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파두르 부인의 편지에서 보는 상류층 인생의 고통 / 이건희 막내딸의 인생이 떠오른다 / 부처의 말처럼 인생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해이며, 그리스 인 조르바의 명언처럼, 자유,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진정한 원천이다

4. 고된 궁전생활[편집]

"내 인생은 끔찍해요. 단 1분조차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어요. 끝없는 집견과 반복되는 의무적인 행사들, 1주일에 2번 넘게 뮈에트성 같은 작은 성들 사이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의 연속, 언제나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하는 왕후나 왕세자, 왕세자비에 대한 의무..."

1749년에 퐁파두르 부인이 보낸 편지. 고된 궁정생활에 대한 퐁파두르의 고뇌가 잘 느껴지는 내용이다.

 



사실 퐁파두르 부인의 업무는 정부 관료나 정치가가 하는 일을 겸하는 중노동이었다. 심지어 퐁파두르가 낳았던 유일한 자식인 딸 알렉상드린이 죽고 외손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퐁파두르의 친정 아버지도 연달아 죽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퐁파두르 부인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화장을 하고 왕을 위해 웃고 떠들면서 연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 퐁파두르 부인을 지켜본 주변의 몇몇 귀족들도 그녀를 동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퐁파두르 부인이 역대 부르봉 왕조의 정부들 가운데 욕을 많이 먹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출신이 부르주아였기 때문이다. 퐁파두르 부인의 어머니는 문란한 행실로 유명했고 아버지 또한 세금을 떼먹고 도망간 전적이 있는데다, 그 아버지가 퐁파두르의 친부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출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정부가 된 이후로 항상 루이 15세를 위해 오페라와 희곡를 열고 도자기와 보석, 그림을 사들이는 퐁파두르를 두고 "부르주아 출신 주제에 사치를 부린다"며 비난했다. 거기다 퐁파두르가 20년 동안 루이 15세의 곁에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꼬워했다. 루이 14세의 말년을 지킨 그의 정부 맹트농 후작부인[26]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는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가 사망하면서 왕비 자리가 공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하지만 퐁파두르가 정부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멀쩡히 살아있었다. 게다가 이 마리 레슈친스카는 후계자를 낳고 공식적인 업무를 이행하는 등, 왕비로서 딱히 흠이 없는 여인이였다. 당연히 사람들은 일개 정부에 불과한 퐁파두르 부인이 아닌, 왕세자의 모후이자 신실하고 조용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편이었다.

측근도 입에 오르내렸다. 남동생인 아벨 푸아송(1727~1781)도 누나가 왕의 애인이 된 덕으로 마리니 후작으로 임명되어 왕의 건축 담당자로 출세하였다. 파리 시민들은 왕실해양 서기관 모르파 백작의 실각 뒤에 퐁파두르가 있다 믿었고 공공연히 푸아송에서 딴 노래인 푸아소나드를 부르며 조롱했다. 하지만 나라에서 지급하는 5만 리브르의 연봉 외에 여타 수입은 없어 자주 빚을 졌고, 빚을 갚기 위해 선물로 받은 보석이나 그림을 팔았다. 평생 자선사업도 많이 한 탓이기도 했다. 결국 사망한 뒤 남긴 돈이라고는 책상 서랍에 있던 370리브르가 전부였다. 당시 파리 오페라의 6개월치 좌석을 예매하는 금액이 600리브르였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이 항상 자기 근처에서 식사하기를 요구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만큼 대식가가 아니였지만 왕인 루이 15세가 요구했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허용하는 양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먹어야만 했다. 기름진 고기 위주의 궁중식단은 퐁파두르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만찬 자리에서는 억지로 다 먹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먹은 음식이 살로 가지 않도록 운동도 빡세게 해야 했다. 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 삶은 퐁파두르에게 있어서 매우 고된 것이었다는 점은 위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게다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왕과 오랜 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도 한 번도 왕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746년과 1749년에 루이 15세의 아이를 가지긴 했으나 모두 유산했고 몸이 허약해져 다신 임신하지 못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고 왕도 많은 적자녀와 서출들이 있었던 만큼 일단 양자 모두 문제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과 살 때에도 몇 차례 유산한 데다가 그나마 살아서 낳은 아이들은 허약해 모두 요절한 점, 그녀가 당시에는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한 부인과 질환을 달고 살아서 나중에는 시침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정도였던 점을[27] 감안하면 원체 몸이 좋지 못했던 그녀가 고된 궁정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탓에 더 허약해져 후천적 불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각종 식이요법을 동원해 가며 간절히 낳길 바랐던 왕의 자식을 끝내 낳지 못했고, 이것은 그녀를 심적으로 상당히 괴롭혔다.

이에 대해서 비화도 있다. 퐁파두르의 말년에 왕의 공식 애첩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했던 한 귀족 여인이 루이 15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이후에도 그 귀족 여인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루이 15세의 아들을 낳자 자신의 갓난 아들을 데리고, 공원에 산책을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유 수유를 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퐁파두르 부인은 변장을 하고 그 모자의 모습을 멀리서 말없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낳지 못한 왕의 아이를 낳은 그 귀족 여인을 상당히 부러워했던 듯. 더구나 그 상황에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모두 요절해서 심적 고통이 상당했다고 한다. 특히 기숙학교에 있던 딸 알렉상드린이 겨우 10세의 나이로 병사해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을 때, 아예 자신의 삶에서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고 말할 정도로 상심했다.

푸아소나드가 유행한 1756년부터는 살해위협에 늘 시달렸고 언제 독살당할지 몰라 반드시 자기 처소에서 하녀를 시켜 만든 음식만 먹었다. 실제로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유 궁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미모를 잃고 말았다. 극한의 경쟁과 암투가 난무하는 궁정생활은 아름답고 건강하던 퐁파두르 부인을 말라 비틀어진 쇠약한 노인으로 만들었고, 이후 퐁파두르는 편두통 신경증에 시달리다가 결핵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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