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동전 던지기로 운명을 가릅니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승부죠. 한 방향으로 이어진 서양식 일직선의 사고입니다; 서양은 진선미, 의식주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말하지만 동양은 진이 선이고, 선이 미이고, 미가 선인 듯 두루뭉술해요. 심지어 (미스코리아 선발하듯) 진선미로 등수를 가려요; 이 ‘사이’가 중요해요. 사이에 낀 것이 잘못되면 큰일 나요.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 다 사이 간(間)자가 들어가 있죠? 즉 사이가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없으면 관계는 끝나는 거고, 자연과 인간 사이가 없으면 공해를 비롯해 각종 기상이변이 생기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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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⑤ 眞善美와 가위바위보

“眞善美를 합치고, 뛰어넘어 포용의 시대로…”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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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담 ‘참꽃에 볼때기 덴 년’… 김소월 시인, 저리 가”
⊙ 어질 인(仁)은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
⊙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동전 던지기 승부
⊙ 서구식 二項대립의 사고에서 가위바위보의 三項순환으로
⊙ 眞善美… 인지론·행위론·판단론 vs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이성비판
⊙ “AI윤리학을 하는 사람, 진선미 제대로 아는 사람 필요한 시대”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몇 해 전 서울 평창동 자택 거실에서 이어령 선생. 사진=조선일보DB
“김 기자! 참기름을 영어로 뭐라는 줄 알아? 내추럴 오일(Natural Oil)이라고 불러요. 우리에게 ‘참’은 진(眞)인데, 번역하면 내추럴이야.”
 
  새해를 맞아 지난 1월 7・18일, 2월 4일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찾았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주변의 하늘빛이 ‘자선 주일’의 어느 하루처럼 포근하였다. 선생은 진선미(眞善美) 이야기를 꺼내면서 참기름을 화두로 던졌다.
 
  “참기름은 참깨를 짠 기름이고 진유(眞油)라고 하지. ‘참’은 ‘진짜’나 ‘진실하고 올바른’의 뜻이 있고, 동식물 이름 앞에 붙어 기본적인 품종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요. 참가자미, 참깨가 그렇지.
 
  또 참꽃은 진달래라고 합니다. ‘들에 피는 달래보다 더 좋은 꽃’이 ‘진달래’입니다. 진에 대립하는 말이 ‘개’인데 ‘개꽃’이라고 하잖아. 접두사 ‘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참된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혹은 ‘함부로 된 것’이라는 뜻이야. 개꽃은 먹지 못하는 철쭉을 뜻해요. 반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는 참꽃이지.
 

  봄바람이 들어 들뜬 아가씨를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참꽃에 볼때기 덴 년’이라는 속담이 있어요. 진달래가 뻘겋잖아? 만산홍(滿山紅)의 진달래로 두 볼에 화상을 입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각적이야? ‘볼 덴 년’이라니. 김소월 시인, 저리 가라야. 대단한 거야.”
 
  그러더니 이내 이야기 흐름이 선(善)으로 이어졌다.
 
  “선은 착하다, 어질다는 뜻인데 어질다를 쓰는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어? 있으면 가져와 봐. 나한테 가지고 와 보라고. 중국에서도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과 같은 뜻이야. 일본에서도 어질 인은 번역이 불가능해. 우리만 해석할 수 있다고.”
 
 
  善과 仁에 대하여
 
이어령 선생은 인문학에서 3가지 사이(間)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뜻한다.
  선생은 선과 어질 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어린 시절 자주 들었던 ‘사이좋게 놀아라’의 ‘사이’가 바로 어질 인입니다. 그런데 어질 인이 뭔지 우린 잘 몰라요. 사전 찾아보면 우습게 써놨어요. 슬기롭고, 너그럽고, 덕행이 높고…. 어질 인 찾아보면 전부 ‘어질다’ 나오고, ‘어질다’ 찾아보면 전부 인(仁)이에요.
 
  공자님도 그랬어요. 다른 건 다 정의 내렸으면서 어질 인자만은 이게 무엇이라고 딱 말씀하지 않으신 거죠. 백 가지, 천 가지 해석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럼, 공자님은 왜 어질 인자를 풀이하지 않았을까요?
 
  정의했다간 큰일 납니다. 왜? 인은 곧 ‘사이’인데, 사이의 경우가 얼마나 많겠어요? 수천, 수만 가지가 넘어요.
 
  그런데 이 ‘사이’가 중요해요. 사이에 낀 것이 잘못되면 큰일 나요.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 다 사이 간(間)자가 들어가 있죠? 즉 사이가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없으면 관계는 끝나는 거고, 자연과 인간 사이가 없으면 공해를 비롯해 각종 기상이변이 생기는 거예요.”
 
  어질 인에서 사이 간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사랑 애(愛)를 자세히 봐요. 사람 뒤통수를 형상화한 거야. 애매하다는 뜻의 희미할 ‘애(曖)’도 거기서 나왔어요. 상대방이 사라질 때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야.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구나’ 하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Interface·서로 다른 두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를 이어주는 접속장치)가 막 생기거나 없어질 때 아니면 못 느끼는 거야.”
 
 
  사이와 인터페이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책상. 이곳에서 수많은 저작이 완성됐다.
  ━ 떠난 다음에 느끼는 게 사랑이라고요?
 
  “그렇지. 사랑이 도대체 어디 있어요? 나한테 있는 건가, 너한테 있는 건가? 사랑이 주는 거냐, 받는 거냐 하면서 인류의 고민이 시작됐어요.
 
  사랑이 마치 물건과 같은 것이어서 교환과 증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물건 같은 것이면 짝사랑을 해도 즐거워야 해요. 나한테 사랑이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요? 아니잖아. 사랑은 둘 ‘사이’에 있는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에 있다는 이야기야.”
 
  선생의 인터페이스론(論)에선, 오랜 사색이 만든 아날로그적 힘이 느껴졌다.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에다가 두 이(二)자를 씁니다. 두 이(二)라는 건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이지요.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인터페이스입니다. 아날로그의 입자와 디지털의 파동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그 ‘사이’를 고민하는 자여야 해요. 머리(디지털)와 가슴(아날로그)을 연결하는 목. 우리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길목, 손목, 나들목….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하듯이 현실과 가상, 로봇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사이좋게’ 만드는 게 관건이죠.”
 
  또 이런 말도 했다.
 
  “산업사회는 독립된 ‘원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정보사회는 항상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요.
 
  사실, 서양은 ‘개인’으로 살아왔지만 우리는 ‘사이’로 살아왔습니다. 서양의 비극은 어디에서 왔느냐? 서양은 밤낮 이항대립을 한 겁니다. ‘나에게 아내 혹은 남편이 있어도 둘이서 사는 건 아니다. 나는 반드시 개인으로, 아톰[原子]으로 있어야겠어!’라고 생각한 겁니다. 즉 인디바이드(Individ),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개체, 개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니에요. 혼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뭐도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짚신짝도 짝이 있다고 하잖아요. 처음부터 짚신은 하나만 있을 수 없어요. 2개여야지만 돼. 눈이 두 개인 것처럼 말이죠.”
 
  선생은 이번 대화의 작은 결론이라도 지으려는 듯 이런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무엇보다 진과 선, 미를 모두 합치고, 뛰어넘으며,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처럼 입자와 파동까지 포용하는 소위 전자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자는 입자하고 파장하고 떨어져 있지 않고 포개어져 있거든.”
 
 
  서구식 二項대립의 사고
 
이어령 선생의 서울 평창동 자택 거실 탁자에 놓인 물건들. 안경과 큰 돋보기가 보인다.
  선생의 의식 흐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배제식 이항대립의 서양식 사고가 아니라 삼항순환의 ‘이것도 저것도’의 포함적 사고로 가야 한다”며 ‘가위바위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의 말을 종합하면,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猜猜猜),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동북아의 가위바위보 사전에 문명의 충돌이란 말은 없다. 가위바위보를 부르는 방법에 있어 일본·중국은 바위-가위-보의 순서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위-바위-보라고 한다. 중국·일본이 순서대로 바위-가위-보를 내고, 한국이 가위-바위-보를 내면 승부가 나지 않고 계속 회전, 순환한다. “어느 한쪽이 이겼다고 우월감을 갖거나 졌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절대 승자는 없다.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
 
  “누구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지 못하고, 동시에 누구도 맨 밑에 깔리지 않습니다. 경쟁은 있으나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죠. 상대적인 대전(對戰)에 따라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기는 끝없는 승패의 순환입니다.
 
  가위바위보는 ‘패권’이 아닙니다. ‘바위’와 ‘보’만 있다면 승자와 패자밖에 없습니다. ‘바위’는 ‘보’에 먹혀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절반은 열리고 절반은 닫혀 있는 ‘가위’가 출현하면 바위에게도 보에게도 ‘패권’은 생기지 않습니다. 금, 은, 동의 올림픽 형태가 아니라 삼자견제의 역학으로 둥글게 회전합니다.
 
  그러나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동전 던지기로 운명을 가릅니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승부죠. 한 방향으로 이어진 서양식 일직선의 사고입니다.”
 
  가위바위보의 동양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인도의 ‘윤회(輪廻)’처럼 순환한다는 말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위바위보와 三項순환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고 한다. 일러스트=조선일보DB
  다시 선생의 말이다.
 
  “삼항순환을 이야기하자면 피시스(Physis),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네요. 각각을 자연계, 법칙계, 기호계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세계 어디든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이 피시스입니다.
 
  그러나 법률이나 제도의 노모스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바뀝니다. 중간에 있는 세미오시스는 언어와 같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영구불변의 자연법칙도 아닙니다. 세미오시스는 상상력의 세계, 예술의 세계를 뜻해요.
 
  피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의 나라입니다. 대륙(중국)은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는 점에서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죠.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주먹은 힘을 상징합니다. ‘바위’와 비교할 수 있어요. 대륙과 비교해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 지향인 것이죠.
 
  한반도의 ‘가위’가 있어야 비로소 다이내믹한 순환운동이 일어납니다. 바위도 섬도 아닌, 또는 대륙이기도 하고 바다의 섬이기도 한 독특한 다양성과 통합성이 반도 문화를 이루었다고 봐요.”
 
  선생의 한반도 가위론(論)을 정리하면 이렇다.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가마솥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가위가 제 역할을 못 하면 동북아는 불행했다.
 
  분단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선생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했고, 남한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문득 선생이 예전에 쓴 시가 생각나 옮겨 적어 본다.
 
  우리는 모두가
  사이에서 태어나
  사이에서 살다가
  사이에서 죽는다
 
  하늘과 땅 사이
  육지와 바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얘들아 사이좋게 놀아라.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
  그런데도
  문자 메시지의 그 많은 이모티콘
  가운데 어질 인(仁)자가 없었다.
 
  언젠가 남과 북 사이도
  거짓말처럼 좋아지는 때가 오겠지
  오늘 내가 너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듯이
 
  -이어령의 ‘사이’

 
 
  진선미와 칸트의 3가지 비판
 
지난 2008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모습. 미인들을 진선미로 가려 선발한다. 사진=조선일보DB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진선미로 귀환했다.
 
  “진선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고요. 진(眞)의 세계에 들어가면 인간은 착한가, 착하지 않은가 하는 선악(善惡)과 다른 차원으로 진짜, 가짜로 갈라집니다. 참이냐 거짓이냐의 물음은 인지론이고, 선악의 물음은 행위론이죠. 선악은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거든.
 
  그런데 미(美)의 영역은 또 달라요. 아름다움은 윤리와 관계없고 진리 추구와도 상관없어요. 미추 개념은 참을 다루는 진도, 행위를 다루는 선도 아니고 오감에 따라 각자가 판단하는 표현의 영역입니다.”
 
  선생은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을 구분할 줄 알아야 인간으로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칸트 이야기를 꺼냈다.
 
  “진선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이성비판과도 다 연결된다고….
 
  예컨대 순수이성으로 보면 자연계에 신은 존재하지 않아요. 일상에서 신의 존재 유무를 어떻게 확인하나요? 존재의 유무를 따지는 인지론으로 보면 (신은) 없는 거지요. 순수이성이지.
 
  그런데 살다 보면 신이 필요해요.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선악의 기준도 생기잖아요. 그러면 행위론이 되는 거야. 실천이성이지.
 
  칸트가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종이 울면서 말해요. ‘주인님, 하나님을 여태 믿고 살았는데, 없다시니 너무 슬퍼요’ ‘그래? 그럼 있다고 해줄게’ 하고 쓴 게 《실천이성비판》이에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한다면 신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선생은 판단이성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의 존재를 끌어냈다.
 
  “산업 중심의 물질사회에서 시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지 몰라. 직접 빵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거든. 그러나 이 세상은 시인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해요. 명징하고 때로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문장이, 시어가 필요하다고. 그게 표현론, 판단이성이지요. 판단이성은 ‘제 눈에 안경’으로 누군가를 보고 반하는 것, 저마다의 미적 판단이거든….”
 

  ━ 진선미에 대한 동서양의 기준이 다를까요?
 
  “서양은 진선미, 의식주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말하지만 동양은 진이 선이고, 선이 미이고, 미가 선인 듯 두루뭉술해요. 심지어 (미스코리아 선발하듯) 진선미로 등수를 가려요.”
 
  선생은 “세상이 의식주의 시대에서 진선미의 시대로, 의식주를 추구하는 삶에서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과거 산업주의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것이었어요.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의식주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던 겁니다. 반면 진선미의 추구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이 필요해요. 진짜 인간이 되는 것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삶인지 따지는 ‘진’의 직업, 어떤 행동이 착한 것인지 규명하는 ‘선’의 직업과 생각,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생각하는 ‘미’의 직업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생은 ‘노동’하고 ‘작업’하는 삶에서 ‘활동(봉사)’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했다.
 
  “딥러닝하는 AI가 시험을 대신 치고, AI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시대에 옛날 방식의 암기식 노작(勞作)교육이 무슨 소용이 될까요?”
 
 
  AI시대의 眞善美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그림들.
  초대 문화부 장관(1989년 12월~91년 12월 재임) 시절, ‘진선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대통령과 관료들을 설득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든 것도 선생이다.
 
  “제가 늘 하는 말인데, ‘먹고 노는 사회가 아니라, 놀고먹는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희랍시대 시민들이 진선미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주를 대신 해결해주던 노예와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이들 덕에 지식인 시민들은 의식주의 ‘노동’에서 벗어나 진선미를 탐구할 수 있었지. 그래서 철학은 희랍시대 딱 한 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AI가 나왔어. 우리가 먹고살기 위한 일을 AI가 해주면 모든 사람이 진선미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선생은 AI시대에 새로운 윤리학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자율주행차의 AI라면 출발 전 스캔을 해서 차량에 인화물질이나 폭탄이 있는지 확인부터 하지 않겠어요? 만약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피하기 위해 차량이 굴러서 폭발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치는 선에서 사고를 막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는 정의, 윤리 개념이 다 뒤죽박죽 되는 골치 아픈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어요.
 
  머잖아 AI시대에 맞는 윤리가 필요하고 AI를 만들고 운영하는 기업윤리도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미국 기업들도 윤리학 전공자를 뽑고 있다고 해요. 이제 AI 윤리학을 하는 사람, 진선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합니다.”
 
 
  “미국 기업들도 윤리학 전공자 뽑아”
 
  끝으로 선생은 “AI가 직면할, 아시모프의 3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가 자신의 소설 《런어라운드(Runaround)》에서 언급한 로봇공학(Robotics) 3원칙은 이렇다.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 명령을 따라야 한다. ▲3원칙: 1과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2. 기원[편집]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게임이지만 사실 서양에 건너간 것은 몇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보는 설이 지배적이다. 서양에선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게임룰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았었다. 다만 고대 켈트족들이 '바위 칼 천'이란 매우 비슷한 스타일의 게임을 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가위를 칼로, 보를 천으로 바꾼것 말고는 거의 룰이 동일하다. 켈트족이 그런 게임을 했을진 모르겠으나 기원 자체는 고대 동양권이다.

chunggwon
중국 등 동양권의 술자리에서 행해졌던 충권이란 놀이를 기원으로 보고 있다. 가위, 바위, 보 대신 엄지, 검지, 새끼손가락을 내밀 뿐, 놀이 규칙은 오늘날의 가위바위보와 동일하다고 한다. 각 손가락은 > 개구리 > 민달팽이 > 을 상징하며[4] 가위>보>바위>가위와 같이 순환되는 형태의 상성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여담으로 이탈리아에도 모라라는 충권과 비슷한 놀이가 있다.

세계 가위바위보 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충권이 다양한 형태를 거쳐서 변형되다가 17세기 경 일본으로 전해진 뒤, 일본과 서양의 접촉이 증가하며 20세기에 서양으로 전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영국의 더 타임즈, 프랑스의 아동잡지, 미국의 뉴욕 타임즈에 독자를 위해 규칙을 설명하는 기사가 작성되었을 정도로 서양에는 알려지지 않은 놀이였음이 보여진다. 일본에서 를 부르는 명칭인 종이가 서양에 그대로 전래되어 rock, paper, scissors가 되었다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가위바위보 상성관계를 가진 모든 것들을 산스쿠미(三竦み)[5]라고 하는데, 중국 충권의 그 상징과 동일하다.[6] 그 외에도 > 코끼리 > 호랑이[7], 포켓몬스터풀 타입, 물 타입, 불꽃 타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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