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따라 달라지는 Uber 기사들의 의식수준, 구에 따라 달라지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수준, 명문대/지잡대에 따라 달라지는 학생들의 의식수준, 그리고 모텔 방 객단가에 따라 달라지는 투숙객들의 의식수준으로 알아보는 우유상종의 법칙
언젠가 캐나다 브램턴에서 에어비앤비로 집을 빌린 적이 있었다. 이 동네는 서아시아계 (인도계)가 대부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고, 중-하류층이 많이 사는 동네다. 짧은 시간 묵긴 했지만, 거리를 걷는 동북아시아인은 나밖에 없었다.
이 동네에서 우버를 3번 정도 탔던 기억이 있는데, 다른 동네에서 우버를 탔을 때와 달리 하나같이 분위기가 싸늘했다.
우선 차에 탑승을 해도 기사가 인사를 안 한다. 태도도 다른 캐나다 동네와 다르게 전혀 살갑지가 않다. 기사와 승객 쌍방이 서로에 대한 평점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우버의 시스템인데, 당연하게도 나는 기사들에게 최하의 평점을 주었고, 그들 역시 나에게 최하의 평점을 주었다.
영국 런던, 캐나다 토론토, 몬트리올, 벤쿠버에서 우버나 택시를 탈 때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아, 물론, 조센징들은 미개하므로, 서울에서 병신같은 택시기사들을 만난 경험은 꽤 된다.)
흥미롭게도, 서아시아인이 전체 인구의 99%인 브렘튼에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이 전체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캐나다 포트 에리로 넘어가 우버를 두번 정도 탔을 때는 기사들이 모두 공손했다. 특히 그 중 첫번째 기사는 환갑이 넘은 백인 아저씨였는데, 짐도 직접 실어주고, 꺼내주고, 말도 계속 걸고, 서로 친구 같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매너가 훌륭했다.
국가에 따라, 또 사는 동네에 따라 우버 기사들의 친절도나 교육 수준이 달라진다. 대체로 잘 사는 동네일수록 사람들의 포용성도 높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한국 서울 강남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서울의 상대적으로 빈곤한 다른 구들 (이를테면 노원구나 금천구)보다 높다.
1990년대에 야권 텃밭이었던 강남 3구는 2000년대 들어 갑자기 보수 텃밭으로 변했는데, 이후 강남 3구 중에서도 강남과 서초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민주당 쪽에 국회의원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종부세에 대한 반감이 큰 원인이긴 했지만, 그게 유일한 원인 같지는 않다.
2020년 4월에 치뤄진 21대 총선에서 서울의 각 구별 투표 결과를 보면, 용산과 강남 3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민주당 계열이 압승했다. 강남 시민들이 단지 부동산 가격에만 연연했다면, 서울 강남의 집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버린 문재인 정부를 지지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을텐데 말이다.
말하자면, 서울에서 오직 강남 시민들만 보수가 표방하는 시장친화적 경제 정책이 역효과만 내는 진보의 위선적인 규제 정책보다 더 진일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본력과 학력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수준은 천차만별로 변화한다.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일수록 착하고 너그러운 게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일수록 훨씬 더 인간이 좀스러워지고 탐욕스러워지며, 천박해진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못 사는 사람들일수록 지적 능력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악한 부자 대 착한 서민'의 대립구조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하여, 한국과 홍콩, 중국의 부모들이 그렇게 애를 쓰면서 아이들을 잘 사는 나라 (영미권)로 유학보내고 싶어하고, 그게 안 되면 국내에서라도 명문대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자식의 명문대 진학에 목을 매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자식만큼은 출세시키고, '좋은 물'에서 놀게 하기 위함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명문대냐 지잡대냐에 따라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학생들의 성실성에서 급격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지능에 앞서 환경이자 분위기다.
명문대 학생들은 (명문대일수록)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활약을 할 수 있는 인생계획을 설계하고, 조별과제나 토론에 임할 때도 좀 더 논리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려는 반면, 지잡대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성실하지 않고, 논리적 토론보다는 똥군기가 우세하며,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하는 태도를 오히려 비웃기까지 한다.
학벌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특정한 분위기나 환경 속에 '물드는' 것이다.
오늘날 명문대 학벌의 최대 장점은 1960~90년대처럼 취업의 보증 수표로 기능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이미 명문대 학벌의 실질적인 메리트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명문대를 졸업하면 최소한 자신이 우수한 환경에서 자라왔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본인 스스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특히 인생의 여러 역경을 극복함에 있어서, "나는 엘리트다" 라는 강력한 자기최면 및 동기부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예전에 유튜브에서 보았던 모텔 사장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그 사장이 말하길,모텔의 객단가가 높은 방일수록 손님들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져서, 방을 깨끗하게 치운다고 한다. 반면, 모텔의 객단가가 떨어지는 방일수록 손님들의 수준도 덩달아 떨어져서, 온갖 악취나 쓰레기, 소음, 기물파손 문제로 골치를 썪게 된다. 하여 이 모텔 사장은 아예 모텔의 전반적인 객단가를 높여버렸는데, 신기하게도 그 후로 문제손님들의 수가 확 줄었다고 한다.
이 '객단가의 법칙'(?)은 국가별 손님들에게도 적용된다. 모텔 사장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뭔가 하면, 일본 손님들이 가장 깔끔하고, 그 다음은 한국 손님들, 그리고 최악이 중국 손님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의식수준이 한국인들보다 높고,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의식수준이 중국인들보다 높다는 통념을 증명validate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꺼려하는 (이를 '메이와쿠'迷惑 문화라고 한다) 일본에서조차 (유튜버 박가네의 지적처럼) 잘 사는 동네는 층간소음이 적지만, 못사는 동네에서는 층간소음 문제가 심각하다. 물론 이는 자재값이 한몫한다. 잘 사는 동네에서는 비싼 자재로 철근 콘크리트 맨션을 만들어 층간소음을 줄일 수 있지만, 못 사는 동네에서는 값싼 목조건물 밖에 못 만들기 때문에 소음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못사는 동네의 사람들일수록 이웃을 신경쓰지 않고, 소음을 유발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 그럼 오늘 이야기의 사회학적 결론은 뭐다?
우유상종은 대자연의 대법칙이라는 것이다.
태양계 행성들이 태양계 행성들끼리 모여사는 것도 우유상종,
광물이 광물끼리, 식물은 식물끼리, 동물은 동물끼리 모여사는 것도 우유상종,
원숭이가 원숭이끼리, 인간은 인간끼리 모여사는 것도 우유상종,
인간들 중에서도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중산층은 중산층끼리, 하류층은 하류층끼리 모여사는 것도 우유상종,
고학력자는 고학력자끼리, 저학력자는 저학력자끼리 모여사는 것도 우유상종,
그리고 미인은 미인에게 끌리는 것도 우유상종...
이 모든 것에는 다 우유상종의 법칙이 적용된다.
이 법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인지했다면,
더 우수한 국가에서,
더 우수한 사람들과 함께,
더 우수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한 선결조건은,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수한 역량을 가진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되는대로 막 인생을 산다면,
고시촌이나 쪽방을 전전하다가 서울역 노숙자들과 자리 싸움을 벌이는 삶을 살게 되거나,
질낮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나 일본 야쿠자/한구레들 같은 범죄집단과 친교를 맺다가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지적처럼, 고통은 능동적인 속성이 있고 행복은 소극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에, 장차 미래에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환경 자체를 최대한 피하며 사는 것이 그나마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결국 인간은 자유의지보다는 환경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환경을 만드는 것에는 자유의지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가난한 판잣집에서 태어났어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손 마사요시 같은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재벌 2세, 3세로 태어났어도 마약에 찌들어 '범죄', '무기력', '방탕'의 세계와 우유상종하는 케이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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