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의 queer한 측면에 대한 탐구


1903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토 바이닝거(1880~1903)가 「성과 성격」을 출판하고 그해 베토벤이 죽은 집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쏴 자살하였다. "천재가 아니면 죽음을!"[29]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인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가 바이닝거의 주저 「성과 성격」을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책을 탐독했으며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시신이 운구될 때 그 뒤를 따라갔고 평생 그의 추종자로 남았다.[30] 「성과 성격」의 내용은 비장하리만치 과장된 여성의 결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금욕을 통한 인류의 멸종(...)의 주장이다.[31] 여담이지만 바이닝거는 법실증주의를 만든 한스 켈젠의 친구이기도 했다.[3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학창시절에 <<성과 성격>>에 깊은감명을 받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중에 하나로 꼽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를 '위대한 천재(a great genius)'라고 회상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바이닝거에 대한 깊은 찬사는, 바이닝거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인 불일치와 연결되어있다. 그는 G.E.Moore에게 쓴 편지에서 "바이닝거의 의견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위대함은 우리가 반대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위대한 실수가 그의 위대함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성과 성격>> 전체에 부정기호(negation sign)을 붙인다면, 중요한 진실을 얻는다고 썼다.

바이닝거가 제시한 현대문명의 타락이라는 주제나, 완전한 자의 천재에 대한 의무라는 주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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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형 루돌프(1881~1904): 배우로서 살기를 희망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집에서 나와 베를린에서 살고 있었다. 1904년, 베를린의 한 술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한 뒤 그것을 들으며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

유서에는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타락한 성격'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고 적혀 있다. 동성연애자 해방 운동을 하던 단체에 가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아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성향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타락한 성격'은 그것과 연관 지어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루돌프도 아버지의 강압에 적잖이 힘들어 했음에 분명하나 그것이 직접적인 자살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19년 10월, 빈의 프라터 거리에서 동성애로 인해 곤경에 빠지다.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 그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매주 며칠 동안 그는 방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프라터 공원에 갔다. 친구에게 말한 대로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악마에 홀린 채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도심 부근의 바에 드나드는 세련된 외모의 청년들보다 프라터 공원의 산책길과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칠고 솔직한 타입의 동성애 청년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빈에 사는 동안이나 빈을 방문했을 때마다 서둘러 찾아간 곳은 바로 이 특별한 장소였다. ……나중에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는 때때로 그의 처분에 자신들을 맡길 준비가 된 멋지고 지적인 청년들보다는 런던 술집의 거친 젊은이들을 선호했다."[49] 이 시기 젊은 이성애자인 자동차 기계공 아르비트 셰그렌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 그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지만 셰그렌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을 사랑하게 되어 아침 드라마 1920년 4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에 빠진 이 기간을 일컬어 "쓸모없는 에피소드들로 가득찬 내 삶을 무너뜨리는 기간"이라고 하지만 이 기간이야말로 그가 오토 바이닝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었던 해방구가 아니었나 바틀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50]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셋째 누나 그레틀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주로 천장의 높이, 창문, 문, 자물쇠, 라디에이터, 벽의 디자인 등을 맡았다. 건축가 파울 엥겔만과 같이 만들었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마르그리트 레스핑거라는 여성과 만나 1931년까지 사귄다. 그러나 둘은 성격 차이가 있었고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엄밀히 말해 게이가 아니라 양성애자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지난밤에 자위를 했다. 양심의 가책. 그러나 또한 난 너무 약해서 그 충동과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는 확신. 만일 그 충동과 유혹, 그리고 그것들을 수반하는 이미지들이, 내가 다른 것에서 피난처를 마련할 수 없을 때, 내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겨우 어제 저녁 나는 깨끗한 인생을 살아갈 필요에 대해서 숙고했다(마르그리트와 프랜시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2일]" (평전,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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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2/05/16/how-queer-was-ludwig-wittgenstein

Perloff is, of course, talking here about queerness in the sexual sense. The Wittgenstein of these notebooks hints at an earthier sexuality. At the crudest level, they painstakingly record the occasions on which Wittgenstein masturbates: “Feeling more erotic than before. Masturbated again today.” “Today I fought for a long time against depression, then for the first time in ages masturbated.” “At night masturbated again (while half asleep). This is happening because I am getting so little, almost no exercise.” There is no indication of how he feels about the activity, or of the fantasies, if any, that might have fed it.

Every now and then, Wittgenstein notes that he has just heard from his beloved David Pinsent, who was an undergraduate at Trinity College, Cambridge, when they met, in 1912: “Wrote to David. Already longing for a letter from him so as not to lose the feeling of contact with my previous life.” “Also, wrote a card to dear David. May heaven protect him and maintain our friendship!” “A letter from David!! I kissed it.” Even in code, Pinsent remains a “friend,” albeit a friend whose letters one ki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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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벤 리처즈와 사랑에 빠지다. 물론 그도 남자다.

1946년 10월 26일, 전설의 탄생. 칼 포퍼와의 도덕학 클럽에서의 패싸움 논쟁. 논쟁 전, 비트겐슈타인은 포퍼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64]였고, 더군다나 벤 리처즈와의 관계로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반면, 포퍼는 10년을 기다린 만남이었다. 논쟁의 시작은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한 몇 가지 연설 규칙에 대해 비웃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규칙은 초청장에 명시되어 있었는데, "짧은 발표문, 서론은 간단하게, 몇 개의 철학적 수수께끼를 제시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초청장은 자신이 비서(와스피 히잡)에게 시킨 일이며 비서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변호했다.

 

 https://wittgenstein-initiative.com/on-the-correspondence-ludwig-wittgenstein-ben-richards/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_Skinner

 

금욕적 삶을 택한 비트겐슈타인 41살엔 21살 스키너에게
58살엔 19살의 의대생에게 빠져 ‘위대한 선물’을 어쩔줄 몰라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56967.html

 

1946년, 분단의 조짐이 역력했던 한반도에서 몽양과 우사 등이 좌우합작에 분투하고 있던 때, 58세의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의대 학부생이었던 벤 리처드(Ben Richards)와 생애 마지막 사랑의 합작에 열심이었다. 스스로 벤과의 사랑을 ‘위대하고 희귀한 선물’이며,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이라고 표현할 정도였고, 조만간 그를 잃게 될 것이라는 번민에 빠지곤 했다: “아, 도착하지도 않는 편지를 계속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당시 벤은 19세, 둘의 나이 차이는 거의 40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벤과 간헐적으로 동거에 들어가는 등, 그 마지막 염화(艶火)에 제법 열정적이었고, 이것은 1951년까지 큰 곡절없이 계속된다. 1951년 3월 1일, 벤은 비트겐슈타인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는 안스콤(E. Anscombe), 스마이시스(Y. Smythies), 드루리(M. Drury) 등도 합석했다. 그것은! 철학사의 뒤안길에서 엿볼 수 있는 참으로 묘한 자리였을 것이다.


21세의 남학생 프란시스 스키너(Francis Skinner)와 사랑에 빠진 것은 1930년, 비트겐슈타인의 나이 41세 되던 해였다. 아카데미아의 속물주의를 염오했던 그는 젊은 프란시스에게서 어린애 같은 순박함과 예리한 두뇌 그리고 맹목적인 헌신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그의 전기철학으로 대변되는 지적 염결주의와 쾌락불안의 대체물을 희구했다. 스키너와의 성관계를 언급한 유일한 경우에서 그 행위의 자괴감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성벽과 기질, 취향과 철학적 태도로부터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어쩌면, 그에게 여성혐오가 보다 노골화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노릇이겠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고, 수도자와 같은 여건 속에서 신비주의자의 아우라를 달고 다녔으며, 20세기의 볼테르였고 자유연애주의자였던 스승 러셀에게 종교를 권유하기조차 했던 비트겐슈타인이 금욕주의적 외양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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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queer, and his notions seemed to me odd,” Russell says, surely using queer in its archaic sense. (Though others do apply; in 1993, Derek Jarman made a gay-themed biographical film about the philosopher.) “For a whole term, I could not make up my mind whether he was a man of genius or merely an eccentric.” But at the end of this term, the young Wittgenstein brought to his instructor a pressing question: “Will you please tell me whether I am a complete idiot or not? If I am a complete idiot, I shall become an aeronaut; but, if not, I shall become a philosopher.” Russell issued a challenge to write about a philosophical subject over the school break, and Wittgenstein handed him the result as soon as the next term began. “After reading only one sentence,” recalls Russell, “I said to him, “No, you must not become an aeronaut.” And he didn’t.” One imagines his unrealized career in aeronautics wouldn’t have given us quite so much to 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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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snyc.com/season/Ludwig_Bertie.htm
"Ludwig and Bertie" traces the entwined lives and philosophies of these two avatars of modernism from their first meeting at Cambridge in 1911, when Russell was nearly 40 and Wittgenstein was 21, to Wittgenstein's death in 1951. A play on such characters might seem to be a play of philosophical ideas, but this one is rooted in a pointedly personal drama that plays out at many levels. Russell is heterosexual, hedonistic and agnostic; Wittgenstein is puritanical, gay and Jewish. Russell is an imprisoned pacifist; Wittgenstein a decorated combat soldier. Wittgenstein is intensely religious; Russell mocks religion from first to last. Academically, they start out together as proponents of a modernism rooted in logic, mathematics and science. Wittgenstein creates a modernist book, and then designs a modernist house, each with as many sharp angles as a painting by Mondrian. But it all goes wrong in 1926, when Wittgenstein wakes up to a post-modern, post-truth world. Russell tries desperately to hold on to modernism, but Wittgenstein supplants him at Oxford, Cambridge and around the world.

We ride along as their ideas evolve, including Wittgenstein's notion that the meaning of a proposition varies with its use. Meanings, you see, are only rules--and when you get down to it, there are no rules for rules. With this logic Wittgenstein drives Russell nearly mad.

Ludwig regards Bertie as his "mental father," but their relationship has elements of rivalry. At one point, Russel declares, "Damn it, I will never catch up with him." Their clashes take many comic turns, as when Russell is unable to prove to Wittgenstein that there is no rhinoceros in the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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