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적 명분론이 일본 사무라이의 무사도와 존황양이 천황제를 탄생시켰다

 
강황과 교류했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대학을 강의하게 되는데 이전까지 일본의 유학은 당나라까지의 훈고학의 영역에 그쳐있었다가 강항을 통해서 주자와 정자의 사서삼경 주해가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고 이는 에도 막부에 성리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마루야마 마사오, 와타나베 히로시 등 일본 사상사학자들에게 따르면 에도시대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덴노는 덴노지만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건 쇼군이라는 일본 특유의 기묘한 이중 권력 체제에 딱히 체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전국 시대 말기만 되더라도 덴노는 가끔가다 실권자한테 명목상 감투 하나 씌워주는게 역할이고,[5 그나마도 오다 노부나가가 세를 불리면서 가능해졌지 그 전에는 덴노 자신이 먹고 살 길을 찾고 궁녀들이 몸을 팔아가며 생계를 꾸릴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 심지어 일상 생활은 커녕 장례식이나 즉위식에 쓸 자금조차 구하지 못해 유력 다이묘들이 성금을 모아서 치르게 해주고 그 보답으로 관위를 하사받은 일도 있었을 정도로 덴노의 위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건 사무라이들의 수장이자 실제 군사력을 확보한 쇼군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6]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강항이나 후지와라 세이카 같은 일부 유학자 출신 포로들과 개인적인 학구열에서 성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 사이 연결점이 생기고, 이를 이제 군사적 역할이 필요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어찌 무장해제하고 평화기의 문신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었던 도쿠가와 정권이 유용하게 보아 관학으로 추대하면서 일본에도 알음알음 성리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신유한의 해유록이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견문록 같은 조선통신사 문학을 보면 17세기 후반쯤 되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의 책들이 일본에도 번역되어 널리 팔리며 사무라이들의 애독서로 대접 받았다는걸 알수 있다. 이렇게 성리학적 명분론이 들어오면서 지금까진 힘 쌘놈이 실권자인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풍조가 중국식 정통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남조정통론 같은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해석도 한층 더 퍼지고, 아메노모리 호슈 같은 유학자들 중심으로 은밀한 지하 사상 수준이지만 존왕양이론의 사상적 토대도 깔리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쯤 되면 아무래도 같은 일본인보다 이런 면에선 더 눈치 안보고 얘기할수 있는 조선통신사들과의 대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막부를 망탁조의에 비교하며 남옥, 성대중, 이익 같은 통신사 경험이 있거나 국제적 통찰력이 각별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벌써부터 "언젠간 저 뜻있는 일본 선비들이 충의를 품고 옮은 대의를 위해[7][8] 들고 일어나면 덕천씨 조정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예언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 민간과 막부의 유학자들이 이론화 하기 시작한 대정위임론이니, 훗날의 공무합체 운동이니, 어떻게든 덴노와 쇼군간 이중 권력 체계를 정당화할 이론을 어찌 짜보기 시작한 것도, 뒤집어 말하면 이전 시대에는 그딴 고찰 할 필요도 없이 걍 칼자루 쥔 쇼군이 다스리는게 당연한거였는데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도 더 넓은 세계의 성리학이란 동아시아 보편적 정치 윤리 체계를 접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이를 정당화할 명분이 갑자기 필요해졌던 것이다.[9]

후대에서 윤색하고 세간에서 생각하는 맹목적인 이미지의 무사도가 실제로 무사들의 전성기였던 전국시대 사무라이 계급이 종종하곤 했던 통수치기, 전직, 이직 같은 지극히 실리적인 행동 패턴과 크게 차이났던 이유가 이것이다. 추신구라 같은 에도시대와 그 이후 무사도 문학은 사실 성리학, 유교는 지이이인짜 가끔가다 특출나게 학식이 높은 불교 스님들이나 가끔 알던 본격적인 유학 전파 이전 사무라이들의 철학이나 관습보다 이미 어느정도 성리학 테이스트가 가미된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가치관에 어필하던 것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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