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vs. 쩡칭훙 (장쩌민 최측근이자 현재 상하이방 대빵) / 밀려난 후진타오-리커창 공청단 계열 / 쩡칭훙이 발탁했으나, 여전히 시진핑 시대의 상무주석을 역임 중인 중국의 3대 책사 왕후닝 / 왕후닝, 류허, 왕치산은 국제투기자본 관련 인물들

 

* 지금은 시진핑 일당독재 체제지만, 2019년도만 해도, 홍콩의 경찰 및 조직폭력배 삼합회는 장쩌민파, 더 구체적으로는 한정 상무위원과 쩡칭홍 전 국가부주석의 관할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시진핑 관할.







글: 왕우군(王友軍)

만일 완전무장한 홍콩경찰이 없고, 폭력을 계속 강화하면서 진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홍콩정부가 민의에 순응하여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2019년에 홍콩의 '폭란'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금년 6월 홍콩의 반송중운동이 발발한 후, 200만의 홍콩인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했다. 질서는 잘 유지되어 전세계가 감탄할 정도였으며, 누군가는 홍콩인들이 노벨평화상후보라고 얘기하기까지 했다.

다만 7월 21일이후, 홍콩의 반송중운동에서 '폭란' 문제가 두드러지게 된다. 그리하여 갈수록 '폭력(暴)'이 늘어나고, 갈수록 '어지러워(亂)'졌다. 중국정부는 이번 '폭란'은 홍콩의 '폭도(暴徒)와 외국적대세력과의 '결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진실한 상황은 그러나, 이번 '폭란'은 중국공산당의 가장 흑악(黑惡)한 세력의 대표인물인 쩡칭홍의 '검은 손'이 막후에서 조종한 결과이다.

시진핑이 비록 현재 중국공산당의 '우두머리'이지만, 쩡칭홍은 홍콩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이다. 2004년에 정치국상임위원, 국가부주석으로 있던 쩡칭홍은 중앙홍콩마카오공작협조소조의 조장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 홍콩은 쩡칭홍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다.

2013년 1월, 시진핑이 반부패 타호(打虎)를 발동한다. 5년동안 440여명의 부성장급이상의 고위관료들이 조사처벌받았다. 다수는 장쩌민, 쩡칭홍이 발탁하여 중용한 사람들이다. 쩡칭홍의 확실한 심복이며 전 홍콩특구행정장관을 지낸 렁춘잉(梁眞榮)은 차기 홍콩행정장관출마를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쩡칭홍이 밀던 홍콩의 전 행정장관 도날드 창(曾蔭權)은 20개월의 형을 받았다. 쩡칭홍의 심복이자 전 홍콩화룬(華潤)그룹 동사장인 쏭린(宋林)은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쏭린이 체포된 후, 화룬그룹의 부동사장인 왕솨이팅(王帥廷)등 7명의 고위경영진이 연이여 조사를 받는다. 쩡칭홍의 '돈주머니'이며 '명천계(明天係)'그룹의 막후조종자인 샤오젠화(肖建華)도 체포되고, 합계 3조위안에 달하는 자산은 시진핑이 몰수해 버렸다.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로써 쩡칭홍은 시진핑과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쩡칭홍은 또한 중국공산당이 벌인 대규모 파룬공신자 장기적출의 중요책임자이다. 재미학자인 허칭롄(何淸漣)은 일찌기 이런 글을 썼다: "보시라이가 먼저 사형범의 시신매매를 시작한다. 저우용캉이 나중에 사형범의 장기매매 이익체인의 시발점이 된다. 만일 배후에 공동의 단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쩡칭홍이 중앙서기처 서기로 정법위업무를 주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형범의 장기와 시신을 상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거대한 이익체인을 이루게 된다. 이는 중국인의 치욕과 아픔이며, 더더구나 이런 매매를 비준하고 이런 상업활돌을 허용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한 중국정부의 치욕이다.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을 뿐아니라, 국내인들도 통한으로 여기고 있다." 국제적으로 파룬공신자의 장기매매죄행을 조사처벌해야한다는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파룬공신자의 선혈을 손에 가득 묻힌 쩡칭홍으로 하여금 언제 댓가를 치러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2019년은 '6.4사태' 30주년이다.

1989년 4월 15일 전 중공총서기 후야오방이 서거한다. 이 사건은 전국을 석권한 학생민주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같은 해 4월 26일, 인민일보는 <반드시 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하는 기치를 들어야 한다>는 글을 싣는다. 같은 해 6월 4일, 중국인민해방군은 천안문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6.4사태'를 일으킨다. 이때부터 매년 4월 15일부터 26일까지 그리고 6월 4일은 모두 중국정부에 '민감한 날'이 되었다.

2019년 4월 20일, 3년여동안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바 없는 쩡칭홍이 돌연 그의 고향인 장시(江西)에서 요란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4월 24일, 쩡칭홍은 비가 오는데도 장시성 공청성(共靑城) 후야오방 묘지를 참배한다. 쩡칭홍이 이번에 얼굴을 드러낸 것에 대하여 외부에서는 미중무역전으로 시진핑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고의로 국면을 악화시켰다고 해석한다.

쩡칭홍의 심복이자, 현임 중국주홍콩연락판공실주임인 왕즈민(王志民)은 홍콩시위서기에 상당하는 인물인데, '옛 상사'가 친히 나서는 것을 보자, 즉시 그의 뜻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홍콩행정장관 캐리 람(林鄭月娥)를 독촉하여 '송중조례'를 추진하게 한다. 누군가 반대하면 할수록 더욱 밀어부쳤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면 만을 수록 더욱 강하게 밀어부쳤다. 103만명이 길거리로 나와서 반대해도, 계속 밀어부쳤다; 200만이 길거리로 나와서 반대해도 여전히 '철회'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홍콩의 주류민의와 반대로 간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왕즈민은 일찌기 쩡칭홍의 모친을 모신 바 있고, 모친의 환심을 사서 발탁되었다고 한다.

쩡칭홍의 심복이자 현임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법위서기인 궈셩쿤(郭聲琨)도 '옛 상사'가 '민감한 날'에 '민감하게' 참배한 것을 아고는 즉시 '심유영서일점통(心有靈犀一點通)'했다. 그는 홍콩경찰의 고위층을 원격조종하여 반송중민중에 대한 고강도의 폭력진압을 진행하게 한다. 6월 12일, 절대다수의 홍콩시위자들은 평화롭고, 이성적이고, 비폭력적이었다(和理非). 홍콩경잘은 그런데도 150여발의 최루탄을 발사했다! 이는 5개월여동안 홍콩경찰이 고의로 갈등을 격화시키고 폭력진압을 격상시키는 시작점이었다. 6월 12일부터 지금까지, 홍콩의 폭력경찰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폭행(인터넷에 많은 동영상이 있음)을 저질렀고, 홍콩 '폭란'이 격화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현재, 비록 송중조례는 이미 철회되었지만, 홍콩인들은을중국으로 송환해서 재판받을 필요도 없이, 홍콩의 폭력경찰이 홍콩현지에서 일체의 도덕과 법률의 마지노선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진압하고 있다. 

궈셩쿤의 부인의 이모가 바로 쩡칭홍의 모친인 덩류진(鄧六金)이다. 궈셩쿤은 바로 이 관계를 이용하여 발탁되었다.

쩡칭홍의 심복이자 현임 중공정치국상임위원인 왕후닝(王滬寧)은 중국 선전기구의 총책임자이다. '옛 상사'가 돌연 장시에 나타나니 자연히 협력하게 된다. 7월 21일, 홍콩의 폭력경찰은 흑사회(黑社會, 조직폭력단)를 종용하여 윈롱(元郞)에서 무차별적으로 홍콩시민을 구타한다. 이는 홍콩사태를 악화시킨 전환점이다. 8월 1일, 왕후닝이 주관한 CCTV는 <폭력을 다스려 홍콩의 법치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라는 글을 싣는다. 홍콩의 폭력경찰과 흑사회의 모든 폭행은 눈을 뜨고도 보지 않는다. 책임을 모조리 홍콩시위자와 소위 '외국적대세력'에게 돌린다. 이 '암장설기(暗藏殺氣)'의 문장은 중국공산당의 홍콩시위자말살, 대륙민중기망, 홍콩'폭란'가속화의 총동원령이 된다.

옛날에 바로 쩡칭홍이 왕후닝을 장쩌민에게 추천한다. 이때부터 왕후닝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쩡칭홍을 배경으로 하는 해외매체는 반송중운동이 발발하기 전에, 계속하여 '홍콩이 혼란스럽지 않을까봐 두렵다'는 신호를 내보낸다. 3월 19일부터 4월 14일까지 연이어 글을 발표해서, 캐리람으로 하여금 23조 입법을 추진하도록 재촉한다. 4월 4일의 글에서는 '최근 권위있는 소식통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제23조입법을 캐리람의 임기내에 해야할 가장 중요한 임무로 보고 있다." 4월 8일의 글에서는 "여러 방면의 권위있는 소식통에 따르면, 기본법 제23조입법이 계속 미뤄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앙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방식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중 하나의 가장 놀라운 방안은 인대상위회가 제23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법을 해석하는 것이다." 4월 14일의 글에서는 "만일 누군가 더 이상 미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타당하지 않다." 2004년, 홍콩정부는 강제로 제23조입법을 추진한다. 그러다가 50만의 홍콩인이 길거리로 나와서 시위했었다. 그래서 결국은 철회한다. 지금 다시 23조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하다니 이는 고의로 홍콩을 심연에 빠트리는 일이다.

쩡칭홍은 중국공산당 특무의 우두머리라고 인식되고 있다. 해외에서 많은 홍색매체들이 지지한다.

홍콩의 반송중운동은 중국공산당이 홍콩을 22년간 통치하면서 계속하여 <중영공동성명>에서 만든 '일국양제' 50년불변의 약속을 어긴 것의 연속이다. 이를 통해 심각하게 홍콩의 자유와 자치를 침식한다. 누적된 갈들이 이번에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홍콩의 소위 '폭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 막후의 검은 손은 바로 쩡칭홍이다. 그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진핑이 그의 많은 심복들을 조사처벌한데 대한 복수이고, 다른 하나는 1989년 덩샤오핑이 중공총서기 자오쯔양을 끌어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기회를 틈타 시진핑을 끌어내리고 자기 사람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처벌을 면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명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쩡칭홍은 실제로 장쩌민, 쩡칭홍 일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쩌민과 쩡칭홍은 한 몸이다. 그리고 많은 막전막후의 대리인들이 있다. 단지 장쩌민은 지금 93세로 그저 목숨이 간당간당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쩡칭홍을 얘기한다고 하여 시진핑의 책임을 면제해줄 수는 없다. 시진핑은 홍콩의 혼란국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고의로 홍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쩡칭홍과 그의 일당이라는 것이다.

만일 시진핑이 쩡칭홍과 그의 일당을 체포하지 않는다면 홍콩은 안정될 수 없다. 그리고 홍콩혼란의 모든 책임은 결국 시진핑이 지게 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csUEFmWNJY


"시진핑, '사회 혼란스럽다' 원로들 쓴소리에 격분…'내 탓인가'" [앵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열린 비공개회의에서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원로그룹의 쓴소리에 분노를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 주석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불참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 나오는데요. 이준삼 기자입니다. [기자]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에 위치한 휴양지 베이다이허. 지난달 이곳에서 열린 중국 전·현직 지도부의 연례 비밀회동에서 원로그룹이 현 지도부를 향해 이례적으로 강한 경고음을 발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닛케이(니혼게이자이신문)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고 장쩌민 전 국가주석 측근이었던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이 시 주석 면전에서 "(사회를) 더는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원로그룹 차원의 사전모임을 통해 취합된 의견으로,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를 포함한 중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적하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예상치 못한 쓴소리에 허를 찔린 시 주석은 측근들을 다른 장소에 소집한 뒤 "과거 3대(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전 주석)가 남긴 문제가 모두 덮쳐왔다. 10년이나 노력했지만, 문제가 정리되지 않는다. 이게 내 탓인가"라며 격분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습니다. 닛케이는 이 같은 원로 그룹과의 알력, 그리고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경제 문제를 시 주석이 오는 9일 인도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불참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기자회견 등에서 관련 질문이 나올 경우, 시 주석의 체면이 깎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는 겁니다. 닛케이는 이러한 흐름이 이어질 경우, 오는 11월 중순 미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에이펙 정상회의에 시 주석이 참석할지도 불투명하다고 전망했습니다.





‘G20 불참’ 시진핑, 11월 미국서 열리는 아펙은 갈까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107426.html
 
 





소외받는 '2인자'…인민일보·신화·CCTV, 총리 재난 시찰 이례적 미보도 시진핑과 경쟁했던 '공청단계' 리커창…노점경제 제창 후 수모당하기도


(서울=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장화를 신고 진흙으로 뒤덮인 충칭시 퉁난(潼南)구의 수해 지역을 돌아보고 있다. 2020.8.23 photo@yna.co.kr (끝)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국의 공식 권력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가 최근 수해 지역인 충칭(重慶)시를 찾아가 진흙투성이가 된 고무장화를 신고 현장을 돌아보면서 주민들을 위로했다.

중국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은 리 총리의 사진을 퍼 나르면서 '인민의 훌륭한 총리'라고 환호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 같으면 이런 모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인민일보, 신화통신, 중국중앙(CC)TV를 포함한 핵심 관영매체들이 리 총리의 수해 지역 방문 행보 소식을 일제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기, 관영 매체들이 안후이성 수해 지역 시찰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행보를 연일 열렬히 보도 중인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당내 권력 투쟁설이 다시 제기되는 모습이다.

(서울=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충칭시 수해 지역의 가게를 방문해 피해 상인을 격려하고 있다. 2020.8.23 photo@yna.co.kr (끝)

◇ 사라진 리커창 보도…권력 이상 징후인가

(서울=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충칭시의 범람한 강을 둘러보고 있다. 리 총리의 오른쪽으로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당서기의 모습이 보인다. 2020.8.23 photo@yna.co.kr (끝)

23일 중국 국무원이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인 정부망(政府網)에는 지난 20일부터 리 총리의 충칭행 소식과 함께 여러 장의 현장 사진이 공개됐다.

리 총리는 바닥에 진흙이 두껍게 쌓인 수몰 지역을 찾아가 주민들을 위로하는 한편 현지 중소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이들의 어려움을 직접 청취했다.

하지만 신화사 등 '3대 관영 매체'를 포함한 대부분 관영 매체는 이런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리커창 총리가 20일 충칭 수해 지역을 방문해 재해 상황을 점검했는데도 인민일보, CCTV, 신화통신이 현재까지 일절 보도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라며 "베이다이허 회의 이후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설이 재점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서는 최고위급 지도자들에 관한 보도가 사라지거나 지연되는 현상이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차기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당내 권력 투쟁이 치열하던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 주석 시절,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의 동정 보도가 관행보다 하루나 이틀씩 더 늦어지더니 그가 끝내 낙마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이번 리 총리의 수해 현장 방문 보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낙마 가능성을 바로 속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가 실질적으로 와해하고 권력이 시 주석 1인에게 완전히 쏠린 상황에서 거의 동시에 이뤄진 최고위 지도자들의 수해 현장 방문 보도가 '1인자'인 시 주석 위주로 이뤄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또 정부망이 공개한 사진들을 보면, 리 총리의 이번 충칭시 방문 과정에서 시 주석의 측근이자 유력한 차기 최고 지도자 후보군에 속한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가 '정상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 '소외된 총리' 리커창…갈등설에 지속 노출

그럼에도 최근 중화권에서는 시 주석과 리 총리의 '권력 투쟁설', '불화설'이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모습이다. 리 총리의 낙마 같은 극단적 상황을 상정하지는 않더라도 리 총리가 권부 중심에서 소외되는 흐름은 비교적 선명해 보인다는 평가다.

실제로 시 주석 집권기 내내 리 총리는 시 주석에게 권한을 계속 내주면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이 현대 집단지도 체제가 자리 잡은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 시절에는 총리가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한 내치를 책임지는 자리로 인식됐지만 시 주석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모든 정책 결정 권한이 최고 지도자와 그 측근들에게로 쏠리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6월 리 총리는 코로나19 충격으로 어려움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단속 완화를 통해 노점상을 활성화하자고 주창하고 나서 중국 각 지역에서 지방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노점 바람'이 뜨겁게 일었다.

그러나 중국 관영 매체들이 돌연 노점 활성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노점 경제'는 흐지부지됐고, 이를 주창했던 리 총리는 사실상 공개적인 수모를 당한 꼴이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기자회견에서 리 총리가 말한 '6억 빈곤설'도 당내 불화설과 맞물려 크게 주목받았다.

당시 리 총리는 폐막식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지적하며 "6억 명의 월수입은 겨우 1천 위안(약 17만원)밖에 안 되며, 1천 위안으로는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토로했다.

대외에 공개되지 않던 자국의 '치부'를 드러낸 리 총리의 발언은 시 주석이 선전해온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 건설'에 대한 정면 반박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에서는 1년에 단 한 번 총리가 중국 안팎에 TV로 생방송되는 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을 통해 '검열'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날 그가 작심하고 이런 발언을 했다는 관측에 힘이 실렸다.


소외받는 '2인자'…인민일보·신화·CCTV, 총리 재난 시찰 이례적 미보도 시진핑과 경쟁했던 '공청단계' 리커창…노점경제 제창 후 수모당하기도


(서울=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장화를 신고 진흙으로 뒤덮인 충칭시 퉁난(潼南)구의 수해 지역을 돌아보고 있다. 2020.8.23 photo@yna.co.kr (끝)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국의 공식 권력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가 최근 수해 지역인 충칭(重慶)시를 찾아가 진흙투성이가 된 고무장화를 신고 현장을 돌아보면서 주민들을 위로했다.

중국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은 리 총리의 사진을 퍼 나르면서 '인민의 훌륭한 총리'라고 환호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 같으면 이런 모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인민일보, 신화통신, 중국중앙(CC)TV를 포함한 핵심 관영매체들이 리 총리의 수해 지역 방문 행보 소식을 일제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기, 관영 매체들이 안후이성 수해 지역 시찰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행보를 연일 열렬히 보도 중인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당내 권력 투쟁설이 다시 제기되는 모습이다.

(서울=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충칭시 수해 지역의 가게를 방문해 피해 상인을 격려하고 있다. 2020.8.23 photo@yna.co.kr (끝)

◇ 사라진 리커창 보도…권력 이상 징후인가

(서울=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20일 충칭시의 범람한 강을 둘러보고 있다. 리 총리의 오른쪽으로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당서기의 모습이 보인다. 2020.8.23 photo@yna.co.kr (끝)

23일 중국 국무원이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인 정부망(政府網)에는 지난 20일부터 리 총리의 충칭행 소식과 함께 여러 장의 현장 사진이 공개됐다.

리 총리는 바닥에 진흙이 두껍게 쌓인 수몰 지역을 찾아가 주민들을 위로하는 한편 현지 중소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이들의 어려움을 직접 청취했다.

하지만 신화사 등 '3대 관영 매체'를 포함한 대부분 관영 매체는 이런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리커창 총리가 20일 충칭 수해 지역을 방문해 재해 상황을 점검했는데도 인민일보, CCTV, 신화통신이 현재까지 일절 보도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라며 "베이다이허 회의 이후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설이 재점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서는 최고위급 지도자들에 관한 보도가 사라지거나 지연되는 현상이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차기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당내 권력 투쟁이 치열하던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 주석 시절,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의 동정 보도가 관행보다 하루나 이틀씩 더 늦어지더니 그가 끝내 낙마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이번 리 총리의 수해 현장 방문 보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낙마 가능성을 바로 속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가 실질적으로 와해하고 권력이 시 주석 1인에게 완전히 쏠린 상황에서 거의 동시에 이뤄진 최고위 지도자들의 수해 현장 방문 보도가 '1인자'인 시 주석 위주로 이뤄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또 정부망이 공개한 사진들을 보면, 리 총리의 이번 충칭시 방문 과정에서 시 주석의 측근이자 유력한 차기 최고 지도자 후보군에 속한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가 '정상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 '소외된 총리' 리커창…갈등설에 지속 노출

그럼에도 최근 중화권에서는 시 주석과 리 총리의 '권력 투쟁설', '불화설'이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모습이다. 리 총리의 낙마 같은 극단적 상황을 상정하지는 않더라도 리 총리가 권부 중심에서 소외되는 흐름은 비교적 선명해 보인다는 평가다.

실제로 시 주석 집권기 내내 리 총리는 시 주석에게 권한을 계속 내주면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이 현대 집단지도 체제가 자리 잡은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 시절에는 총리가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한 내치를 책임지는 자리로 인식됐지만 시 주석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모든 정책 결정 권한이 최고 지도자와 그 측근들에게로 쏠리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6월 리 총리는 코로나19 충격으로 어려움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단속 완화를 통해 노점상을 활성화하자고 주창하고 나서 중국 각 지역에서 지방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노점 바람'이 뜨겁게 일었다.

그러나 중국 관영 매체들이 돌연 노점 활성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노점 경제'는 흐지부지됐고, 이를 주창했던 리 총리는 사실상 공개적인 수모를 당한 꼴이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기자회견에서 리 총리가 말한 '6억 빈곤설'도 당내 불화설과 맞물려 크게 주목받았다.

당시 리 총리는 폐막식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지적하며 "6억 명의 월수입은 겨우 1천 위안(약 17만원)밖에 안 되며, 1천 위안으로는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토로했다.

대외에 공개되지 않던 자국의 '치부'를 드러낸 리 총리의 발언은 시 주석이 선전해온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 건설'에 대한 정면 반박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에서는 1년에 단 한 번 총리가 중국 안팎에 TV로 생방송되는 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을 통해 '검열'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날 그가 작심하고 이런 발언을 했다는 관측에 힘이 실렸다.
  
후진타오 퇴장, 시진핑 계획?…“절대권력 드러낸 상징적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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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习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아시아 순방이 끝났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게 중국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특히 미국 주류 매체들은 자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결과는 폄하하면서도 시 주석의 성과는 높게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이 시 주석을 빛나게 했다"라고까지 평했다. 이 같은 시 주석의 아시아 순방에서 자리에 없어 더욱 주목받은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의 '3 책사 불리는 왕후닝(王沪宁)이  주인공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호에서 이번  주석의 아시아 순방 일정 곳곳에 왕후닝의 흔적이 있다며 왕후닝이 배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각본 그대로 진행됐다는 것을 느낄  있었다"라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4일 자 지면을 크게 할애해  63세의 왕후닝 이력과 생각을 상세히 소개했다.  가운데는 우리 역시 주목할 대목이 적지 않다.

먼저 왕후닝의 근본적 생각을 미국 중국 연구 기관들과 주변인들을 취재해 전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왕후닝은 일찍이 80년대 미국을 두 차례 방문했었다. 당시는 그가 마르크스 주의를 공부한  서방 정치사상을 공부해 나이 30세에 상하이(上海) 푸단(复旦) 대 교수가  뒤였다.  왕후닝의 미국 방문 당시 가졌던 생각을 훗날 미국이 미국을 반대한다  속에 남겼다. 그는 그때 이미 미국은 중국이 쫓아갈 모델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뉴욕타임스가 그의 제자 등을 취재한 결과, 당시 왕후닝은 이미  서구 현대화는 물질적 풍요는 가져다줄  있지만, 인격의 품위를 높여주지는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80년대 말 상하이에서 ‘신권위주의’를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왕후닝은 법학과 사상 전공의 이론가답게 논변에 뛰어났다. 한 번은 그가 그의 대학 제자들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열린 논변 대회에 참여해 대만 대표를 5 대 0의 점수로 누르고 완승을  적이 있다. 당시 논쟁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서로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왕후닝의 학생들은 성악설을 논증했다. 당시 그는 회초리를 상징적으로 교단에 세워놓고 학생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그가 학생들을 때린 적은 없다는  그의 제자들의 회고다.
중국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개혁개방과 함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서 중국 발전의 답을 찾을  왕후닝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고 한다. 중국은 보다 강력한 지도력이 있어야 현대화를 더욱 효율적으로 이룰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 민주주의는 현대화를 이루고 나서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왕후닝의  권위주의 사상이다.
그는 89 중국 천안문 사태를 앞두고 베이징(北京)과 상하이에서 번진 자유주의 운동에 거리를 둔다. 천안문 사태 직후 장쩌민(江泽民) 당시 상하이 당서기에게 발탁돼 정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주석과 함께 북경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중앙정책 연구실 주임으로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2002   주석이 물러나고 후진타오(胡锦涛)  주석 밑에서도 국가 정책 수립과 관련한 일을 맡았다. 중앙정책 연구실 주임을 2대에 걸쳐 맡은 것이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의 시대를 맞아 왕후닝이 역할을 더욱 두드러졌다. 신화통신의  주석 사진마저도 왕의 허가를 받은  찍었고, 발표됐다.
왕은 원칙에 대단히 철저한 인물이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일을   학자 시절 알던 미국의 친구들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2015 미국 국무원에서 시진핑 주석을 위해  오찬 연회에서 왕후닝은 이전부터  알고 있던 당시 미국 국가 안전 위원회 중국 담당 사무를 보고 있던 리버탈(Kenneth G. Liberthal) 만난다. 리버탈이 반가워하며 중국에서 가서 한번 보자 인사를 하니, 왕은 지금은 내가 중앙에서 일을  만나기 어렵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시진핑의 중국이 어디로 갈지,  답은 왕후닝에게 달렸다는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중. 잘. 알. 미디어 해동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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