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로스차일드-베른하르트 공-다나카 가쿠에이를 통째로 날려버린 록히드 사건의 배후였던 헨리 키신저와 데이비드 록펠러 (feat. 문명자)
키신저 국무장관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후일담 하나. 76년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에서 키신저 국무장관과 수행기자단이 비공식 회견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당시는 록히드 스캔들에 돌연 휘말린 일본 다나카 수상의 운명에 외신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기자들은 키신저를 물고 늘어졌다.
"다나카는 오래 갈 것 같은가?"
키신저는 아주 오만한 자세로 답했다.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키신저의 말은 계속됐다.
-"그는 매우 건방지다. 미국을 뒤따라오면서 일.중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미국을 앞질러 일.중 관계를 개선했다."
73년 미국은 미.중 관계를 정상화 했지만 대만과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중국에 대한 지렛대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나 미.중 관계 정상화 작업을 예의 주시하던 일본은 황소 머리 위에 올라탄 쥐가 천릿길을 다 가자마자 목표점에 먼저 뛰어내린다는 식으로 대만과 단교하면서 일.중 관계를 정상화해 버렸다. 다나카가 건방지다는 키신저의 말은 바로 그 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키신저에게 물었다.
"헨리, 록히드 스캔들도 당신이 벌인 것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 때 그의 답변하던 표정과 억양을 잊을 수가 없다.
-"오브 코오스(그거야 물론이지)."
일본 국회가 떠나갈 듯 시끄러웠던 록히드 사건 정보는 먼저 미국 의회에서 터져 나왔다. 록히드사로부터 다나카가 받은 돈은 불과 3백만 불(?) 평소 일본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규모로 보면 그리 대단한 액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수뢰가 사실로 확인되고 언론과 국회가 들고 나서면 문제가 된다. 키신저는 다나카 문제에 대해 마치 재벌그룹의 오너 회장이 월급쟁이 사장 하나 잘랐다는 투로 말했다. 결국 그 후 다나카는 사임했고 후쿠다 내각이 출범했다.
나는 1992년 일본 정가에서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사태를 목격했다 90년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이 사회당 다나베 의원과 함께 조.일 수교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그 때 다나베 의원은 먼저 귀국하고 가네마루만 하루 더 머물며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그가 도쿄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와 장어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조.일 수교 문제는 잘 되어 갈 것 같습니까?"
-"그 문제는 정치생명을 걸고 내가 해결할 것입니다. 나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김 주석을 만나 보니 인상이 어떻습디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김 주석에게 당시 간첩선으로 나포돼 북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후지산마루 호 선장과 선원들의 송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들 선원 가족들의 정상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김 주석이 말했습니다. '가네마루 선생, 걱정 마시오. 법도 인간이 만든 겁니다. 선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려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북조선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후지산마루 선장과 선원들이 일본으로 귀환 조치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조.일 수교 문제를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가네마루 신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쇼크사였다. 가네마루의 정치자금 문제를 집요하게 걸고넘어진 세력, 나아가 그 집에 있던 금괴 문제까지 적나라하게 들고 나와 가네마루를 쇼크사하게 만든 배후 세력은 누구인가. 나는 그 때 20년 전 록히드 스캔들로 다나카를 실각시켰던 키신저 국무장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92년 당시 미국의 목표는 북핵 동결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 몇 년 전에 찍어 두었던 인공위성 사진을 가지고 북한을 위협하고 한.미.일 공조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가네마루의 조.일 수교 추진활동이 이 같은 스케줄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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