다.
          • O1b2a1a3 (CTS10687, F1800)는 가장 고빈도 지역으로는 강원도 4% 발견된다. 그외 주로 북방 소수민족에서 소수로 발견된다. 시버족, 부랴트인, 우랑카이인(북서몽골 지역), 자흐친족(남서몽골 지역),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바다흐샨 지역).
            • O1b2a1a3a (CTS1215)
        • O1b2a1b (CTS562, CTS562*) 중국(베이징)
      • O1b2a2 (Page90)

같이 보기[편집]


9.3. 인류를 우생학적으로 분류한다?[편집]

하플로그룹은 분야 특성상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이러한 우생학적 연관을 떠올리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하플로그룹에 대해서 더 알게 되면 오히려 우생학과 거리는 멀고, 인류 평등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란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우월한 북방 게르만족인 아리아인만이 인류의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는 나치 홀로코스트를 주장한 아돌프 히틀러의 하플로그룹이 E1a1b인 유대인한테 주로 검출되는 하플로그룹이 나타났으며, 오히려 나치가 말한 '순수 아리아인'의 혈통은 I 계열과 R1a 계열이라 볼 수 있다.

I 계열이야 북방 게르만족(바이킹, 데인, 노르드인 등)들의 주류 하플로그룹이라 그럴 수 있다 쳐도, R1a 계열의 경우는 말이 좀 달라진다.

Y-DNA 하플로그룹 R1a 계열은 슬라브족의 주류 하플로그룹인데, 슬라브족은 나치의 학살 대상 민족에 포함되었다. 역설적으로 나치는 순수 아리안 혈통을 학살 대상으로 삼았단 것이다. 이처럼 하플로그룹은 나치의 유사과학적 사상을 반박하는 논리적, 과학적 도구이며 증명이다.

애당초 하플로그룹은 인류를 우생학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출경로와 혈통, 민족 구성을 알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 더더욱 말이 안된다.

모든 생물은 각자 서식 환경에 맞게 적응과 진화했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생물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

다른 생물과 비교할 필요 없이 같은 인간만 보더라도 고위도에서 서식하던 백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자 피부암 발병률이 극도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서식하던 흑인들이 미국과 같이 고위도 지역에 서식하자, 비타민 D 결핍 문제가 심각해지고 구루병 환자 다수가 흑인인 점 등 각각의 환경에 맞게 적응과 진화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우월한 생물종은 그 지역의 환경에 서식하기에 적합한 형질을 가진 생물종이 우월한 생물종인 것이다. 백인이 아프리카나 적도 부근에 가면 그 지역 환경과 적합하지 않은 형질들에 의해 열등한 생물종이 되는 것이다.

애초에 '고등' 또는 '하등' 생물이란 개념은 현재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박테리아와 사람 사이에도 우열이 없는데 인류 내에서? 오히려 이것은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부터 더 잘 인식하고 있다.

더군다나 mt-DNA 항목에서 설명했듯이, 변화 파악에 요긴하게 쓰이는 영역은 변화가 있어도 비암호화 DNA를 대상으로 단일염기다형성을 분석하기에 형질적 차이도 발생한다고 보기는 힘들며, '우생학적 우열'과는 무관하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염색체 유전 얘기만 나오면 조건반사적으로 우생학을 떠올리는 낡아빠진 생각은 이제 그만 접어둘 때가 됐다. 다만 Y염색체는 변화가 심하면 고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고자라니!!

사실 오히려 흔하게 널린 하플로는 주변 지역에도 많으므로 우생학보다는 평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21]

하지만 하플로그룹을 다루는 사람들 중에 정치적인 해석이 은연중에 개입되어 어떤 하플로그룹이 우월하고 열등한지에 대한 쓸데없는 논쟁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결론은 정치적인 해석이나 개입 없이 순수하게 과학적인 결과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8. 한계[편집]

공통 조상 추적에 있어선 하플로그룹만큼 직접적이고 정확한 것이 없지만, 인류 진출 경로에 관해선 분명한 한계점을 갖고 있다.
 


위에 쓰여 있듯이 수만 년 전부터 식량이나 기후로 인해 이동한 인류를 순서대로 알파벳 표시한 것으로 지역끼리 거리가 가까울수록 유전자 자체가 매우 달라도 같은 하플로그룹 알파벳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으며, 옛부터 지배층의 경우 하층민보다 인구가 적은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지배층의 경우 근친으로 인한 혈연 권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자녀의 수가 노동력을 중시하던 하층민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근대에는 인구 구조가 달랐으나 현대에 들어 농업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상층류보다 농업을 도울 수 있는 자녀의 수가 훨씬 중요한 하층민들의 인구 증가 폭발이나 대규모 이주로 인해 현대에 들어 Y 하플로그룹의 비율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 계통도[편집]

유전학인 만큼 기본적으로 계통도의 구조를 따른다. 특히 Y-DNA 부계 Hg의 계통도가 그러한데 부계 Hg은 거의 완벽한 나뭇가지에서 줄기를 뻗는 트리 형태의 계통도를 띈다. 반면 모계 Hg의 경우, 트리와는 다소 다른 초기 Hg에서 단순하게 분화한 구조를 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수컷은 살해 당하는 등 유전자 풀에 변화를 주는 요인에 많은 노출이 있었음을, 암컷은 성 노예와 같은 생활에 많은 노출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

 

알렉산더 보빈

3. 인물[편집]

생전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매우 잘하는 편이었다. 보빈 본인의 말로는, 자신의 제1연구 대상이 일본어였던 데다가, 일본에서 상당히 오래 활동한 경력 덕에 한국어보다 일본어 실력이 좀 더 좋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국어 역시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보빈이 간혹 한국어로 쓴 글들이 있는데, 읽어 봐도 외국인이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전형적인 논문형 어휘와 구조로 수준도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주류 국어학계, 사학계 등에 대해 꽤나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 경향 때문인데, 상기한 한반도 남부 토착언어가 일본어족이었을 것이라는 그의 학설과 달리, 한국 학자들은 한국사에서 다루는 모든 고대 국가 및 세력의 언어를 한국어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민족주의적인 정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반도 일본어설을 언급할 때에도 반드시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설명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다[5].

 



고대 한국 남부를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의 야요이인은 계통이 같은 언어(고일본어)를 사용하였으나 Peninsular Japonic 한반도 중남부의 고일본어족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북쪽에서부터 남하한 어족(현대의 한국어로 계승된 부여어족으로 추정)에게 흡수 및 소멸, 추방되어 한반도에서 거의 사라졌고,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어족은 일본열도에만 남아 오늘날 일본어가 되었고 북쪽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어족의 직계 후예는 현대 한국어라는 학설을 발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대표적인 논문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가 번역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탄탄한 이론적 무장과 왕성한 활동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을 다룬 학설 중 지지를 많이 받는다.

주된 근거는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기재된 한반도 중남부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일본어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한반도 중남부에는 원래 고일본어 화자들이 주로 살았다. 이 언어가 오늘날의 일본어로까지 이어지기에 '고일본어'로 부를 따름이다. 즉 원래의 일본어족 한반도 중남부에서 생겼지만, 야요이 시대 무렵, 그러니까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걸쳐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들이 오늘날의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오늘날 간토 지방의 이서 지역을 모두 일본어 사용지대로 바꾸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이후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 그룹은 (대략) 기원전 7-6세기부터 만주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밀려난다. 이들은 부여어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로 추정한다. 그래서 보빈 교수는 고일본어 화자들이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갔거나 또는 언어적으로 한국어에 완전히 병합당했고. 현대 한국어는 남하한 부여어족의 직계 후예라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한반도 중남부에는 원래 고일본어 화자들이 주로 살았다. 이 언어가 오늘날의 일본어로까지 이어지기에 '고일본어'로 부를 따름이다. 즉 원래의 일본어족 한반도 중남부에서 생겼지만, 야요이 시대 무렵, 그러니까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걸쳐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들이 오늘날의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오늘날 간토 지방의 이서 지역을 모두 일본어 사용지대로 바꾸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이후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 그룹은 (대략) 기원전 7-6세기부터 만주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밀려난다. 이들은 부여어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로 추정한다. 그래서 보빈 교수는 고일본어 화자들이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갔거나 또는 언어적으로 한국어에 완전히 병합당했고. 현대 한국어는 남하한 부여어족의 직계 후예라고 주장한다.

 

4.2. 고대 한국어 연구[편집]

우선 고구려어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보면, 고구려어로 된 여러 지명과 인명, 관직명 등을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현대 한국어와의 친연성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있다. 보빈이 조사한 고구려어 고유명사들이나 조사 등에서 한국어 어휘와 유사한 것이 대거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유명사는 다른 언어의 어휘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반드시 순수 고구려어 어휘라고 단정짓기는 애매하지만, 조사나 서술어 부분은 물론이고 문장 형식까지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고구려어가 한국어와 친연 관계일 가능성이 커졌다.

반대로 가야어 신라어의 어휘들은 일본어 어휘와 비슷한 것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보빈은 초기 가야어와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는 임나일본부설과는 관련이 없고, 일본어족의 고대 언어를 사용한 민족들이 한반도 중남부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현대 일본어의 조상어가 된 고대 일본어와 완전히 같은 언어는 아니었고 친척관계에 해당하며 따라서 차이도 있었다.

 
 
이 가설을 연구한 알렉산더 보빈 백제의 경우 남방계 국가 중 가장 일찍 한국어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본다. 요악하자면 진국에서 일본어족을 구사했고 이는 변한/가야 진한으로 이어졌으나, 마한은 일찍이 한국어족을 구사했으며, 이는 백제에서 지속되었다는 주장이다. 보빈은 진한의 언어는 일본어족으로 보았으나, 고조선계 유이민이 세운 국가인 신라의 언어는 한국어족으로 본다. 보빈은 백제에서도 일본어와 연관이 있는 어휘가 일부 발견되나, 초기 신라(=진한) 보다는 훨씬 적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마한 지역이 훨씬 먼저 한민족화 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가야어 탐라어는 남은 기록이 거의 없지만 그나마 전해지는 어휘가 일본어족 계통이라고 봤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마한 진한 변한보다 일찍 한민족화 되었다는 주장은 준왕 전승과도 통하며, 고고학적 근거도 있다. 남한 일대에서 세형 동검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은 준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건마국 부근, 즉 금강 유역이었다.#[3]

이 가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고, 언어학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유사한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에 대해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 등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든다.

 

 

3.1. 지명에 대한 검증[편집]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일반 명사나 수사,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이다. 특히 역사학자 및 언어학자들은 여러 기록들에 나와 있는 한반도의 옛 지명들이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강력한 근거로 들고 있다.
化昌縣本知乃彌知縣景徳王改名
화창현은 본래 지내미지(tinəmiti)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西畿停本豆良彌知停景徳王改名
서기정은 본래 두량미지(turamiti)정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單密縣本武冬彌知一云曷冬彌知景徳王改名
단밀현은 본래 무동미지(mutuŋ miti) 혹은 갈동미지(katuŋ miti)였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道安縣本刀良縣景徳王改名
도안현은 본래 도량(tora)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위 기록들은 전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옛 지명들 중 일부이다.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 본래 지명인 tinəmiti, turamiti, mutuŋ miti/katuŋ miti, tora는 한국어 지명이라고는 보기에는 어색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은 이 지명들을 일본어로 쉽게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먼저 tinəmiti의 경우, 고대 일본어 속격 조사 -nö [nə],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길’이라는 뜻의 mîti로부터 ti-nö mîti를 얻을 수 있다. 고대 서부 일본어 ti는 '피, 우유, 아버지, 힘'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며, 보빈은 tinə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강한/견고한 길'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A]
  • tura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tura는 ‘앞, 얼굴‘이라는 의미이며, mîti는 상술했듯이 ‘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tura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앞길에 있는 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A]
  • mutuŋ miti의 경우, 상술했듯이 miti는 고대 서부 일본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고대 서부 일본어는 음절말 자음이 없었음을 염두에 두면, mutuŋ은 고대 서부 일본어 mutu '친밀한, 가까운'과 비교해볼 수 있다. 따라서 mutuŋ miti는 ‘은밀한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경덕왕이 지은 ’단밀(단지 은밀함)‘에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mutuŋ miti의 또다른 이름인 katuŋ 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합치다‘라는 뜻의 ‘kate-’와[6] ’길‘을 의미하는 mîti로 번역할 수 있으며, ‘합쳐지는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 tora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호랑이’라는 뜻의 tôra로 쉽게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진한 신라 외에도 변한  가야계의 몇몇 소국들의 이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를테면 변한 및 가야의 소국 중에서는 미오야마(彌烏邪馬) 사이기(斯二岐)라는 국가가 있다. 이 두 국가들의 국명은 한국어로 보기에는 상당히 낯설지만 일본어와는 괴리감이 없다는 점에서 근거로 쓰이고 있다. 특히 ’미오야마‘에서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やま, 山)’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오야마(미오산)’라는 명칭을 일본 신화에 나오는 나라현에 위치한 ‘미와야마(미와산)’와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9]

 

반론


반면 보빈은 양서에 제시된 7세기 신라어 낱말을 분석해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신라가 7세기까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일본어족이 기층 언어가 되어 한국어족에 남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라어를 반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주장도 간혹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도자 칭호들이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라인 혹은 백제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26]이 필요하다는 문헌 근거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 해석할 수 있는 신라어 텍스트 중 하나인 향가가 남아있고, 향가를 해석한 결과 일본어족이 아닌 한국어족과 가까웠다. 무엇보다 신라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증거 자체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으며, 반도 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일본서기1>, <일본서기2>,[27] <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1>, <입당구법순례행기2> 그렇기에 보빈은 두 번째 가능성에 더 주목하였다.[B]

다만 알렉산더 보빈은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가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고 있었다고 추측했는데, 신라 초기 시절인 사로국의 계통은 고조선  낙랑에서 남하한 예맥계임이 고고학적으로 드러났고, 사로국 시절부터 후대의 통일신라까지 단절이나 별다른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임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신라의 경우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어렵다. 상술했듯이 신라가 고위층은 한국어족이고 서민 계층은 일본어족을 쓰는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도 증거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진한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도 일본어가 쓰이고 있었지만, 사로국이 권역을 넓혀가면서 한국어족을 진한 지역에 보다 빨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건국 시기쯤, 즉 보빈의 추측보다 훨씬 더 빨리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족 사용 지역으로 모조리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가정 하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열의 언어는 쓰였던 적은 없으며, 한반도 전역이 원래부터 한국어족의 권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전부 심증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며, 결정적인 물증은 자료 부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29] 

 


2017년에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어 목간[34]에서 수사를 분리하여 #, 숫자 '2'를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을 '새태읍(新台邑)', '5'를 '도스읍(刀士邑)', 7을 '일고읍(日古邑)', 8을 '옅털읍(今毛邑)'이라 재구하였는데, 여기서 재구된 음은 상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고 현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상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다.

 

  ...

 

다른 가설

Mark Hudson

https://www.shh.mpg.de/person/91522/25522

야오이인의 언어 = 일본어

한반도 북부 고구려 -> 야오이인 이주 이후 일본어로 정착

백제, 신라어 ->한국어

 


고구려어 수사 4개가 일본어와 일치

사이타마현의 고마신사

 

고구려계가 야오이인이고,

이후 신라계가 삼국통일하며 한국어는 신라어로 통일된 반면,

일본은 고구려어가 남았다? 


6.2.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설[편집]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한반도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로는 미국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가 있는데, 이쪽은 가설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벡위드는 일본어 고구려어를 '부여어족'으로 묶고[45] 오늘날의 한국어는 이 계통에서 철저히 떼어놓았다.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어휘 차용 이외에는 친족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 간의 유사성,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어휘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보빈이 지적하듯이 그의 분석에는 결함이 많아서,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자의적으로 차용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어 기본적인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의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표기할 때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본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적었을 뿐인 것을 몰랐다. 또 한국어 특유의 'n+r→ll'의 자음동화 현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이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였으며, 일본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의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언어학자인 정광 선생에 의해 크리스토퍼 벡위드의 논문이 번역되어 출간된 뒤에 그의 주장은 굉장히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이 가설은 일본어 알타이 제어간 연관성을 찾는 일본의 알타이어족 가설 지지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알렉산더 보빈식의 반론: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남부의 옛 고구려 지명은 반드시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나 황해도~경기도 북부의 예맥족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옛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큰 관련이 없으나, 이 경우 고구려계 지배 세력이 도달하기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는 학설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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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7

최근 ‘일본어의 뿌리는 한국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미즈 기요시씨(전 구마모토대 교수)와 박명미씨(시모노세키시립대 강사)가 한국어와 일본어 어휘의 공통 어근 5천개를 연구해 쓴 『아나타(あなた)는 한국인』(정신 세계사)이 그것이다.

 

저자들은 “한자어에서 차용된 어휘와 서양에서 들어온 외래어를 뺀 순수 한국어와 일본어 고유어의 어근이 거의 같다”고 주장한다. 공동저자 박명미씨는 “두 언어의 유사성을 증명하려면 단어의 형태와 의미가 비슷하고 음운 대응이 규칙적인 사례를 찾아야 하는데 공통 어근을 밝히는 작업이 그것”이라며 “한국어와 일본어 어휘 중 공통 어근이 5천개 이상 나왔다는 것은 두 언어가 자매 언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자매어  공통어근 5천여 개 밝혀내

 

두 사람은 언어가 뜻에 비해 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해 단어의 뜻보다 발음에 초점을 두어 연구했다. 시미즈씨는 “한국어에서도 표준어 ‘먹다’를 경상도에서 ‘묵다’라고 발음하듯 언어는 모음 변화가 자음 변화보다 크다”며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 모음보다 자음이 안정돼 있어 자음 음운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한국어 ‘거미(gm-i)’와 같은 뜻의 일본어 ‘구모(kum-o)’에서 자음인 g와 k가 대응하며, 따라서 gm과 kum은 공통 어근이다. 책에는 구두(gud-u)와 쿠츠くつ(kut-u), 노루(noru)와 노로のる(noro), 바지(baj-i)와 파치ぱっち(pat-ti)등 어근이 같은 예 1300개가 실려 있다.

또 이 책은 발음이 서로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어휘들은 자음삭제[]순경음 탈락 등의 음운 법칙으로, 뜻이 다른 어휘는 단어 발생원리 등을 통해 어원이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현상을 보고 ‘닳다’라는 단어가 나왔듯이 일본에도 달을 뜻하는 츠끼つき(tuki)와 ‘닳다’라는 의미의 츠끼루 盡きる(tuk-ir-u)라는 단어 사이에 음운적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그 예다.

특히 일본어가 한국어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한국어가 일본어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박명미씨는 “언어의 경제성으로 인해 후대의 언어는 음운체계가 더 단순해진다”며 “한국어가 형태론적으로 더 복잡하며 한국어로 일본어의 체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일본어로 한국어 체계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어가 먼저 나타났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시미즈씨는 “이는 앵글로 색슨족이 유럽 대륙에서 게르만어를 가지고 영국으로 이주했듯이 한민족은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한어(韓語)를 가져갔다는 언어학적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고대의 한국어를 한어(韓語)라고 칭하고 자매 언어 중 언니어에 해당하는 한국어를 반도 한어로, 동생에 해당하는 일본어를 열도 한어로 구별했다.

 

한국어가 형태론적으로 더 복잡  일본어가 후대어임을 입증

 

 이 책의 저자인 박명미씨와 시미즈씨는 2년 간 한ㆍ일 양국 언어 연구를 수행했으며 현재 책 발간 이후에도 공통 어근을 가진 어휘 5천개를 추가 발견한 상태이다. 이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우리가 탄생시킨 ‘한어비교학’을 계속 연구해 그 결과를 한국과 일본 학계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글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던 이현복 명예교수(언어학과)는 “한ㆍ일 양국 언어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 성과를 일반인에게 알릴 수 있는 형태로 엮어낸 것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며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한ㆍ일 양국 언어 어휘의 대응을 독자적으로 연구해 두 언어의 관계 규명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출처 : 대학신문(http://www.snunews.com)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8583.html

박 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번 논문은 “포괄적이기보다는 특정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라서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연구자가 난해한 언어학 개념을 빌려 설명하려는 내용은 간단하다. “일본어의 뿌리는 한국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 한글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이같은 주장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아나타는 한국인>(정신세계사)이란 단행본도 함께 펴냈다. 이번 논문 발표는 그 연장선상이자 연구의 새로운 도약과 진전을 알리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언어의 유전자는 자음에 새겨져 있다.” 그 유전자 분석의 시료는 음운 비교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연구자는 지난 2002년부터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연구에 뛰어들었다. 이후 3년여 동안, 한·일의 고유어 어휘 7천개(파생어 포함) 이상이 같은 어근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예컨대 다발(a bundle)을 뜻하는 일본어는 ‘다바’다. 둘 다 한자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어다. 두 어휘는 공통적으로 [d], [b]의 음운을 갖고 있다. 말의 뿌리가 같은 것이다. 박 강사는 “모음은 같은 나라의 방언에서도 서로 차이가 나지만, 자음은 유전자처럼 보존된다”며 “한국어와 일본어의 자음 비교를 통해 두 언어가 ‘체계적으로’ 닮아 있음이 분명해졌다”고 밝혔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형성돼 다른 쪽에 영향을 줬는가다. 박 강사는 “‘삯월세’가 ‘사글세’로 변하듯, 언어는 복잡한 형태에서 간단한 형태로 변화하는데, 같은 어근을 가진 어휘를 비교해보면, 한국어의 여러 자음이 일본어의 첫 자음에만 남는 현상이 무수히 많다”며 “언어학적 측면에서 일본-한반도-대륙이 아니라, 대륙-한반도-일본의 방향으로 언어가 전달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런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들은 일본어를 아예 ‘열도 한어’로 분류하고, 대륙한어-반도한어-열도한어를 아우르는 ‘한어사(韓語史)’ 연구를 주창하고 있다. 두 연구자는 오늘날 쓰이는 일본어의 상당수가 기원전·후부터 7세기 말까지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허재영 서울대 국어교육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본 학자들은 일본어가 알타이어(및 한국어)와는 독립적으로 형성됐으며, 오히려 일본어가 한국어에 영향을 줬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며 “두 연구자는 이를 반박하는 강력한 논증을 하고 있으며, 이번 논문을 통해 그 분석 시스템을 보다 정교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https://nrid-nii-ac-jp.translate.goog/ja/nrid/1000090264267/?_x_tr_sl=ja&_x_tr_tl=en&_x_tr_hl=en&_x_tr_pto=sc

언어학적으로 주변국에 큰 영향력… 종교·농경 분야에 단어들 전파 증거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카드(card)’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기원한 것이다. 라틴어로 종이(paper)는 carta(카르타)인데, 이 단어는 지중해를 건너 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지로 건너갔으며, 그 형태가 ta-carta(타-카르타)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 단어가 -ta로 끝날 때 여성 접두사(feminine prefix) ta-가 붙는 사하라 사막 투아레그족(Tuareg people) 사람들의 언어 형태였다.

 

투아레그족 카라반, 즉 대상(隊商)들은 이 로마 종이를 서아프리카로 운반했으며, 그 단어 형태는 나이지리아와 그 인근 나라들의 하우사어(Hausa language)인 ‘takardaa(타카르다)’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라틴어 단어는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 전하면서 ‘カルタ(카루타, 놀이딱지)’가 되었다.



고구려 제국과 일본열도는 동해를 지중해 삼아 하나의 언어권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대륙 고구려인들은 동해를 건너 일본에 쌀 재배 야요이 문화를 전달했다. 한국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금은 러시아의 극동에서 실천하고 있다. 연해주의 한 한인 농장.


일본 열도는 고대 고구려 영토

이런 식으로 대제국의 문화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들이 종종 세계의 먼 변방으로 차용되었다. 한국인의 기원을 찾는 답사 여행이 끝나갈 무렵, 우리 눈에 고조선(Ancient Korea)과 고구려의 지배 영역은 로마제국의 그것과 더욱더 흡사해보였다. 우리는 이미 답사 전에 고대 일본어가 고구려어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이것은 특히 더 진실인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BC 400년께나 그보다 더 일찍 일본열도가 고대 고구려 영토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로마제국이 지중해의 북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이형구 교수도 제시하려고 하는 것 같이, 우리는 대륙 고구려(continental Koguryo)와 열도 고구려(insular Koguryo) 사이에 있는 동해를 고구려의 동지중해(East Mediterranean Sea), 그리고 대륙 고구려의 서남쪽에 있는 발해만을 고구려의 서지중해(West Mediterranean Sea), 혹은 고조선의 지중해(Mediterranean Sea)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답사의 결과 우리는 고대 로마가 유럽의 지중해 제국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지중해 제국이었다고 보게 되었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당시 고대 한국인들이 주변의 만주-퉁구스족 이웃들보다 더 발전해 있었던 여러 분야 중 하나인 종교와 농경분야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 고구려 제국으로부터 차용해온 가장 명백한 단어는 불교의 핵심 단어들이다.

 

즉‘부처puch- (Bud dha)’와‘절<뎔c r>< ti r (Buddhist temple)’이다. 부처의 열도 고구려어(즉 고대 일본어) 형태는 한국어 접미사 *-ki 가 -ke로 바뀐 ‘ ほとけ hot-o-ke’이다. 대륙에서는 고대 여진어(Old Jurchen) 형태가 *puc-i-ki로 기록돼 있으며, 이것은 나중에 만주어에서 fuc-i-hi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어 접미사 *-ki 는 -ki와 -hi 의 형태로 일본과 만주에서 남게 된 것이다.

 

 

레이니 부연-

「 "이 ki라는 한국어 접미사는 현대 한국어에서는 '지'나 '치'로 변형되어 쓰이지만  일본어에서는 'aniki(형)'라는 말에서와 같이 높은 사람을 나타내는 의미로 여전히 쓰인다. 고대 고구려어로 높다는 의미로 '성'을 ki라 했고 왕이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말 뒤에 키를 붙였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장사-치'등으로 낮은 말로도 변했지만 고대 고구려어의 '막리지'처럼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한국어 '아버-지'도 같은 경우이다. 이 ki는 높다라는 의미가 그대로 남아 나무의 사투리인 '남ㄱ.ㅣ(고어)' 또는 '낭귀' 낭구'에서 '기'로 전승되고 있으며 '기둥'에서도 앞의 '기'는 이 접미사가 접두사로 쓰인 경우이다.

 

따라서 일본어로 Hoto-ke'는 bud-dha<bot-to<hoto<hoto+ki<hotoke의 순으로 음운 변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buddha의 b음이 hotoke의 h음으로 전환된 것은, 일본어로 大本營(2차대전 당시의 일본의 총본부)을 '다이-혼-에이'라고 음독하듯이 ㅂ음이 ㅎ음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음운법칙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hotoke로 완성된 것이다.

 

이 상태에서 '호토키'로 발음 하는 것 보다는 '호토케'로 발음되는 것이 보다 음운전략상 릴랙스하기 때문에 '접미사 ki'는 'ke'로 발음 됐을 것이다. 또한 buddha의 'u'모음은 언어학적으로 모음 어근이 유동적이기때문에 얼마든지 가변성이 있다 따라서 'o'모음으로 변한 것이다. -(레이니 註)"」

 

하와이 대학의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불교는 AD 538~552년 사이에 일본에 전해졌다. 우리는 AD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기 전에 이미 불교가 여진족 영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교가 고구려와 발해, 두 나라에서 번성했기 때문에, 일부 고대 한국어 어원들은 더욱 타당하다 ”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퍼져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대륙과 열도의 고구려 영역에 한국인 승려들에 의해 불교가 모든 고구려 제국에 퍼져나간 것이다.

농업분야에서는 3개의 분명한 차용어들이 있다. 첫 번째는 ‘뿌리ppur-i’다. 중기 한국어 ‘불휘pur-hui’는 만주어 ful-ehe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만주어는 고대 한국어 ‘*pul-eke(root)’에서 기원한 것이다. 두 번째는 ‘무(根菜) mu-u’다. 중기 한국어 ‘무 muzu(radish)’는 여진어 ‘niaju -z- )’보다는 오히려 고조선어 형태인 *bur-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니 부연-ㅁ음과 ㅂ음은 같은 입술소리로 얼마든지 호환가능하다. 고대어 어근 bur이 후대에 m음으로 바뀐 것을 말하고 있다)

세 번째는 ‘메주 mi cu(soybean malt)’다. 만주어 형태는 같은 의미를 가진 misu-n이며, 일본어 형태는 ‘味 みそ mis-o(soybean paste)’이다. 이것은 일본인 승려 요시다 켄코우(吉田兼好, 1317~1331)가 쓴 수필 ‘투레두레구사(徒然草)’에 최초로 기록돼 있다. 만주어와 일본어 형태들은 현대 한국어 형태보다 초중기 한국어 형태인 ‘密祖 *mico’에 더 가깝다.

한국어 흔적 만주어·일본어서 발견

이번에 우수리스크를 답사하면서 우리는 한 한국인 농장에 머물도록 초대받았다. 그곳에서는 쌀과 콩을 재배하여 수출하고 있었다. 대륙 고구려의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런 옛날의 좋은 농업 전통을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극동에 여전히 전달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역사적으로 대륙 고구려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쌀재배 경작의 야요이 문화를 전달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고구려의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인 일본과 더불어 오늘, 그리고 미래에 동아시아의 형제국으로서 그리고 평화의 동반자로서 남아야 할 것이다.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교수, 극동대 겸임교수·언어학>


 

 ...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백제 무령왕릉, 신라 임신서기석

공통점: 우리말 어순 사용. 기본뼈대는 비슷.


삼국시대 - 단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700년의 대립 역사 때문.

삼국사기 - 의사소통은 가능했던 것 같다. 방언 차이.

 

4. 고구려어(부여어족)와의 근연관계 논쟁[편집]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전(百濟傳)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우선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는 없다. 양서(梁書)에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고 서술되어 있고 '신라는 중국인과 말을 할 때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言語待百濟而後通焉)'고 되어 있어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다만] 백제의 경우 토착 세력인 피지배층과 고구려 유민 계통의 지배층이 서로 다른 언어를 썼다는 이중언어설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 가설을 입증할 근거는 부족하다. 오늘날 들어서는 고구려의 변체한문(變體漢文) 문법 구조가 한국어의 문법적 요소와 비슷하다는 점이나 백제 목간에서 현대 한국어와 비슷한 형태의 수사가 확인됨으로써, 이들이 한국어족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남부의 옛 고구려 지명은 반드시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나 황해도~경기도 북부의 예맥족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옛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큰 관련이 없으나, 이 경우 고구려계 지배 세력이 도달하기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는 학설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도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게 실제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이에 대한 재구는 모두 삼국사기 지리지나 일본서기, 삼국지 등 중국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비교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일본서기 비다쓰 덴노조의 기록을 참고하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따로 구분했다. 고구려-백제어와 한어를 별개로 보는 이중언어설을 제외하면 이 기록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가 다른 계통이라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고대 일본어는 고구려-백제어, 즉 '부여계 어족'과 완전히 다른 언어 계통이었지만 부여계 어족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 백제어와 서로 비슷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한다.[37] 이에 대해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설은 없다.

고구려 (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나 동류의식 자체는 언어계통의 논박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예로, 인도유럽어족은 까마득한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썼지만 이들은 서로를 결코 동류로 여긴 적이 없었다.[38] 동류의식을 근거로 언어 간의 친연관계를 논한다면 오히려 이는 역설적으로 해당 언어의 화자인 문화 그룹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아, 그 언어들이 속한 어족의 역사가 인도유럽어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짧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 둘의 언어가 같은 어족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없다.

한편 고구려어를 일본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른 세력으로는 중국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만주족 연구자들[39]이 있으며 이들이 고구려어를 퉁구스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퉁구스 계통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다르다는 중국의 기록[40], 고구려어와 연관된 백제어를 삼한어 계통으로 묶는 일본 기록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증거조차 무시하고 그저 만선사관 혹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을 만주 세력(고구려)에 종속된 국가로 폄하하거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https://www.50plus.or.kr/detail.do?id=165846#:~:text=%EB%82%B4%EB%AC%BC%EC%99%95%2018%EB%85%84%20'%EB%B0%B1%EC%A0%9C%EC%99%95,%EC%9D%B4%20%ED%8A%B9%EB%B3%84%ED%9E%88%20%EB%91%90%ED%85%81%EA%B2%8C%20%EC%9C%84%EB%A1%9C%ED%96%88%EB%8B%A4.
 

삼국시대 서로 말이 통했을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삼국시대 한반도와 만주에 살고 있던, 오늘날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우리 선조들 간에 말이 통했을까?

 

언어의 진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이 하는 말을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천년 넘게 고립되어 진화되어 온 제주도 방언을 본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하다. 산이나 강으로 나눠진 채 교류가 없이 지나온 삼국시대 선조들 간의 말이 다를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삼국시대는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삼국 간에는 물론이고 말갈, 부여, 낙랑, 마한, 진한, 변한, 가야, 왜 등 주변 국가들과도 끊임없이 접촉하고 충돌하면서 일면 국제정치의 냉혹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시기였다.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같은 말을 쓰고 서로 간에 말이 통하면 ‘우리라는 감정(we-feeling)’을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야만인’은 우선 그리스 말을 쓰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는 이어인(異語人)을 말한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고유한 지식과 역사,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문화적 보편성으로, 나아가 오늘날 관점에서 ‘민족’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삼국 간에는 사신이 수시로 교환되었다. 과연 이들이 ‘한국어’의 초기 단계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말’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글’은 중국의 ‘한자’만으로 교신했을까? 필자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들로부터 유추해 보았다.

 

자세히 읽어보면 <삼국사기>는 삼국 간의 접촉을 기술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표현은 파사 이사금 26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고구려 동천왕 2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등이다. 이 사례들은 이들이 어떤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을 했는지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어떤가?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은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삼국 간에 어느 정도 의사표현이 자유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열전’ 제1 ‘김유신’ 편에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치자고 청한 데 대해 고구려가 거부하는 대화가 나온다. 이후 옥에 갇힌 김춘추가 고구려왕이 총애하는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두 사람은 토끼와 거북의 설화를 주제로 ‘농담을 나눈다’ 그리고 ‘석방되어 신라 국경을 넘으면서 고구려 호송인에게 그들을 속였음’을 말한다.

 

 

 ▲충남 부여의 서동요 테마파크. 서동과 선화공주는 어떤 말로 대화했을까.

 

 

고구려는 개로왕을 잡아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곧 죄목을 헤아린 다음’ 죽였다. 백제 항복 당시 신라 태자 김법민(金法民, 후일 문무왕)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꾸짖는다’. ‘열전’, ‘김인문’ 편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이 잡히자 ‘인문이 고구려왕을 당의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헤아려 꾸짖었다. 고구려왕이 두 번 절을 하자 영국공이 그에게 답례했다’. 김인문은 보장왕에게 직접 말을 했으며 영국공은 보장왕이 절을 하자 몸짓으로 답례했다는 것이다. 그 외 백제 무왕(武王)인 서동(薯童)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삼국유사>, ‘기이’ 제2) 등,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많다.

 

삼국 간 언어의 차이는 오늘날 서로 다른 방언 정도인 듯하며 이를 극복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오늘날 언어에 관한 간단한 이론 한 가지를 덧붙여 보자. <육체의 언어(Body Language)>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앨버트 메라비언은 3V 이론을 제시한다. 얼굴을 마주보는 대화에서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언어의 의미(verbal 혹은 words)가 7%, 말의 억양(vocal 혹은 tone of voice)이 33%, 표정(visual/ facial, body language)이 55%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의 ‘언어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혹은 말의 억양을 ‘느끼고’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의미’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남녀가 싸울 때 여자가 “I hate you(난 네가 싫어!)”라고 해도 남자는 오히려 섹시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최근 국어학자들은 <삼국사기> 34~37권에서 삼국의 지리가 한자로 기록된 것을 거꾸로 유추하여 당시의 우리말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글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원래의 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많은데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서 그 기원을 추적하면 삼국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진(秦)에서 수-당 시대 중국어의 변천과 우리말의 변천을 통해 우리말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설명이 전문적이어서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44권에 나오는 ‘居柒夫 或云 荒宗(거칠부 혹운 황종)’은 ‘거칠 황’ ‘부와 종은 우두머리’라는 걸 이해하면 ‘거칠부라고 발음하고 (혹은) 이것은 황종으로 쓰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국어에서 ‘거칠’은 ‘거츨’로 발음된다. 그러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는 이를 어떻게 발음했는지, 또 ‘거칠’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삼국이 비슷하게 사용했는지 등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 단서는 중국 ‘24서’ 중 하나인 <양서(梁書)>, ‘동이열전’, ‘신라’ 편에 나온다. ‘신라는 문자가 없고 나무를 조각하여 편지를 했다. 말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는 구절이다. 중국인들이 신라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이 통역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백제인과 신라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


150년 전 한국어, 지금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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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주의, 역사, 청원, 교통, 박사, 윤리, 상상, 문명, 문화, 예술, 고전, 강의, 의학, 위생, 봉건, 작용, 전형적, 추상, 철학, 회사, 부장, 사장 등 모두 일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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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한 때 중국대륙을 통치했지만 언어가 없어졌다.

 

프랑스의 투봉법

프랑스어 지키는 법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어 총괄위원회

 

프랑스 헌법에 프랑스어에 대해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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