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과 당끈 (건설적 대화)을 번갈아가며 소련을 설득하자는 (사실상 공존하자는) 조지 케넌의 봉쇄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재현되었다; 물론 햇볕정책의 숨은 설계자는 한반도 분단고착화를 위해 북한을 물밑 지원한 국제투기자본이다
https://m.blog.naver.com/miavenus/70086839787
모건스탠리
하나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삼킬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네오콘 부시 퍼셀이라는 것이다. 네오콘 부시 - 김대중 - 김정일 - 담배공장 - 퍼셀인 게다. 햇볕정책의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대소봉쇄반공정책인 케넌정책과 햇볕정책은 같다라고 말한 국유본 관계자의 말을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7/02/1998070270331.html?outputType=amp
[태평로 칼럼] 햇볕도 필요하고 채찍도 필요하다
류근일(논설주간).
'당근이냐 채찍이냐' '햇볕이나 북풍이냐'하는 말들이 성행하고 있
다. 미국에서도 이런 논란들은 있었다. 공산권에 대해 봉쇄정책, 롤백
정책, 세력균형론을 주창한 조지 케넌, 덜레스, 키신저 같은 이들은
이를테면 '힘의 우위'를 중시한 현실주의자들인 셈이다. 반면에 카터,
맥거번, 유진 맥카디, 프랭크 처치 같은 정치인들은 흔히 이상주의자
또는 비둘기파라고 불렸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이념적 철학적 차이
일 수도 있고 전략적 전술적 차이일 수도 있다. 현실주의자들은 공산
주의자들의 본질적 속성을 '폭력혁명론'에서 찾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궁극적으로는 폐지해야할 존재로 친다. 그 폐지는 곧
혁명을 의미하고, 혁명은 마지막 판에 가서는 물리적 폭력으로 완성된
다.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막는 길은 오직 '힘의
압도적인 우위'에 바탕한 대응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도덕적 이상주의
자들은 현실주의자들의 그런 논지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으면서도
조금 다른 논리를 제시한다. 공산주의 혁명을 막으려면 자본주의 사회
의 문제점도 스스로 개혁하면서 아울러 '힘의 과시'보다는 상호간의
삼투작용을 거쳐가면서 점차적으로 공동이해의 영역을 넓혀가자는 것
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다분히 개념적이고 도식적인 흠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투철한 현실주의자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협상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파리 평화협정
을 체결한 장본인은 현실주의자인 키신저였다.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이룩한 사람도 '강경파'인 닉슨이었고, 한국의 '강경파' 박정희 대통
령도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마찬가지로 '비둘기파'라는
카터도 이란에 억류된 미국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 침투를 명령
한 적이 있다. 이처럼, '햇볕' 정책이나 '채찍' 정책은 그때그때의 필
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구사하게 되는 도구나 수단일
뿐이지, 반드시 그 중의 하나만을 요지부동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 북한 당국의 태도에 따라야
그렇게 본다면 '햇볕'이나 '채찍'은 전술차원의 것이지 그것을 굳
이 원리화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원리적인 수준에 놓아야 할 것
은 한반도의 '통일' 이전에 '평화' 또는 '전쟁억지'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 북의 도발에 대해서는 냉철한 현실주의에 바탕한 '힘의 우위'로
대응할 수 밖에 없고, 북한주민의 굶주림에 대해서는 따뜻한 동포애로,
그리고 남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보이는 상호주의 만큼
의 '햇볕'을 쐬어줄 수도 있다. 이처럼 '햇볕'과 '채찍'은 우리가 미
리 앞질러 선택할 성질의 '옵션(option)'이라기보다는, 북한당국이 하
기에 따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이 계속 무장도발과 지하공작, 통일전선 전략으로만 일관하려
할때는 '그런 것은 절대 불용'이라고 단호하게 말해주는 것(채찍)외에
달리 무슨 대책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북한이 대화를 원하는 기색인데
도 우리가 계속 '채찍'만 든다면 그것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햇볕 대접'과 '채찍 대접'은 북한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이 '햇볕'받을 자세로 임하면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고, '채찍' 맞을 일을 벌이면 역시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햇볕'이냐 '채찍'이냐가 마치 두가
지 중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택일해서 그 '철칙'을 모든 경우에 고정시
켜야할 일인 것처럼, 그리고 북한이 남한에 대해 어떤 선택으로 나올
것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선택해야 할 일인 것처럼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기본철학을 어떻게 정립할 것이냐의 전략,
구도, 가설, 전제는 세워놓아야 한다. 그러나 선험적인 구도, 가설,전
제를 너무 철석같이 세워놓고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적중할 경우의 이
득 못지 않게 그것이 적중하지 않을 경우의 위험 또한 동시에 안고 있
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F._Kennan
George Frost Kennan (February 16, 1904 – March 17, 2005) was an American diplomat and historian. He was best known as an advocate of a policy of containment of Soviet expansion during the Cold War. He lectured widely and wrote scholarly histories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USSR and the United States. He was also one of the group of foreign policy elders known as "The Wise Men."
During the late 1940s, his writings inspired the Truman Doctrine and the U.S. foreign policy of containing the USSR. His "Long Telegram" from Moscow in 1946 and the subsequent 1947 article "The Sources of Soviet Conduct" argued that the Soviet regime was inherently expansionist and that its influence had to be "contained" in areas of vital strategic importance to the United States. These texts provided justification for the Truman administration's new anti-Soviet policy. Kennan played a major role in the development of definitive Cold War programs and institutions, notably the Marshall Plan.
Soon after his concepts had become U.S. policy, Kennan began to criticize the foreign policies that he had helped articulate. By late 1948, Kennan became confident that the US could commence positive dialogue with the Soviet government. His proposals were dismissed by the Truman administration, and Kennan's influence waned, particularly after Dean Acheson was appointed Secretary of State in 1949. Soon thereafter, U.S. Cold War strategy assumed a more assertive and militaristic quality, causing Kennan to lament what he believed was an abrogation of his previous assessments.
In 1950, Kennan left the State Department—except for a brief ambassadorial stint in Moscow and a longer one in Yugoslavia—and became a realist critic of U.S. foreign policy. He continued to analyze international affairs as a faculty member of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from 1956 until his death in 2005 at age 101.
1. 개요[편집]
미국의 20세기 대 공산 진영 정책을 대표하는 정책이다. 미국이 냉전시절 동안 적국이자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고 우위를 점하고자 실행하였던 대외정책이다. 미국의 외교관이자 정책관이었던 조지 케넌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고, 그 후 폴 니찌, 조지 C. 마셜. 존 포스터 덜레스, 멕조지 번디, 헨리 키신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그리고 조지 P. 슐츠 등 냉전 시대의 미국의 안보전략관들과 그들이 보좌한 대통령들에 의해 냉전이 종료될 때까지 수없이 변형되고 바뀐 역사가 있다.
2. 기본 토대[편집]
이것이 봉쇄정책의 초안이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 정책은 유지된다.
3.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편집]
하지만 저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보이는 모든 지점에서 러시아인들에게 대응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보았다. 당시 행정부는 외부의 위협이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그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과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집중시키기 위하여 이익의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필수적 이익과 주변적 이익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 필수적 이익과 주변적 이익을 구별하는 기준은 필수적인 원자재와 안전한 통신라인 그리고 산업-군사 역량이 존재하는지이다. 위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지역은 만일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적대감을 표출할 수단인 산업 역량 및 전쟁수행 잠재력이 없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위의 기준을 통해 서유럽, 지중해, 중동, 그리고 일본 등이 방어해야 할 최우선 지역으로 설정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이르는 아시아 대륙은 만일 소련에게 넘어가도 미국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증명된 미국의 강점인 경제적 기술적 탁월함을 바탕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잡았고 그 다음으로 정치적 안정, 마지막으로 군사적 안정을 목표로 잡았다. 경제적 수단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이유는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였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원자폭탄에 대응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대량살상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수 있기 전까지는 여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역량 강화보다 경제원조가 더 이득이 크다고 판단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서유럽과 일본을 경제적으로 재건해 봉쇄전략을 달성해야 한다고 판단하였고.위의 일환으로 이 시기에 공업 국가들을 소련을 막는 보루로 재건하기 위해 유럽부흥계획(the European Recovery Program)이 주요 외교정책으로 구상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전략은 소련 영향권을 단순히 봉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축소시키기 위하여 공산권 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모스크바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1948년 6월 소련과 가까워 보였던 유고슬라비아가 모스크바와 관계를 단절한 것을 보고 수정해야만 했다. 위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티토주의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였고 티토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국방부와 국무성 사이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 철강분괴 압연기를 수출하였다. 위와 같은 분열을 위해 1949년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장개석과 국민당을 패주시켰을 때 미국 국무성의 전문가들은 이것을 티토주의를 촉진할 만한 고무적인 기회로 보았다. 애치슨도 이러한 시각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고 중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지 못하기 위해 중국과는 비전략적 물자 교환을 계속화되 대만에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와 같은 전략적 인식을 바탕으로 1949년 12월 3주 간격으로 NSC 48/2와 NSC 58/2를 재가하였다. NSC 58/2는 "위성국가들로부터 소련의 힘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소련과 불화를 빚고 있는 공산주의 정권과 일시적으로나마 협력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보고서였고 NSC 48/2는 "미국은 적절한 정치적 심리적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소련 사이에, 스탈린주의자들과 중국 내의 다른 분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한편, 미국이 개입한다는 낌새를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적절하다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공식적인 수단뿐만 아니라 은밀한 수단도 활용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보고서이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인들과의 협상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힘이 반드시 필요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협상을 미루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결성과 독립적인 서독 국가 건설, 일본 점령 후에도 일본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 수소폭탄 제조를 결정하였다.
먼저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은 서유럽이 먼저 제시하였다. 이당시 서유럽은 붉은 군대와의 군사력 격차[2]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은 서유럽 동맹이라는 군사 동맹을 결성해 미국과 연계하려고 하였고 이에 미국도 1948년 9월에 캐나다와 함께 협정의 개요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는 북대서양이라는 개념을 확장해 이탈리아를 포함시켰고 회원국들에게 군사지원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미군을 주둔하는 것과 서독 국가 건설은 독일과 일본을 두고 소련과 협상하면 이득보다 위험이 크다고 국무성이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미국과 소련의 상호 이익을 위하여 독일과 일본을 비무장하고 중립화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소련이 서구 진영이 납득할 만한 조건으로 독일을 통일하는데 거부하자 독일이 경쟁국으로 부상할까봐 우려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고려하고 독일 전체를 소련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서독 국가 건설을 하였고 일본은 재무장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미군을 계속해서 주둔시켰다.
수소폭탄 개발은 1949년 8얼 소련이 예상보다 일찍 원자폭탄을 폭발시킴으로서 촉발되었다.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는 의견도 꽤 있었으나 트루먼 행정부는 기술적으로는 낙후되어 있지만 인력이 풍부한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함으로서 힘의 균형을 깨트렸다 보았고 따라서 균형을 바로잡기 위하여 수소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위의 4가지 행동인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일본에 지속적으로 미군을 주둔하는 것, 서독 국가 건설 그리고 수소폭탄 개발은 소련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였다.
4. 6.25 전쟁 발발에서 트루먼까지[편집]
중요한 구역들과 외곽구역들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구역들을 중요한 구역으로 판단한 이유는 기존에 외곽구역이라고 판단한 지역이라도 만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면 심리적 불안감과 신뢰 상실이 초래되어 힘의 균형에 변화를 끼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NSC/68은 소련의 역량이 증가하여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소련이 기습적으로 전면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전면전을 일으키기 전에 소련이 대리전을 일으켜서 전쟁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NCS/68은 도발에 즉시 대응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철수를 하게 되면 대응할 힘이 없게 되어 필수적인 이익까지도 희생시키게 된다고 결론내렸다. 따라서 어떤 지역이든 크렘린의 지배 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정권은 초기의 자유진영을 중요지역과 외곽지역으로 나누는 전략을 버리고 모든 지역을 보호하는 정책을 수용함으로서 기하급수적으로 방위비가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NCS/68은 이를 당시 크게 지지를 받던 케인지언(Keynesian) 경제정책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4] 미국 경제활동 수준을 더 높여 국민총생산을 증가시키고 그 증가분을 이용하면 국내 생활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서구 진영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상당히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수가 확대될 때까지 예산적자를 감수하면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그리고 소련의 도전에 대한 응전 수단으로 NSC/68은 정치적, 경제적 조치보다 군사적 조치에 집중하였다. NSC/68은 도발이 발생할 때 미국이 그 도발에 군사적으로 대응할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 조건으로 NSC/68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군사력이 군비증강을 통해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가들의 군사력을 능가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도발에 대한 대응이 세계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게 하기 위해 행사해야 할 무력의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항복 아니면 전면적 세계전쟁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상황밖에 없는 원자폭탄에 대한 의존을 낮추기 위해 미국의 공중, 지상, 해상 전력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서 원자무기 체계를 축소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NSC/68은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NSC/68의 결론들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에 대한 공격의 속성상 이 공격을 수수방관하면 다른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에 한국을 필수적 이익으로 간주해야 된다는 합의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는 NSC/68의 모든 지역이 중요한 지역이라는 결론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북한의 남침은 미국의 핵무기 만으로는 도발행위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기존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NSC/68의 주장을 강화하였다. 한국은 다행히도 육해공군이 가까이 있어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대응할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애치슨이 상원 외교위원회에서의 "소련이 그리스에서 도발을 했다고 해도 우리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그리스로부터 1천마일 이내에 조차도 군대가 없으니 말이다. 이란에서 도발했다면 우리는 아무런 대응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베를린이라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란 발언에서 잘 묘사된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전략은 NSC/68에 따라 도발에 대응하되 불필요하게 확전을 시키면 안 되었다. 따라서 확전을 막기 위해 미국은 전투의 범위에 지리적 제약을 가하고 국민당 군대를 동원하지 않도록 결정하였으며, 행정부는 "경찰 행동"이라고 한국 전쟁을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확전 방지는 NSC/68에서 강조한 신뢰와 적절하게 조합하여야 했다. 미국이 38선 이남에서만 군사작전을 하는 것은 전술적으로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나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줄지도 몰랐다. 따라서 국가안보회의와 트루먼 대통령은 확전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38선보다 북쪽에서의 군사활동을 재가하였다. 이러한 판단에는 북한이 해방되면 베이징과 모스크바가 틀어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전략은 1950년 11월 말 중국이 개입하면서 실패하였고 이에 미국은 난상토론 끝에 38선에 있는 전선을 안정화하고 38선 너머로 확전하지는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1951년 1월에 미국은 유엔의 휴전 결의안을 지지하였으나 중국이 이를 거부하였고 다시 6월에 소련이 제안한 휴전협정을 받아들였고 양측이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한국전쟁은 고지전의 형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트루먼 행정부가 퇴임하고 일 년 반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이러한 한국전쟁은 NSC/68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트루먼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지속적으로 국방비를 삭감할 계획이였으나 발발 뒤에는 국방예산 증액을 요청하여 1950년 말에 경제자문위원회가 1년 안에 국방비로 700억 달러 정도를 지출할 것으로 예상할 정도가 되었다. 트루먼의 행정부는 처음에 이 증액된 국방비를 아시아보단 서유럽의 취약한 방어 상태를 강화하는 데에 쓸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 4개 대대에서 6개 대대를 유럽에 파병에 NATO에 합류하도록 하였고 미국의 부담을 덜기 위해 서독을 재무장시켜 NATO에 편입시킬려고 하였다.
하지만 11월 중국이 한국전재에 참전하면서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분열에 대한 기대가 산산조각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문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사태가 세계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일과는 별개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NSC/68은 서구 진영은 취약하며, 적들의 사이가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적들과의 이견해소보다 동맹을 강화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적이 지닌 적대감이 동맹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과 신뢰는 추구해야한다는 요소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NSC/68도 행정부 안팎의 난관을 피해가지는 못하였다. 공화당에서는 기존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기존 방식처럼 군사적으로 대칭적으로 대응하게 되면 필요한 군사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게 됨과 동시에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경제를 파산시케게 되어 정작 보호해야할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런 비판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공식적으로는 허튼소리라고 무시하였다.
그러나 행정부에서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이들의 우려사항에 이미 공감하고 있었다. 일찍이 행정부는 미국이 한국에 개입하게 되면 미국은 한국에서 버티기만 하면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보았다, 또한 NSC/68이 요구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에 중국군이 개입하게 되자 미국은 진짜 적을 나두고 2진과 싸우게 되었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행정부에서는 동아시아 전략에 대해 재점검이 일어났으며 결론적으로 NSC-48/5을 통해 중국인들과의 갈등에 인력과 물자를 그만 투입하고 더 중요한 소련 봉쇄로 돌아가자는 취지를 나타냈다. 또한 NATO에서 경제회복을 위태롭지 않게 하면서도 목표한 수준으로 군비를 지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군비 수준을 경제 역량에 알맞은 수준으로 축소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도 행정부는 NSC-68을 검토한 NSC-135/3을 통해 NSC-68은 근본적으로 타당하다고 결론내렸으며 이 결론을 다듬은 NSC-141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제시하였다.
5. 아이젠하워와 뉴 룩 정책[편집]
위와 같은 달라진 인식을 바탕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솔라리엄 작전이라는 작전기획 훈련을 통해 다룬 3가지 대안을 적절히 통합하여 뉴 룩(New Look)이라는 전략을 완성하였다. 이 뉴 룩이라는 전략의 핵심은 주도권을 되찾고 비용을 줄인다는 취지였다. 따라서 이를 위해 적의 가진 수단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칭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상대방의 약점에 적용하도록 계산된 방식으로 적의 도발에 대응하는 비대칭 대응을 핵심으로 삼았다.
뉴 룩 전략의 요소들 중 하나는 바로 핵 무기였다. 트루먼 때에는 핵무기의 수가 적어서 도발에 대응하는데 사용하기에는 어려웠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들어서 핵무기는 수와 전략적, 전술적 차원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 당시의 행정부는 비용이 많이 드는 지상군과 해군 일부를 신형무기에 의존하면 어느 정도 감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재래식 전력의 감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이익이 걸린 곳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관료들은 핵무기와 비핵무기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고 실제로 폭넓은 상황에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려한다고 해서 핵무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핵무기 사용과 관련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입장은 적들의 도발 초기에 가능한 대응의 범위를 감당할 만한 비용으로 할 수 있는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까지 확장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소련이 주도권을 유지할 확신을 잃게 만들어서 도발을 억제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방식은 전임 행정부의 방식보다 더 위험했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기꺼이 감수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국지전이 한국전쟁 정도의 규모로 확산되면 원자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무기를 제한적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는 주장했다.
뉴 룩 전략의 비핵적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동맹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트루먼 행정부처럼 자유진영의 안보를 보장하는 초석이 동맹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두 행정부는 동맹에서 꽤 차이가 있었다. 이 당시 행정부는 트루먼 행정부보다 동맹국보다 의논하지 않고 행동할려는 경향이 강했고 트루먼 행정부가 동맹을 전쟁 수행 도구로서 여겼다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동맹을 맺음으로서 러시아나 중국이 공격이 삼가리라는 억제력을 강조했다. 또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러한 동맹을 미국 대신 인력을 제공할 곳으로 보았다. 미국은 필요하면 공군력과 해군력으로 개입할 수 있겠지만 도처에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동맹관계에 태국과 파키스탄 한국과 대만을 추가로 넣었다.
뉴 룩 전략의 비핵적 요소 중 다른 하나는 심리전 정책이었다. 심리전의 전술은 수사를 통해 소련의 취약점에 관심을 집중시켜 냉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위성국가에서 질서를 깨는 사태가 발생하게 하며 소련 영향권 내의 국민들의 두려움을 해소시켜서 국민들이 배반을 하게 만들거나 7함대를 철수시켜 장개석이 중국 본토를 공격하도록 허용하거나 모택동 정권을 외교적 인정을 보류해 모택동이 중국을 다스리기 어렵게 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인쇄물이나 방송을 통해 선전을 하는 전술도 있었다.
뉴 룩 전략의 나머지 요소는 비밀작전과 협상이였다. 비밀작전은 1948년부터 중앙정보국에 의해 수행해왔으며 비밀작전의 예산과 관련 인력, 해외지부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비밀작전을 국가 전략의 도구로 자리매김하였다. 중앙정보국의 작전수행과 정보수집을 통합시켜 작전수행 쪽에 비중이 더 커지도록 하였고 신임 중앙정보국장으로 국무장관의 동생을 임명함으로써 긴밀하게 정보작전과 국가전략을 조율할 수 있게 하였다. 협상 쪽으로 넘어가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소련이나 중국과 협상을 시도할 의향이 훨씬 더 강했다. 이는 NSC-162/2와 NSC-5501에 들어나 있다. 이 문서들은 미국의 안보이익에 분명히 이득이 된다고 보이면 소련이나 중국과의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위에서 언급한 뉴 룩 전략을 실행하였다. 우선 핵전력이 재래식 도발을 억제하고 퇴치할 수도 있다는 원칙에 따라 서유럽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붉은 군대의 침략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서유럽 국가들의 미국이 서유럽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로 인한 핵무기 개발을 억제할 수 있었다. 또한 주변부 전역에서도 핵무기에 의존하였다. 우선 한국전쟁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핵공격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다음에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핵위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확신했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도 핵무기를 사용을 고려하였지만 여러 이유로 실제로 사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54~55년과 1958년 두 차례 이었던 금문도와 마조도 위기에서도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일부러 누설하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 섬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면 대만 지역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서태평양 전 지역과 동남아시아까지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에 넘어갈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섬들은 공군력과 해군력만으로는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는 모택동이 물러남으로써 이 전략은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미국이 사소한 도발만으로도 핵무기를 사용할 확률이 있는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미국 대중과 해외 동맹국들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대응의 범위에 대한 관할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동맹국들에게 끌려다니게 되었으며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핵무기 사용이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젠하워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겉으로는 이를 자신하였지만 비공개적인 자리에서 보인 자신감은 훨씬 약했다. 따라서 참모들은 핵 억지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어 유연성을 달성할려고 했지만 이이젠하워는 이를 거부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어떠한 전쟁이라도 결국에는 핵무기 사용으로 확전된다고 보았으며 결국 핵 전면전을 막을 길은 핵 전면전을 미국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군사적 선택지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제 3세계에 관한 부분으로 넘어가 보면 이 시기에 일어난 제 3세계의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해당 지역에서 저항 세력을 구축함과 동시에 충분한 지원으로 독자적으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월남과 남한, 대만, 필리핀, 파키스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였다. 위와 같은 대응 방식을 취한 이유는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밀행동을 쓰는 것은 단기적인 임시방편은 있을 수 있어도 계속 쓰면 의심하는 이도 늘어나기에 다음 작전을 은밀히 진행하기 어려워진다는 부작용이 있었고 심리전 작전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오랜 기간이 걸리고 뜻밖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핵위협도 효과적이지 않았다. 핵무기를 통해 베이징과 모스크바가 민족해방 운동을 이용하기를 주저하기를 바랬지만 이는 먹히지 않았다. 베이징과 모스크바에서는 전쟁을 선포하도록 자극할 만한 일만 안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서다. 동맹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맹국과의 합의를 통해야 해서 행동의 할지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으며 일방적인 행동으로 미국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었고 그런 식민 지배 국가들과 엮이면 미국의 이미지가 식민지에서 악화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결론이 나왔으나 이런 방법은 러시아나 중국처럼 내정에 간섭하는 행동으로 비춰졌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행정부에서는 민족주의가 공산주의에서 스스로 버틸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판단으로 인하여 민족주의를 지원할려고 애를 썼고 이는 주권과 자주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여져 반감을 샀으며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마져도 다 같은 공산주의라고 보아서 이들을 이용하는 것을 배제하게 되었다. 행정부가 제 3세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핵 보복 위협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소련을 막을 수는 있어도 적대적일 가능성이 있는 혁명을 억제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르쇼프의 스푸트니크 쇼크로 촉발된 미사일 격차에 대해서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딱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지시로 작성된 게이더 위원회 보고서에서 스푸트니크호가 담기기는 했다. 아이젠하워는 이 보고서에서 권고한 몇몇 부분에서 동의하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인 권고안들은 거부하였다. 민수를 조금 줄이고 군수를 조금 늘리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게이더 보고서에서 권고한 예산 지출은 너무 높아서였다. 게이더 보고서의 권고안들이 효력을 발휘할려면 높은 예산적자가 일어나 경제통제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도발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힘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추가로 무기를 보태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U-2 정찰기로 인한 소련 항공을 정찰한 결과 소련의 ICBM제작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외교적 부분을 보면 아이젠하워 시기에는 소련인들이 참여한 세 차례 정상회담과 다섯 차례 외교장관 회담이 있었고 그 외의 다른 회담은 더 많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처음에는 새로 들어선 소련 지도부에 유화적인 접근방식을 취했고 그 일환으로 1953년 4월 연설에서 "보편적 무장해제"에 관한 협상을 제안했으나 크렘린 지도부 구성원의 위신을 강화해줄 우려가 있다 판단하여 정상회담은 거절하였다. 결국 정상회담은 1955년 7월에 제네바에서 열렸다.
또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무기통제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군축 협상보다는 신빙성 있는 핵 억지력의 유지와 동맹국들 간의 화합 유지, 그리고 심리전을 더 중시하였다, 그로 인해 1955년 5월에 소련이 제한적인 사찰에 동의했을 때 이것 대신 선전효과를 위해 영공개방을 제시하였다. 1957년에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을 때 영국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러시아인과 의논했다는 이유로 협상가를 소환하여 군축협상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다른 제안도 검토되었으나 그 제안이 과학적으로 별 신뢰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자 철회되었고 결국 구속력 없는 핵실험 유예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온 데에는 호루쇼프도 자기가 제안한 제안을 철회한 것도 있었고 사찰안이 아주 일부밖에 사찰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 행정부는 실속 있는 협상을 거부하였다, 이는 1957년 6월 미국은 장개석을 지지한다고 천명하고 베이징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유엔 가입에도 반대한다고 밝혀 이를 확실히 들어냈다, 당시 행정부는 중소간에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유화책보다 강압책이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압박을 가해 모스크바에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게 함으로서 중소관계에 더 큰 부담을 씌운다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임기 말년에는 소련과의 협상에서 훨씬 전진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하였단. 1958년 11월 호루쇼프가 서베를린에 접근하겠다는 최우통첩을 하였을 때나 1959년 9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보여졌다. 하지만 협상에 그렇게 큰 우선순의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U-2 정찰기 격추 사건이 발생하고 난 다음에 파리 정상회담이 취소된 것에서 드러난다. 정상회담이 근접한 시기에 항공정찰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U-2 정찰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국방비 지출을 안정화시켜 총예산에서 군사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1954년의 69.5%에서 1961년 50.8%로 낮추는 데에 성공하였고 해외 군사활동을 자제했음에도 공산주의에 잃은 나라는 북베트남과 쿠바뿐이었다.
6. 존 F. 케네디의 봉쇄정책[편집]
케네디의 행정부에서는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와는 달리 다양한 참모들을 포진시켰다. 쿠바 사태 당시에도 케네디는 여러 명[7]의 조언을 받으며 사태의 경과를 지켜보고 지휘했다. 하지만 케네디 정권의 총체적인 전략을 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월트 윗먼 로스타우(Walt Whitman Rostow)였다.[8] 로스타우는 BSNP (Basic National Security Policy-기본 안보 전략)을 작성하였으며 케네디 정권의 봉쇄정책의 틀을 마련하는데 쓰였다.[9] 케네디 행정부는 힘의 균형은 깨지기 쉽다는 확신을 지녔으며 힘의 분포가 조금만 바뀌어도 연쇄반응이 일어나 참담한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케네디는 미국의 안보에 대해, 어느 한 세력이나 세력의 연합들이 미국을 위협하지 못할 때 보장된다고 믿었으며[10], 따라서 한 블락(bloc)이 미국을 위협하지 못하게 여러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했다. 또한 그런 일이 방생하지 않게 미연에 방지할 행동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무작정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반감을 살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렇다고 행동을 너무 자제하면 적이 이를 이용할 기회를 줄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균형점이 중요했다. 그래서 행정부는 진보적인 세력을 지지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런 세력을 지원하는 데에 민주주의나 민간기업 미국의 입장에 공감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상관없었다.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케네디 행정부는 핵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양한 선택지를 위한 국방에 필요한 재원은 국가 경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출에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U-2와 인공위성 정찰 기능을 이용해서 미사일 격차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ICBM의 수효에서도 미국이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의 군사력 균형도 소련군이 미국군 수준으로 무장되지 않았다는 점과 사단의 규모도 미국과 나토의 1/3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총체적 군사력에서 소련과 대등하거나 압도한다고 보았다. 또한 중소분쟁이 심각하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을 압도한다고 해도 제한적인 도발의 위협은 여전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어느 지역에서도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것은 미국의 손실이라고 보았다. 일부가 공산주의에 넘어가는 것은 미국이 나약하게 보일 수 있었고 필수적인 지역까지 포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판단을 바탕으로 케네디 행정부는 유연한 대응이라는 전략을 세웠다. 다양한 종류의 도전에 대응할 만한 충분한 수단을 구축하여 모든 전쟁을 억제하고 군비경쟁을 종식시키는 협상에서 미국의 협상력을 공고히 하는 일이 목표였다. 유연성을 갖추어 확전의 위험성과 모욕을 당할 염려 없이 위험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차원에서 행동이 가능한 역량과 제어할 능력을 바탕으로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 과제는 핵무기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이기 위해 재래식, 비재래식 군사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선택지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때에 억지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방편으로 장기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춘 육군을 11개 사단에서 16개 사단으로 늘렸으며 나토의 재래식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재래식 전력만으로는 각 나라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대처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반란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행동에 능숙한 특수군의 훈련을 강화하였다.
두 번째는 전략적 미사일을 증강하는 것이었다. 미사일 격차가 근거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전략적 우위의 입지를 고수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전략적 우월적 지위가 억지력과 전략을 산정하는데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적 우월성을 추구하는 것은 행정부 내에서도 이견이 갈렸다. 소련도 이에 똑같이 대응하도록 하여 결과적으로는 안보가 이전에 비해 딱히 튼튼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소련이 ICBM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략적 미사일을 계속 증강했다.
세 번째는 동맹을 강화하고 합리화하는 일이었다. 이것의 가장 큰 난관은 NATO였다. NATO를 강화하기 위해 유럽에 배치한 전술핵무기 수를 60% 늘렸으나 유럽은 미국이 자국의 도시가 위험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의 억지력에 의존하는 상황을 점점 불안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NATO 회원국들의 핵무기 개발 용인과 미국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되 공동으로 통제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앞의 방안들의 여러가지 문제로 케네디 행정부는 다자간 핵전력을 제한했다. 미시일을 갖추고 다양한 소속의 선원들이 배치된 군함 25척을 NATO 총사령관의 휘하에 두고 미사일 발사는 NATO 회원국들의 만장일치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억지력에는 제약을 부과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다자간 핵전력의 사용을 거부할 권리를 준다는 점이 문제였다. 따라서 유럽의 태도는 미온적이었고 이 제안은 사장되었다. 따라서 NATO는 여러 모순을 안은 채 계속되어야 했다.
네 번째는 비군사적인 봉쇄활동 이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제 3세계 국가들에게 예방접종을 하여 공산주의라는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군사지원뿐만 아니라 외교, 정보활동, 교환 프로그램, 교욱문화발전 지원, 경제프로그램 지원, 기술 지원, 무역과 상품가격 안정화 정책 등등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를 달성할 수단으로 라틴아메리카에 200억 달러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내부개혁을 조건으로 하는 전진을 위한 동맹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평호봉사단이라는 자원봉사단을 파견하여 건강, 교육, 농사와 관련된 소규모 프로젝트를 하거나 평화의 식량이라는 프로그램을 세워 미국의 잉여농산물의 소비를 해당 지역에서 촉진하도록 하였다.
다섯 번째는 국방에 필요한 국내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방 부문에서는 자의적인 예상 상한선을 폐지하는 대신 각 부서가 화보한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감시하도록 하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 프로그래밍 예산편성 체제라는 것을 구축하였다. 경제 부문에서는 케인즈 기법을 경제운용에 적용하였다. 연방 정부가 재정적인 도구를 이용해 지속적이고 신중하게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경제를 팽창시켜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해 미국을 세계의 본보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섯 번째는 협상이었다. 소련과의 갈등은 가까운 시일 내에 종식되기는 불가능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합의에 도달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구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라오스에서의 폭동아 일어났을 때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라오스를 중립화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도 소련과 협상하였다.
케네디의 재임기간동안 세계는 핵전쟁을 겪을 위기를 한번 넘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케네디는 소련이 미사일을 설치하는 것이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이 바뀐다고 보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행정부 내에서도 협상하지 않고서도 쿠바에서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협상으로 인해 미사일 배치를 완성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쿠바에 미사일이 배치된 상황에서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다행히 위의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이 사건에서 서로 전쟁할 의도가 없다는걸 파악하고 총부리를 돌리게 된다. 케네디 행정부는 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유연한 대응이 제도로 작동된 교과서적인 예시로 판단하였고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삼았다.
7. 린든 B. 존슨과 베트남 전쟁[편집]
베트남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앞서 말한 유연한 대응 전략에서 두드러지는 조율이었다. 베트남에서 그러한 조율은 케네디 때부터 실행되고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에서는 미국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소규모 미군을 파견하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케네디는 이를 거부하였다. 대신 남베트남의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경제적 군사적 원조와 자문 인력을 투입하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섬세한 조율이 필요했다.
남베트남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디엠의 독재를 완화하면서 베트콩에 대응하기 위해 그의 장악력이 떨어지지 않아야 했고, 원조를 지속하되 디엠이 미국의 꼭두각시로 보이지 않아야 했다. 조건이 너무 엄격했고 디엠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미국은 조율의 일환으로 1963년 디엠을 촉출하였다. 물론 누구로 대체할지는 고려하지 않았고 사이공에서는 불안한 정세가 지속되어서 베트콩이 이득을 보았다. 결국 존슨 행정부는 케네디가 거부한 미군이 전투에 참여한다는 안을 재가하였다.
물론 조율은 여전히 진행되었다. 미군을 급격하게 투입하는 것을 막고 대신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압박의 범위와 강도를 높여서 도발에서 얻는 이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점진적 압박은 북베트남 사람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지 않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협상할 여지도 남기고 민간인 사망자를 억제하여 반전정서가 강해지지 않도록하는 것을 고려하여 나온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에는 여러 가지의 제한 조건이 붙었으며 조종사들에게는 극도의 정확성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폭격의 강도와 범위는 점점 증가하여 1965년에는 2만 5천 번이던 것이 1967년에는 10만 8천 번으로 폭증하였다. 또한 지상군을 투입하라는 압력도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존슨 행정부는 비행장을 지킬려면 지상군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따라 지상군을 파견하였다. 파견 규모는 처음 요청한 2개 여단을 넘어서서 1967년 말 무렵에는 48만 6천 명으로 치솟았다.
점진적 압박이라는 전략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본래 취지는 미군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1961년에 북베트남과 중국이 완전히 개입할 때 20만 5천 명을 파견해야 한다고 예측하였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투입된 군의 규모는 예측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는 억제할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북베트남뿐만 아니라 고려할 대상이 너무 많았다. 너무 깊숙히 개입하면 중국이 참전할 위험과 국민이 염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개입을 더 이상 자제하면 미국의 동맹국의 신뢰를 잃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나약해 보인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했다.
또한 적의 도발에 세심하게 맞춘 점진적인 확전을 선택함으로 인해 주도권을 적에게 넘겨주었다. 적에게 자기가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억지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의 대안은 북베트남과 협상하는 것이었지만 존슨 행정부는 남베트남에서 미국의 힘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난 다음에야 협상할 생각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적이 협상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려는 시도를 할 때 방지할 대책과 미국이 더 깊이 개입하는 것을 방지할 대책이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무력을 정밀하고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군을 투입하고 난 뒤에 행정부는 군에 재량권을 넘겼다. 또한 적이 기대하던 반응 보이지 않자 공군, 해군, 육군이 요청하는 대로 제약을 차례로 풀었다.
베트남전에서 보인 다른 특징은 조율 전략을 와해를 행정부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에는 통계 지수에 너무 의존하였기 때문이었다. 통계가 정확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실제로 남베트남인들이 미국의 고문관들에게 과장된 통계를 주었다. 남베트남인들만 아니라 베트남 주둔 미군 자문역 총사령관도 낙관적인 정보를 주었다. 지상전에서는 전과를 무기 수 대신 시신으로 세거나 공중전에서는 폭격의 효과를 사진 정찰 대신 신뢰하기 힘든 조종사의 보고에 의존했다.
그리고 정확한 보고가 행정부까지 올라가더라도 행정부에서 이러한 정보를 무시했던 것도 한몫을 하였다. 이미 1961년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 투입한 인력이 미군과 맞먹는 규모가 되고 북부를 폭격해도 침투 과정을 크게 방해하지 못한다고 보고되었다. 2년 뒤에도 똑같은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행정부는 이러한 비관론을 인정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티었다. 지속적 확전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다른 대안보다는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철수하는 것은 굴욕을 의미하였고 현상유지는 위태로워 보였다. 또한 1968년까지 여론은 확전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택한 대안보다 더 나은 하노이가 원하는 조건에서 협상하는 것과 단계적 철수라는 대안이 있었다. 하지만 존슨 행정부에서는 수단이 무한하다고 생각했기에 예산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으므로 위의 대안을 선택하여 공산주의 베트남이라는 결론보다 값비싼 군사개입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재원은 무한하니 기존의 선택을 밀고 나가면 비용이 얼마가 들든 이긴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은 확전했을 때 얻는 이익보다 지출하는 비용이 더 높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이어졌다.[11]
베트남전에서 나타난 특징은 단기적인 수단이 장기적인 목표를 훼손했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곳에서 말해주는데 남베트남을 자립시킬려고 하였지만 수 십만 명의 미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함에 따라 대거 유입된 달러가 오히려 남베트남이 지립할 역량을 없애버린 것이나, '남베트남에 주둔함으로서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약속을 지키고 위험을 감수한다'라고 보일려고 했지만 미국이 베트콩에 대응해 점점 군사력을 증강시키지 못하자 정반대의 결과만 낳았던 것이 있다.
또한 베트남전에 집중한 근시안적 사고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소련의 군비증강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으며 동유럽에서 소련의 장악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경제적 관계 증진도 동유럽의 베트남전 지원에 격분한 의회가 거부함으로서 좌절되었다. 샤를 드골의 비타협적 태도로 인한 NATO에서의 심각한 갈등과 중동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도 거의 방치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도 전략무기제한 협정을 미루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혼란은 국내에서 발생하였다. 존슨 행정부는 수단이 무한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국내개혁 프로그램과 전쟁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국내개혁 프로그램에서의 예산 삭감을 막기 위해 전쟁비용을 감출려고 하였지만 결국 국내개혁 프로그램 예산을 삭감해서 전쟁비용을 충당하여야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야기된 공적인 신뢰의 훼손과 물가상승의 후유증은 그가 백악관을 떠나고도 십년 넘게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에서의 유연한 대응은 대실패였다. 전략이 의도한 목적과 판이한 목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을 구하지도 못하였으며 미래의 도발을 억제하지도 못했고 미국의 신뢰성을 높여주지도 못하였고 국내에서의 불안도 막지 못했다.
8. 관련 항목[편집]
9. 참고서적[편집]
- John Lewis Gaddis, 봉쇄전략 Oxford University Press
- Christopher Llayne, The Peace of Illusions. Cornell University Press
- Odd Arne Westad, 냉전의 지구사.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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