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버블시대에 세계를 평정했던 일본 기업들이 닷컴버블 이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해 몰락한 과정; 일본은 갈라파고스화가 심하고 내수경제가 커서 국제 트렌드와는 따로 놀았다; 그 결과가 아직도 7.65%에 불과한 일본의 B2C 물건 거래에서의 온라인 거래 비중 및 글로벌 1위 기업이었던 소니 주가의 폭락이었다; 반대로 이 기회를 잘 포착한 조조타운의 마에자와 유사쿠나 (재산 3조)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는 (재산 6조) 떼돈을 벌어 돈방석에 올랐다; 미키타니 왈, 미국에서 창업은 일상적이었지만 일본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선택하는 길이었다; 95년 고베대지진을 계기로 인생은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해 온라인 창업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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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쿠텐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7년 미키타니 히로시(三木谷浩史, みきたに ひろし)가 창업했다. 미키타니 히로시는 라쿠텐을 전자상거래를 바탕으로 인터넷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로 라쿠텐의 사업 영역을 확대한 인물이다. 창업 이래 지금까지 줄곧 라쿠텐의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바탕으로 성장해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제프 베조스(아마존의 최고경영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분석에 따르면 미키타니 사장은 55억 달러(5조 9455억 원)의 자산을 보유한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부자다. 그가 이끌고 있는 라쿠텐은 2016년 7819억 엔의 매출을 거뒀고, 약 1만 5000명의 직원을 둔 일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터넷 서비스 기업이다. 약 1억 명의 가입자와 4만 4000개의 출점 점포(판매자)를 보유하고 있다. 평범한 월급장이었던 미키타니는 어떻게 라쿠텐을 일으켰을까.
젊음을 낭비하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 엘리트 비즈니스맨 관두고 창업 나서
미키타니 사장은 1965년 일본 간사이(관서) 지방 효고 현 고베 시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고베(한신) 대지진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고베상과대학의 교수였던 아버지가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면서 어린 미키타니 사장도 한동안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이때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까지 습득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은 두고두고 미키타니 사장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귀국 후 중학교에 들어간 미키타니 사장은 이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국 교육과 다른 일본 교육 특유의 답답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귀국 부적응 증세'를 나타낸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테니스라는 스트레스 배출구를 접하고 일본 교육과정에 적응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키타니 사장은 1984년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도쿄 히토쓰바시(一橋) 대학에 진학했다. 도쿄대, 교토대 등 종합국립대학 다음에 위치한 상과(경영) 중심의 국립대다. 거의 대부분의 대학이 종합대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대학은 상당수가 특정 학문 분야에 특화된 특성화 대학을 추구하고 있다. 히토쓰바시 대학의 경우 상과(경영, 경제)에 특화된 학문만 가르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가 첫 번째로 선택한 직장은 일본흥업은행(현 미즈호 은행)이었다. 직장에서 그는 테니스에 능한 엘리트 직장인이었다. 은행에서도 테니스부를 이끌며 은행대항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의 앞날은 평범하고 순탄해 보였다.
변화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에 다시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미즈호 은행은 직원 재교육 제도의 일환으로 내부의 엘리트 직원을 2년 동안 미국에 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미키타니 사장은 이에 선발되어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경영학 석사(MBA)를 받으러 떠났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미키타니 사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창업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일본에서 창업이란 둘 중 하나에 해당되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 놀라운 아이디어로 진행하거나, 조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란 인식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거대한 회사의 일원으로서 회사를 이끌어나가고 내부에서 출세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졌다.
반면 미국에선 창업이 일상이었다. 회사에 다니다가 조금만 괜찮은 아이디어만 있어도 창업에 뛰어들었다. 회사의 일원으로 출세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개척하는 것이 더 높게 평가받았다. 일본의 엘리트 비즈니스맨은 그렇게 미국의 사업가 정신에 큰 감명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기업 인수합병(M&A)에 대해 공부한 후 귀국한 미키타니 사장은 회사내에서 M&A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며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사장, 마스다 무네아키 츠타야서점 사장 등 일본의 신흥 벤처 사업가들과 교분을 나누게 된다. 이들이 젊은 나이에 창업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회사를 운영하는 것을 본 미키타니 사장은 자신 역시 언젠가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는 것을 꿈꾸게 된다.
변화의 계기는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왔다. 1995년 1월 고베 시를 중심으로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훗날 한신 대지진이라고 명명된 이 대지진으로 약 63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고베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키타니 사장은 이때 숙부, 숙모 등 가족과 몇 명의 친구를 잃었다. 지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인생은 단 한 번뿐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안정된 삶과 익숙한 편안함에 만족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미키타니 사장은 당시 결정을 훗날 이렇게 밝혔다. "인생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돈과 지위를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인생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일본인 엘리트가 창업에 나서지 않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헤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대학 졸업 후 취직 대신 요리 사이트를 창업한 사람들 두고 주변에서 동정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라고 당시 분위기를 회상했다. 젊은이들이 창업 대신 직장생활에 안주하는 것은 한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의 가능성을 믿고 전자상거래에 뛰어들다
회사를 그만둔 미키타니 사장이 처음 선택한 사업은 컨설팅이었다. 은행을 다니면서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기업에게 경영에 관한 조언을 제공하는 컨설팅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컨설팅 사업은 스스로가 주(主)가 되는 사업이 아니라 미키타니 사장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7년 2월 당시 막 태동하고 있던 인터넷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그는 인터넷에 네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1) 인터넷은 더욱 간단해지고 더 편리해질 것이다. 2) 인터넷은 폭발적으로 보급될 것이다. 3) 모든 일본인이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게 될 것이다. 4) 인터넷이 유통을 바꿀 것이다.
초고속 인터넷망은커녕 56k 모뎀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황당하다 못해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즉시 주식회사 MDM(훗날 라쿠텐으로 이름 변경)을 설립하고 1997년 5월 1일 '라쿠텐 이치바(낙천시장)'라는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개시했다. 미국에서 아마존닷컴이 책뿐만 아니라 온갖 콘텐츠와 잡화를 판매하는 전자상거래 업체로 변화를 꾀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라쿠텐도 함께 태어났다.
하지만 라쿠텐은 업계의 선두주자가 아니었다. NEC, 후지쓰 등 일본의 대기업이 이미 관련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라쿠텐 같은 영세한 기업이 설자리는 없어 보였다. 미키타니 사장은 살아남기 위해 두 가지 차별화된 전략을 선보였다.
첫 번째 전략은 저렴한 입점료였다. 당시 경쟁사들은 태동기라 상품이 잘 팔리지도 않는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서비스 입점료로 월 수십만 엔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입점하고 싶은 판매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반면 미키타니 사장은 사업이 잘 되든 안되든 업체들에게 입점료를 월 5만 엔만 받겠다고 제안했다.
두 번째 전략은 발로 뛰는 것이었다. 미키타니 사장을 포함한 라쿠텐의 직원들이 판매자들을 직접 만나 라쿠텐에 입점하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성실한 인상을 주기 위해 판매자 앞에서 별로 힘들지 않은데도 땀을 흘리는 연기를 해가며 판매자들을 찾아나섰다. 판매자들에게 점포 근처에서만 물건을 팔지 말고 라쿠텐을 통해 일본 전역에 팔아보라고 권유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서비스 2개월 만에 50개, 반 년 만에 100개의 판매자를 모집할 수 있었다.
이후 미키타니 사장은 다양한 서비스를 출시해 고객과 판매자들을 라쿠텐으로 끌어들인다는 전략을 세웠다. 판매자들이 자사의 콘셉트에 맞는 판매 페이지를 만들 수 있도록 사이트를 간편하게 개편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이 때문에 라쿠텐은 사이트 구조가 통일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RMS(Rakuten Merchant Server)라고 불리는 이 CMS(Content Management System)는 문서작성기를 이용하는 것만큼 편리하고, 판매자 누구나 자유롭게 점포 페이지의 디자인, 상품 구성, 가격 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어 많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쇼핑은 엔터테인먼트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고객들이 판매자가 내놓은 물건에 입찰할 수 있는 온라인 옥션과 개인끼리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파는 프리마 옥션 등도 선보였다. 심지어 구매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싸지는 초기형 소셜 공동구매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마침내 라쿠텐은 대기업의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누를 수 있었다. 판매자 수도 1999년 1600여개, 2000년 2400여개를 돌파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00년 미키타니 사장은 라쿠텐을 자스닥(JASDAQ, 일본의 두 번째 주식거래소)에 상장했다. 2005년 마침내 라쿠텐은 1만 5000개의 판매자와 4000억 엔의 유통 총액을 확보한 일본 1위의 전자상거래 업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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