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슐 아이젠버그-포항제철, 메나도)과 데이비드 록펠러 계열(CIA, 이후락, 스위스, 칼텍스, 유니언 오일, 걸프 오일, 카길), 그리고 국내 재벌들(호남정유-SK, 럭키금성-LG, 한화-이후락)은 어떻게 박정희를 도와줬는가? (feat. 문명자)

 
수많은 증인들이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 중에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들 이동훈, 사위 정화섭,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참사관 김상근, 박정희가 기용한 로비스트 박동선. 김한조, 국제 석유재벌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사 대표 등 박정희의 비자금 조성과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그런데 5월 16일 열린 이 청문회에서 석유재벌 걸프는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 되었다" 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Gulf Oil was a major global oil company in operation from 1901 to 1985.[1] The eighth-largest American manufacturing company in 1941 and the ninth-largest in 1979, Gulf Oil was one of the so-called Seven Sisters oil companies. Prior to its merger with Standard Oil of California, Gulf was one of the chief instruments of the Mellon family fortune; both Gulf and Mellon Financial had their headquarters in Pittsburgh, Pennsylvania, with Gulf's headquarters, the Gulf Tower, being Pittsburgh's tallest building until the completion of the U.S. Steel Tower.

Gulf Oil Corporation (GOC) ceased to exist as an independent company in 1985, when it merged with Standard Oil of California (SOCAL), with both re-branding as Chevron in the United States. Gulf Canada, Gulf's main Canadian subsidiary, was sold the same year with retail outlets to Ultramar and Petro-Canada and what became Gulf Canada Resources to Olympia & York.[2][3] However, the Gulf brand name and a number of the constituent business divisions of GOC survived. Gulf has experienced a significant revival since 1990, emerging as a flexible network of allied business interests based on partnerships, franchises and agencies.

In 1934, the Kuwait Oil Company (KOC) was formed as a joint venture by British Petroleum, then called the Anglo-Persian Oil Company (APOC), and Gulf. Both APOC and Gulf held equal shares in the venture.[19] KOC pioneered the exploration for oil in Kuwait during the late 1930s. Oil was discovered at Burgan in 1938, but it was not until 1946 that the first crude oil was shipped. Oil production started from Rawdhatain in 1955 and Minagish in 1959. KOC started gas production in 1964. It was the cheap oil and fuel being shipped from Kuwait that formed the economic basis for Gulf's diverse petroleum sector operations in Europe, the Mediterranean, Africa, and the Indian subcontinent. These last operations were coordinated by Gulf Oil Company, Eastern Hemisphere Ltd. (GOCEH) from their offices at 2 Portman Street in London W1. While serving as General Manager and Vice President of Gulf Oil, Willard F. Jones facilitated the expansion of crude oil import from Kuwait, a nation that was - at the time - a yet incipient supply region to the United States. This expansion program implemented by Robert E. Garret and Jones consisted of construction of a fleet of supertankers and was meant to "result in a sharp increase in the processing of crude oil and various petroleum products at a time when the domestic demand for (such) products (was) at an unprecedented peak."[20]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가 기용한 김성곤. 이후락. 김형욱 3인은 정치자금 조달체계에서 각기 다른 책임을 맡았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은 수표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성곤으로부터 그 수표들을 건네받아 현금화하는 동시에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하며, 비서실장 이후락은 그 자금들을 스위스은행의 비밀구좌에 예치하고 관리하였다. 이런 '역할분담' 체계에서 66년 공화당 재정위원장에 임명된 김성곤이 헌납의 주요 창구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었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정치자금 비밀 조달 체계는 67년 대선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67년 대통령 선거는 당시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선거로 평가되었다. 67년 선거에서 미국의 일부 대기업들이 박 정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은 76년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상.하원 윤리위원회와 프레이져소위원회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다.

이 같은 정치자금 수수와 부패 문제는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71년 선거에 박정희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공화당은 새 후보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극심한 분열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것은 야당의 승리를 의미했다. 정권을 잃는다면 공화당 지도부는 정치자금과 부정부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위험이었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과 공화당 의장을 지낸 김종필 양인은 모두 국회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형욱과 이후락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박정희는 김종필과 김성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김형욱과 이후락을 3선 개헌 후 사임시킨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이와 같은 번거로움이 유신이라는 절대권력을 꿈꾸게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정치자금 비밀 조달 체계는 67년 대선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67년 대통령 선거는 당시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선거로 평가되었다. 67년 선거에서 미국의 일부 대기업들이 박 정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은 76년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상.하원 윤리위원회와 프레이져소위원회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다.

이 같은 정치자금 수수와 부패 문제는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71년 선거에 박정희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공화당은 새 후보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극심한 분열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것은 야당의 승리를 의미했다. 정권을 잃는다면 공화당 지도부는 정치자금과 부정부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위험이었다.

67년 선거 직후, 3선개헌 문제를 놓고 김종필과 박 정권의 다른 중간 보스들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김종필과 김성곤은 3선개헌을 반대했고, 김형욱과 이후락은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들의 찬반입장은 각자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퇴임이후 대통령직을 계승할 사람은 자기라는 개인적 야심에 차 있었다. 그러니 박정희의 3선 기도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김성곤은 자신의 기업 활동과 축재를 방해하는 김형욱과 이후락을 밀어내기 위해 3선개헌에 반대했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과 공화당 의장을 지낸 김종필 양인은 모두 국회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형욱과 이후락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박정희는 김종필과 김성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김형욱과 이후락을 3선 개헌 후 사임시킨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이와 같은 번거로움이 유신이라는 절대권력을 꿈꾸게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69년 사임한 후에도 이후락은 정치자금 모금책으로 계속 활동 하다가 70년 12월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다시 기용 되었다. 그러나 김형욱의 정치적 위상과 자금모금책으로서의 역할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불안을 느낀 김형욱은 미국으로 탈출한 73년까지 부정축재한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리는 한국을 방문한 한 프레이저위원회 조사 위원과의 인터뷰에서 "70년 이후락, 김성곤, 김형욱이 각각 1억 불 이상을 축재했다"고 증언했다. 훗날 김형욱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의 증언에서 "김성곤이 모금한 정치자금 중에서 75만 불을 내가 개인 용도로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김성곤이 박 대통령, 육여사,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에게도 그런 자금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이 모금한 자금은 대통령 개인 용도로 스위스은행 비밀구좌에 예치되었다. 이후락 외에 다른 측근들도 대통령에게 돈을 제공했다. 박정희는 그 돈의 일부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책상 뒤의 금고에 보관했다.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비밀구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프레이저위원회가 찾아낸 은행 기록과 이동훈(이후락의 아들)의 청문회 증언, 청와대 고위 측근의 증언들에 의해 명백히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프레이저청문회 증언에서 "스위스은행에 있는 돈을 비록 아버지(이후락)가 관리했지만, 그 돈은 아버지의 돈이 아니고 박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 자금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동훈은 "나도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일본 은행에 2백만 불을 예치했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박정희는 이 같은 비밀구좌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동훈은 "박 대통령은 여당 인사들뿐 아니라 야당 인사들에게도 돈을 주었다"고 했다. 코리아케이트에 대한 미국 행정부 보고서에는 "한국의 한 유력 기업가에 따르면 70년 당시, 거의 모든 야당 의원들이 박정희의 돈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동훈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그는 또한 "70년대 초반 박 대통령은 군부의 불복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요 군 지휘관들에게도 상당한 자금과 혜택을 주었다"고 했다.

박정희가 3선을 위해 출마한 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은 더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70년 6월 박정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에게 공화당에 10만 불씩을 기부할 수 있는 기업체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김성곤이 작성한 명단에는 럭키그룹, 현대건설, 삼성그룹과 김성곤의 쌍용그룹 등 한국 유수의 기업들이 포함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업 대표들 중 다수가 5.16 직후 부정축재자로 기소되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외국 기업들 역시 71년 선거를 위한 정치자금 조달에 이용되었다. 예컨대 걸프 사는 공화당에 1천만 불을 제공하도록 요청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3백만 불을 제공했다. 같은 석유재벌 칼텍스 사도 최소한 1백만 불을 제공했다. 미 행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다른 한국 대리인을 통해 청와대에 커미션으로 수백만 불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 중 1백만 불은 71년 선거 이전에 대리인의 이름으로 해외 계좌에 지불되었다.


코리아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미국쌀 수입에서 떨어지는 커미션이 미국의회에 대한 로비자금의 출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미국 의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박동선을 내세워 특정 미국 기업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국 정부가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의원들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을 지원함으로써 해당 의원을 친한파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미 외교 정책의 필요성]과 [한국의 대미 외교정책 계획]이란 두 개의 문서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문서들의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Ⅱ상.하원 의원의 이익증대를  통한 외교활동

A. 상.하원 선거구에 대한 지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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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투자 기업 원조
(a) 만일 하원 의원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이 한국 투자에 대한 이해관계를 암시하면 우리는 그 기업을 지원한다.

(b) 우리는 이미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대기업(걸프, 칼텍스, 아메리칸 에어라인,, 페어차일드)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 기업의 본부가 있는 지역 출신 하원 의원의 지지를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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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의 중정부장 재직시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 박동선과 슐 아이젠버그가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아이젠버그는 자유당 때부터 한국 재계에 깊숙이 침투해 온 이스라엘 출신 유태계 무기상이다. 그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 때 일본 가마쿠라 지방으로 피신했는데, 그 때 그를 구해 준 일본 여인과 결혼해 동양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당시절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차린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접근해 충주비료공장 건설권을 따내는 등 한국의 정.재계에 깊숙이 침투했고, 나아가 자유당에 3.15 부정선거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5.16 이후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컨소시엄을 형성할 때 한.일 간에 문제가 생기자 아이젠버그는 장기영을 통해 유럽 투자가들을 알선해 유럽 금융시장의 자금을 한국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미 대사인 필립 하비브는 미국 기업들과 뇌물 거래를 했던 아이젠버그의 전력을 들어 그와의 거래를 피하라고 경고했으나, 박정희는 73년 초, 한국 기업의 사업자금 조달처인 아이젠버그의 편의를 봐 주라고 한국 정부에 지시했다. 60년대 초 미국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실현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을 때 아이젠버그가 필요한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박정희의 지시로 한국 정부는 아이젠버그가 대리인으로 있던 캐나다의 캔두(CANDU) 핵원자로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덕분에 아이젠버그는 캔두 판매 커미션으로 2백만 불을 챙겼다. 김종필과 전 대통령 비서실장 민충식은 아이젠버그의 커미션에서 일부를 뇌물로 받았다. 그 후 캔두 판매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자체조사로 이 사실이 드러나 75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과 한국전력 사장이었던 민충식이 해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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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된 직후 박정희의 이른바 '가지치기'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73년 12월 3일 영국을 거쳐 바하마로 피신했다. 그 후 이후락은 형사처벌이나 기타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친필서신을 받은 후인 74년 2월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들 이동훈은 청문회 증언에서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해임된 것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중앙정보부의 부정부패 때문이 아니라, 커 가는 이후락 세력에 대한 박 대통령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락의 측근 중 한 사람이 모 요정에서 벌어진 기생파티에서 '이제 그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이후락이 그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에 의해 녹음되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고 말했다.


이동훈은 또한 "73년 이후락이 해임된 후 권력의 중심은 이동했지만 부패 관행은 계속되었다. 신임 신직수 부장에 의해 중앙정보부의 활동이 가차 없이 축소된 반면, 경호실의 비호 하에 부패는 지속되었다. 미 행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74년 5월까지 청와대측은 기업 활동에 개입한 박종규의 미심쩍은 행적에 대해 두 번이나 경고한 것으로 되어있다.

74년 8월 육여사가 피살된 후 박종규는 사임했다. 71년 오치성 항명 파동 이후 박정희로부터 버림받고 술로 날을 보내던 김성곤이 75년 말 사망했고, 비슷한 시기에 국무총리 김종필이 해임되었다. 이로써 이전 15년간 주요 정치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한 박 정권의 중간보스들은 모두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김종필은 여전히 막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캐두 원자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박정희 사이는 불화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후락의 경우는 달랐다. 78년 이동훈은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에서 "아버지는 74년 2월 귀국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시기는 청와대가 '권력과 부패의 구심점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보와 자료가 결국에는 청와대로 향했고, 이를 바탕으로 청와대가 모든 돈을 거두어들였다. 기업가들이 사업을 하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미 행정부 보고서는 "이 시기에 한국 정부는 하급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경제정책 결정과 그에 다른 정치자금의 청와대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78년에는 오직 박정희만이 한국 정부 내의 유일한 정책 결정자였다"고 평가했다.

프레이저소위원회는 미국 기업의 한국 정부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과 거래하는 1백 35개 미국 기업에 질의서를 보냈다. 그 중 1백10개의 기업들이 조사에 응했는데, 그 가운데 48개 기업이 한국과의 거래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문제가 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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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대통령 선거와 미국기업의 정치자금

미국 기업들은 소위원회에 대한 답변에서 "한국 정부인사 혹은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미국 기업을 정치자금원으로 간주하고 접근했다"고 밝혔다. 그들 한국인들은 공화당에 대한 직접적인 기부(야당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은 보고된 바 없었다)나 한국 정부의 관리. 대리인. 정치자금 모금책에 대한 자금제공이나 뇌물 공여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 기업이 한국 정부로부터 정치자금을 요구받을 때 한국 정부의 핵심인사로부터 직접 요구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후락만은 직접 두 미국 기업에 정치자금을 요구했고, 그 기업들은 모두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정치자금 모금책의 측근이 미국 기업에 접근했다. 상당수 기업들이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종필의 측근으로부터 자금을 요구받았다. 콜트(Colt)사는 71년 대통령 선거시, 박종규의 수석보좌관이었던 미키 김(Mickkey Kim, 김운용 IOC위원)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요청받았다. 김용운은 콜트 사 대표에게 "박종규가 나에게 자금을 요구하라고 지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 고문의 조언에 따라 콜트 사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또 다른 기업은 김동조 주미대사로부터 한 미국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에 자금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그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위원회가 미국 선거법에 따라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금 제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글라스 항공사(Douglas Aircraft)는 한국 정부로부터 항공기의 대한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부총리 장기영을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이 회사는 또 6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두 명의 한국 정부관리에게 7만 불 이상을 제공했는데, 이 돈은 공화당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프레이저소위원회와 행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71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미국 기업들은 공화당의 대리인이나 자신들의 사업 파트를 통해 총 8백 50만 불을 공화당에 제공했다. 8백 50만 불 중 걸프사가 3백만 불, 칼텍스가 4백만 불(1백만 불은 차관 조로 3백만 불은 선불 조로)을 한국 파트너를 통해 지불했으며, 세 개의 다른 미국 기업 한국 대리인들이 선거 3주 전쯤 총 1백 50만 불의 커미션을 받았는데 이 자금의 최종 수령자는 공화당인 것으로 보인다.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8% 미만의 표차로 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대규모 정치자금 제공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 기업이 제공한 정치자금이 71년 대통령 선거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8백 50만 불이 다른 자금원에서 나온 정치자금과 함께 대중에 살포되는 상황은 김대중과 박정희의 득표차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8백 50만 불이란 수치는 단지 프레이저소위원회가 확인할 수 있었던 액수일 따름이다. 예컨대 한미 합작회사의 한국 측이 공화당에 제공한 정치자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프레이저위원회나 미 행정부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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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이후락 관리 구좌에 정치자금 예치

 70년 10월 칼텍스의 한국 합작회사인 호남정유 사장 서정귀는 칼텍스측에 "공화당이 2백만 불의 정치자금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정귀는 "공화당이 69년 3선개헌 투표 때 들어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요구가 뉴욕의 칼텍스 본사에 전달되었으나 본사측은 "정치자금 제공은 회사 정책에 반하는 것"이라고 서울대표부에 통고했다. 그러자 호남정유 경영진은 1백만 불 상당의 자금을 원화로 공화당에 제공했다. 후에 칼텍스측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 내 정부 및 공적 관계에 대한 책임은 한국측이 맡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남정유의 자금제공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일 호남 정유가 공화당에 1백만 불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대략 50만 불이 배당금으로 분배되었을 것이다. 칼텍스 사는 계약상 어떠한 경우에도 첫 배당금 중 33만 불과 잔여 배당금 중 20%를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1백만 불 제공으로 칼텍스측은 총 36만 4천 불의 손해를 본 셈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그 액수를 칼텍스가 공화당에 제공한 간접적인 정치자금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71년 초 서정귀는 칼텍스측에 다시 한 번 "공화당이 다가오는 대선을 위한 정치자금 1백만 불 제공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서정귀는 "호남정유의 현금 유통 문제로 그 자금이 국외에서 달러화로 지불되어야 한다"고 못 박으면서 칼텍스측에 1백만 불의 대부를 요청했다. 그는 칼텍스측에 이 돈을 스위스은행에 있는 파나마 국적의 '아시아무역회사' 구좌에 이체시켜 달라고 했는데, 71년 3월 15일 이 돈이 이체되었다.

서정귀가 미국 기업으로 하여금 스위스은행에 정치자금을 예치하게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69년 9월, 걸프 사는 서정귀가 소유한 기업의 주식 2백만 불 어치를 매입한 후 그 대금 중 20만 불을 스위스은행 구좌에 서정귀 명의로 예치했다. 그런데 그 거래에서 서정귀가 입회한 가운데 이후락이 은행 신용카드에 서명했고, 이후 잔액명세서는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에게 우송 되었다. 20만 불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가 이 모든 은행기록을 찾아내 제시하자,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정화섭이 이후락을 위해 돈을 관리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호남정유는 72년 후반부터 74년 초까지 칼텍스가 호남정유로부터 구매한 연료용 기름값을 깍아 줌으로써 칼텍스에서 빌린 1백만 불을 갚았다. 호남정유는 그 금액에 대한 이자는 지급하지 않았다. 호남정유가 기름값을 깍아주지 않았더라면 호남정유 주주들에게 추가분으로 50만 불의 배당이 돌아갔을 것이고, 칼텍스측도 약 1백 68만 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텍스는 호남정유를 통해 70년과 71년 공화당에 적어도 50만 불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셈이다.
더욱이 70년 이래 두 번에 걸쳐 호남정유의 한국 주주들은 8백만 불에 달하는 선불중계료를 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구좌에 입금하도록 하는 계약에 합의했다.

이 자금은 한국 주주들의 배당권 감소와 호남정유의 칼텍스 지분 구매권의 양도를 보상하기 위해 지불된 것이었다. 칼텍스측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 "우리는 그 자금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어디에 쓰이는지를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텍스의 한국 파트너 호남정유가 70년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기업일 뿐 아니라 공화당에 대한 유력한 정치자금 제공 기업인 럭키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점만 봐도 사실은 명확하다. 더욱이 럭키그룹의 소유자인 구씨 형제 중 구태회는 공화당의 핵심지도부 중 일인이었다. 그는 70년부터 73년가지 공화당 당무위원이었고, 71년부터 72년까지 정책위원회 의장이었으며, 73년에는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이후 그는 유정회 정책위 의장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럭키그룹과 공화당의 이 같은 관계나 호남정유 서정귀가 69년 20만 불을 공화당에 제공한 사실로 볼 때,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8백만 불 중 상당 부분이 공화당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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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로가기 ]

"한국에서는 정치자금 헌납이 부도덕한 일 아니다"

72년 가을 한국 기업인 최기림(럭키그룹 구 씨 집안의 사위)은 미국 기업 퍼모스트 인터내셔널 사에 한국 정부가 퍼모스트의 상품및 용역 구매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고한 후, 퍼모스트가 판매 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통고한 후, 퍼모스트가 판매 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퍼모스트는 대표를 서울에 보내 최기림 및 정부 관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최기림은 2명의 퍼모스트측 간부와 협의하는 자리에서 "우선 박 대통령이 속한 정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해 달라"고 요구했다. 퍼모스트측 대표는 미국으로 돌아가 본사와 협의한 후 최기림에게 "회사의 사규상 그런 조건으로는 협상을 계속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최기림은 퍼모스트측에 "만일 '지방적 규모'의 미국 기업이라면 정치자금 제공 협상에 쉽게 응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지방적 규모의 기업'은 미국 군수품 청부업자로서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 기업 에이펙스 인터내셔널이었다. 최기림은 정치자금 제공을 쉬게 하기 위해 에이펙스 사가 퍼모스트 사의 하청업자로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조정했다. 결국 에이펙스 사와 퍼모스트의 일정한 계약하에 퍼모스트 사는 50만 불을 최기림에게 건네주었고, 최기림은 이 돈을 공화당에 전달했다.

최기림과 퍼모스트 간의 협상 직후 다른 한국 기업가 엄익호가 협상에 참여했다. 퍼모스트 사의 대표는 "엄익호는 최기림의 상급자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엄익호는 한 한.미 합작기업의 부사장이었고, 당시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태완선과 절친한 사이였다. 엄익호는 퍼모스트 사 간부와 만나 한국적 윤리관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국에서는 정치자금 헌납이 부도덕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암시했다. 그런데 퍼모스트 사는 한국측과의 공급계약 이전에 정확한 시장성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국 정부와 최기림, 엄익호는 퍼모스트가 시장성 조사를 끝낸 후 한국과 총판계약으로는 한국에 이를 수행할 유능한 전문가가 없다고 결론짓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이자계약 방식을 제안했다.

그러나 퍼모스트의 이 같은 제안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퍼모스트 대표가 74년 6얼 20일자 편지로 퍼모스트 본사에 보고한 것처럼 엄익호는 서울에서의 회의 때 "그런 조건으로는 이 프로젝트 자체가 심각한 난관에 부딪칠 것"이라며 퍼모스트 대표를 위협했다.

결국, 퍼모스트 사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관심이 있는 다른 기업을 물색했는데 미국기업 AHFI가 물망에 올랐다. 그래서 퍼모스트는 공화당의 정치자금 중개상 엄익호, 최기림과 AHFI 간의 만남을 주선했다.

74년 12월 AHFI 사는 최기림을 대리인으로, 에이펙스 사를 주요청부업자로 선임했다. 그와 함께 최기림과 에이펙스 사는 최기림이 에에펙스의 대리인이 되는 별도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최기림은 에이펙스 사와 AHFI 사 양측으로부터 약 1백75만 달러에 달하는 커미션을 기대할 수가 있었다.

최기림은 이 커미션을 당시 서울대학병원장이자 정부 관리였던 김홍기 박사에게 어느 정도 나누어 주었다. 서울대학병원은 퍼모스트와 AHFI의 물품 및 용역을 구매하는 기관이었다. 에이펙스 사는 73년 2월 최기림과 김홍기를 위해 찰리와 피터라는 암호명을 사용해 김박사의 은밀한 역할을 기술해 놓았다.
프레이저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정부 관리들에게 제공된 자금은 AHFI 사와 에이펙스 사가 지불한 커미션으로부터 나왔다. 그 자금은 김박사에게 제공 되었고, 나머지는 경제기획원과 정부 관리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뿐 아니라 최기림이 사용한 비용 중 50만 불도 문제다. 이 돈은 AHFI 사로부터 나온 커미션으로, 에이펙스 사 간부의 은행 구좌를 거쳐 한국과 미국에 있는 제3자의 구좌로 위장되거나 최기림의 구좌에서 현금으로 인출되었다.

이 돈 중 엄익호에게 최소한 3만 불, 프레이저위원회가 입수한 당시의 거래 수표에 등장하는 '이름을 판독하기 어려운 인물'에게 18만 불이 돌아갔고, 33만 불은 에이펙스 사 간부의 은행구좌를 통해 구범(?)에게 전달되었다. 구범은 럭키그룹 창업주 구종회의 아들이다. 구범의 삼촌 두 명이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그 중 특히 구태회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최기림의 구좌에서 인출된 현금이 공화당으로 전달되었음은 이와 같은 인맥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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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심쩍은 자금들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상품 및 용역을 구매할 때 한국 정부는 가격 할인 및 상납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항공, 곡물, 선박, 가발, 유류 관련 생산품및 용역산업 등에서 특히 성행했다.

가장 좋은 예가 석유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석유 및 석유화학 제품의 최고 가격은 한국 정부가 통제했다. 70년대 후반 국방부 관리들은 걸프와 칼텍스 사의 한국측 파트너에게 국방부에 판매할 기름 가격을 인상하도록 요청했다. 그런데 걸프와 칼텍스가 제시한 가격과 인상된 최종판매가의 차액은 국방부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국방부는 그 자금이 군인 및 그 가족들을 위해 사용될 것이며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텍스와 걸프 사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받아들였다. 프레이저소위원회에 따르면, 71년부터 75년까지 이런 식으로 조성된 차액이 약 75만 불에 달한다.

비록 그런 거래를 주도한 것이 국방부 관리였지만 그것은 명백히 불법 행위였다. 국방부 측이 기름 구입 차액을 어디에 썼든, 그것은 예산안을 승인하는 국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더욱이 비싼 기름값 때문에 한국의 국방예산은 실제보다 부풀려졌는데 이 때문에 한국 국회와 미국 군사정책 입안가들은 한국 국방비의 실제수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카길 사의 방계회사인 호엔버그 브라더스 사가 한국의 대한농산과 한 면화판매 거래도 정치자금 조성과 관련해 주목된다. 그 거래에는 대한 농산의 뉴욕 지사가 개입됐다. 카길이 한국의 대한 농산에 면화를 판매했을 때, 대리인인 뉴욕의 대한농산은 거기서 발생하는 커미션 지불을 카길측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카길측은 대리인에게 몇%, 대한 농산에 몇 %, 그리고 '미국에 있는 다른 관련업체'에 몇 %씩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카길측은 프레이저위원회에 대한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측 구매 대리인은 면화 가격을 높이 책정하라고 종종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한국의 대한농산에서 나왔으며, 그러한 과잉가격 책정에서 나오는 이윤은 커미션 등의 형식으로 한국 내의 다른 곳에 지불되는 듯 했다."

면화 가격 차액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우리는 당시 대한농산이 중정부장 이후락의 영향권 하에 있는 기업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농산은 중앙정보부가 미국 학계와 교포학자들 사이에 친박정희 세력을 조성할 목적으로 강영훈을 내세워 설립한 전위조직인 한국문제연구소의 재정 기부자였다. 더욱이 70년대 초반 이후락과 김성곤의 압력으로 대한농산은 쌀 수입 커미션 중 1백 50만 불 이상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이 밖에도 프레이저위원회는 유태인 무기상 슐 아이젠버그가 수년간 한국 정부의 최고위층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아이젠버그는 계약 성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만 한 청와대 보좌관들에게 계약액의 25%에 달하는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따냈다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아이젠버그는 공화당과 고위 관리들에게 차관, 증여, 상납금 조로 5백만 불 이상을 지불했다고 한다.

또한 캘리포니아의 유니언 오일(Union Oil) 사는 "우리 회사의 한국 합작회사인 경인에너지의 주식 50%를 소유한 C.H. 김(김종희 한국화약 회장)에게 우리는 때때로 대여, 선수금, 그리고 다른 자금 등을 지불했다"고 프레이저위원회에 보고했다.

김종희(일명 다이너마이트 김)는 이후락의 친구이자 사돈이다. 73년 후반부터 74년 초반에 걸쳐 김종희는 박정희와 박종규에게 이후락이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탄원했다. 김종희와 그의 형제 김종식 및 그의 회사, 한국화약은 이후락의 중정부장 재직시 미국에서의 중정 공작에 적극 참여했다. 김종식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학국교포 단체였던 남캘리포니아 한인회에서 지명도가 높았는데, 이후락의 사위이자 전 중앙정보부 2국장 정화섭의 공작을 지원했다. 김종식과 정화섭은 반 박정희 인사를 한인회 회장직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유의 활동은 73년 중앙정보부와 한국 외무부에서 작성한 '한국교민 지도지침'이란 문서에 나타나 있다. 김종식은 또 한미정치협회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그 협회는 문선명 교단과 한국 정부 관리들이 개인적, 재정적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단체였다. 한국화약은 중앙정보부 전위조직인 강영훈의 한국문제연구소에 중앙정보부 및 타 기관들이 기부한 총 27만 달러 중 2만 달러를 냈다. 이는 유니언 오일 사가 김종희와 한국화약에 제공한 자금이 미국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에 사용되었슴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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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이후락이 관리한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 것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 것"

한국 정부가 기용한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이 미 의회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뿌린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던 미 의회 외교위원회 국제관계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는 박동선이 뿌린 박정희 비자금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둘째 아들 이동훈을 몇 차례 소환했다. 78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이 씨는 계속 피해 다니다 결국 소재지가 발각돼 비밀 증언 형식으로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는 증언대에서 "내 아버지 명의의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의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박정희 비밀구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물론 "도대체 이동훈이 왜 입을 열었을까" 라고 궁금해 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한보청문회에 출두한 정태수 회장처럼 '자물쇠 입'이나 '실어증'으로 버티면 되는 것 아니가 하는 의문일 텐데, 그것은 완전히 한국식 사고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증인출석 요구를 받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이동훈의 소재를 FBI를 통해 파악한 프레이저위원회는 그에게 소피나(강제소환장)를 발부했다. 소피나를 받고도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FBI에 의해 강제구인 당한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그를 증언대에 세우기 위해 '비밀증언'이란 타협책을 제시했다. 미 의회의 조사활동 목표가 박 정군의 비밀자금으로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 한 한국인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뇌물을 받은 의원들을 밝혀 내 처벌하고 의회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동훈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프레이저청문회의 비밀증언대에 선 것이다.

그런데 일단 증언대에 선 이동훈은 결코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프레이저청문회의 조사반들은 이미 이후락 일가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자금을 조성하고 비축하고 유통시킨 과정에 대한 상당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증거자료들은 CIA, FBI, 법무성, 국세청, 국무성의 회계전문가들이 미국 내는 물론 스위스. 바하마. 도쿄 등 전 세계의 박 정권 비자금 거래 은행들의 거래기록을 뒤져 확보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걸프가 스위스은행의 이후락의 비밀구좌에 입금시킨 돈의 내역을 은행측이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에게 통보한 명세서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명백한 증거자료를 들이대며 심문하는 특별검사들의 칼날 같은 질문 앞에서 이동훈이 무슨 수로 비밀구좌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동훈은 "일본 모 은행의, 당신 이름으로 되어 있는 구좌에 예치돼 있는 2백만 불은 누구 돈이냐"는 추궁에 "그 돈은 아버지(이후락)로부터 받았지만 실제로는 박 대통령의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일류 변호사까지 동원했지만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끝내 사실을 부인했다가는 위증죄로 법정에 서는 일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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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의 박정희 감시 끄나풀 이후락

5.16 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63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직에 있던 이후락이란 인물을 나는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다. 그런데 이후락에 대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정일권의 후임으로 63년부터 주미대사로 일했던 김정렬이었다. 그는 은퇴 후 서울에서 만났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문 기자, 이후락이같이 교활한 놈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거요. 이후락과 김형욱이란 악당 손에 박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 거야. 3선개헌 때 우리 공화당 의원들이 그 두 놈 손에 어떻게 끌려갔는지 아시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 사람 벨트를 붙잡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소경처럼 질질 끌려간 곳이 제3별관이야. 가보니 촛불 몇 개 켜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당시 부의장)이가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 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 하면서 땅땅 때리는데, 개헌안 통과시키는 데 1분도 안 걸렸어요. 모두가 화적단 같은 놈들이야. 문 기자, 내가 죽은 후에 언젠가 이것만은 역사에 밝혀 주시오."

"대사님, 그러게 5.16 나고 나서 공화당 사전 직후 의혹이다 뭐다 해서 모두들 들고 일어나 공화당 해체하라고까지 하는 판국에 무엇 때문에 공화당에 참여하셨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5.16 났을 때 내무장관으로 있던 홍진기가 발포 명령자에다 사사오입 개헌 관련으로 잡혀 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거든. 그런데 홍진기하고 나호고는 일제 때부터 아는 사이로, 자유당 때 각료도 같이 했고 해서 인간적으로 몰라라 할 수 없는 관계였어요. 그런 판에 하루는 박 의장이 나를 부르더니 '공화당 의장을 좀 맡으라'고 하더구먼. 그래서 나도 '청이 있다. 공화당에 갈 테니 홍진기 좀 풀어 달라'고 했지. 홍진기 살리려고 공화당 간 거야."

김정렬 씨는 이후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요.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 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겠지."

공화당 정책위원장 박준규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자가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 나가더구만."

이 때 이후락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CIA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민주당 정권에서 장면의 비서를 지내 선우종원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창설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 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 맡게 된 것을 보니 CIA 한국 지부에서 그를 민 것 같았다."

사실 이후락은 5.16 이후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 놓은 첩자였다. 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부터 최고회의 정보를 미국 측에 보고했다. 미국으로서는 창군 초기부터 내내 미국 정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이후락을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 옆에 붙여 놓았으니까 박정희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감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이후락 같은 미국 끄나풀을 곁에 둠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

그 집에 돈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집주인이 내방객으로부터 받은 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수백, 수천만 원짜리 수표가 든 돈봉투를 주은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초등생이던 이후락의 셋째 아들 이동욱이 ㅊ의 집에 놀러 왔다가 ㅊ의 어린 딸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폐를 한 장씩 넘기며)

"돈은 1억, 2억, 3억... 이렇게 세는 거야."

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평양을 왔다 갔다 하던 이후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때에 나는 서울을 방문해 ㅊ의 집에 며칠 머물렀다. 그 때 영어를 배우러 온 이후락의 부인 정윤회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ㅊ이 나를 "미국 친구"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말끝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남북 통일을 시킬 것이다"라고 자랑을 하기에 나는 한마디 쏘아붙였다.

"정 여사, 당신 남편은 도둑놈이오."

그러자 이후락의 부인은 펄펄 뛰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건 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세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우리 주인은 절대로 결백합니다. 부정이라고는 모르는 분이예요."

이후락 부인과 나는 이후락이 도둑놈인가 아닌가를 놓고 한참이나 설전을 벌였다.
내가 자리를 뜨자 이후락의 부인이 ㅊ에게 "그 사람 누구냐"고 물었다라고 한다. ㅊ이 "워싱턴의 문 기자"라고 하자 다음 날 그녀는 돈봉투를 가지고 와서 내게 내밀었다. 기가 막힌 나는 그녀에게 목청을 높였다.

"나까지 도둑놈으로 만들려고 이러십니까?"

5공 시절, 나는 동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 온 박영옥(김종필 부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부정축재 액수에서) 우리보다 이후락이가 적게 나왔는데 이럴수가 있나. 신군부 놈들이 이후락이는 봐준 거다. 당시 신군부 군인들의 기세가 어땠는줄 아니? 그들은 나에게 '이 도둑년' 하면서 내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빼 갔다. 그러면서도 이후락이는 봐줬으니 신군부에다 뭐를 먹였는지..., 목숨 바쳐 혁명한 사람은 두 번이나 외국으로 쫓아내고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권력은 다 해먹은게 바로 그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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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장 시절 유태인 차관 중개인 메나도[38]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차관을 많이 들여왔다. 간혹 상공부에서 "그런 돈은 쓸 수 없다."고 하면 이후락이 다그쳐서 차관을 들여오게 했고 이렇게 유입된 차관 자금의 5~6%는 이후락 측 정치 자금으로, 다시 일정 %를 메나도 측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메나도는 이렇게 차관 브로커 노릇을 하며 모은 돈으로[39] 프랑스 해군 함정을 사들여[40] 고철로 분해해 두었다가 6일 전쟁 발발 후 다시 조립하여 이스라엘 해군에 제공해 이집트 해군을 격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훗날 메나도는 "한국 관료들은 10만불만 쥐어주면 국가에 1,000만불 손해가 나도 도장을 찍어준다."는 회고담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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