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 재단 이사장 출신 딘 러스크 국무장관 "38선, 내가 그었다" (feat. 문명자)
딘 러스크 국무장관 "38선, 내가 그었다"
나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을 역임했던 딘 러스크에게 "한국이 언제 통일 되겠는가?" 라고 질문한 일이 있다.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살아서는 못 본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45년이 흘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러스크 국무장관과 얘기하던 중에 38선 문제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38선은 내가 그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4년 나는 미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의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8월 10일 일본 측이 자신들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미.영.소 3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날 밥 늦게 정책과에 긴급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일본군에게 제시할 항복 문서중 한반도와 극동지역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서 30분 안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책과장은 본스틸 대령이었고 나와 매코맥 대령이 과장 보였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소련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그어 그 이남으로는 소련군의 진주를 저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북위 40도로 분할하면 너무 북으로 치우쳐 소련 측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고 38도선 정도라면 절반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38선이 이남에 수도 경성과 미군 포로수용소, 주요 항만시설등이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유리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38선을 그어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초안을 30분 만에 작성해 전략 정책단에 보냈는데 소련 놈들이 그걸 수용해서 뒷날의 38선이 된 것입니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한민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 육군 일개 대령들이 30분 만에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와 관련된 국무성 문서가 공개되어 이를 [동아일보]에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백악관 앞에서 같이 5.16 반대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의 그 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바가 많다. 박정희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회유해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를 지내던 신병현 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본격화한 회유공작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 뒤 귀국해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 보좌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최경록 장군도 "선배님, 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라는 박정희의 간청에 점차 흔들리더니 결국 귀국해 런던대사-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최 장군이 민주당 정권에서 육군 참모총장직에 있을 때 박정희가 관련된 영관급 쿠데타 음모가 적발 되었는데 최경록은 그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최경록이 5.16을 반대했지만 이 같은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 박정희는 그를 심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들어가도 다른 백악관 시위 동지들은 만나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최경록과는 가끔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적선동 옛날 한옥 집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백악관 시위 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것은 강영훈이라 하겠다. 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하고 꿋꿋하게 생활했다. 강영훈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 때문에 손가락이 다 헐 지경이었다. 이 같은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결국 70년대 들어 강영훈은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해 미국 언론계, 학계 등에 친 박정희 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었던 몇몇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 둘 만하다. 장면 정권 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와 나중에 야댱 당수를 지낸 이철승이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턴에 와 있다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급보를 접하자 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부치고 "대사님! 미군을 동원 시켜야 합니다" 하면서 열을 올렸다.
그런데 5.16이 기정사실화 하고 CIA 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환영 파티가 열렸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필자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
"이 의원, 와이셔츠 걷어부치고 미군 동원시키라고 하던 분이 여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김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우리 김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 김부장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 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잘 아는 그 인연을 통해 권력의 신주체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 때 이석기는 자기 지역구인 부여를 그에게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 그 점에서는 이철승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그 자리에는 왜 왔겠는가.
5.16 당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송요찬의 떳떳하지 못한 처신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4.19가 발발하자 계엄 사령관에 취임했는데,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집요한 정군운동에 밀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루는 송요찬이 저녁 늦게 남편 최동현을 급히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왔는데 별로 기분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이 무슨 일로 당신을 불렀어요?"
-"최기자는 장도영이하고 같은 평안도 출신인데 무슨 닿는 선이 없는가 합디다"
"그래서 뭐라 했어요?"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라기는? '그런 선 없어요 하고 딸기만 한 접시 먹고 왔지요."
5.16 후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명목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장도영과 닿는 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박정희에게 다가갈 길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가 일으킨 하극상으로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밀려나 미국에 와 있는 처지면서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쥐자 다시 그 밑으로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송요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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