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과 아사코, 그리고 인연

 

한 여인과의 세 번의 만남

 

인연
/피천득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 선생 댁에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書生)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一年草)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學部)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聯想)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았았나, 남편이 전사(戰死)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고 잘 됐다고 치하(致賀)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뽀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출처: 피천득, 인연, 인연 피천득 수필집, 민음사,2018>
 

🍏해설

한국의 명작 수필중 하나다.
 
1.피천득은 가톨릭 성심수녀회 한국관구에서 운영하는 대학인 성심여대에 한 학기 출강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피천득이 강원도 춘천시까지 먼 길을 힘들게 다닌 것은, 성심수녀회 소속인 주매분 수녀(중국인)와 김재순 수녀(아웅산 묘소 순직 고 김재익 경제수석의 누님)가 피천득의 집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피천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아사코 때문이었다.
 
2.17살의 봄, 피천득은 일본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도쿄의 미우라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미우라 부부에게는 '아사코'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다. 아침(朝)에 태어났다고 해서 '아사코(朝子)'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것이 아사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3.당시 아사코는 성심수녀회 일본관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계 여학교인 세이신 여학원(聖心女學院)의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성심수녀회는 1800년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을 하는 수도회로, 일본 세이신 여학원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운영하고 있는 큰 규모의 학교였다.
 
4.어린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잘 따랐고, 피천득도 아사코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했다. 피천득은 아사코에게 동화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아사코는 피천득에게 세이신 여학원을 안내해 주며 자신의 신발장과 실내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5.피천득이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는 성심 여학원(대학) 영문과 3학년이었다. 성심 여학원 캠퍼스에 함께 갔다. 아사코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피천득은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피천득이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피천득은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6.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피천득은 도쿄의 미우라 부부 댁을 찾았다. 패전 후, 아사코는 전공을 살려 맥아더 사령부에서 영어 통번역 일을 했다. 거기서 만난 일본계 2세 남성과 결혼하였으며, 친정 근처에 따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7.피천득은 미우라 부부에게 부탁하여, 아사코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사코와 3번째 만남이었다.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이건만, 피천득이 마주친 아사코는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사코의 남편은 미국인 같지도 않고 일본인 같지도 않은, 그저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듯한 사람이었다. 피천득과 아사코는 악수도 없이, 절을 몇 번씩 하며 헤어졌다.
 
8.피천득은 아사코와의 3번에 걸친 만남과 이별을 추억하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수필을 마무리한다.
 

🍏사색 과제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귀하는 저자가 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하는가.

PS 1: 피천득은 평생 세 여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이 아사코였다고 한다.
PS 2: 피천득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여자중 한 명인 따님 피서영 박사. 75세.(최근 사진)

피서영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미국 보스턴 대학교의 유명한 물리학 교수다.(최근에는 은퇴했을듯).남편도  MIT물리학 교수.아들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재미교포 모임 때 피서영 교수를 보스턴 대학교 교수라고 소개하면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분이 피천득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여자중 한명인 따님 피서영이라고 소개하면 그 누구도 그녀의 곁을 떠날줄을 모른다. 반가워서 손을 잡고 난리라고 한다.
재미교포 청년들은  facebook 메신저에서 애정어린 농담으로 그녀를 놀려먹고 있다.이렇게.
"그녀의 미국 이름은 So-Young Pi다. 이 갓 구운 파이야. ㅎㅎ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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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답례로 오늘 보너스 두 편을 드립니다.
 

🍎 보너스 1: 딸 바보 피천득 시인의 딸 자식 교육

피천득 시인의 외손자 하버드대 출신 바이올린니스트. 사진은 그의 공식 웹사이트 제공.

피천득 시인은 한국 제일의 딸 바보다. 딸 서영이를 초등학교 6년 동안 학교에 직접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비가 오면 감기 들까봐 학교에 보내지 않고 끼고 앉아서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데 딸은 아버지가 그리워서 결국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 일을 세 번이나 되풀이한다. 시인은 엄친으로 변하여 딸을 설득했다. 그녀(피서영, Dr. So- Young Pi)는 결국 미국 보스턴대학교의 세계적인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피서영 박사의 장남은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수재다. 보통 하버드대 출신에게는 출세 길이 열려 있다. 장남이 하버드대를 졸업하고서도 바이올린니스트의 길을 가겠다고 하자 피서영 박사는 두 말없이 승낙한다. 이건 부전자전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대교체 교육방식인가?
 
피서영 박사의 아들 바이올린니스트 스테판 재키브(Stefan Jackiw). 하버드대 출신으로 유명한 바이올린니스트. 2006년 서울시향과 협연. 어릴 때 외할아버지 피천득 시인과 대화를 많이 나눠 지금도 틈만 나면 문학작품을 읽는다고 한다. 피천득 시인과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었는데 이 친구는 편지 서명으로 어머니 성 Pi가 들어가는 Stefan Pi Jackiw를 꼭 사용했다. 피천득 시인의 시 정신, 문학정신은 미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 피천득의 수필집[편집]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신희상

인터넷 피천득 시로 떠도는 위의 시는, 사실은 신희상의 시 [인연을 살릴 줄 알아야 한다]의 일부이다.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수필 입문서로 좋은 책인 피천득의 수필제목이자 그것이 수록된 수필집 제목이 인연이다. 그 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연>, 은전 한 닢 등이 있다. 수필 인연은, 작가가 하숙하던 집의 딸 미우라 아사코(三浦朝子)와의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

여담이지만 아사코는, 피천득의 인생에 영향을 준 3명의 여성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2. 해당 수필집에 실린 수필 중 하나[편집]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라는 말로 수필이 시작된다.

피천득 가톨릭 성심수녀회 한국관구에서 운영하는 대학인 성심여대에 한 학기 출강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피천득이 강원도 춘천시까지 먼 길을 힘들게 다닌 것은, 성심수녀회 소속인 주매분 수녀(중국인)[1]와 김재순 수녀[2]가 피천득의 집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피천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아사코' 때문이었다.

17살의 봄, 피천득 일본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도쿄의 미우라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미우라 부부에게는 '아사코'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다. 아침(朝)에 태어났다고 해서 '아사코(朝子)'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것이 아사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아사코는 성심수녀회 일본관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계 여학교인 세이신 여학원(聖心女學院)의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성심수녀회는 1800년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을 하는 수도회로, 일본 세이신 여학원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운영하고 있는 큰 규모의 학교였다.[3][4]

어린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잘 따랐고, 피천득도 아사코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했다. 피천득은 아사코에게 동화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아사코는 피천득에게 세이신 여학원을 안내해 주며 자신의 신발장과 실내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피천득이 미우라 부부의 집을 떠날 때, 아사코는 이별을 몹시 아쉬워하며 자신이 아끼던 손수건과 반지를 피천득에게 선물했다. 헤어진 후로도, 피천득은 초등학교 1학년 즈음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를 떠올리곤 했다.

세월이 흘러 피천득은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의 미우라 부부 댁을 찾았고, 2번째로 아사코와 만났다. 초등학교 1학년 꼬마이던 아사코는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사코는 피천득과의 재회를 반가워했다. 피천득과 아사코는 문학에 대해 한참 동안 즐겁게 이야기했고, 이번에도 세이신 여학원을 산책했다. 이제 아사코는 더이상 학교에서 실내화를 신지 않는다고 했다. 산책 도중, 아사코는 강의실에 두고 왔던 우산을 떠올리고는 달려가서 챙겨 왔다. 고운 연두색의 우산이었다.

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피천득 도쿄의 미우라 부부 댁을 찾았다. 그간 일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다. 그리고 한국 광복, 6.25 전쟁, 남북 분단을 겪었다. 미우라 부부는 피천득을 몹시 반겼지만, 아사코는 더이상 그 집에 없었다. 패전 후, 아사코는 전공을 살려 맥아더 사령부에서 영어 번역 일을 했다. 거기서 만난 일본계 2세 남성과 결혼하였으며, 친정 근처에 따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피천득은 미우라 부부에게 부탁하여, 아사코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사코와 3번째 만남이었다.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이건만, 피천득이 마주친 아사코는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사코의 남편은 미국인 같지도 않고 일본인 같지도 않은, 그저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듯한 사람이었다. 피천득과 아사코는 악수도 없이, 절을 몇 번씩 하며 헤어졌다.

피천득은 아사코와의 3번에 걸친 만남과 이별을 추억하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수필을 마무리한다.

3. 관련 문서[편집]

 

 

 

https://brunch.co.kr/@yehyunpark/183

 

3-3)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의 4번째 인연은?  (1973년 출간)



* 피천득의 인연 (지식채널e-EBS)

https://www.youtube.com/watch?v=boPXF_jEi-k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중 아니 필자에게 있어서 생애 최고의 수필이 중 하나가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옛 시대에 이렇게 섬세하고 로맨틱한 수필이 또 있을까 생각을 한다. 또한, 이렇게 짧은 분량의 글을 읽으며 삶에 있어서 다시금 생각해 준 귀감이기도 하다. 처음 이 글을 접할 때는 급한 상황에서 만나선지 대충 읽었다.  군대 있을 때 고작 이등병에게 글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피천득 선생이 수필을 읽고선 너무 상상에 빠져산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한 여인을 7년동안 그리워하면서 늘 생각해 온 것이 바로 피천득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진정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면서 산다는 것은 행복하지만 때로는 애처롭고 버티기 힘든 것을 알게 되었다. 소원이 있다면 나 역시 피천득 선생님처럼 몇 번이나마 그녀를 봤으면 하는 갈망이 컸다. 시대를 뛰어넘고 피 선생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인연이라는 게 말로 표현하기 쉽지 그냥 만나는 게 아님을 알게되었다. 그 깊이를 알기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연. 적어도 20대 초반에는 몰랐다. 당연히 만나던 사람이 같이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대체적이기에 특별한 만남이란 없었다.      



 1920년대 말. 피 선생님이 17세에 일본에 넘어가 하숙할 때, 옆집 초등학교 1학년인 아사코와 만난 인연. 그와 함께 나눈 추억. 특히 학교 교실에서는 신을 벗고 신발장의 하얀 운동화(실내화)를 보여줬던 그 기억을 하고 있다. 헤어질 때 볼에 입을 맞추며 아쉬워해서 반지를 준 아사코. 그 모습이 커서 잘 어울리는 말에 내심 얼굴이 더워졌다고 한다. 피선생님은 그런 아사코를 못 잊다가 10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이제는 처음 만난 피선생의 나이가 된 아사코. 그녀와 함께 같이 간 교실. 다시 10년 전 처럼 신발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모르는 듯, 그저 신을 벗고 들어가서 잃어버린 우산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고 그렇게 10년이 다시 지나서 제 2차 세계대전 후 해방이 된 대한민국. 에 걱정하여 찾은 일본. 이미 그녀는 일본인 2세와 결혼하였고 그저 짧게나마 절을 한 게 고작이라서 아예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추억의 서랍을 정리하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의 에피소드를 보는 듯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우리 인생에 누구나 한 번 쯔음, 있을 듯한 인연이기에 더 애절한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인연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말이 있다. 1번 만나는 것은 우연, 2번은 인연, 3번은 운명. 그렇게 피 선생님은 아사코를 3번 만났기에 운명일까? 글쎄, 그 것은 잘 모르겠다. 적어도 한국과 일본이라는 먼 거리에서도 이렇게 기억해주고 찾아와 주니 더 애절한 듯하다. 더군다나 이 수필의 마지막 글귀가 인연이라는 게 뭔지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는 문장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3번째는 만나지 않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 기대에 따른 실망도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수필이 모든 국민들이 다 아는 가운데, 피 선생님이 살아계시기 전 마지막 KBS에서 한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아사코와 피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피천득의 '수필'이 아직 끝나지 않고 그 4번째 만남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저 가슴 속으로 추억으로 남기를 원했다. 어쩌면 이렇게 늙고 초라한 모습보다는 이 젊은 날의 아릿따운 이미지로 남고 싶어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취재진은 일본 특파원을 통해서 '아사꼬'의 젊은 모습의 사진을 찾은 것이다. 아사꼬는 이젠 피 선생님의 인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연이기도 한 사람이다.  취재진의 의하면 아사코의 친구가 초등학교 부터 줄곧 대학교 동창인 수녀를 통해서 알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방송에서 아사코의 초등학교 5학년 모습, 중학교, 대학교 모습을 비추어 주었다. 특히나 대학교의 모습에서는 선명히 그려졌다. 아마도 피 선생님이 2번 째 만났을 때의 모습이 역력히 채워졌을 법도 했다. 사진 속 아사코의 모습은 다른 이들과 달리 여러명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서구적인 미인이었다. 특히나 높은 콧날을 지녔다. 녹화 전에는 이같은 사실을 몰랐던 피 선생님께선 "도대체 어떻게 찾았느냐"고 놀라워했다. 사실상 수필은 진실성이 묻어나야 하지만, 아침에 아이를 낳았다고 '아사코'라고 한 대목은 익명성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다르게 기재한 것었기 때문이다. 방송을 하던 2002년 당시 83세로 '아사꼬'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음을 말해줬다고 한다.      

 진행자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싶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피 선생님께선     


"그럴 생각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소식만으로도 기쁨을 줍니다.  아~살아 있군요"     


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짤막한 답변으로 감정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께서는 후에 사진을 받을 수 있겠냐면서 아쉬움을 표의하였다.      


 피천득 선생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 다 이루지 못한 인연을 다시금 떠오르면서 애틋함을 안고 살지는 않는가? 이 날의 피천득 선생은 상호간의 사랑을 하지 못했던 게 너무나 후회스럽다면서 자신의 인생을 아쉬워했다. 한 평생! 제대로 사랑을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그렇지 못함에 더 후회스럽다고 했다. 선생님은 왜 자기의 유독 아내만큼은 수필에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아사꼬와 어머니 그리고 딸 서영이만 빼곡히 채우고 있다.     

 

"내 일생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엄마이고 하나는 서영이다"     


 그렇다면 실례이기는 하나 아내와의 사랑은 완벽하게 이루지 못한 것일까? 가슴 한 켠에 그렇게 애절하도록 '아사꼬'의 정신적 추억이 너무나 크게 자리 잡아서 그러한 것일까? 세월이 지나서 피 선생님이 그리는 그 '아사꼬'의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피천득 선생에게 아사꼬란?

1) 소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기에 -> 꿈에서 나마 이루고 싶은 사랑

2) 절제 젊을 날에 추억이 아련하여서 -> 지금으로는 그저 추억으로 남고픈 것

3) 인연 몇 십년의 터울로 세월이 흘러도 -> 서로 간의 인생에 3번 스친 나그네      



 피천득 선생에게는 이상적으로 젊은 날의 아사꼬란 소유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어서 단념하는 것에 그쳐야 할 인연이기도 하다. 이토록 사람은 소유하고자 하는 본능이 클 수록 기대를 하는 것. 헌데 그러한 큰 욕망어린 기대에 채우지 서운함이 크게 자리잡는 것. 그에 따른 못한 것에 대해 미련이 많이 남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 어린아이같은 맑은 영혼의 순수함을 이해시킬 만한 상대 대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사꼬'는 그나마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논할 정도로 문학의 대한 조외가 깊으니 영혼의 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영혼의 짝이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꿈꾸던 행복처럼 '아사꼬'와 단 둘이 뾰족지붕에 뾰족창문에 살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아사꼬는 맥아더 장군 곁에서 번역일을 하다가 만난 그의 남편과 혼인하게 되었는데 그 게 참으로 애처롭다. 소유 할 수도 있었는데, 그 놈의 한국전쟁이 두 사이를 갈라놓게 된 계기이다. 남북간의 형제가 아니라 한 인생에 있어서 인연마져 갈라 놓는 전쟁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더 애절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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