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인정의 역설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에게 사랑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잠재무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어린 시절에 충분히 사랑받아야 한다.


타인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에게 인정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잠재무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어린 시절에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범죄자의 95% 이상은 

인생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충분히 인정받기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타인에게 표현할 수단으로 

폭력을 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생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충분히 인정받기 못했기 때문에

다양한 히스테리성 정신병을 안고서 살아간다.

 

모든 인간이 타인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을만한

눈부신 외모와

이해심 많은 부모,

많은 재산,

뛰어난 능력,

특출난 재능,

그리고 운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아직 어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쉽게 남의 말에 곧잘 화를 내던 시절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셨는데, 그 후로 나는 그 충고를
마음속으로 항상 되새기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남의 잘잘못을 따질 때는 언제든지 이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먼저 사랑해야 하고,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Take and Give가 아니라

Give and Take인 것이다.

 

항상 나로부터,

내 내면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 누가 과거의 트라우마와,

엿같은 인간군상들에 대한 기억을 극복하고,

과감하게 먼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여유를 실천할 것인가?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평생 인정받지 못했는데

타인을 조건없이 사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타인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ㅡ 마침내 '인류' 전체에 도달할수록)

손해본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관성의 힘은 강해지고,

나는 인류는 먼저 사랑하고 인정하기 보다는,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는

멍청한 인류를 증오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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