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인터페이스론(論);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를 고민하는 자; 그레고리 베이튼슨: 인간과 기계(도구)의 경계는 무엇인가; 인간중심의 인터페이스는 인간 이외의 것들을 타자화한다; 너무 인간 친화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다 보면 인간의 본질적인 면까지 기술이 대치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타자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매체를 ‘전달체’라는 도구로 파악해야 하는지 ‘인간의 확장’으로 봐야 할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올리버 그라우: 현재의 디지털 매체는 조작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유 자체를 결정하는 도구가 됐다; 마셜 맥루한: 매체는 인간의 확장이다

  https://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2203100036


  사랑이 마치 물건과 같은 것이어서 교환과 증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물건 같은 것이면 짝사랑을 해도 즐거워야 해요. 나한테 사랑이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요? 아니잖아. 사랑은 둘 ‘사이’에 있는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에 있다는 이야기야.”
 
  선생의 인터페이스론(論)에선, 오랜 사색이 만든 아날로그적 힘이 느껴졌다.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에다가 두 이(二)자를 씁니다. 두 이(二)라는 건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이지요.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인터페이스입니다. 아날로그의 입자와 디지털의 파동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그 ‘사이’를 고민하는 자여야 해요. 머리(디지털)와 가슴(아날로그)을 연결하는 목. 우리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길목, 손목, 나들목….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하듯이 현실과 가상, 로봇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사이좋게’ 만드는 게 관건이죠.”
 
  또 이런 말도 했다.
 
  “산업사회는 독립된 ‘원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정보사회는 항상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요.
 
  사실, 서양은 ‘개인’으로 살아왔지만 우리는 ‘사이’로 살아왔습니다. 서양의 비극은 어디에서 왔느냐? 서양은 밤낮 이항대립을 한 겁니다. ‘나에게 아내 혹은 남편이 있어도 둘이서 사는 건 아니다. 나는 반드시 개인으로, 아톰[原子]으로 있어야겠어!’라고 생각한 겁니다. 즉 인디바이드(Individ),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개체, 개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니에요. 혼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뭐도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짚신짝도 짝이 있다고 하잖아요. 처음부터 짚신은 하나만 있을 수 없어요. 2개여야지만 돼. 눈이 두 개인 것처럼 말이죠.”
 
  선생은 이번 대화의 작은 결론이라도 지으려는 듯 이런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무엇보다 진과 선, 미를 모두 합치고, 뛰어넘으며,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처럼 입자와 파동까지 포용하는 소위 전자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자는 입자하고 파장하고 떨어져 있지 않고 포개어져 있거든.”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85269

 

 영국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1972년에 펴낸 저서 ‘마음의 생태학’에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맹인의 지팡이는 그 사람의 일부인가’ ‘근시가 심한 사람에게 안경은 몸의 일부인가’라는 문제다. 김재영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인간과 기계(도구)의 경계는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라고 설명한다.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이 문제는 더욱 복잡미묘하다. 특히 컴퓨터는 계산을 위한 도구 수준을 벗어나 사용자와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더 나아가 사용자의 정서를 파악하고 감성을 고려하는 콘텐츠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김진현 독일 쾰른대 음악학과 강사는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이제 공학의 영역에 국한돼선 안 되며 커뮤니케이션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인문학, 사회과학에서도 다뤄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토대로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과 한국문화연구원은 8일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인문학적 시각으로 본 인터페이스’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조윤경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는 미리 제출한 발표문에서 우선 인터페이스의 정의를 △인접한 지역, 몸 혹은 국면들 간의 경계를 형성하는 표면 △독립적인 체계들이 상호작용하는 지점 △컴퓨터와 다른 실재물(프린터 혹은 사용자)의 상호작용이나 소통의 지점 등으로 정리했다. 그는 “우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컴퓨터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으며 모니터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서 “그러한 인터페이스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힘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인간중심’이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중심의 인터페이스는 인간 이외의 것들을 타자화한다”면서 “너무 인간 친화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다 보면 인간의 본질적인 면까지 기술이 대치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타자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예상했다. 조 교수는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인터랙션)에 대해 “점점 인간이 기계화하고 기계가 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소통이 이뤄지면서 두 영역을 매개하는 인터페이스가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페이스 기술의 발전과 미래’를 발표하는 김동호 숭실대 글로벌미디어학부 교수는 “최근 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은 인간의 감성을 바탕으로 하면서 복합감각적, 또는 체감형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성능의 발전만 추구해선 안 되며 인간의 감성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심혜련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매체와 공감각 그리고 자연적 인터페이스’에서 “사유 주체는 분명히 ‘나’인데 ‘나’는 컴퓨터 없이는 불안하다”면서 “매체를 ‘전달체’라는 도구로 파악해야 하는지 ‘인간의 확장’으로 봐야 할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이와 관련해 “현재의 디지털 매체는 조작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유 자체를 결정하는 도구가 됐다”는 독일 예술사학자 올리버 그라우의 말과, ‘매체는 인간의 확장이다’라는 캐나다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언의 정의를 소개했다. 금동근 동아일보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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