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망료니망료아를 부른 왕걸의 인생역경기

 

왕걸은 1962년 10월 20일에 홍콩의 쇼브라더스 영화사 소속 배우로도 활동했던 배우 왕협(王俠)[13]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왕협이 1965년에 쇼브라더스와 계약하면서, 홍콩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14] 1970년대에는 영화 배우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화 귀태감(鬼太監, 1971)[15]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였고, 이후 어린 시절의 홍문정을 연기한 홍희관(洪熙官, 1977)을 비롯한 여러 개의 홍콩 영화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였다. 그는 1978년 작인 《살절(殺絕)》에서는 적룡이 맡았던, 무명무성(無名無姓)인 청년 검객의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아역 배우로 활동할 시기 홍콩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계 개신교 기숙사 학교인 화남삼육서원 부설 중학부(華南三育書院 附設中學部)[16]에 재학 중이던 1974년에 그의 부모인 왕협과 허옥이 이혼한 이후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양육비를 비롯한 경제적 지원을 일절 받지 못하였다. 부모의 이혼 후 그가 10대 시절 홍콩에 거주할 때 그의 부모는 그를 두 번만 찾아가는 등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17]
생사의 고비를 넘길 정도로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온 그였기에, 부모의 방치와 무관심에 해방감을 느낀적도 있었다. 그러나 명절을 비롯한 대부분의 날들을 학교에서 보내다 보니, 명절 때 친구들 부모님이 그에게 음식을 나눠주었지만 그를 찾아 오는 사람들은 없기에 (친구들과 대조적인 자신의 삶에 대해) 마음속은 고통으로 가득찼었다.[18] 그는 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면서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고, 학교 선생님이 대신 그의 학비를 내주었기에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그는 매우 조숙해졌으며, 한편으로는 우울하면서도 감상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며 마음을 달랬고, 루마니아계 학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노래를 부르는 방법을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가 다닌 학교가 미국계 학교였기에 학교에서 영어를 비롯하여 서구권 음악을 많이 접했던터라, 그는 학창 시절에 창법을 비롯한 음악적 성격과 가치관 등에서 서구권 대중 음악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3살(대만 나이로 13살)에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4살에는 와와재곡료(娃娃在哭了: 인형이 울고 있어요)를 작사, 작곡하게 된다.[19] 그는 2003년 오락관관 쇼(娛樂串串SHOW)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계 개신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영어를 써야했고, 홍콩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광동어를 써야했기 때문에 대만계 가정(왕걸의 부모는 대만 국적자다.)에서 자라 표준 중국어가 더 익숙한 그에겐 학교 적응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자신은 자신의 조숙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학창시절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하면서, 13살 때부터 학교에서 그의 별명이 낭자(浪子: 유랑자, 방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화남삼육서원 중학부의 7년 과정을 마친 뒤, 화남삼육서원 대학부[20]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1년 정도 다니다가 교수와 싸워 퇴학당했다. 대학 중퇴 후 '새장집(籠屋·농옥 : 닭장집으로도 불리는 집이다.)'에서 거주하면서 길거리에서 매예[21]를 하기도 하고 일용직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친구들과 17살에 대만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대만에서 한 여성을 만나 약 1년 간의 연애 후, 1981년에 첫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는 홍콩 여권을 소지하였지, 대만 시민권자가 아니었기에 대만에서 안정적으로 취업할 수 없어 태권도 사범, 스케이트 코치, 페인트공, 택시 기사, 택배 기사, 웨이터, 바텐더, 요리사, 스턴트 맨 등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했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부모의 이혼 후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10대 초반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기에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는 대만 시민권을 얻기 위해 3년간 군대에 복무[22]하였다. 그가 군 복무를 하게 되면서 임신한 부인을 그의 어머니와 외삼촌에게 맡겼는데, 휴가를 나와 그의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니 아기만 남아있고 부인은 집에 없었다고 한다. 왕걸 어머니의 핍박과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부인이 딸을 조산(早産)한 뒤에 집을 떠나면서 첫번째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한 이후에 왕걸은, 첫번째 전 아내가 임신하였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아내를 돌보지 않고 집에서 늘 사람을 찾아 춤을 추며 아내에게 같이 춤을 추기를 요구했고, 그의 어머니가 (춤추기를 비롯하여) 자신의 각종 요구를 거절하는 아내를 을러서 내쫓았기에, 그의 전 부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딸을 두고 그의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전역 후 혼자서 딸을 키우면서 전 부인에 대해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다.[23] 전역 후에도 경제적으로 힘들었기에 홀로 딸을 키우면서 힘들고 고된 나날을 보냈다. 딸에게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해주지 못 했을 뿐더러 자신도 굶는 적이 많았다.[24]

택시기사로 일할 때 그는 항상 두 살배기 딸을 택시에 같이 태운 채, 도처의 승객들을 받으며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어느 심야에 한 명의 손님을 만났는데, 그 손님은 왕걸이 택시에 두 살배기 딸을 태우고 일하는 택시를 운전하는 모습에 동정심을 느껴 1000위안을 주면서, 그보고 일찍 퇴근하여 딸을 데리고 집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였다. 손님의 온정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낀 그는 마음이 쓰려서 곡[25]을 쓰게 되었다. 택시 기사 뿐만 아니라 공사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딸을 맡길 곳이 없어서 공사장에도 대동했었고 심한 경우에는 집이 없어서 딸과 같이 길에서 노숙을 했다. 스턴트 맨, 택시기사 등을 비롯한 각종 직업을 떠돌면서 심하게 다쳤을 때는 손목이 부러지기도 했으며 철근이 허벅지를 관통하여 400여 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그는 리틀 그래스(Little Grass), 노던 윈드(Northern Wind)와 같은 예명으로 활동하며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써주면서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또한 라이브 카페에서 댄 힐(Dan Hill)의 Sometimes when we touch[26]를 비롯한 팝송 등을 부르며 언더그라운드 가수로도 활동했지만, 음색이 처량하다고 라이브 카페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3. 가수 활동[편집]

3.1. 1980년대[편집]

1987년 마침내 인생의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게 된 기회를 만나게 된다. 음반 프로듀서 이수전(李壽全)이 우연히 그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그의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여겨 그의 앨범을 발행해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1987년 12월 19일[27]에 이수전이 프로듀싱한 앨범 일장유희일장몽(一場遊戲一場夢)을 발매하면서 가수로 정식 데뷔하였다. 왕걸이 데뷔 하기 전, 당시 대만 가요계는 기교를 넣어 부르는 노래가 대세였는데, 그는 기교를 거의 넣지 않고 불렀던데다가 음색이 처량했기에 아무도 그의 대성공을 점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된 일화를 하나 예로 들자면, 왕걸이 음반 일장유희일장몽을 낸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획사 동료가 그에게 예상 음반 판매량을 물었다고 한다. 당시 신인이었던 왕걸은 자신의 앨범의 예상 판매량에 대해 "적어도 30만장이 팔리지 않을까."라고 대답하였고, 기획사 동료는 그 대답을 듣고 비웃었다고 한다. 당시 가장 잘 팔린 앨범들도 앨범 발매 1년이 지나서야 단일 앨범 누적판매량이 30만장이었던 대만 가요계의 현실에 대해, 왕걸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명의 타이틀곡인 일장유희일장몽(一場遊戲一場夢, 영문명 : A Game A Dream)[28]은 장애가(张艾嘉) 감독의 영화 《황색고사(黃色故事)》에 삽입되면서, 그는 가수로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1988년 제 25회 금마장에서 삽입곡상(最佳電影插曲)을 수상하였다. 이 노래는 6개월 이상 대만 음악 순위에서 정상권에 머물렀다고 한다. 타이틀곡 뿐만 아니라 그의 데뷔 앨범이 당시 대만 음악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고생끝에 낙을 맞이하게 된다. 왕걸의 데뷔 앨범 일장유희일장몽은 2010년대 기준으로 전세계으로 약 18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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