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 뜻으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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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으로 역사를 '뜻'을 통해 '참나'를 통해 해석한 획기적인 시도!

 

특히 선생이 영국 페이비언 협회와 H.W. 웰즈, 줄리언 헉슬리를 이야기한 대목에서는 놀랐다. 마치 조선말을 살아가는 한복을 입은 백발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박학다식하고 통찰력이 일품이다.

 

그가 한 다음 말들은 곱씩을수록 철학의 정수다. '부분과 전체'에 대한 현자의 통찰이다.


한국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니!



1.

참은 날마다 새로운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새롭게 한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꼐서 부활하신 다음 그 호숫가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기사가 있다. 거기 보면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고 빵과 생선도 있었다. 주님은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라 하셨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이미 넉넉히 있는데 왜 하필 방금 잡은 것을 가져오라 할까? 오늘에는 오늘의 체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맨 첨부터 있는 영원한 진리지만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야 생명이다. 오늘날 사람이 라디오, 텔레비전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속에 날마다 새로운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하다, 지루하다, 스트레스니, 노이로제니 하는 것은 다 삶이 역겨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2.


생명은 '확산-수렴의 원리'다. 생명은 될수록 번져 나가려 한다. 물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져 나간다. 방전이 되면 빛이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빛도 소리도 열도 그저 방사되어 나가려 한다. 크게는 본체에서부터 작게는 사람의 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저 번져 나가려고만 하는 것이 그 근본 경향이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또 거두어들이려는, 될수록 모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는 창조요, 하나는 안식이다. 하나에서 진보주의가 나오고 또 하나에서는 보수주의가 나온다. 보수 없이 진보도 될 수 없고 진보 없이 보수도 될 수 없다. 늘 변하지 않으려 하면서 또 돌변하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진화는 여기에서 나왔다.

 

3.

 
있음과 없음은 둘이 아니요, 있음과 생각과도 둘이 아닐 것이다. 있다하면 없는 것이요, 없다 하면 있는 것이다. 참 생각이야말로 있음이요, 참 있음이야말로 생각이다. 있다 함은 벌써 생각이 끊어진 것이요, 생각하면 벌써 있음은 깨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모순과 통일이 딴 것 아니다. 모순은 의식된 통일이요 통일은 의식된 모순이다. 생명은 이것으로써 자기초월을 해 나간다. 인격의 본질은 자기초월이다. 내가 나를 아는 것이 긍정이면서도 자기부정이 된다. 내 지식의 내용으로 된 것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격은 자기반성으로 자기부정을 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 자기는 자기 이상일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쉬임없이 자기초월을 해 가는 것이 인격이다.


4.


사람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완전히 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람된 까닭은 자아의식, 자아주장이 있는데, 그 자아의식 자아주장을 성립시킨 것은 하나님 곧 절대자다. 내가 '나'를 만든 것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나들어졌다는 것이 자아의식의 밑바닥이다. 내가 '나다'할 때 벌써 거기 '너'가 있었다. 그리고 그 너야말로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내가 그를 안 것 아니라, 그가 나를 있게했다. 내가 무한을 아는 것 아니라, 무한이 자기 제한을 함으로써 내가 생겼다. 그러므로 '나'속에는 두 법칙이 있다. 절대자에 돌아가려 하는 생각과, 내가 주인이 되려 하는 생각, 이 두 모순되는 생각이 서로 싸우는 것이 인생이다. 문제의 근본은 나에게 있다. '나'란 생각 아니하고는 살 수 없는데, 또 '나'를 주장하면 전체자에 대한 반역이다. 자아의식 자체가 벌써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내가 죄를 지은 것 아니라, '나' 그것이 벌써 죄다. 나는 하나님에게까지 가잔 것인데,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면 죄다. 그래서 "야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하는 것이다.


5.


사람이 저를 아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할 것은 이 몸 생김의 뜻을 생각해 보는 일이다. 모든 형상은 뜻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발이 펀펀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라 한 말이 웃을 말이 아니다. 눈 귀 코 손 발이 다 쌍으로 된 데도 뜻이 있어야 할 것이요, 육체적 생명의 근본되는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과 정신적 생명의 양식인 말이 나오는것이 한 구멍으로 하게 되었고, 더러운 찌꺼기를 내보내는 것과 새 생명의 창조를 하는 것이 역시 하나로 되어 있다는 데도 반드시 무슨 뜻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그만두더라도 사람이 두 발로 꼿꼿이 서게 생겼다는 것만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사람에게서만 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하늘 땅을 연락을 시키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힘이내 발로 올라와 머리를 통해 저 까만 하늘에 뻗는다 하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 그래 1만 5천리 지구 중심까지 울림이 내려가도록 힘있게 디디고 서자는것이다. 또 앉을 때면 산처럼 부동의 정신으로 앉아야 한다. 그러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 한다. 옛사람들은 거기를 기해라, 단전이라 해서 정신수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다.


6.

켱긴다는 것은 둘이면서 하나가 됨이다. 곧은 바늘은 어디 가도 걸리지 않고 어디에 떨어져도 찾을 수 있다. 몸이 켱기면 어떤 방해물 속에서도 빠져나올 수가 있고 마음이 켱기면 어떤 복잡한 문제도 풀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을 다 알면 둘이 아니다. 그래 생사일여다. 생사가 하나가 못되고 둘이기 때문에 살까 죽을까 혹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나만 알고 전체를 모르며 전체만 말하고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공이냐, 사냐 번민을 한다. 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가 곧 나임을 안다면 공사의 충돌이 있을 리 없다. 빙공영사하는 것이 참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지만 멸사봉공도 참 공이 못 된다. 정말 공은 사가 되고 정말 사는 공이 된다. 그것은 공사의 대립을 초월해서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공사를 초월하는 사람이면 그는 두 손에 공과 사를 다쥐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삶도 아니요 죽음도 아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고로 살 수도, 죽을 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7.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배경에 있다. 그 서는 동산, 그 가을, 그 하늘, 그 바람에 있다. 또 기러기를 그 깃이나 소리를 볼 때에는 아름답달 것이 별로 없지만, 그것을 푸르고 한없이 넓은 가을 하늘가에 날려놓고 그 한 소리 길게 뽑는 것을 들을 떄는 공작이 봉황이 꾀꼬리가 떼로 몰려든가 해도 비길 바가 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기러기의 아름다움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오 그 사는 배경에 있따.

8.
그럼 무엇이 아름다움이냐? 첫째 알아야 할 것은 아름다움은 하나를 나타냄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옷이 아름답다면 곧 그 옷감이 무언지 그 빛깔이 어떤지 그것부터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은 그 내용되는 자료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나타내는 방법에 있다. 조화에 있다. 조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됨이다. 전체의 각 부분부분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 곧 조화다. 조화의 화는 하나됨이다. 저고리와 치마가 따로 놀아서는 아니 되고, 오소가 신발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양복에 미투리를 신어도 보기 싫거니와 일하는 베잠방이에 구두를 신어도 보기 싫다. 그래 짚신엔 제날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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