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달력 비화; 조선은 명, 청의 식민지였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천기누설’은 황제의 전유물

그런데 필자는 서애의 초서 메모와 함께 활자로 인쇄된 조선시대 다이어리, 즉 달력(대통력)에 시쳇말로 ‘꽂혔다.’

‘대통력(大統曆)’이 무엇인가. 1370년(고려 공민왕 19) 수입된 명나라 달력이다.

1653년(효종 4) 서양의 역법을 가미한 시헌력을 도입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조선에서 사용됐다.

어째 좀 기분이 싸하다. 왜 조선에서 명나라 달력인 ‘대통력’을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뭐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라 할 수 있다. 왜 ‘천기(天機)’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예부터 ‘천문 기상의 관측’은 천자(황제)의 고유권한이었다. 3300년전 무렵 중국 상나라 때 만들어진 상형문자 ‘왕(王)’을 보라.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시람(†)’이 바로 군주(천자·황제)였다. <서경> ‘요전’편은 “하늘의 뜻을 읽는 군주만이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베풀어 줄 수 있다(欽若昊天 敬授人時)”고 했다.

생각해보라. 누구나 천체의 운행을 읽어(천기를 누설해서) 시간과 절기를 멋대로 정하면 어찌 되겠는가. 세상이 뒤죽박죽될 것이다. 따라서 천자(황제) 만이 제후국(신하)에게 달력을 만들어 배포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원칙적으로’ 명나라 황제가 해마다 동짓날에 제작·반포한 ‘이듬해 대통력(달력)’을 받아왔다.

그 때 중국에 보내는 사절단의 이름을, ‘동짓날 즈음’에 보낸다 해서 ‘동지사(冬至使)’라 했다.


그러나 ‘원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일단 동지사의 중국 체류 기간이 너무 길었다.

동짓날 즈음에 출발한 동지사는 40~60일 정도 연경에 머문 뒤 이듬해 3월 말이나 4월 초 귀국하는게 통례였다.

그때면 이미 백성들이 농사짓느라 한창일텐데, 그 무슨 철 지난 달력이란 말인가.

예컨대 1599년(선조 32) 12월 16일 선조가 “중국이 달력을 반포하기 전에 우리나라 역서를 배포하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승정원·예조·관상감이 일제히 나섰다.

“중국에서는 해마다 10월1일 달력을 나눠주는데…우린 동지사가 귀국하기를 기다리면 설이 지난 뒤가 될 것이고…백성들은 절기를 알지못해 농사 때를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빨리 달력을 배포해야…”(<선조실록>)

그래서 ‘원칙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물론 중국 황제가 제작한 대통력을 받아와 인쇄·반포하는 것이 당대의 법도였다.

그러나 실상은 동짓날에 맞춰 조선 나름대로 ‘새해의 달력’을 제작·배포했음을 알 수 있다.

동지사가 받아오는 대통력은 그저 외교적인 요식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의 달력, 즉 대통력은 조선의 ‘시간과 절기’와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연경(북경)과 서울의 위도와 경도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달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세종대왕은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사기> ‘열전·역이기전’)는 고사를 누누이 강조한 분이다.

그런 마당에 ‘시간과 절기’가 다르면 백성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세종은 서울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을 연구해서 조선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1442년)했다.

특히 서울(한양)을 기준으로 일출·일몰 시각과 주야 시간을 계산하여 정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칠정산>(내편)으로 구한 서울의 동짓날 낮의 길이(39.12각)는 중국 연경(베이징·38.14각)보다 0.98각(1각=14분24초)이 길었다. 즉 서울의 동짓날 낮 길이는 위도가 높은 베이징에 비해 현대 시간으로 14분 이상 긴 것을 밝혀냈다.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에 잘 나와있다.

“중국은 낮의 길이가 가장 길 때가 60각,조선은 61각…조선의 일출이 가까우므로 1각의 차이가 있는 것…. 역서(달력)를 항상 활자로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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