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에 비견되는 부르키나파소의 '미완의 혁명가' 토마 상카라, 그리고 그를 암살한 미국 CIA

 

2.3. 사망[편집]

그러나 이런 상카라의 개혁정책들은 주변국의 독재자[10]에게는 위협적으로 비쳐졌다. 이들은 토마 상카라의 존재로 인해서 자국에서도 개혁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권좌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도 역시 상카라를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상카라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개혁가였고 미국은 상카라가 부르키나파소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에 반미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퍼뜨릴 것을 우려했다. 결국 부르키나파소 인근 국가들의 독재자들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미국 CIA는 상카라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11]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12]

상카라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지 1987년 장 지글러(Jean Ziegler)[13]를 만난 자리에서 "체 게바라는 몇 살까지 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14] 또한 체 게바라 20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상은 죽일 수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15]

1987년 10월 15일 CIA에 포섭된 블레즈 콩파오레는 반혁명 쿠데타를 단행했고 상카라는 반란 진압 도중 결국 수도 와가두구에서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가 존경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떠올리게 하는 최후였다. 콩파오레의 퇴진 후인 2015년 10월에 상카라의 유해가 발굴된 후 검시결과에 의하면 수십발의 총탄을 맞았다고 하며 심지어는 콩파오레가 직접 상카라의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고는 콩파오레는 상카라의 아내와 자녀 2명에게 '상카라가 자연사했다'는 사망 증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으며, 뻔뻔하게도 이 조작된 사인을 언론에 공표하기까지 했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상카라를 본인의 손으로 처형시킨 이후에 대통령직에 올랐고, 자신이 토마 상카라의 사형을 집행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그는 CIA의 권고대로 그간 실행되어가던 개혁정책을 모조리 이전으로 되돌리고, IMF세계은행에 재가입한 후 '파탄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절박하게 필요한' 기금을 가져왔다. 이후 부르키나파소는 단 한 번도 상카라 시절의 경제와 민생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외채와 해외 자본에 종속되어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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