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을 쓴 보에티우스나 중세의 이단이었던 고트샬크의 주장처럼, 신이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소부재(無所不在), 유일무이(唯一無二) 하다면 필연적으로 그 피조물인 일체 만물에게 자유의지란 없다; 그것이 또 철학적, 신학적으로 응당 올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에 동양 베단타의 해석을 곁들이면, 신과 피조물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므로 (불이일원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요컨대, '자유의지-운명론'의 숱한 논쟁들은 관점의 문제로 귀결된다
중세의 대표적 신학적 지성인 에리우게나가 비판했던 중세의 대표적 '이단' 고트샬크는 ‘이중예정설double predestination’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지옥에 갈지 천국에 갈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자유란 없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을지 아니면 짬뽕을 먹을지 이도 아니면 볶음밥을 먹을지 고민하고 있지만, 실상 이러한 자유로운 고민은 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인간에겐 자유가 없다.
이러한 고트샬크의 주장은 나름 합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신은 모르는 것이 없다. 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그 부분에서 신은 무식한 존재가 된다. 무식한 신이란 신의 본질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의 미래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미래 앞에서 신은 무식해서는 안 된다. 신이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 진리라면, 인간의 미래는 이미 결정됐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우리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선택을 해도 다 무용지물이다. 결국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 철학자 보에티우스 역시 고트샬크보다 앞서서 비슷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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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트샬크의 기독교적 변증론에 힌두교 베단타적를 섞으면, 한층 더 흥미로운 철학적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
즉, 이 세계라고 하는 한편의 마야(maya)를 전개하는 대상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고, 브라흐만인 동시에 아트만이며, 음인 동시에 양인, 유일무이의 一者다.
힌두교 베단타의 '네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는 경구와 불교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이를 잘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모든 이분법을 초월했으며, '과거-현재-미래'라는 3차원적 시공간에 얽매여있지 않은 존재의 근원, 브라흐만은 아트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고 있지만, 이 세계라고 하는 연극에 임하는 아트만은 오직 '현재'라고 하는 투박한 프리즘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해나갈 수밖에 없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운명, 필연, 숙명, 또는 카르마지만,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한 자유의지인 것이다.
시계추의 관점을 5차원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소부재(無所不在),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브라흐만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절대자가 의도한 그 필연적 결과물이며, 모든 것은 정해져있지만, 3차원 자아, 에고, 개체, 아트만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어디까지나 자유의지의 소산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베단타는 이 겉보기에 상충되어 보이는 양자가 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불이일원론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8B%A8%ED%83%80_%ED%95%99%ED%8C%8C
불이일원론
베단타 학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일절대의 브라만만이 참된 실재인데 개인아인 아트만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직관(直觀)하게 될 때 그 즉시로 최고아(最高我)인 브라만과 완전히 동일해진다.[1] 베단타 학파는 이러한 절대적 일원론적 존재 모습이 우주의 진실된 모습이며, 현상계의 다양성은 마야(환영 · 幻影)로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본다.[1] 따라서 베단타 학파에서는 무지(無知 · Avidyā · Ignorance) · 무명(無明 · Avidyā) 또는 망상(妄想 · Avidyā · Delusion)이란 아트만과 브라만이 분리되어 있다는 앎(인식 · 지식)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곧 신(브라만)을 알지 못하는 상태와 동일한 것이며 또한 자신의 진정한 자아(아트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와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즉 신을 아는 것은 곧 자아를 아는 것이고 이것은 곧 신과 자아가 하나임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이 앎을 아트마 즈냐나라고 한다. 그리고 아트마 즈냐나는 오직 사마디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단타 학파에 따르면, 원래 무수한 차별이 있는 현상 세계를 창조한 신(이슈바라 · 自在神)은 원래 무차별 · 무속성의 브라만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무지(無知)로 인해 그 같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1] 우주는 요술장이가 만들어낸 것과 같은 환영(마야)의 세계, 즉 무실체의 세계이다.[1] 세계의 환영성을 알게 되면 브라만과 아트만이 본래 동일한 존재라는 자각, 즉 범즉아(梵卽我) · 아즉범(我卽梵)의 범아일여의 진리를 곧바로 깨닫게 되고 그 즉시로 해탈에 도달한다고 하였다.[1]
이와 같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둘이 아니며 동일한 하나의 존재라는 베단타 학파의 주장을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한다.[1] 이 불이일원론의 철학에는 불교의 영향이 있어서 다른 힌두교 철학 학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결국 힌두교 사상의 주류가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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