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미리 알고 있었던 미국의 록펠러 재벌; 한국전쟁과 록펠러-모건 재벌, AEC, 원자력 개발의 연관성; 한국전 이후 한국 최대의 금광을 장악한 록펠러계 오리엔탈콘솔리데이티드 광업 (록펠러 가문의 내셔널시티은행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주주로 한반도를 착취하고, 록펠러 2세가 조선총독부 만찬에 참가했던 것이 떠오른다); 국제투기자본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받은 이승만;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말하는 종북 세력도 역겹지만, 미국이 한국을 위해 싸웠다고 말하는 병신같은 우파들도 역겹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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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발발한 6월 초, 알라모 요새의 AEC 위원이던 루이스 슈트라우스는 록펠러형제 사의 재정고문으로 영입되었다. 이 회사는 존 D. 록펠러형제 사의 재정고문으로 영입되었다. 이 회사는 존 D. 록펠러의 손자에 해당하는 5명의 록펠러 형제가 경영하는 투자회사였는데, 이 회사에서 슈트라우스를 영입한 목적은 간단했다. 바로 한국전쟁으로 고양된 원폭 수요에 대한 투기였다. 이 사실을 뒷 받침하듯 1953년 7월 2일,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종결하는 7월 27일의 3주 전에 슈트라우스가 AEC로 복귀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슈트라우스의 자리 이동은 모두 개전과 종전 직전에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상 무언가가 일어난 다음에 달려가는 투기꾼은 큰 돈벌이를 할 수 없다. 미리 손을 써두고, 그 다음에 ‘돌발 사변’이 일어나야 그야말로 빅 비즈니스가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추리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록펠러 형제가 개전과 종전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의 손으로 촉발된 전쟁이었다는 결론이다. 사실상 루이스 슈트라우스라는 인물을 보자면, 그는 이미 AEC에 들어가기 전부터 KKK단과 손잡은 파시스타 단체 아메리칸 리전의 사령관을 지내며 모건 상사의 그레이슨 머피로부터 자금을 받았던 우두머리였다. 게다가 듀폰의 자회사인 US스틸의 중역이기도 했으므로 모건- 록펠러연합의 확실한 대표자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수많은 미국인들은 이제 영문도 모른 채 아시아인을 학살하는 일에 차출되었고, 혹자는 제 발로 개죽음을 당하러 갔다. 그리고 이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피날레로서, 록펠러와 손잡은 할리우드 스타 윌리엄 홀덴이 <모정>에서 호연을 펼치며 우리의 심금을 울린 것은 한국전쟁이 원폭 사용 직전까지 돌입하던 해인 1953년이었다. (286~287p)


역사 서술에 있어 픽션과 논픽션은 백지 한 장의 차이이다. 가려진 장막을 걷어내자 민족상잔의 비극으로만 알고 있었던 한국의 현대사가 군수 산업부분은 막론하고, 그 뒤에 있던 원자력, 더 넓게는 모건과 록펠러 가문의 장단에 널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는 의구심이 들었다. 투자와 거래면에 있어서, 투자는 불확실성에 거는 도박이라는 말처럼 최소한의 리스크와 최대한의 리스크를 견주어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라는 판단하에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지식 수준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단순히 말놀음에 그치고, 이 것이 짜여진 각본이었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은, 적어도 투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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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건에는 종전 후 트루먼 대통령이 즉시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을 서울에 파견했으며, 또 에드윈 폴리라는 인물에게 특별조사원이라는 명목하에 현지 조사를 명했다고 기록한 대목도 있다. 그런데 이 폴리라는 이름은 이미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다름아닌 트루먼을 대통령으로 만든 캘리포니아시민은행의 창립자이며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과 석유 이권을 분할한 석유왕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트루먼이라는 허수아비의 명령이 아니었다. 후버와 폴리가 스스로 현지로 달려가 탐욕스럽게 이권을 챙긴 상황이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한국에서 대유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신에 한국 최대의 금광을 미국의 오리엔탈콘솔리데이티드 광업이 장악한다. 이 역시 체이스내셔널은행과 US스틸이 주식을 지배하는 회사이다. 마침내 이 후버가 "태평양에 반공의 방벽을 쌓아야 한다"고 국제정치 무대에 호소하고, 이에 따라 1950년 1월10일 대만의 장개석 군대에게 탱크 200대, 장갑차 100대 등 산더미 같은 병기가 매각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 병기들은 오하이오 군수창고에서 필라델피아로 수송되었고, 그 대금은 중국국제통상이 조달했으며, 융자를 한 곳은 체이스내셔널은행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이러한 병기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그 선언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이번에도 체이스내셔널은행이었다! 그로부터 16일 뒤 미국은 한국과 군사협정을 조정하고 그 보름 뒤엔 수폭 제조를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5개월 뒤에 공격을 개시했다. 개전 날짜를 록펠러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휴전 날짜는 어떤가? 그들은 전쟁을 통해 한국 민중을 지배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를 굳힌 뒤 "38도선을 확정함으로써 일단 승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투기꾼다운 발언이 휴전 직전에 정부 수뇌들의 입에서 일제히 흘러나왔던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대통령인 리승만에게 100만 달러를 주고 이권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우려한 것은 군수경기가 침해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무기 수출로 스스로 불을 지른 내셔널시티은행이 휴전 후의 경기를 분석하며 그렇지 않다고 장담했다. 이 은행의 월보(한국전쟁 중간기에 해당하는 1952년 10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실렸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군비 계획이 축소될 거라고 예상하는건 국방정책에 대한 오해이다." 즉 모건의 이 월보는 국방정책이란 축소될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더불어 앞으로도 축소될 리 없다는 경제예측을 투기꾼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 288쪽 -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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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부터 미국 본토의 네바다 주에서 시작된 대기권 핵실험……


미국이 한국과 군사협정을 맺기 불과 두 달 전인 1949년 11월 1일, 그때까지 연구소였던 샌디아는 갑자기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이때 샌디아의 주식을 100% 완전하게 장악한 곳이 존 A. 모건이 중역으로 있었던 모건의 웨스턴일렉트릭 사이다. 이 회사는 독자들도 기억하는 바와 같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6개를 지배한 토키 특허회사이다. 그리고 이 회사와 함께 토키 기술을 공동 개발한 곳이 벨전화연구소인데, 샌디아 원폭 공장도 웨스턴일렉트리고가 벨전화라는 토기콤비에 의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말한, AEC의 인사부에 모습을 드러낸 최고재판소 배석판사 오웬 로버츠가 벨전화의 중역이었던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이리하여 원폭과 할리우드가 마침내 모건을 통해 연결되고, 이 책의 수수께끼가 시작된 것이다.


기실 모건도 록펠러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개전 날짜를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즉, 샌디아를 인수한 것이 한미군사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은 전쟁을 움직인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따라서 앞서 소개한 GE 사장 찰스 윌슨의 말은 웨스턴일렉트릭 사에도, 벨전화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전기 메이커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세계를 움직인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할리우드 영화인들을 종횡으로 조종하고 역선전과 첩보활동과 세뇌기술을 구사해서 전세계의 군인들을 한반도에 집결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원폭에 있었다.


……


네바다 주에서는 1951년부터 53년까지 무려 30회나 핵실험을 실시했는데, 한국전쟁이 휴전하기 한 달쯤 전에 갑자기 중단되었다.


……



《아토믹솔져》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6월 말 펜타곤엔 ‘인간자원국’이라는, 아우슈비츠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의 부서가 신설되고 국장으로 멜레디스 클로포드가 취임했다고 한다. 클로포드는 JP 모건의 이웃에 살던 철도왕이 세운 밴더빌트대학의 이학부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모르모트 병사들의 거동을 실제로 연구한 곳은 따로 있었다. 20세기 초에 존D. 록페러가 인수하여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부총재 유진 블랙을 임원으로 맞이하고 록펠러재단의 이사 윌리엄 우드 주니어가 부학장으로 있었던. 바로 존스홉킨스대학이었다. 이 대학의 설립자 존스 홉킨스는 미국 최초의 철도인 볼티모어 오하이오철도의 중역으로, JP 모건과 존 D. 록펠러에게 그 길을 열어 준 거물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설립한 대학엔 JP 모건도서관이 우뚝 세워져 있다. 나아가 원폭 실험 시대의 이 대학 재산관리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권고한 바네바 부시였다. (288~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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