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을 전혀 몰라도 재밌습니다. 물론 알면 더 재밌겠지만... 아메카지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zhA4adPiIOs
일본인의 미의식
자기 나라 패션도 아닌 아이비 들여와 문화 퍼뜨리고 나중엔 자기네가 직접 만듦
또 다른 예: 돈까스
일본 패션사
청바지
프레피룩
잡지를 통해 패션 전파
일본적 패션의 확립 / 꽁데가르송: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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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지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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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화혼한재
16세기 이후 화혼난재
19세기 후반 - 화혼양재
어느정도 도래문화 커지면 거부반응 일으킴.
임란 이후 성리학 주자학도 일본의 국학으로 흡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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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나베 쿄우사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197124
일본의 19세기 목판화에 다양한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오른편 위로 털북숭이 인물의 머리털을 자르고 있고, 왼편에는 저울 아래로 문서가 불타고 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초록색과 빨간색 괴물들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뿔을 뽑거나 잘라내기도 하도 옷을 강제로 입히기도 한다. 거울을 보면서 망연자실한 괴물들도 있다. 이 그림은 무엇을 묘사하고 있을까? 화가는 어떤 역사적 현실을 반영해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 1은 일본의 전통적 니시키에(錦繪)다. 니시키에는 목판으로 프린팅한 에도시대의 다색 그림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17세기부터 일본에서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가 발달했는데, 특히 1760년대부터는 색깔별로 목판을 따로 만들어 순차적으로 찍어내는 방식인 니시키에가 인기를 끌었다. 이런 목판화는 메이지시대(1868-1913)에 크게 유행하였다. 작품들은 풍속화가 많은데, 특히 해외에서 들어온 새로운 물품과 패션, 철도와 같은 교통수단 등이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 작품을 제작한 이는 카와나베 쿄사이(河鍋??)다. 그는 전통 일본화를 공부하였지만, 점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화풍을 지향했다. 격식을 무시하고 과장된 표현을 섞은 캐리커처에서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일본 문화사를 통해 특징적으로 발달한 ‘망가(漫畵)’의 선구자였다고 볼 만하다.
그림 1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림이 묘사하는 것은 지옥이다. 털북숭이 인물은 다름 아닌 염라대왕인데, 난처한 표정을 한 채 머리털이 잘리고 있다. 그 앞으로 염라대왕이 벗어놓은 붉은색 도포를 집어 드는 이가 있고, 반대쪽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한 노파가 염라대왕을 위해 양복과 신사 모자를 들고 이발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서있다. 왼편의 저울은 저승에 온 자가 생전에 지은 죄의 무게를 재는 도구이며, 그 아래에서 불타고 있는 문서들은 죄상을 기록한 자료다. 괴물들은 염라대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을 텐데, 이제는 뿔을 제거당하고 있고, 염라대왕과 마찬가지로 전통 복장 대신에 서양 옷을 강제로 착용당하고 있다. 괴물들 가운데 일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뿔 잘린 볼품없는 자신들의 얼굴만 확인할 뿐이다. 죽은 자의 생전 행동을 보여주는 업경(業鏡)인데, 몸뚱이조차 양복에 가려져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화가는 지옥도를 희화화함으로써 자신이 살던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때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가 서구화를 빠르게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전통적 풍습을 서구에서 도입한 새 풍습으로 교체하는 제도들이 우후죽순으로 마련되었다. 예를 들어서 1871년에는 앞머리를 밀고 후두부에 상투를 트는 존마게(丁?)라는 전통적 머리모양이 금지되었다. 1876년에는 군인과 경찰을 제외하고는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불법화되었다. 그림 1은 서구화라는 급류에 휩쓸린 일본 사회를 비유했다. 뿌리 깊은 전통적 가치가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상황, 그리하여 본연의 몸체와 기록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을 화가는 조롱하고 있다. 화가가 당시의 변화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반세계화’주의자였는지, 아니면 다만 변화와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본 ‘대안 세계화주의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당시 일본이 얼마나 급속한 전환기를 겪고 있었는지를 그림 1이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 사회와 경제의 대전환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에도막부 말기인 1853년 미국의 소함대가 도쿄 만에 들어서면서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개방 압력을 높여 왔지만, 일본은 네덜란드에만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런데 페리 제독이 이끄는 증기선 - 흑선(black ship) - 들은 통상을 교구하는 대통령의 친서를 내미는 한편 함포 사격으로 무력시위를 하면서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이듬해 페리의 함대가 다시 찾아오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교역에서 최혜국대우를 얻었고, 미국 함대에 연료를 공급할 수 있도록 두 항구를 여는데 성공했으다. 난파한 미국인의 안전귀환도 보장받았다. 뒤이어 일본은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유사한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인들에게 페리 제독은 어떤 인상으로 인식되었을까?
이다. 이 그림도 만화적 묘사를 보여주는데, 페리 제독은 일본의
전설에 등장하는 덴구(天狗)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덴구는 깊은 산골에 살면서 마계를 지배하는 요괴로, 원래 옛날에 벼락이 쳤을 때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개라고 한다. 덴구는 보통 붉은 얼굴에 높은 콧대를 지니고 수행자 차림을 하는데, 페리 제독의 초상이
영락없이 이 이미지다. 페리 제독 일행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원하는 이익을 강제로 취할 요괴처럼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졌나
보다.
페리는 이런 모습으로 자신이 일본인에게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일본의 대외개방이 기술진보와 경제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시킬 만한 물품들이었다. 그중에서 일본인들의
눈을 가장 확실하게 사로잡은 것은 미니어처 기차였다. 미국 선원들은 실물의 1/4 크기로 제작한 미니어처 기차와 100m에
달하는 철로를 요코하마 영빈관 뒤에 설치하였다. 그림 3은 근대화 혹은 ‘문명’의 궁극적 상징인 증기기관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기심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차를 운행하고 통제하는 미국인들과 시승하고 관찰하는 일본인들의 상호작용이 호의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2의 페리 초상이 보여주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페리의 입항으로 촉발된 일본의 개방은 일본 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두고 막부세력과 반대세력이 충돌하였는데, 1866년 막부가 패배함으로써 700년 넘게
지탱해온 체제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새로 들어서게 되었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서는 서양 세력의 확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개화파 중에는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의 정신은 보존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가장 많았다. 청나라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일맥상통하는
관념이었다.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서양을 배척하자는 양이(洋夷) 사상이 퍼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힘을 잃어갔다.
오히려 화혼양재로서는 개혁이 불충분하다는 주장이 확산하면서 전면적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일본 정부는 우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폐지하였고, 영업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했다. 1870년대부터는 식산흥업정책을 실시했다. 서구로부터 근대적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고, 근대적 경영자와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국가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을 통해 일본은 빠르게 공업국으로 변모해갔다. 예를 들어 1886년에 일본은 국내 소비용 면직물의 2/3를 수입에 의존했다. 그림 1에 등장하는 의류도 화가가 수입품을 가정해 그렸음직하다. 그러나 1902년이 되면 면직물 생산을 완전히 국산화했으며,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전 세계 면직물 무역량의 무려 1/4을 일본의 수출이 담당하게 되었다.
1885년 일본의 개혁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탈아론(脫亞論)에서 일본은 청과 조선이라는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고 서양 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차별화 전략을 천명한 바 있다. 그의 주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바로 국가주도형 공업화 전략이었다.
송병건 성균관대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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