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메이슨으로 보는 중남미 현대사; 1932-5년 차코전쟁은 록펠러 (볼리비아) vs 로스차일드 (파라과이) 대리전쟁이었을까, 아니면 록펠러 (볼리비아) vs 구겐하임 (파라과이) 사이의 전쟁이었을까?

아래 인드라의 글에서 "차코전쟁 같은 건 그 깊은 배경으로 들어가면, 구겐하임과 같은 유대 광산 재벌과 록펠러와 같은 미국 재벌 대결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19세기말 20세기 상황인 셈입니다." 같은 러프한 문장은 동의하지 못한다.

 

차코전쟁은 파라과이는 로스차일드의 러열더치셸이, 볼리비아는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후원한 대리전쟁이었다. 구겐하임이 낄 자리는 없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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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국유본론에서는 중남미 근현대사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 유럽 프리메이슨 VS 중남미 프리메이슨

둘, 중앙 프리메이슨 VS 연방 프리메이슨

셋, 로스차일드 VS 록펠러

하나, 유럽 프리메이슨 VS 중남미 프리메이슨

당대 중남미 지배층은 대부분 프리메이슨이거나 프리메이슨 우호세력입니다.

가령 멕시코만 보더라도 왕당파이건, 공화국파이건, 뭐건,

당대 정파 투쟁했던 이들이 죄다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해서, 시몬 볼리바르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유럽에 유학을 가는 것이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유럽에 가서 계몽사상(사실은 프리메이슨 사상^^!)을 접합니다.

하고, 프리메이슨이란, 프랑스 나폴레옹처럼 각자 자기가 속한 지역에 공화국이나 새 왕조를 세우되, 자신이 세운 국가 중심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에게 있어서 시몬 볼리바르는 나폴레옹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카드였기에, 영국과 시몬 볼리바르는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대 국유본 황제 가문이었던, 베어링 가문은 영국 중심이면서도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을 지속시키기를 바라는 이중 플레이를 했습니다.

둘, 중앙 프리메이슨 VS 연방 프리메이슨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습니다. 국유본 황제 가문인 베어링 가문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영국도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어링 가문과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행한 정책은, 중앙 프리메이슨을 견제하고, 연방 프리메이슨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서, 중앙파란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지하는 세력인데, 쉽게 말해, 제국 건설을 지향합니다. 반면, 연방파란 중앙집권을 반대하는 세력인데, 제국 건설에 소극적입니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에서도 일어났는데, 조슈가 중앙파라면, 사쓰마가 연방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헌데, 이는 근대화 시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이전에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가령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왔습니다. 이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천여년간 한반도 중심이 수도권이잖습니까. 반면, 통일신라도 천여년 역사가 있으니 호족 세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해서, 고려부터 조선까지 수도권 중앙 VS 영남 연방 대결이 이어져온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드라 독특한 근현대사론에서는, 기존 좌우익파쇼 역사관과 달리 안동김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잖습니까.

국제유태자본론이 동아시아 근대사를 말한다 :사..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아무튼 나폴레옹 전쟁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것입니다. 영국과 베어링 가문은, 아메리카가 대제국이 되는 걸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아랍과 인도, 한국, 아프리카처럼 아메리카도 분단시키는 것이 통치하기 좋은 셈입니다.

해서, 어제의 동지였던, 시몬 볼리바르가 이제는 적이 된 셈입니다^!^

셋, 로스차일드 VS 록펠러

엄밀히 말하자면, 로스차일드가 아닙니다.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록펠러 가문은 모건 가문처럼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신 가문이었습니다. 당대 상황을 말하자면, 초대 국유본 황제 가문인 베어링 가문은, 무역과 낙농업과 경공업에 무게를 두고, 전 세계를 거대한 농장으로 만드는 구상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 지역이 거대한 낙농업 지역인 건 그 때문입니다. 반면, 로스차일드 가문 주된 관심사는 금융업과 철도 건설, 그리고 금은과 같은 광산 개발이었습니다. 게다가 베어링 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사순 가문)은 유럽,러시아,중동과 같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미국에 주된 관심이 있었습니다. 해서, 중남미는 로스차일드 가신 그룹끼리의 경쟁이었습니다. 가령 차코전쟁 같은 건 그 깊은 배경으로 들어가면, 구겐하임과 같은 유대 광산 재벌과 록펠러와 같은 미국 재벌 대결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19세기말 20세기 상황인 셈입니다.

중남미 근대사에 이어 지금부터는 아르헨티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브라질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쓴다는 점에서 중미에서는 멕시코,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이다, 라는 대표국가라는 부심이 있습니다.

면적 2억 7,804만 ㏊ 세계8위 (2021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 4,577만 3,884명 세계33위 (2023 통계청, UN기준)

GDP 6,327억 7,028만 달러 세계23위 (2022 한국은행, The World Bank)

1만 3,686.01달러 세계56위 (2022 한국은행, The World Bank)

라틴아메리카, 인구, 인종, 브라질 물라토(mulatto), 멕시코 메스티소(Mestizo), 흑인과 원주민 간 삼보(Zambo) (tistory.com)

많은 남미 원주민들이 유전자 검사 없이 메스티소로 분류되어 등록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인종을 추척해왔으나 이런 통계 자료들은 당시 사회가 무엇으로 생물학적 인종을 파악했는지만 보여줄 뿐이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들이 조사한 것은 인간의 "사회적" 인종이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식민 시대에 아메리카에서 한 사람의 법적 인종을 분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 부, 문화, 언어 사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많은 남미 원주민들은 돈으로 자신들의 실제 혈통을 바꾸거나 감추었다. 그리고 수많은 토착민들은 에스파냐에 공납을 피하기 위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 메스티소로 보이려고 했다. 여러 토착민들과 아프리카 혈통을 일부 이어받은 사람들이 에스파냐어를 구사하고 메스티소처럼 사는 경우 이들도 메스티소로 분류되었다...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경우, 공식적인 메스티소 인구는 3%에서 8%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CIA 월드북 인구 통계 기준

유럽인 (대부분 스페인계와 이탈리아계)과 메스티조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 97.2%, 아메리카 원주민 2.4%, 아프리카계 0.4% (2010년 추산)

둘, 1848년 이후 유럽에서 대거 신대륙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계가 50%가 넘는데, 유럽계 내에서 이태리 6 스페인 3 기타 유럽인 1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비중을 때로 85%, 또는 97%까지 보는데, 이는 중동계와 메스티조 혼혈까지 백인으로 간주할 때 나오는 수치입니다. 예서, 눈치챈 분들이 있겠지만, 이들 대다수 백인들은, 이등 백인, 백인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백인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뉴욕시에서 갱단만든 애들이 아일랜드인, 이태리인, 유대인, 나중에는 동유럽인이었습니다. 또한, 10% 정도가 흑인입니다. 10%가 시리아 등 중동계와 유대계, 아시아계입니다.

(9) Autos sin patente levantan gente en las calles de San Salvador de Jujuy - YouTube

30% 정도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혼혈 후손, 통칭하여 메스티조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순혈 원주민은 공식 3%인데, 자신을 사회환경 탓에 메스티조로 신분 세탁(?)한 이들을 포함한다고 해도 매우 낮을 것입니다. 백인들이 원주민을 많이 죽였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들을 보면, 대개 백인들이어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모두 백인으로 여기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백인이 극도로 많을 뿐이고, 아르헨티나 북부나 시골로 가면, 원주민과 원주민 후손이 꽤 삽니다. 자치권을 달라고 올해에도 시위를 하였습니다.

베어링 은행에게 아르헨티나는 무덤이었다 - 아틀라스뉴스 (atlasnews.co.kr)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모처럼 세계적으로 큰 전쟁이 없었다. 프랑스에선 이 시대를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렀다. 유럽과 미국에선 산업이 발달하고 금융회사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 금리가 내려갔고, 위험성 있는 투자대상에 돈이 몰렸다. 런던은 세계금융중심지였다. 런던 은행들은 러시아에서 캐나다, 남미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나섰다. 영국 자본수출은 1890년에 8,000만 파운드로, 당시 영국 GDP의 5.5%에 달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높은 수익을 제공할 것처럼 보였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초원(팜파스)은 밝은 미래를 제시했다. 영국은행들의 해외투자 가운데 40~50%가 아르헨티나에 집중했고, 그 중 베어링 은행이 아르헨티나 투자를 선도했다. 1880~1890년 사이에 베어링은 무려 1,360만 파운드를 아르헨티나에 쏟아부었는데, 그 다음 순위의 은행은 450만 달러에 불과했다. 1890년 무렵에 베어링의 대출 가운데 4분의3이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에 쏠려 있었다. 베어링의 투자 덕분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경제에는 거품현상이 빚어졌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셋, 흔히, 아르헨티나가 1880-1890년대까지 역사상 황금기였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레호 훌리오 아르젠티노 로카 파스 시절부터 아르헨티나 경제가 잘 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한 일이라고는 미국 대통령 잭슨처럼 원주민 학살 업적밖에 없습니다^^! 허나, 인드라 국유본론은 늘 강조합니다. 유통 없이 자본 경제없고, 특히 금융 투자없이 근대화없다고 말입니다.

보불전쟁 이후 국유본 황제 가문 자리를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빼앗기긴 했으나,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던 것이 초대 국유본 황제 가문인 베어링 가문이었습니다. 베어링 가문이 그간 스리랑카다, 멕시코다 여기저기에서 농장 사업 망하기 일쑤였지만, 아르헨티나 투자가 마지막 한방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투자 실패로 인한 파산 사태로 말미암아 그간 베어링 가문 영향 하에 있던 일본 이토 이토부미 정권마저도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당대 일본 은행 주거래 은행이 베어링이었으니까.

아무튼, 아르헨티나가 19세기말 20세기 초반 유럽이 부럽지 않았던 까닭은, 베어링 가문이 파산했어도 아르헨티나 인프라를 깐 게 어디간 게 아니니 이 덕분에, 거기에 일차세계대전이 터져서 미국과 일본이 호황일 때, 그 틈새로 아르헨티나 주력 수출품인 농산물 수출도 잘 되었으니 아르헨티나 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전까지 잘 나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지급불능 상태여서 아르헨티나 채권이 똥값이 되더라도 베어링 채권자만 망한 셈이 되고, 미국 주정부 채권처럼 1830년대 면화파동으로 망했다가 정상화되어서 지급되니까. 프랑스도 채권 똥값되었다가 원금을 돌려주었잖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KD_1Z8iUDho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1943년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넷, '돈 크라이 포 미 알젠티나' 페론 등장입니다~

페론 정권의 반민주성, 인권 문제를 두고서 얼마든지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기원이 만일 인용하였듯이 페론정권이 시민을 위해 애를 쓰는 과정에서 당대 국유본 황제 빅터 로스차일드 지시하에 드레퓌스 곡물 카르텔과 심각한 마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우리는 보다 국제유통자본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영국 베드포드 공작 가문 방계였던 러셀 가문이 국유본 황제 가문이 되었고, 버트런트 러셀이 국유본 황제가 됩니다. 대공황 일으켰던, 당대 세계 로스차일드 가문을 장악했던, 파리 로스차일드 가주는 무거운 책임을 느껴 홧병인지 죽었습니다. 페론은 당대 아르헨티나 노동당, 지금은 정의당(애칭으로 페론당)으로 나서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페론이 왜 망했나요^^? 페론이 곡물 사업을 국영화하자 아르헨티나 곡물 시장을 지배했던, 세계 5대 곡물회사인 드레퓌스가 배후 조종하여 페론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드레퓌스하면 에밀 졸라 '나를 고발하라'의 그 드레퓌스가 떠오르나요^^? 맞습니다. 같은 가문입니다. 드레퓌스의 명과 암입니다.

하면, 드레퓌스가 대단한 유대가문인 건 알겠는데, 드레퓌스 혼자 힘으로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페론을 대통령으로 임명한 건 버트런트 러셀입니다. 해서, 페론 정부 초기에는 마치 전후 일본처럼 아르헨티나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그 방식이 일본과 다른 듯 보였지만, 페론은 러셀 지시를 받은 듯, 스페인 협동조합론자 방식과 스탈린 중앙집권 통치를 혼합하였습니다. 핵심은 국유본의 무한 보증이었습니다. 페론은 국유본을 믿고(겉으로는 미국을 믿는 듯했지만^^ 당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국과 세계를 지배한 건 1954년 이전까지 버트런트 러셀이었으니까.)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1954년 이후입니다. 한국전쟁 직후 1954년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시 국유본 황제 가문이 됩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황제가 됩니다. 아마 드레퓌스 가문이 읍소했겠죠^^? 물론 드레퓌스만 읍소한 것이 아닙니다. 당대 중남미 꽁산당들이 페론당으로 급격한 세 위축을 겪었습니다. 페론은 꽁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해서, 당대 중남미 꽁산당들이 가장 미워하고 증오한 자는 페론이었던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폭망하기 시작합니다. 음모론을 배제하면, 일본과 아르헨티나 차이는, 무한정 투자한 만큼 매출과 이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스탈린과 반쪽일성을 사주해서 국유본이 일으킨(?), 한국 전쟁 덕분에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딱히 없죠. 게다가 믿었던 빽, 버트런트 러셀이 아무런 힘도 못 씁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르헨티나가 망할 수밖에요.


 

보불 전쟁과 파리 콤뮨 이후

동인도회사에 배신을 당하고,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우롱 당한

프랑스 프리메이슨들이 기댈 것은,

이제 미국 프리메이슨 뿐이었을까요?

뜬금없이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어서 뉴욕에 보냅니다.

보불전쟁 이후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반유대주의가 프랑스에서 퍼집니다.

주로 프리메이슨 사이에서 말입니다.

상층 프리메이슨들은 대체로 정치인, 외교관, 혁명가, 군인, 상인, 건축가, 학자들입니다.

특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군부 프리메이슨들 사이에서 심각했습니다.

해서, 터진 사건이 유대인 루이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에밀 졸라, 나를 고발하라, 뭐 이런 야그 들어봤을 것입니다.

헌데, 그거 아세요?

루이 드레퓌스 가문이 오늘날 세계 4대 곡물메이저이고,

아르헨티나 페론 정부를 붕괴시킨 프랑스 곡물 재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1967년 이스라엘으로 건너가 키부츠에서 생활했으며, 이 기간 동안 제3차 중동 전쟁(6일 전쟁)을 겪었다... 1982년 미국제약 시장 조사 기업인 IMS 헬스COO로 입사했으며, 이후 CEO가 되어 기존의 20배의 매출을 올린 뒤 1988년 회사를 매각했다. 그 뒤 영국의 국제 광고 대행사사치 앤드 사치CEO로 일했으며, 1993년까지 개인 사비를 투자해서 회사를 상당 부분 성장시켰다. 이후 1994년 독일의 다국적 스포츠 용품 생산 기업인 아디다스CEO가 되었으며, 이 기간동안 생산 라인을 간소화시켜 능률적으로 만들어 기업을 회복시켰다.

https://en.wikipedia.org/wiki/Margarita_Louis-Dreyfus

레닌그라드에서 마르가리타 올레고브나 보그다노바(러시아어: м аргарита о леговна б огданова)로 태어난 그녀는 전기 기술자인 할아버지에게서 자랐고 모스크바에서 법을, 레닌그라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1988년 취리히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로버트 루이스 드레이퍼스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1992년에 결혼하여 잉글랜드 챔피언십 축구 클럽 선덜랜드의 회장이자 대주주인 키릴을 포함한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포브스에 따르면 그녀는 취리히에 세 아들(1992년생 에릭, 1997년생 쌍둥이 모리스와 키릴)과 함께 살고 있는 스위스 시민입니다...그녀의 파트너는 전 스위스 중앙은행장인 필립 힐데브란트입니다.[12] 2016년 3월 21일 쌍둥이 여아를 출산했습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30713072332603

마가리타 루이 드레퓌스(50)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러시아 여성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최근 마가리타의 개인 자산을 3월 현재 60억 달러(한화 6조5110억 원)로 추정해 세계 196위의 억만장자로 평가했다.이 재산의 대부분 남편으로부터 상속 받은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에서 출발한 다국적 농산물 중개업체 루이드레퓌스그룹(Louis Dreyfus Group)의 소유주인 드레퓌스 가문의 후손 로베르 드레퓌스다.그는 2009년 7월4일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면서 전재산을 러시아 태생의 부인과 세자녀에게 남겼다...드레퓌스 가문은 7살에 부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손에 자란 그녀가 결혼을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부자가문이었다. 한때 프랑스 5대 부자가문으로 불린 유태인 부자 가문이었다. 루이드레퓌스그룹은 세계 농산물 시장을 주무르는 중개업체인 ABCD 즉 미국의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아르헨티나의 번지(Bunge),미국의 카길(Cargill)에 이어 D를 구성하는 막강한 기업이다. 이들은 세계 곡물교역량의 약 80%, 곡물저장시설의 75%, 운송을 위한 항만시설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드레퓌스그룹은 농산물 중개업으로 2011년에 59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 것을 비롯,그룹 전체로는 120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재벌기업이다.이 기업은 프랑스 알사스의 유태인 레오폴 루이-드레퓌스가 18살이던 1851년 세운 세운 곡물회사에서 출발했다. 오늘날 드레퓌스그룹은 상품(commodities)과 에너지, 부동산을 주축으로 하고 있지만 상품중개와 가공,운송을 주축으로 한다. 53개국에 72곳의 사무실을 두고 면화와 쌀, 오렌지주스,커피,구리와 아연 등 비철금속과 우유, 비료,설탕과 에타놀 등 18개 상품을 거래하며 수확기에는 전세계에서 3만8000명을 고용하는 재벌기업이다. 이처럼 덩치가 크지만 루이드레퓌스그룹은 그러나 162년 동안 비상장 가족 경영을 하고 있다. 1915년 창업자 레오폴이 영면하자 그의 두 아들 루이와 샤를이 회사를 물려받았다. 이들의 지분은 루이의 두 아들 장과 프랑수와, 샤를의 아들 피에르에게로 넘어갔다. 2차 대전때는 프랑스 괴뢰 비시정부에 많은 자산을 압류당해 일부 가문 구성들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피에르의 아들이자 창업주의 증손자인 제라르가 1969년 회장이 돼 경영을 하다 2006년 장의 막내 로베르가 회장직을 물려받았다...로베르는 가문의 이름이나 가문의 돈이 아니라 자기손으로 성공하고 싶어 1982년 가문을 떠나 근 10년 동안 미국의 제약 시장조사회사 IMS에 합류해 영국의 광고회사 사치앤사치,독일의 스포츠용품회사 아디다스 등의 CEO을 맡아 성공을 거뒀다.

1996년에는 프랑스의 명문 축구구단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 구단주가 됐다... 로베르는 아디다스 CEO,로 있을 때인 1997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그녀는 현재 병상의 로베르가 회사를 비상장사로 유지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실천하고 있다...21살인 장남 에릭(Eric)을 스위스 상품중개업체 글렌코어의 인턴으로 상품거래의 A부터 Z까지를 밑바닥에서부터 배우게 한 것은 단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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