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 무역을 독점했던 로스차일드-사순-카두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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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상하이에서 타이페이와 홍콩으로 이어지는 부의 역사를 여러 책을 통해 접했는데 중요한 퍼즐 하나를 끼워맞추는 느낌의 책이었다.
상하이와 홍콩의 발전에서는 유대인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특히 사순 가문과 카두리 가문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유대인들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고위관료층과 상인으로 800년정도 살아온 미즈라힘 유대인들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월가의 백인 금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아닌 아랍계 외모에 터번을 쓰고있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이 아편무역을 시작하자 가장 먼저 이득을 취한것은 영국계 회사인 자딘 매터슨 상사였지만
이후에 사순가문이 뛰어들며 아편을 생산지인 인도에서 매점매석 하고 거래가격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는 방식으로
자딘 매터슨 상사를 뛰어넘는 아편제국을 만드는데 성공함. 그리고 아편이 불법화 되자 방직업, 부동산, 호텔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바꿔서 승승장구.
카두리 가문은 사순 회사의 직원이었던 '엘리 카두리'가 독립해서 홍콩의 금융시장의 증권 거래인으로 출발해서 현재도 홍콩의 전력 독점사업자중 하나인 CLP의 최대주주가 되고, 페닌술라호텔, 동남아의 고무플랜테이션 등 부동산으로 성공하게 되었음.
사순 가문과 카두리 가문이 미묘하게 스탠스가 다른데,
두 가문이 양차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라고 불리는 1920-30년대 상하이의 호황기동안 부동산으로 부를 불린것은 비슷하면서도
사순 가문은 카두리에 앞서서 성공했지만 중국을 끝까지 비즈니스 대상으로만 보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가문의 리즈시절을 일궜던 시대를 풍미한 다방면의 알파남 '빅터 사순'이 제2차세계대전과 국공내전에 대해 오판을 저지르면서 자산을 대부분 몰수당해서 쪼그라 들었다.
반면 카두리 가문은 중국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며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덩샤오핑에게 '당신 가문은 진정한 중국의 친구' 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지만
일본의 부상으로 태평양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취약해질 상하이의 입지를 내다본 엘리 카두리의 탁견 덕분에 홍콩으로 상당부분 자산을 미리 이전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공내전 이후에도 공산화 되지 않은 홍콩에서 지속적으로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음.
그래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의 미덕은 화이부동 하며 동이불화 하지 않는것에서 출발하는것 같다.
이질적이지 않게 어울리되 앞으로 다가올 위협을 감지하고 기민하게 대처하는것이 사순과 카두리의 운명을 갈랐다.
'빅터 사순'과 '로런스 카두리'의 성격차이도 한몫한 듯 한데, 상하이의 개츠비였던 빅터는 잘생긴 외모를 지닌 사교계의 중심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엘리 카두리의 아들이었던 로런스는 변호사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졌고, 아빠가 런던에서 법학공부 때려치우고 상하이로 돌아가자고 강요했을때 아버지를 따라가면서도 다니던 학교에 퇴교신청을 끝내 하지는 않은 '소심한 반항'을 하던 사람이었다.
사순은 사라졌고 카두리는 남았다. 돈을 벌고 부를 지키는 비즈니스는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코로나 이전 2년, 코로나 이후 2년 홍콩에서 지내며 사순과 카두리의 명성을 접해온지라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는데
내가 자취하던곳 근처에 있는 '카두리 힐' 이라는 동네는 한때 상하이에서 탈출한 카두리 가문이 더욱 근신하는 자세로 소박해 보이는 저택을 자신들이 소유한 다른 집들 사이에 가려서 지은 다음 지냈던 곳이다.
부자였기 때문에 일본 점령군과 공산당에게 삥뜯는 타깃이 되고 수용소를 전전하며 고생한것이 카두리 가문에게 상당한 트라우마 였던 것 같다.
카두리 힐의 땅을 처음 구매하고 주거지역으로 개발할때 분양받을 대상으로 삼은 집단도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에 살지않는 중국계, 남미계 등 비 백인 부호들이었는데
당시 홍콩에 빅토리아 피크에는 백인 관리들과 사순 가문 처럼 허가받은 소수의 비 백인 명문가만 거주할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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