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양성애 역사인물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알렉산더, 카이사르, 하드리아누스, 프리드리히 2세,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마르실리오 피치노, 미켈란젤로, 아르튀르 랭보,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 앨런 튜링

 

Sort of.

The term gay/homosexual wasn’t used and the idea of being exclusively same sex wouldn’t be common, but having same sex lovers was accepted in the classical era. What we would now call straight men would often have younger male lovers. In Rome these would be mainly actors or prostitutes, while in Greece these would be pupils. Sexuality is very hard to define in modern terms in history.

Alexander is the easier one to define. He had three wives and at least one child. However, his ‘companion’ Hephaistion remained his constant companion and raised eyebrows even then. When Hephaistion died Alexander fell apart and died shortly afterwards. Their relationship appears to be more far more like a gay relationship than friends. Additionally Alexander took Bagoas, the favourite eunuch of Darius, as his own favourite eunuch. One must wonder what a ‘favourite eunuch’ is then. Alexander was either gay or bisexual by modern terms.

Julius is a little more complex. He was criticised for his affair with King Nicomedes of Bithynia. For years after there were songs and jokes about Julius calling him the Queen of Bithynia. He seems to have been criticised not only for the affair but for being the passive partner (how did anyone know). This gives one the issues with ancient sexuality. Being the active/top in a male on male relationship wasn’t an issue, but being the passive/bottom partner was, which may reflect that people thought of this as men taking a woman’s role, and is an extension of misogyny - this view is still alive and well in some middle eastern counties. Could the origins of homophobia be sexism? Possibly.

Julius was hugely sexually active. He had several wives, numerous mistresses and the idea that he took male lovers as well wouldn't be out of place. Warring armies often took boys with them for times when women weren’t available. Those medieval squires didn’t spend all their time sharpening swords and grooming the horses.

So yes, it’s almost certain that both had sex with men, but neither would associate as being exclusively homosex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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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has been suggested by several ancient sources - namely Suetonius, who was one of the more credible of the ancient writers (as opposed to, say, Plutarch) - that the only reason Julius Caesar named Augustus (then Octavianus or Octavian) as his successor was because Augustus/Octavian played the submissive in Caesar’s sexual advances. Even Suetonius, however, admits that there is a strong possibility that this was just part of Marc Antony’s BS slander campaign against Augus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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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비중과 독일에서의 인지도와 달리 영상매체에서의 등장은 상당히 저조한 편이다. 이는 프리드리히 2세의 능력치가 다방면에서 거의 만렙을 찍었기 때문인데, 삼국지로 치면 조조와 주유의 장점만 갖다 놓은 인물이다. 정치적 철학과 사상에서 이미 당대의 군주들보다 앞선 것은 기본이고 당대의 석학들과 토론 배틀을 할 정도의 학식과 비록 아마추어이긴 해도 오늘날로 치면 덕후에 준하는 바로크 음악 연주 실력을 갖춘 당대의 팔방미인인데, 이런 사람을 제대로 연기하려면 정치학과 음악 무예에 능한 삼국지의 주유의 거의 상위호환급 인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탓에 독일을 비롯한 중유럽 최고의 먼치킨과 인지도를 가졌음에도 영상화할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대략 중국과 한국에서 광무제와 세종대왕의 치세를 다룬 사극이 많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자타가 인정한 역대급 프리드리히 추종자였고 과거 군국주의와 파시즘 국가들의 롤모델인 탓에 프리드리히 영상화를 터부시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41] 하지만 현재의 독일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상화에 미적지근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냥 독일인들이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최대 흑역사 12년에만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사극으로 제작되지만 그 이전의 시대는 큰 관심이 없다. 그나마 있다면 비스마르크 시대 정도? 그렇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일대기는 의외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프리드리히 사극도 제작되지 않는 것이고 나치랑 별 관련은 없다. 오히려 대왕을 잘 아는 독일 일부 지방 출신들이나 독일 역덕들은 전반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매우 좋게 평가한다. 다시말해 호불호가 아니라 무관심이 문제이다.

게이였음이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애인들이었던 한스 헤르만 폰 카테,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 등을 볼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을 동성애자로 여기고 있다.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는 평민의 아들이자 프리드리히 대왕보다 4살 연상으로, 둘이 어느 시기에 처음으로 조우했는지는 기록마다 조금 분분하다.

어릴 때 발레를 배우다 만났다던가 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폰 카테와 도망을 치려는 시도를 하던 중에 동료 군인으로서 처음 조우했었다는 설들이 있다. 둘은 당대 예술 기조와 역사학에 대해 공통된 학구심이 있었고 그 때문에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프레더스도르프에게 영지를 수여했고, 프레데어스도르프는 개인 집사, 왕립 극장 총감독을 거쳐 후일 왕정 회계사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평민 출신으로는 내각에 처음으로 등용된 것이라 풍문이 많았다고 한다.[43]

프리드리히 대왕이 상수시 궁전을 지었을 때 둘의 침실은 아예 같이 붙어있는 설계로 지어졌다.[44] 그러나 평민 출신인 프레데어스도르프는 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반대에도 국왕에게 재정적 후원을 했던 부유한 은행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프레데어스도르프는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8년에 사망했다.

정작 아내이자 왕비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는 평생 서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세자 시절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내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왕위를 상속받자마자 아내인 엘리자베트와 아예 다른 건물에서 살기 시작했을 정도로 사이가 안좋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86년 8월 17일에 임종했는데, 엘리자베트와 프리드리히 대왕이 마지막으로 서로 얼굴을 본 날이 그 해의 1월이었을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유일하게 가까이 했던 여성은 그의 누이인 빌헬미네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자식은 없으며, 죽은 뒤의 왕위는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계승했다.

고대 그리스 테베의 신성부대, 알렉산드로스 대왕, 하드리아누스 황제, 폰 슈토이벤 남작과 함께 세트로 거론되는 경우가 잦은 인물이다. 다름이 아니라 동성애가 국력이나 군사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에 대한 반례인 셈. 즉, 한 개인의 성적 지향과 국가/군사 지도 능력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근세 유럽 군주 중 최초로 아웃팅 당한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Marriage A-la-Mode: 4. The Toilette》작품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상징하는 플룻 연주가가 등장하는데, 대놓고 제우스와 가니메데와 오버랩되게 그려놓았다. 그런데 프레드리히 2세는 스스로 딱히 풍문이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령 상수시에서는 남성 시종과 남성 귀족 청년들만 데려다놓고 살았고,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 등 동성애 관계의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신화 영웅들을 주제로 한 정자를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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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yung.com/article/2012091488821

 


귀족청년 카발리에리에게 사랑의 詩 300여편 바쳐
19세기말 동성애자로 밝혀져

더럽혀진 마음 속죄 의미로 말년에 여성과 정신적 사랑 ‘식음을 잊는 것이 그대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훨씬 쉽다오. 초라하게도 음식은 단지 우리의 육신을 지탱할 뿐이지만 그대의 이름은 나의 육신과 정신 모두를 부양한다오.’(1533년 여름)

‘저는 오늘 피렌체를 떠납니다…내가 살아 있는 한, 어디를 가든 나는 늘 당신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할 겁니다.’(1533년 12월)

 

것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누구나 이 편지를 보면 미켈란젤로가 아리따운 여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닐까 단정하기 쉬우리라. 그러나 놀랍게도 이 편지는 토마소 카발리에리라는 귀족 청년에게 부친 편지다. 게다가 이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청년을 향한 누를 수 없는 열정을 쏟아냈다. 그는 이 청년에게 무려 300여편이 넘는 소네트를 헌정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 한 남자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렇게 많은 시를 헌정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림과 조각만 잘 한 게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뜬 지 60여년이 경과한 1623년, 그의 조카의 아들이 우연히 그의 육필 시고를 접하게 됐다.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구들에 매료돼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카의 아들은 시를 읽어나가면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시들이 온통 남자들에게 바쳐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치였다. 그러나 단테와 페트라르카 뺨치는 그 주옥 같은 시들은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는 고심 끝에 이 시들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는 시 속의 대명사를 모조리 여성형으로 바꿔버렸다. 이 시집은 오랫동안 미켈란젤로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론 250여년간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가려지는 계기가 됐다.

사실 르네상스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동성애가 만연한 시기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인문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이 동성애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 소문의 빌미는 대부분 미켈란젤로 자신의 부주의한 처신이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게라르도 페리니, 페보 디 포기오 같은 눈부신 외모의 청년들을 조수로 고용했다. 그는 또 새로운 작품에 착수할 때마다 건장한 신체의 젊은 청년들을 아틀리에로 불러들였다. 메디치가의 묘실을 장식하기 위해 ‘밤’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조각 작품을 제작할 때도 남자를 모델로 고용했다고 한다.

 

미케란젤로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지극히 금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조수였던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늘 자신이 가난한 사람처럼 살아왔다고 뇌까렸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잊는 경우도 많았고 작업하다가 날이 저물면 작업복 차림 그대로 신발을 신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외모에 무심한 데다 잘 씻지도 않은 탓에 그는 사람들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열정을 간직한 사내였다. 다만 그의 남다른 자제력이 그 열정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참을 수 없는 열정을 젊은 청년들에게 쏟아낸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에게 ‘그의 아름다운 신체를 감싸는 옷’이 되고 싶다고 에로틱하게 고백할 정도였지만 실제로 그와 육체적 사랑을 나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찌 보면 그와의 관계는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봄이 타당하리라.

그의 열정이 가장 진한 흔적을 남긴 것은 바로 그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심지어 시스틴 성당 벽화에 자신이 마음으로 연모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그려넣기까지 했다. 그 형상은 그의 연인들과 너무도 비슷해서 동료 화가인 아레티노가 알아차릴 정도였다. 아레티노는 그림 속의 페리니와 카발리에리의 모습을 가리키며 미켈란젤로의 불경함을 비난하기도 했다. 조각상 ‘승리’에서는 카발리에리를 구세주로 묘사하기도 했다.

 

만년에 미켈란젤로는 비토리오 콜로나라는 지적이고 정결한 미망인과 사랑을 나눈다. 이 여인에 대한 사랑은 아름다운 남성들에게 바쳐진 종전의 에로틱한 사랑과는 달랐다. 그는 마치 페트라르카가 라우라에게 바친 연시나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쓴 순결한 시에 비견될 만한 고차원적인 정신적 사랑을 이 여인에게 바쳤던 것 같다. 그것은 예전에 가졌던 음탕한 마음에 대한 일종의 회개였다. 그가 시스틴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에 거죽이 벗겨진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은 뼈를 깎는 회개의 표시였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전에 자신의 드로잉과 문건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러나 연인에게 보낸 편지와 시까지 은폐할 수는 없었다. 그 부끄러운 베일을 들춰낸 사람은 19세기 말 영국의 동성애운동가인 존 애딩턴 시먼즈였다. 그는 시집의 여성형 대명사를 모두 남성형으로 되돌려놨다. 학자들은 경악했다. 이 사실을 인정했다간 수백 년 동안 쌓아온 미켈란젤로의 빛나는 성채가 허물어질 게 분명했다. 이로부터 다시 지루한 은폐의 한 세기가 흐른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인정된 것은 20세기 후반이 돼서다. 이제야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남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던 작가의 열정의 흔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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