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초기 미국 과학자들 상당수가 소비에트 (빅터 로스차일드) 스파이였다; Morton Sobel, 클라우스 푹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 천쒜선, 그리고 베노나 프로젝트

Morton Sobel

버트런트 러셀이 Sobel에게 적용된 소비에트 스파이 혐의에 

격정적으로 무고함을 주장했는데,

뒤늦게 정말로 그가 소비에트 스파이였던 것이 밝혀짐.


https://en.wikipedia.org/wiki/Morton_Sobell

Final admission of guilt

In September 2008, the National Archives released most of the grand jury testimony from the prosecution of the conspiracy case against the Rosenbergs and Sobell, in response to a suit by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historians and journalists.[18] Sobell, then 91, was interviewed by The New York Times about the case, as he was the only surviving primary figure other than David Greenglass. He was asked if he had given military secrets to the Soviets during World War II (then a war-time ally of the United States). He made the distinction that he had passed only material about defensive radar and artillery devices. This was the first time he had acknowledged his espionage activities. Reporter Sam Roberts pointed out that military experts contended that one device Sobell mentioned in the interview was later used against US military aircraft during the Korean and Vietnam wars. By that time, the Cold War was long underway, and the Soviet Union was considered an enemy of the US. Sobell also said that his co-defendant Julius Rosenberg had been involved in spying:[18]

In the interview with The New York Times, Mr. Sobell, who lives in the Riverdale neighborhood of the Bronx, was asked whether, as an electrical engineer, he turned over military secrets to the Soviets during World War II when they were considered allies of the United States and were bearing the brunt of Nazi brutality. Was he, in fact, a spy? "Yeah, yeah, yeah, call it that," he replied. "I never thought of it as that in those terms."[18]

Like the Rosenbergs, at the time of the events for which he was tried, Sobell was a committed communist. In 2018, he told The Wall Street Journal, "I bet on the wrong horse."[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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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당시 남북한에 모두 러셀 총책이 있었는데,

대한민국에는 MI6 서울지부 총책 블레이크가 있었으며,

반쪽일성에게는 주은래 끄나풀 성시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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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나 프로젝트

소비에트 스파이로 기소된 상당 수 사람들이 실제로 소비에트 스파이였던 것으로 밝혀짐.

핵심은 영국 빅터 로스차일드 케임브리지 스파이링과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


빌 클린턴의 임기 2년차인 1995년도에 미국 정부가 이 문서를 기밀 해제했다는 점이 중요.

 

The Venona project was a United States counterintelligence program initiated during World War II by the United States Army's Signal Intelligence Service and later absorbed by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NSA), that ran from February 1, 1943, until October 1, 1980.[1] It was intended to decrypt messages transmitted by the intelligence agencies of the Soviet Union (e.g. the NKVD, the KGB, and the GRU).[2] Initiated when the Soviet Union was an ally of the US, the program continued during the Cold War, when the Soviet Union was considered an enemy.

During the 37-year duration of the Venona project, the Signal Intelligence Service decrypted and translated approximately 3,000 messages.[3] The signals intelligence yield included discovery of the Cambridge Five espionage ring in the United Kingdom[4] and Soviet espionage of the Manhattan Project in the US[5] (known as Project Enormous). Some of the espionage was undertaken to support the Soviet atomic bomb project. The Venona project remained secret for more than 15 years after it concluded. Some of the decoded Soviet messages were not declassified and published by the United States until 1995.[citation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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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푹스


"맨해튼 계획의 주도자에게 웬 스파이몰이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인물 중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가 있던 것이 밝혀졌고 (클라우스 푹스) 미국이 핵 개발을 성공한 뒤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아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심은 충분히 할 수도 있었지만 스파이는 그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애꿎은 천재 한 명을 날린 셈이었다.



1943년 트윈-튜브 앨로이 프로젝트가 미국으로 이관되어서 맨해튼 계획으로 발전할 무렵 푹스도 같이 미국으로 넘어갔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즈음 소련 민간 정보부(NKGB)에 가입했다. 그 뒤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로 가서 한스 베테, 리처드 파인만과 친목을 쌓았다. 그리고 이때 플루토늄이 최단시간 안에 임계점에 도달하는 핵분열 에너지를 계산하는 기술 개발이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가 만든 계산법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Fuchs-Nordheim 방법) 이후 1945년 7월 16일에 있었던 트리니티 실험에도 참가했고, 일본에 투하된 리틀 보이와 팻 맨의 설계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전후 미국에 머물렀을 때에는 크로스로드 작전을 수행했고, 존 폰 노이만을 설득해 수소폭탄의 특허를 등록했다.

그리고 맥마흔 법으로 인해 배신을 당한 영국이 독자적인 핵개발을 개시했다. 미국에 있던 영국 국적의 과학자들을 귀국시킬 때 푹스도 영국으로 갔고, 영국의 핵무기와 원자력 연구소인 AERE(Atomic Energy Research Establishment)에서 부소장 역할을 맡았다. 영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소련에 유출시켰지만, 영국에도 미국의 핵무기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영국의 핵무기 개발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1949년 8월 소련 카자흐 SSR 세미팔라틴스크에서의 핵실험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소련이 불과 4년 만에 미국을 따라잡은 사실에 경악했다.
영국은 한 달 뒤인 9월 클라우스 푹스를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용의자로 연행했고, 집중 심문한 끝에 이듬해 1월 자백을 받아냈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항의에 소련 정부는 1950년 3월 7일 푹스를 스파이로 활용한 사실이 없다는 짤막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체포 이후[편집]
푹스는 영국과 소련의 관계,[3] 영국인이 아닌 독일 국적의 망명자라는 애매한 신분 그리고 영국에 제공한 핵무기 기술 때문에 간첩 혐의 대신 기밀준수 서약 위반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았고,[4] 그마저도 1959년 모범수로 석방되어 동독으로 추방됐다. 동독에서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의 평전 Atomic Spy를 펴낸 낸시 손다이크 그린스팬(Nancy Thorndike Greenspan)은 "그의 의도는 양대 강국의 전력 균형을 맞춰 핵 억지력을 도모하려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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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퍼트 오펜하이머

당시 대공황 시절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본인은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주위에 공산주의나 좌익 사상에 경도된 인물들이 많았다. 당장 그의 친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잠시 미국 공산당에 익명으로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아내였던 키티 역시 한때 좌익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던 과거가 있었으며, 전 남편이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로 직접 참전해서 목숨을 잃었을 정도였다. 키티는 당시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본인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그만뒀다.

오펜하이머가 키티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애인 진 태트록(1914~1944) 역시 미국 공산당 소속이었으며, 급진적인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기에 오펜하이머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진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44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19] 오펜하이머는 당연히 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오펜하이머의 이러한 행적은 먼 훗날이 아니라 맨해튼 계획을 시작하기 직전에도 문제가 됐는데, 레슬리 그로브스를 포함한 미국 장성들은 오펜하이머의 충성심, 사상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다만 당시에는 오펜하이머의 능력이 당장 필요하기도 했고, 그와 많은 대화를 했던 미국의 장성, 정치인들은 오펜하이머가 한때 좌익 사상에 몸담았던 적은 있었지만 국가 기밀을 취급하기에는 적합한 인물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과거의 행적으로 인해서 오펜하이머가 곤욕을 치르기 시작했을 때, 그로브스는 그에 대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호의적인 증언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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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이후 '오펜하이머 청문회'[28]로 보안 접근 권한을 빼앗기게 된다.[29]


소련이 원폭개발에 성공한 후 미국은 수소폭탄 개발계획을 서두르는 데 오펜하이머는 자문 위원회 의장 지위를 이용해 이를 반대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오펜하이머는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이후 비밀청문회의 서류가 분실된 것 등등 여러 이유로 공격을 받게된다.


생전에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가 미국 공산당의 당원이였고, 그의 첫사랑 중 한 명인 진 태들록이 당원이였다. 오펜하이머는 인생의 상당 기간 동안 "급진적",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으로 간주되는 여러 단체에 기부를 했다. 자신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피플스 월드》[43]를 구독했으며 공식적으로 가입한 적은 없지만 "공산당과 상당히 가까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루스벨트가 펼친 뉴딜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본인을 뉴딜연합이라 말할 정도로 진보주의, 세계주의적 믿음이 있었다. 원자폭탄이 촉발할 핵개발 경쟁 시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선 소련까지 참여한 세계 과학 공동체를 통해 원자력 사용에 대한 국제 통제 체제를 만들어야 하며, 유엔 창설을 추진하던 루스벨트도 이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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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쉐썬

1950년대 빅터 로스차일드 통제 하의 미국이 칼텍의 일류 과학자이자, 로켓과학 기술 분야의 권위자였던 천쉐썬을 중국으로 추방한 것은, 오히려 공산권으로 하여금 핵개발과 인공위성을 만들게 도와주기 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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