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재정과 금융 근대화 촉발한 러·일전쟁 by 한국재정연구원

 

 

2018년 글. HSBC와 로스차일드, 쉬프를 언급한것은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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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1897년. 우연찮게도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전격적으로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1월 러시아가 금본위제를 시행한데 이어 10월에 일본이 ‘화폐법’을 제정하면서 곧바로 뒤를 따른 것이다.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금본위제를 받아들인 것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선 거액의 자금이 드는데,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운영 중이던 금본위제에 들어가는 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금본위제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기본조건이자, 선진국의 자격을 인정받은 ‘인장’ 같은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금본위제를 도입하며 전쟁을 결심한지 7년 뒤 발발한 두 나라간 전쟁(러·일전쟁)은 근대 재정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경우엔 현대적 의미의 국가의 성립에도 큰 역할을 맡기도 했다.
러시아와 일본 양국 중에서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가던 일본 재정의 발전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893년 10월 마쓰가타 마사요시 일본 총리는 금본위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로 ‘화폐제도 조사회’를 설치했다. 조사회에는 관계·재계·학계·정계 관계자 20명이 참여했다. 영국 유학파로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자 앨프레드 마셜을 사사했던 소에다 주이치, 통계학자 호소가와에 유지로, 재무성 관리 및 미쓰이은행 간부를 지낸 하야가와 센키치로 등이 조사회 멤버였다.
당초 은본위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장이었던 소노다 고키치가 “장래를 위해선 금본위제를 도입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 뒤, 격론 끝 표결을 통해 8 대 7로 금본위제 도입이 결정됐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천 년 가까이 은화경제권이 작동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으로선 은본위제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정계와 재계 실력자들이 금본위제 도입을 반대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도입이 결정된 금본위제는 일본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글로벌 스탠더드’인 금본위제 도입 결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지급한 배상금을 영국 런던에서 파운드화로 수령했고, 영국 내 은행에 이를 예치했다.
일본이 해외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것도 용이해졌다. 1897년 일본은행은 홍콩상하이은행과 요코하마정금은행 등의 신디케이트를 통해 런던에서 군사공채 4,300만 엔어치를 발행했다. 1899년에는 9,763만 엔이 넘는 국채를 발행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바탕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같은 아직 ‘전초전’에 불과했다. 일본의 국채 발행이 본격화되고, 일본의 재정규모가 확충된 것은 러·일전쟁 때부터다.
첫 단추를 꿴 것은 영·일 동맹이었다. 19세기 세계 최강국 영국이 ‘영광스러운 고립’을 포기하고 선택한 최초의 동맹국은 뜻밖에도 극동의 일본이었는데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영·일 동맹’이 선포된 것은 재정사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영·일 동맹은 한 해 전

인 1901년 주영 독일대사였던 헤르만 폰 에크하르트슈타인 남작이 세계적으로 팽창하던 당대의 ‘주요 2개국(G2)’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독·일 동맹’을 제안한 게 시초였다. 일본 내에선 러시아와 직접 맞서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까닭에 영국과의 동맹 체결에 부정적 인식이 적지 않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제안자였던 독일이 빠진 채 일본이 영국의 파트너로 간택됐지만 일본은 당대의 최강국이자, 첨단 금융선진국이었던 영국과 손을 잡으면서 대외 정책에서도 공세적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노·불 동맹을 맺고 유럽대륙에서 영국을 위협하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일본이 한나라 이상의 국가와 전쟁을 할 경우 지원할 것'이라는 입장을 공식화해서 러시아의 동맹국들이 극동의 정세변화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공개경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일 동맹 체결 이후 세계사의 흐름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북해와 발칸반도,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 대영제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큰 그림'에 따라 영국은 일본과 손을 잡았다. 영국이 일본에 제공한 군함과 화약, 석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수집해 해저 케이블로 전달한 군사정보들이 일본과 아시아 침략에 한몫했다.
영·일 동맹을 맺은 덕에 일본은 전비 마련 과정에서도 영국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물론 당시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의 영향으로 재정 부담을 다 벗어나지 못한 상태여서 기대에 못 미쳤던 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영국정부가 일본에 보증을 서면서 국채 발행을 적극 지원했고, 이것이 일본의 숨통을 틔게 했다.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은 영·일 동맹을 기반으로 런던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했고, 러시아는 노·불 동맹을 맺었던 관계로 파리에서 국채를 발행했다.
일본은 전쟁 중에 4회, 전쟁이 끝난 후에 2회에 걸쳐 총 1억 3,000만 파운드 규모의 국채를 발행했다. 1~3회 국채발행은 영국과 미국 금융시장에서 이뤄졌다. 당시 일본은행 부총재였던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며 자금을 끌어 모았다.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던 러시아에 반감을 지녔던 로스차일드와 제이콥 쉬프 등 영·미 유대계 자본가들의 협력도 한몫했다. 4회 때에는 독일이 추가로 국채발행에 참여했다.

1~4회 국채 발행에 총 8,200만 파운드어치 일본 국채가 팔렸다. 전후 진행된 5회 국채 발행부터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 시장에서 채권을 동시에 발행했다. 추가로 4,800만 파운드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작업은 세계 최초로 대규모 국제협조 자금조달의 사례가 됐다. 러·일 전쟁은 일본이 국제 자본시장에 데뷔하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국채 가격 변동도 드라마틱했다. 1904년 2월 전쟁이 발발하자 양국 국채금리가 출렁였다. 일본국채 금리는 1904년 3~5월경 연 6.5% 근접할 수준으로 올랐다. 당초 일본이 ‘거인’ 러시아에 게임 상대가 못된다고 평가 받았던 만큼, 일본국채가 대량으로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러시아 국채와 일본 국채간 금리 스프레드가 일순간 2.23%포인트로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전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되자 시장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1904년 7월~1905년 1월경이 되면 일본 국채금리는 연5~5.5% 수준을 유지했다. 이후 전쟁에서 승세가 굳어지자 연 4.5% 수준을 오르내렸다. 반면 러시아 국채는 러·일 전쟁 기간 시종일관 연4~4.5% 사이를 오갔다. 패전이 유력해지면서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금리는 다소 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 국채는 금리 상으론 ‘안정적(?)’인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다소 달랐다. 뤼순이 함락되는 등 러시아 측 전세가 악화되고, 러시아 본토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면서 런던 금융시장에선 프랑스 혁명기에 준하는 러시아 국채 ‘디폴트’ 가능성마저 고려됐다.
동맹관계 등으로 러시아에 호의적이던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마저 러시아 국채 매입에 주저하면서 러시아 국채발행은 점점 어려워졌다. 마침내 러시아의 비장의 카드였던 ‘발트함대’마저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전비조달 작업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됐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전쟁을 끝마친 뒤에도 정부는 ‘돈과의 전쟁’을 계속 이어가야 했다. 전쟁 수행을 위한 비상 군사비는 1904년 경상예산의 7배에 해당하는 19억 엔에 이르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인상됐고, 일반 백성들은 전비 마련에 쓰인 공채나 외국차관의 이자를 갚아야 했다. 전쟁 개시 전 5,600만 엔이었던 공채 잔고도 1907년 22억 7,000만 엔으로 껑충 뛰었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배상금도 받지 못하게 되자 국고 부담으로 갚아야 할 액수가 국가예산의 약 30%에 달했다.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 후에도 높은 수준으로 유지했던 군사비 탓에 국가재정에 가해지는 압박이 대단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 중인 1905년 1월 상속세를 제정해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전격적으로 소득세를 인상했다. 담배(1904년)와 소금(1905년)을 전매제도로 운영해 세입증가를 도모했다(담배 전매는 1985년, 소금 전매는 1997년까지 지속됐다). 영업세와 주세, 설탕소비세, 간장세, 등록세, 각종 거래세, 수렵면허세, 광업세, 인지세 등도 이 시기에 신설되거나 인상됐다. 일본은 결국 1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쟁 특수’에 힘입어서야 국가가 재정난을 벗어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러·일 전쟁 이후 집행된 재정 지출이 이후 민간금융 시장을 성장시키고, 산업자본 축적의 기반을 정비하는 과정이 되기도 했다.

러·일전쟁은 산업혁명 이후 벌어진 최초의 기계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러시아 양국 모두 소모될 전비를 과소평가 했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전과는 한 단계 달라진 재정 ‘수입’과 ‘지출’을 경험하며 국가의 ‘수준’과 ‘체급’을 한 단계 키워야만 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이같은 시대 과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매우 큰 모험을 감내해야만 했지만 말이다.
미국과 유렵의 국제정치학과 역사사회학 분야 연구에서는 근세기(1603~1868년) 이후 서구 세계에서 수많은 정치체가 상호간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제도, 조세제도, 관료 제도를 정비해 인적·물적 동원이 가능한 근대국가가 형성됐다고 본다. “모든 국가기구는 근본적으로 군사 기구며, 전쟁을 위한 것이다”라는 19세기~20세기 초 독일 역사학자 오토 힌체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14세기 이후 유럽국가에서 공성 기술과 대포 등 군사기술이 발전하고, 상비군이 대두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졌고 이에 따라 중앙정부의 재정과 군사비 지출이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서구 국민국가가 형성됐다는 시각이다. 대규모 군대의 보유와 전쟁 수행 과정은 관료제와 재정제도를 포함하는 강력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지닌 국가제도를 전제로 했다. 조세기구, 경찰, 법원, 상비군, 관료제도, 대의 기구 등은 ‘전쟁의 자식’으로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규모로 전쟁자원을 동원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확충해 나갔다는 측면에서 러·일 전쟁은 이 같은 서구적 국가형성 스토리를 동아시아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기도 하다. 러·일 전쟁은 일본의 대외 침략 뿐 아니라 일본 근대국가의 완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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