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문학의, 예술의, 아니 인생의 심층의미를 발견하지 않고, 영화를 빛과 그림자의 조합으로, 모든 것을 그저 기호의 조합으로 보는 하스미 시게히코식 표층비평은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를 생각하면 네빌 고다드가 떠오른다

 

존 포드 지지자로 유명한 허문영 평론가조차,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층비평'이 지닌 위험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비평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영화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광원의 구체에 의해 장방형의 벽에 비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문장에 유의해야 한다. 영화는 기계장치에 의해 조작된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그저 표층의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체험이란 범용한 것들을 잊거나 모르는 '우둔함'의 상태에서 표층에 드러난 기호와의 현재적 조우라는 것이다. (하스미에게는 문학도 표층의 기호 놀이이기는 마찬가지다. 1978년에 발간됐으며 올해 국내에 번역 출간될 《나쓰메 소세키론》의 서장에서 그는 "의미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거리도, 깊이도 없는 채로, 모든 것이 깨어지기 쉽게 표층에 부상해서 일제히 소란을 피우는 장이야말로 문학이 아니던가"라고 단언하며 소세키에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 이외의 어떤 것도 시계(視界)에서 일소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영화가 표층적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언명은 위험한 발언이다. 이건 언어 혹은 철학의 개념이 닿을 수 없던 세계의 진실을 영화가 대면케 한다고 주장하며 전력을 다해 영화를 옹호했던 위대한 시네필 비평가-학자들(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스탠리 카벨, 세르주 다네, 질 들뢰즈, 알랭 바디우, 질베르토 페레스 등등. 자크 랑시에르는 제외된다)에 대한 도발이다. 경탄을 멈추고 한발 떨어져 곱씹어볼 대목이다. 기껏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불과한 것에 하스미는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 도발적 발언조차 '무상의 요설'을 격파하기 위해 동원된 모종의 수사일까? 그는 영화의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허문영 평론가, 『야만적 유희자의 초상』, 계간 문학동네 2016년 봄 (86호)[24]

허문영은 하스미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천재다. 그와 비교하기에 아주 적절한 가라타니 고진은 수재다. 가라타니에게는 배울 수 있어도 하스미에게는 배울 수 없다. 영화의 맨살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와 수재는 지능이나 지식의 차이가 아니라 지적 태도의 차이로 구분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성일 평론가도 시네필 안내서를 통해, 하스미 시게히코 비평의 위험성을 경고한 적이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을 꺼내 들고 싶을지 모르겠다. 이 책 앞에서는 만감이 교차한다. 물론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냥 한마디로 ‘영화 광인(狂人)’이다. 자기 글을 모아놓은 (일본판) 책 제목을 그렇게 붙였고 또한 그 말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분이시다. (나를 포함해서) 내 동료들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탄식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다.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진다. (일본에서는 아예 ‘하스미 벌레(蓮實蟲)’라고 부른다) 괜히 큐브릭은 이류감독이지, 라고 중얼거려보고 싶어지고 역시 영화는 아무래도 존 포드지, 라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치고 싶어진다. 잉마르 베리만이 우스워 보이고 이마무라 쇼헤이쯤은 무시하고 싶어진다.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게다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통찰력만큼이나 이상할 정도로 부정확한 장면 설명이 부조리할 정도의 조화(?)를 이룬다. 나는 당신이 하스미의 영향력을 견딜 만큼 힘센 시네필이 된 다음에 읽으라고 ‘경고’하고 싶어진다.

 정성일 평론가, 시네필 안내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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