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센티브 없는 집단주의 (사회주의) 체제가 농업의 생산량에 얼마나 악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중국의 사례: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
4. 중국의 인민공사(人民公社)[편집]
△ 1958년작 인민공사 선전화. 오른쪽 위의 화로들은 그 유명한 토법고로(土法高爐)다. 그림 속 공동식당을 보면 알겠지만 식사도 공동으로 해야 했고 집에서 조리도구가 나오면 처벌(...)됐다. 개인 취사를 하면 계급이 생긴다나? 그 참상은 대약진 운동을 참조할 것.
중국은 대약진 운동을 펼치면서 1958년에 농업 집산화를 위해 소련의 집단농장을 본따 인민공사를 만들었는데, 농촌의 행정과 경제 조직을 일체화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리센코 식의 엉터리 이론을 도입해 농지에 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밀식 농법을 추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었고, 거기에 마오쩌둥이 시전한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스킬까지 겹치는 바람에 소련을 능가하는 대재앙급 기근으로 3,000~5,000만 단위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헬게이트를 열었고, 그 여파는 아무리 신격화된 마오쩌둥이라고 한들 책임을 져야할 만큼 컸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건강을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류사오치의 위협을 받고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다시 정계에 나선다.
이후로 텃밭제도 재도입 및 개간으로 땜빵을 했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 집산화 폐지와 잉여농산물 처리 자율화(농가생산책임제)가 일어나자 생산량이 경이적인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식량자급에 성공했고. 반대급부로 인민공사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가다가 1982년 폐지되었다. 등샤오핑이 밀어붙힌 가정연산승포책임제 개혁이란 그저 "인민공사의 수취량은 고정이고 증산분은 각 가정이 할당된 토지에서 농민이 전부 가질 수 있다."라는 인클로저 운동에 가까운 소유권 개혁인데 하자마자 농업생산물이 5년간 55%나 증가해서 식량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던 국가에서 남아돌아 수출하지 않고서는 못버티는 국가로 변해버렸다. 다시말하지만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단 5년에 불과했다'이다. 결과물이 이렇게 나오니 등샤오핑의 개혁에 반발하던 공산당 보수파들이 절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는 후문이 있다. 인클로저 운동이 영국의 공유토지 농노제를 사유지체제로 해체하여 생산력을 폭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걸 보면, 중국의 집단농장은 공산당이 부재영주로 작동하는 서구식 농노제의 도입이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이후 화끈하게 인민공사를 다 해체해버리고 개인농장으로 땅을 나눠줘버리자는 주장을 덩샤오핑이 했을때 공산당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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