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이 롱을 통해 생각해보는 진보주의 (좌파)와 공산주의 (극좌)의 차이점; 한국의 무식한 인간들 - 특히 자신을 '우파'라고 자랑스럽게 지칭하는 병쉰들 - 은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 록펠러 스탠더드 오일에 과세를 때리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반대하다 암살당한 인물
미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선명한 진보주의자로 꼽히는 롱의 모토는 "모든 사람이 왕"(Every Man a King)이었다. 대공황의 불황 가운데 롱은 모든 사람이 왕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주장했다. 물론 롱은 반공주의자였다. 롱의 주장은 생산수단의 공유화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정부가 나서서 부자들과 대기업의 부를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정책이었다.[1] 오히려 이런 부의 재분배야말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지자들은 '미국사상 주류 정계에 진출했던 최고의 거물급 진보주의자'라고 평가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국에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시키려고 했던 남자'라고 혹평한다. 또한 일부에선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재정건전성을 해친 측면은 있지만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이념적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내에서 정치 개혁과 복지 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롱의 정책이 일반적인 복지 정책과 다른 것은, 단지 정부가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부자들이 독점하는 부(자산) 그 자체를 국민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어찌보면 자본의 사적 소유를 적극 옹호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상한선을 넘어 독점하는 것을 반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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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이 롱의 동생 얼 롱(Earl Long)은 그라쿠스 형제마냥, 휴이 롱이 죽은 뒤 형에게 보내는 동정표로 정계에 진출했다. 1939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보궐선거, 1948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 1956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다. 그리고 얼 롱은 보란듯이 휴이 롱보다 더 강경한 진보정책을 밀어 붙였다. 실제로 얼 롱이 활동하던 기간 동안 미국 정계는 이들을 '그라쿠스 형제의 미국판'이라고 불렀다. 1960년 얼 롱은 주지사직이 만료되자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1960년 9월 5일 선거 유세 도중에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65살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얼 롱이 죽었을 때 휴이 롱처럼 반대파에서 암살한 게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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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Morgan and Baruch and Rockefeller and Mellon going to do with all that grub?
모건, 바루크, 록펠러, 그리고 멜론이 모든 음식을 가지고 뭘 할까요?
They can't eat it, they can't wear the clothes, they can't live in the house.
그들은 그것을 먹지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하고, 집 안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Giv'em a yacht! Giv'em a Palace!
그들에게 요트를 줘야 합니다! 그들에게 대저택을 줘야 합니다!
Send'em to Reno and give them a new wife when they want it, if that's what they want.
만약 그들이 원하는 게 새 아내라면 리노[10]로 보내서 줘야겠군요.
But
when they've got everything on God's loving earth that they can eat and
they can wear and they can live in, and all that their children can
live in and wear and eat, and all of their children's children can use,
그러나 그들이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살 수 있고, 그들의 아이들이 살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다정한 땅에서 모든 것을 가져간다면,
then we've got to call Mr. Morgan and Mr. Mellon and Mr. Rockefeller back and say, come back here,
모건 씨, 멜론 씨, 그리고 록펠러 씨에게 여기로 돌아오라고 전화해서,
put that stuff back on this table here that you took away from here that you don't need.
가져가는 물건들 중 필요 없는 것들을 식탁 위에 올리라고 해야겠군요.
Leave something else for the American people to consume. And that's the program.
미국인들이 소비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남기십시오. 그게 프로그램입니다.
We're not going to destroy the Gulf Refining Company; we're not going to destroy the Standard Oil Company,
우리는 걸프 오일을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탠더드 오일을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but
we're going to say that the limit of any one man's stock ownership in
the Standard Oil Company is from 3-to-5 million dollars for that
individual and the balance to the people of America who own the balance
of what the Standard Oil Company is worth!
그러나 우리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한 사람의 주식 소유 한도는 3백만 달러에서 5백만 달러이며, 스탠더드 오일의 나머지를 갖고 있는 나머지 미국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All right
좋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나와 세일즈맨을 하면서 돈을 모은 뒤 오클라호마 뱁티스트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변호사가 된 후 정치에 관심을 두고 스탠다드 오일을 포함한 대기업들을 공격해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24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낙선한뒤 4년 동안 열심히 표밭을 일구어서 1928년 선거에서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당당히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롱은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에 빠진 목화 농가를 구제하기 위해 '목화 휴일'이란 이름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산물 생산량을 조절했다. 또한 적극적인 실업자 구제를 위해 고속도로, 아스팔트 포장도로, 신규 교량 건설을 시행했다. 하지만 주의 적자가 10배나 불어났는데 이는 건설사업 과정에서 각종 뇌물수수 및 리베이트 등의 비용들까지 추가된 탓이었다.
자칫 주지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지만 롱은 주의회 의원들을 돈으로 구워삶아서 주의회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롱의 입김은 주지사가 관여하기 어려운 주 사법부나 교육기관에까지 미쳐서 루이지애나를 쥐고 흔들게 되었다.
1929년, 재정적자를 타개할 요량으로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에 중과세를 부과하려 했다. 주 하원이 이에 반발해서 롱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롱은 매수와 협박으로 이를 부결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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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중앙 정계로 진출한 롱은 1932년, 자신의 수하인 오스카 K. 알렌을 루이지애나 주지사로 당선시키고 자신은 뒤에서 루이지애나를 계속 쥐고 흔들었다. 당초 롱은 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지지했지만 롱의 급진적인 정책을 내심 못마땅해한 루스벨트가 롱과 거리를 두려고 하자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936년 대선에는 본인이 직접 출마하려고 구상했다. 전국적으로 750만명 이상이 그를 지지하는 모임에 가입하고, 매주 6만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루스벨트 대통령보다도 많은 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롱의 주장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누진세, 사회보장제 등 그의 많은 주장들을 정권 후반부에 받아들였다.
롱이 만약 암살되지 않고 민주당
대선경선에 뛰어들었다면 어찌되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물론 루스벨트라는 산을 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롱이 암살된
데에는 다른 배후의 음모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롱이 유력한 대선주자였기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주장이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때문에 휴이 롱을 민주당 진보계파의 아버지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휴이 롱의 인지도와 달리 민주당의 역사에서 롱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기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현대 민주당 좌익 계파의 실질적인 시초는 조지 맥거번[4] 상원 의원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인터넷에서의 인식과 실제 휴이 롱이 민주당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히 차이가 있는 편이다.
- 아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대한 어록.
그는 부의 재분배를 추진하겠다는 명목으로 대통령실에 입성했다. 그는 그곳에 간 이후로 그런 일을 한 적도 없고, 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He rode into the president’s office on the platform of redistributing wealth. He has done no such thing and has made no effort to do any such thing since he has been there.
주니어는 2019년 8월 1일, 84살로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까지도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무죄 주장에 대하여 이미 1991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는 56년 동안 묻혔던 칼 와이스의 시체를 꺼내 뼈를 자연사 박물관에게 조사를 맡겼다. 와이스의 뼈 곳곳에 총알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의 뼈나 당시 기록, 현장 그림, 총까지 모두 조사한 시체 법의학 과학자 제임스 얼 스타즈(James E. Starrs)는 당시 현장 그림을 봐도 휴이 롱 등 뒤에서 쏜 총알이 확실하고 등 뒤에 있던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고 더 확고해졌다고 발표했다.
이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된 주니어와 똑같이 현재도 의사로 일하는 손자 칼 와이스 3세는 반발했지만 시체 부검결과를 상세히 보여주자 한다는 소리가 다른 시체를 부검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지금도 이 주장을 손자 칼 와이스 3세가 계속 한다. 칼 와이스가 휴이 롱을 암살하자 오히려 페이비 판사는 정치적 입지까지 박살났다. 그래서 장인을 증오하여 정치적으로 매장하고자 휴이 롱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소리까지 나올 판국이다. 아무튼,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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