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카 유지가 말하는 일본의 성씨 문화: 전통적으로 일왕이 수여했던 일본의 성씨; 가야계 -> 백제계 -> 일본계로 이어지는 일본 왕실사; 고분시대 일왕 무덤들에서는 속실 등 가야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는데, 이는 5세기 이후의 일왕가와는 다른 지배계층이 일본을 지배했다는 뜻 ㅡ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고분 발굴 작업을 중지시켰다; 제30대 일왕 비다쓰는 575년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 33대 스이코 일왕은 백제옷을 입었다고 부상략기에 적혀있다; 30대 비다쓰의 손자인 34대 조메이는 백제대례, 즉 백제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신찬성씨록에 백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는 조메이가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으며, 스스로를 백제인으로 칭했다고 적었다; 쇼토쿠 태자의 스승은 고구려계 승려; 34대 조메이의 손자이자 소가씨를 몰아낸 38대 덴지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인가: 대마도에 백제성 짓고, 27,000여명을 백제에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고 (660-663년 3년 동안 일본서기의 주인공은 일왕이 아닌 부여풍), 한인 (백제인)이라 불렸으며, 망한 백제인들에게 백제의 관직을 그대로 주었다는 부분에서 그렇게 추측이 가능; 40대 덴무는 이전 왕들과는 다른 신라계라는 추측이 있는데, 실제로 에도시대 때 일왕가는 40대 덴무부터 48대 일왕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716년 사이타마에 설치된 고려군에 2016년 아키히토 일왕이 일왕으로는 최초로 참배했다; 백제계에 의해 751년에 동대사가 준공되었고, - 백제왕 경복이 758년의 동대사 대불건립을 위해 900냥을 헌납 - 같은 해인 758년에 나라에 신라군이 만들어졌다; (일왕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언급한) 50대 간무부터는 백제계 후지와라씨의 도움으로 다시 백제계인 간무가 일왕으로 군림하여 헤이안 시대를 열었으며, 그 핏줄이 현재까지 일왕가에 이어져온다; 나라현 곳곳에 있는 쿠다라 (백제)라는 지명; 일본의 사와스 축제에서 들을 수 있는 말 사다바의 어원은 "찾아봐"; 일본축제에서 듣는 말 '왓쇼이' (신이 탄 수레)는 조선통신사가 전래한 한국말 "왔써"에서 왔다; 미야자키현 서정창원에는 백제유물이 그득하다
일본 제30대 천황 비다쓰 덴노 | 敏達天皇 민달천황 | |
출생 | |
사망 | 585년 9월 14일 |
능묘 | |
재위기간 | 제30대 천황 |
4. 백제와의 관계[편집]
비다쓰 덴노의 손자가 '백제왕'이었다는 기록이 《신찬성씨록》이라는 일본의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비다쓰의 손자인 '백제왕'은 제34대 조메이 덴노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하단에 후술한다.
이 통사에는
“비다쓰 덴노가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
비다쓰 덴노가 백제 왕궁을 지었던 나라(奈良)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애초에 백제계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었기에 비다쓰 덴노는 그의 궁궐인 '백제 왕궁'을 당당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비다쓰 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
이는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이 나라 지역에서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참고로 33대 스이코 덴노의 남편이었던 비다쓰 덴노만 '백제 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후대 천황 또한 ‘백제 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쓰 덴노의 친손자인 조메이(舒明, 629~641년 재위)덴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일본서기》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조메이 천황은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천(百濟川) 근처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
즉, 조메이 덴노가 나라 지방 백제천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덴노 또한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드디어 ‘백제 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 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 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 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大化改新の 眞相》. 1967.
5. 신라와의 관계[편집]
신라와는 관계가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평왕 치세에 신라가 일본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단, 《삼국사기》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해동기》를 인용해
가야멸망전 伽倻滅亡戰 | ||
시기 | 562년 7월 ~ 9월 | |
장소 | ||
원인 | 백제의 약화로 인한 가야의 외교적 고립과 신라의 팽창. | |
교전 세력 | 가야·백제·왜 (방어자) 패 | 신라 (공격자) 승 |
주요 인물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백제 1,000여 명 전사 가야, 왜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가야의 소멸. 남부지방의 백제·왜 세력 축출 | |
영향 | 신라 전성기 구도의 완성, 삼국시대 후반기 구도 정립 |
부장군 니에와 그 부하들의 가족을 잡은 신라 장군[17]은 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보고 니에에게 "네 목숨이 소중하냐? 아내가 소중하냐?"고 이야기했고, 니에는 당연히 목숨이 소중하다며 아내와 여자들을 바쳤다. 그러자 신라 장군은 니에는 풀어주고 옥외에서 우마시히메를 능욕했다. 우마시히메는 나중에 풀려나서 니에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니에가 그녀와 말을 나누려 하자 "날 팔아치우고 살아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말을 거냐"며 일갈했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또 이 신라 장군은 포로가 된 장군인 츠키노 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에게 칼을 대고 하카마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왜국의 장군은 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외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이키나는 끝까지 "신라의 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반대로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화가 난 신라군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도 같이 죽었는데 아버지의 유해를 안은 채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일본서기》 자체가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일본에 좋은 쪽으로 과장한 서술이 많은 와중에 유독 여기서는 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런 내용들이 기재된 이유는, 아마도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왜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기록을 그대로 남긴 게 아닐까 싶다.
일본 제33대 천황 스이코 천황 推古天皇 | |
출생 | |
사망 | |
능묘 | |
재위기간 | 제33대 천황 |
이유야 어쨌든 백제의 외교문서 강탈 사건은 영락없는 외교적 횡포였기 때문에 614년까지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다가 재개된다.
이후 620년에는 《천황기》(천황의 기록), 《국기》(국가의 기록) 등의 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앞에서 설명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과는 별개로 백제의 선진 문물들은 계속 받아들였는데 《부상략기》(扶桑略記)[5]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
일본 제34대 천황 조메이 천황 舒明天皇 | |
출생 | |
사망 | |
능묘 | |
재위 |
1. 소개[편집]
소가씨의 피를 잇지 않은 비다츠 덴노 계열의 황족 중에서 최초로 황위에 오른 천황이자 현 일본 천황 가문의 직계 조상이다.[1]
비다츠 덴노의 아들인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와 그의 이복 여동생이자 아내인 누카데히메 황녀(糠手姬皇女)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로, 부모가 모두 비다츠 덴노의 자식인 강력한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오시사카 황자는 비다츠 덴노 사후에 31대 요메이 덴노의 태자[2]로서 차기 황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인물이었으나, 소가씨의 조정 내 영향력 확대와 황위 계승상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한 대신 소가노 우마코의 공작으로 인해 결국 황위 계승이 좌절되었다.
아버지가 천황이 되지 못했고, 스이코 덴노 즉위 연간에는 쇼토쿠 태자가 차기 황위 계승자로 낙점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무라 황자는 사실상 황위 계승상에서 거리가 먼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622년 음력 2월 5일에 쇼토쿠 태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무슨 연유인지 스이코 덴노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스이코 덴노 사후에 황위를 계승할 후보자를 정하는 것을 놓고 조정 내의 여러 씨족들 간에 알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가필이 의심되기는 하나, 《부상략기》나 《성덕태자전력》 등 후대에 저술된 사료에는 쇼토쿠 태자가 죽기 전부터 타무라 황자가 부각되기 시작하는 기사들이 보인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쇼토쿠 태자 말년 즈음에는 조정 내에서 타무라 황자가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쇼토쿠 태자 또한 혈통상으로 완벽하고, 현실적인 힘을 갖기 시작한 타무라 황자의 황위 계승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인정했던 것으로 추정한다.[3]
2. 황위 계승 분쟁[편집]
임자(6일)에 천황의 병이 심해져서 나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타무라 황자를 불러
“황위에 올라 나라의 기초를 닦고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원래 안이하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고 잘 살펴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
고 말하였다. 또 같은 날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를 불러 “너는 아직 미숙하다.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도록 하라.”
고 타일렀다. - 《일본서기》 권 22 스이코 덴노 36년 3월 임자 조
위 내용을 보면 일방적으로 타무라 황자가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읽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전한 유언도 그가 황위 계승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스이코 덴노의 유언은 한 사람을 후보자로 확정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후보자로 지명한 것이기 때문에, 유언의 내용에 따라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를 놓고 군신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소아하이신이 대신이었다. 그는 혼자 후계를 정하려고 하였으나, 군신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안배마려신과 상의하여, 군신들을 대신의 집에 모이게 하여 향응을 베풀었다. 연회를 끝내고 산회하려고 할 때 대신이 안배신에게 명하여 군신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사가 없다. 만일 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내란이 일어날까 걱정이다. 지금 어느 왕을 후계로 해야 하는가. 천황이 와병 중일 때 타무라 황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대임이다.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타무라 황자여, 신중하게 생각하라 태만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그대는 혼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라 삼가며 그릇됨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 천황의 유언이다. 지금 누구를 천황으로 할 것인가?"
그때 군신이 침묵하여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때 대반경련이 나아가
"천황의 유언을 따라야 합니다. 군신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고 말했다. 이에 안배신이
"무슨 말인가. 본심을 밝혀라"
라고 말했다. 이에 (대반경련이)
"천황이 어떤 생각에서 타무라 황자에 ‘천하의 통치를 위임하는 일은 대업이다. 태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에 따르면 황위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때 채녀신마례지, 고향신우마, 중신련미기, 난파길사신자 등 4명의 신하가
"대반련의 말에 전혀 다른 이의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허세신대마려, 좌백련동인, 기신염수 3인이 나아가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 왕, 이분을 천황으로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소아창마려신만이 혼자
"신은 지금 당장에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생각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군신이 화합하지 못하여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일본서기》 권 23 조메이 덴노 즉위 전기 스이코 덴노 36년 9월 조
위 기사에서는 당시의 대신 소가노 에미시가 원래 독자적으로 후보를 선정하려 했으나, 군신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황위 계승 자체는 황실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키나이(기내) 지역의 씨족들의 이해관계도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는 군신들 간에 큰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회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급작스러운데다 술자리가 파하고 돌아가려던 찰나에 갑자기 의견이 제시되었고, 군신들이 유조에 따라 두 후보자를 동시에 지지한 점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를 지지해야 했던 소가노 에미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이코 덴노의 붕어 전후로 줄곧 타무라 황자를 지지했는데, 군신회의에서도 처음부터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게끔 유도하려 했으나 회의에 참가한 군신이 5대 3의 비율로 두 황자를 지지하자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틋 보면 타무라가 앞선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야마시로노오오에를 지지하는 의견이 있었다는 점 자체가 군신회의의 실패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군신회의에서 의견 합의를 도출해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소가노 에미시는 회의를 파했는데, 며칠 후에 회의의 결과를 전해들은 야마시로노오오에는 회의에서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는 군신의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부인 소가노 에미시에게 사자를 보내 그의 뜻을 듣고 싶다고 전했다.
이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반구궁에 있으면서 의논한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삼국왕, 앵정신화자고 두 사람을 보내 몰래 대신에게
“전하여 듣건대, 숙부는 타무라 황자(田村皇子)를 천황으로 삼으려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서서 생각해도, 앉아서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바라건대 분명하게 숙부의 생각을 알고 싶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전하는 말을 듣고 혼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배신, 중신련, 기신, 하변신, 고향신, 채녀신, 대반련 등을 불러 상세히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의 말을 전했다. 이윽고 또 대부들에게
“그대 대부들은 함께 반구궁에 가서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에게 ‘어찌 신하인 저 혼자서 후계를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군신에게 말할 따름입니다. 군신들은 유언과 같이 타무라 황자(田村皇子)가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하며 다시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라고 모두 말합니다. 이것이 군신의 뜻입니다. 신의 혼자 생각이 아닙니다. 신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더라도 삼가 두려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얼굴을 뵙는 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했다고 전하여라.”
라고 말했다. 이에 대부들은 대신의 말을 듣고 반구궁으로 갔다. 그리고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대신의 말을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에게 전하게 했다. 그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여러 대부들에게
“천황의 유언은 어떠한 것인가?”
라고 물었다. (대부들은)
“신들은 깊은 것은 모릅니다. 오직 대신의 말에 따르면, 천황이 병석에 누워있던 날 타무라 황자에게 ‘경솔하게 장래의 국정을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그대 타무라 황자는 신중하게 말하고, 태만해서는 안된다.’라고 명을 내리고, 다음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는 ‘그대는 아직 어리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르라.’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가깝게 모시고 있었던 여러 여왕 및 궁녀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왕이 분명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또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이 유언은 도대체 누가 들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기밀이기 때문에 신들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다시 대부들에게
“친애하는 숙부가 마음을 써서 사자 한 사람만 보내지 않고 중신들을 보내 깨우쳐 주셨다. 이것은 큰 은혜다. 그런데 지금 군경이 말하는 천황의 유언은 내가 들은 것과 조금 다르다. 나는 천황이 와병 중이라는 것을 듣고 달려가 궁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중신련미기가 궁 안에서 나와 ‘천황이 부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아가 내전으로 향했다. 율외채녀흑녀가 뜰에서 맞이하여 대전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근시인 율하녀왕을 위시하여 궁녀, 유녀 8인 등 모두 수십 인이 천황 옆에 있었다. 또 타무라 황자도 있었다. 천황은 병이 위중하셔서 나를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율하녀왕이 ‘부르신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천황이 몸을 일으켜 ‘짐은 덕이 없는 몸으로서 오랫동안 대업을 맡아왔다. 지금 명운이 다하여 병을 피할 수는 없다. 그대는 본래 짐의 심복이다. 총애하는 마음은 비할 데가 없다. 황위의 계승은 짐의 세대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 충실하여라. 그대는 어리더라도 삼가 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은 당시에 거기에 있던 측근들이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이 대은을 입어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가의 통치는 중대한 일이고, 나는 어리고 현명하지 못한데 어찌하여 대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숙부 및 군경들에게 상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기회가 없어서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이전에 숙부의 병문안을 하려고 왕경에 가서 풍포사에 묵은 적이 있다. 이 날 천황께서는 팔구채녀유녀를 보내 ‘너의 숙부인 대신은 항상 너를 걱정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황위가 그대에게 갈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러니 삼가고 자중하라’고 명하셨다. 전에 틀림없이 이러한 일이 있었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어찌 천하를 탐하겠는가. 오직 들은 것을 밝히는 것뿐이다. 천신지기가 함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천황의 유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대신이 보낸 여러 경들은 원래 신성한 창의 가운데를 잡는 것처럼 공정하게 주상하는 사람들이니 숙부에게 잘 말씀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가노 에미시는 회의에 따라, 군신의 의견은 타무라 황자의 옹립으로 통일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스이코 덴노의 뜻이었음을 강조했다. 반대로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는 자신이 유조를 들었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대왕(오오키미)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언의 올바른 뜻을 알고 싶다고 전했으나,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삼국왕과 앵정신을 군경과 함께 대신에게 보내서
“대답을 듣고 싶다.”
고 말하도록 시켰다. 그러자 대신은 기신과 대반련을 보내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전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어느 왕을 가볍게 여기고 어느 왕을 중하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며칠 후에 야마시로노오오에는 또 앵정신을 보내 대신에게
“전일의 일은 내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숙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겠는가?”
라고 말했다. 이 날 대신은 병이 나서 직접 앵정신을 만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대신은 앵정신을 불러, 안배신·중신련·하변신·소간전신·대반련을 보내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흠명(긴메이) 천황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경은 모두 다 총명합니다. 오직 신만이 현명하지 못하지만, 때마침 인물이 없는 때를 만나서 어긋나게 군신의 윗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황위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중대합니다. 전언하여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노신이 힘들어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유칙을 거스르지 말자는 것으로, 신의 사사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소가노 에미시는 계속 스이코 덴노의 뜻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하기를 꺼리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자기는 그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라면서 어찌 숙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냐며 태도를 유보했다. 이 시기에 야마시로노오오에가 황위 계승을 포기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타무라 황자의 황위 계승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타무라 황자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지지자였던 사카이베노 오미 마리세가 소가노 에미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리세는 전대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의 동생으로 소가노 에미시의 숙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이코 덴노 20년에 기타시히메[5]를 긴메이 덴노의 능에 합장하는 행사에서 "씨성의 본"[6]을 읊는 제관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대덕 사카이베노 오미 오마로의 존재로 볼 때, 스이코 조에서는 소가노 우마코 다음가는 중신이자 실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신회의에 앞서 소가노 에미시는 숙부인 마리세를 찾아가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지를 물었는데, 이는 그가 소가씨 내부에서 장로격인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대신이 홀로 경부마리세신에게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계자가 없다. 누구를 천황으로 세워야 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를 천황으로 하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황위 계승이 좌절되자 마리세는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던 소가씨의 막사를 파괴하는 등, 대대적으로 깽판을 친 뒤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이복형제인 하츠세베나카츠 왕의 궁으로 숨었다.
이미 대신은 안배신·중신련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경부신에게
“어느 왕을 천황으로 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경부신은
“일전에 대신이 친히 물으셨을 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새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크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갔다. 이때 소아씨의 일족이 모두 모여서 도대신을 위해 묘를 만들려고 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마리세신은 묘소의 막사를 부수고, 소아의 전가로 물러가서 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은 분노하여 신협군승우와 금직수적저를 보내
“지금 나는 그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친족의 의리로서 해칠 수는 없다. 다만 타인이 그르고 네가 옳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타인에 거슬러도 너를 따르겠다. 만일 타인이 옳다고 하고 네가 그르다고 하면, 나는 당연히 너를 등지고 타인을 따를 것이다. 이 때문에 네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틀어질 것이다. 나라도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 둘이 나라 일을 망쳤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오명이 될 것이다. 너는 삼가 반역을 일으키지 말라.”
고 말했다. 그러나 따르지 않고 마침내 반구로 가서 박뢰왕의 궁에서 머물렀다. 대신은 더욱 노하여 군경을 보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요새 마리세가 저를 배반하여 박뢰왕의 궁에 숨어 있습니다. 마리세를 내보내 주시면 그 이유를 추문코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마리세는 원래 성황이 좋아하셨다. 지금 잠시 와 있을 뿐이다. 어찌 숙부의 마음과 다를 것인가. 허물하지 말길 바란다.”
고 말했다. 그리고 마리세에게
“그대가 선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온 것은 몹시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대 하나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울 것이다. 또 선왕이 임종하실 때 여러 아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좋은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받들어 길이 훈계로 삼고 있다. 그래서 사사로운 정이 있어도 참고 원망하지 않는다. 또 나는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꺼리지 말고 여러 경들의 의견을 따라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말했다. 이때 대부들은 마리세에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그래서 마리세신은 의지할 바가 없어졌다. 이에 울면서 집에 돌아와 지낸 지 10여 일이 되던 날, 박뢰왕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이에 마리세신이
“나는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경부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보냈다. 경부신은 군사들이 왔다는 것을 듣고, 차남 아야를 데리고 문을 나가 걸상에 앉아서 기다렸다. 곧 군사들이 와서 내목물부이구비에게 목 졸라 죽이도록 했다. 그리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이들을 같은 장소에 묻었다. 다만 장남인 모진만은 니사의 기와집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그는 거기서 비구승 한 두 명을 범했는데, 비구승 한 명이 질투하여 그 사실이 밝혀졌다. 절을 포위하여 붙잡으려고 했으나, 도망하여 무방산에 들어갔다. 그래서 산을 수색했다. 모진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목을 찔러 산중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노래했다.
"무방산은 들어선 나무가 적어도 거기에 의지하려고, 모진이라는 젊은 분은 여기에 숨어 있었던가."
당시에는 한 씨족의 대표자가 죽었을 때, 일족 전체가 모여서 묘소를 조영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묘소 조영 뿐만이 아니라 차기 대표자의 족장권과 정치적 우위를 대대적으로 공인받는 관습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마리세의 자충수가 되었는데,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기 위해 모인 일족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소가씨 전체의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소가씨 전체에서 소가노 에미시의 족장권 승계를 공인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마리세는 결국 에미시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었다.
숙부가 자기 아버지의 묘소를 공격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소가노 에미시는 마리세에게 사자를 보내
"당신 때문에 우리가 후세에 역적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냐? 지금이라도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살려주겠다."
이에 소가노 에미시는 이 사태를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고했고,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는 마리세에게
"그대는 우리 아버지가 총애하던 신하였고, 그 뜻에 따라준 것은 고맙다. 근데 지금 그대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부탁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라."
그리고 이듬해인 629년 음력 1월 4일, 소가노 에미시를 중심으로 한 군신들은 타무라 황자에게 신새를 바치고 황위에 오를 것을 종용했다. 타무라 황자는 고사했으나 결국에는 군신의 뜻을 받아들여 즉위했다.
3. 즉위 이후[편집]
639년 조메이 덴노는 야마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 '백제천'이라 명명하고, 서쪽의 백성들에게는 궁을, 동쪽의 백성들에겐 절을 짓게 했으며, 640년 10월, 백제인 서직현이 조영을 책임졌던 백제궁이 완성되자 덴노는 거처를 옮기고 이듬해 겨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궁 북쪽에 빈궁을 지어 죽음을 애도했는데, 사람들은 이 궁을 '백제의 대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치세는 13년이었으며, 붕어했을 당시 나이는 49세였다. 백제에 대한 건 하단 후술.
그의 사후 황위는 그의 아내이자 조카인 타카라 황녀(후의 고교쿠 덴노, 사이메이 덴노)가 물려받았으며 그의 동생 코토쿠 덴노를 거쳐 그의 아들인 덴지 덴노와 덴무 덴노에게 상속되었다.
3.1. 백제와의 관계[편집]
《신찬성씨록》이라는 고대 기록에[7] "비다츠의 손자 '백제왕'"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조메이 덴노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조메이 덴노는 스스로를 백제인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百濟川) 강변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덴노 또한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전형적인 백제양식인 판축기법에다 백제식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쏟아졌다.
이 백제대사의 금당 기단 크기는 36미터와 27미터로(아스카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스카지는 21미터와 17.5미터)로 아스카 시대에 세워진 절들 중 가장 규모가 거대하다고 한다. 또 9중탑은 남아있는 기단의 한 변의 길이 30m, 높이가 2m가 넘어가기 때문에, 초석 등이 제대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높이 80m 급의 거대한 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규모는 현대 남아있는 일본의 거대하다는 절들조차 우습게 넘어서는 규모다. 7세기 무렵은 유독 동서를 가리지 않고 궁궐 건축이든 절 건축이든 초거대 규모로 짓는 경향이 있었는데,[9] 백제대사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드디어 ‘백제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초기에는 단순히 아스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이가 좋고 선진국인 나라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여겨졌지만, 최근 도래인들의 숫자와 영향력이 예상외로 거대했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과 같은 부류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규모와 영향력은 정계 중진까지 간섭할 정도로 거대했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츠 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 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 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大化改新の 眞相》. 1967.
한편 조메이 덴노와 '백제'와의 밀접한 관계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10] 어째서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직 없지만 적어도 조메이 덴노 시절 백제계들의 영향력이 일본 조정 내에서 굉장히 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백제계 도래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냐면 백제가 망하고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 백제계 도래인이 조정 내 실권 세력 중 하나였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덴노만 하더라도 후지와라 씨족과 도래인들이 세운 천황이라서 외가인 백제계들을 대규모로 고용했다고 한다. 후지와라,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 씨족에게 권력이 전부 넘어가 기록에서 사라지기는 하지만 나라가 멸망하고도 200년 이상이나 그랬다는 소리니 대단하기는 하다.
3.2. 즉위 전기의 문제점 : 압도적인 장문의 기사[편집]
일본 제38대 천황 덴지 천황 天智天皇 | |
출생 | |
사망 | |
능묘 | 야마시나릉(山科陵) |
재위기간 | 일본 황태자 |
제38대 천황 | |
2.1. 을사의 변으로 소가씨를 몰아내다[편집]
카마타리와 함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 밑에서 배우면서 당대의 권신으로 전횡을 일삼던 소가노 이루카를 도모할 계획을 상의하고 인재를 천거받았으며, 카마타리의 주선으로 이루카의 사촌이었지만 적대하는 관계였던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 石川麻呂)와 접촉해 그의 차녀인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蘇我 遠智娘)와 혼인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645년 6월 12일에 잇시(을사)의 변을 일으켜 이루카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2.2. 실권을 장악하다[편집]
649년 3월 17일에 좌대신 우치마로가 죽자 코토쿠 덴노 및 다른 공경들과 함께 애도했다. 소가노 히무카노 오미(蘇我日向臣)가 나카노오오에 황자의 장인인 이시카와마로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했다.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오오토모노 코마노 무라지(大伴狛連), 미쿠니노 마로노 키미(三國麻呂公), 호즈미노 쿠히노 오미(穗積嚙臣) 등을 보내 장인인 이시카와마로를 추궁했는데 그에게서 직접 천황을 뵙고 해명하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러다 코토쿠 덴노가 군사를 보내 이시카와마로를 죽였고,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처리 과정에서 이시카와마로가 결백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으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부인인 오치노이라츠메가 매우 슬퍼하다가 죽자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했다.
653년에는 민 법사(旻 法師)가 죽자 사신을 보내 조문하게 했으며, 이전에 코토쿠 덴노가 나니와노미야(難波宮)로 천도했었는데 나카노오오에가 다시 아스카노카와베노카리미야(飛鳥河辺行宮)로 천도할 것을 요청했으나 덴노가 거절하자 다른 공경들과 함께 아스카노카와베노카리미야로 옮겨 정치적으로 외숙부인 코토쿠 덴노를 고립시켰다. 654년에 코토쿠 덴노가 붕어하자 655년 어머니 고교쿠 상황을 다시 사이메이 덴노(斉明 天皇)로 즉위시켰고 660년에는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다.
2.3. 백제부흥운동 지원[편집]
661년 3월 4일 신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고구려가 왜국 조정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 부분은 백제 부흥군에 대한 교류나 지원이 고구려로 오기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662년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 귀실복신과 백제의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에게 여러 물품을 지원하면서 수군 170척을 보냈다.
663년 군사 27,000명을 보내 백제 부흥군과 합세하여 나당연합군을 상대하도록 했지만 결국 역사적인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은 대패하고, 지원군은 몰살되었으며 부흥군의 근거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왜국도 백제 부흥을 단념하고 한반도에 대한 직접 개입을 중단했으며, 이후 나당전쟁의 전조가 보이자 과거의 적이었던 신라와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신라와 사신을 주고받는 빈도수가 갑자기 늘어났으며, 신라의 중신 김유신에게 배를 선물하는 등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것이 무색하게 태도가 확 바뀌었다. 그리고 탐라국의 사신을 받고 견탐라사를 보내는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외교 다각화를 시도한 정황이 드러난다.
665년 백제의 남녀 400여 인을 오미국(近江國) 가무사키노코오리(神前郡)에 살게 했다. 그리고 나가토국(長門國)에 성을 쌓았으며, 쓰쿠시국(筑紫國)에도 오노성(大野城)과 기이성(基肄城)을 쌓게 했다.
666년 사에키노 무라지 고마로(佐伯連子麻呂)의 병문안을 했다. 이 해에 수도의 쥐들이 오미국으로 향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백제의 남녀 2,000여 명을 아즈마국(東國, 현재의 관동 지방)에 살도록 했다.
667년 3월 19일 오미국의 오미노오오쓰노미야(近江大津宮)로 천도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싫어하여 크게 비난했다고 한다. 7월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물건을 헌상했다. 8월 야마토국(大和國)에 행차했다. 11월 야마토국에는 다카야스성(高安城)을, 사누키국(讃岐國) 야마다노코리(山田郡)에는 야시마성(屋嶋城)을, 쓰시마국(対馬國)에는 가네다성(金田城) 등을 쌓았다.
2.4. 천황 즉위 이후[편집]
668년 가을 9월 12일 신라가 사탁부 출신 급찬 김동업 등을 보내 조를 올렸다.
669년 여름 5월 야마시나노노(山科野)에 사냥을 나갔다. 가을 8월 3일 다카야스 고개(高安嶺)에 올라 성을 쌓는 일을 의논했다. 겨울 10월 10일 공신 카마타리의 문병을 갔다. 16일 그가 죽자 후지와라(藤原)씨를 사성하고 19일에는 그의 집에 행차해 조서를 내리면서 금 향로를 하사했다. 또한 다카야스성을 쌓으면서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냈다.
670년 정월에 궁문 안에서 조정의 행사를 열었으며, 2월 호적을 만들어 도적과 부랑자를 단속했다. 카마후노코오리(蒲生郡)의 히사노노(匱迮野)에 가서 궁지를 살펴보고 다카야스성(高安城)을 수리해 쌀, 소금을 쌓아두었다.
671년 2월 여러 대신들을 임명했다. 9월 병이 위중해졌다.[6] 겨울 10월 호코지(법흥사)에 사자를 보내 여러 보물들을 불전에 올렸다. 17일 병이 더욱 위중해졌다. 음력 12월 3일 오미노오오쓰노미야에서 붕어했다.
67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올렸다. 겨울 10월에 신라가 사찬 김만물을 보내 조를 바쳤다.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일본서기》에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되는 '규해(糺解)'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부여규해가 또 다른 백제 왕자라는 설도 있지만 동일 인물이 맞다면 그 이름이 초명(初名)이거나, 자(字), 호(號)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으로 왜국으로 보내진 인질로 서술되었다.
다만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거의 동시대 사람인 김춘추도《일본서기》에서 인질이라고 서술되는데, 642년 고구려로 외교사절로 파견되었고, 647년에 왜국으로 갔으며, 1년도 채 안 돼서 다시 64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김춘추가 신라 내에서 차지한 입지를 보면, 인질로 파견될 인물도 아니고, 인질이 되었다면 1년도 채 안 돼서 빠져나와 당나라로 파견될 리도 없다.[5][6][7] 부여풍은 김춘추와 비슷한 시기인 조메이 덴노 3년 즉, 631년에 인질로 파견되었다고 적혔지만, 후에 백제가 멸망하고 왜왕이 백제로 송환하며 준 왜군 5천 명과 수하에 왜국 장군들을 거느리고 재건 운동에 투신한 상황을 짐작하면, 인질이라는 표현은 윤색이나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8]
형으로는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 차남 부여태, 3남 부여효, 4남 부여연이 있었으며, 동생으로는 《일본서기》에만 전해지는 부여충승(忠勝)과 부여새성(塞城)이 있었다.[9][10] 660년 백제 멸망(사비성 함락) 당시에는 왜국에 머물고 있었으며, 장남도 아니었으니 시대가 평안했다면 왕이 될 일은 없었겠지만 백제의 급속한 붕괴 이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부여융 등을 비롯해 의자왕의 왕자들이 당나라로 끌려간 뒤 국왕이 없어진 백제의 옛 대신들이 왜국에 요청해, 왜 왕실의 협조를 받아 귀국, 백제부흥운동에 나섰다.
2.1. 백제부흥운동[편집]
660년 8월, 전격적으로 봉기한 백제 부흥군은 순식간에 200여 개의 성이 호응[17]하며 당군을 몰아냈다. 당군은 13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상륙하여 일거에 백제의 웅진성과 수도 사비성을 점령했지만, 잔당 처리에는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벌써 대부분 병력이 본국으로 귀환한 상황이었다.[18][19]
그리고 여세를 몰아 9월 23일 옛 도읍 사비성을 포위하고, 또한 웅진성도 공격하며 옛 백제 땅을 거의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백제 부흥군은 성 20여 개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 무라지(狹井連)[20],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1]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22]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며,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일 뿐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이렇게 부여풍은 복신과 왜군 장수 타쿠츠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뜻대로 피성을 부흥운동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지만, 천도한 직후 김흠순과 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23]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 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두 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이 후술할 백제부흥군의 내분과 연결되었을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3년(햇수로는 4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요 세력인 복신과 도침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도침이 복신에 의해 살해당했고, 복신이 풍왕마저 죽이려 하자 풍왕이 선수를 쳐 복신을 살해했다.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오로지 한 뒤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굴실(窟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오면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였다”《신당서》 권 제220 <동이 열전> 제145
여름 5월 계축 초하루 이누카미노 키미(견상군, 犬上君)[24]가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려(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석성(石城)[25]에서 규해(糺解)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했다.
6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등이 신라(新羅)의 사비기노 강(沙鼻岐奴江)[26] 근처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할 바를 알지 못했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하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복신이 곧 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복신은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초기 부흥운동을 지도했고 백제부흥군이란 것도 복신이 쌓아올리고 부여풍은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였으므로 복신의 공백은 부흥군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내분에 빠져 전력을 소진한 백제부흥군은 663년 9월에 3만여 명에 달하는 왜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했다. 그리고 백강에서 당군과 대치했는데, 알고보니 당군을 이끄는 장수는 부여풍의 친형 부여융이었다.[27] 백제부흥군이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내세우자 당나라는 부여풍보다 직계 왕족인 부여융을 전향시켜 내세운 것이다.
결국 백제 - 왜국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부여융을 포함한 신라 - 당 연합군에 의해 대패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 등을 비롯해 학자에 따라선 왜국의 지원군을 포함한 백제 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간 시기를 백제라는 국가의 멸망으로 보기도 했다. 660년에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에서 예식진의 매국 행위로 의자왕이 끌려갔지만 사실 200년 전에도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이 털리며 한성백제가 멸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28] 660년의 멸망은 두 번째, 풍왕의 몰락이 실질적인 멸망이라고 본 것이다.
2.2. 고구려 망명[편집]
고구려로 달아난 뒤의 행적은 당나라의 장군 유인궤의 상소문에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가서 왜국에 있는 자기 동생 부여용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것이 유일하다.
이후 고구려도 연개소문이 죽고, 연씨 집안내에서 내전이 일어나 666년,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위기에 빠지는데, 노태돈 교수는 《속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해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저자세로 병력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666년 정월, 10월, 그리고 말 그대로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668년 7월에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협상해볼만한 일은 지원 요청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 고구려에는 일본과 연줄이 있는 부여풍이 망명해 있었고,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을 실제로 보낸 전례도 있었으므로 고구려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는 주장. 하지만 일본은 이미 백강 전투에서 병력을 날려먹은데다 지리적인 거리도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에서 발을 빼서 나당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했고, 한편으로는 성을 쌓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중이었다.
결국 부여풍은 자신이 이끌던 백제부흥군의 패망 5년 뒤인 668년 9월 21일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 바람에 결국 포로로 잡혀서 당나라에 압송되었고, 영외(嶺外)로 유배를 갔다. 이후의 생애는 전해지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부여풍이 다시 도주해 일본에 갔다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왜국에 있었다는 풍왕의 동생 부여용에 대해서는 부여선광[31]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다른 백제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
3. 여담[편집]
- 그의 아들 중 부여사(扶餘絲)는 지금 일본의 나라현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정쟁에 휘말려 규슈 미야자키 현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부여사의 후손으로 추정[32]되는 부여정가(禎嘉)는 스스로 백제왕을 칭하며 불교신앙, 건축술, 농업 기술 등을 전파했지만 718년 (아마도 신라의) 자객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부여화지와 함께 전사하고 만다.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조.
- 이 해(643년)에 백제의 태자 여풍(餘豐)이 꿀벌 둥지 네 개를 미와산(三輪山)에 풀어 사육하였다. 그러나 결국 번식시키지 못하였다.
- 한국 대체역사소설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 현대인 주인공이 부여풍에게 빙의하여 고생 끝에 망했던 백제를 되살리고 오히려 신라를 멸망시키며 고구려 왕위를 선양받아 삼국을 백제의 깃발 아래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다.
일본 제40대 천황 덴무 천황 天武天皇 | |
출생 | 631년? |
사망 | |
능묘 | 히노쿠마노오오치능가메야마릉(檜隈大內陵) |
재위기간 | 일본 왕태제 |
제40대 천황 | |
1. 개요[편집]
일본이라는 국호, 천황이라는 군주명을 비롯해 전근대 시절 일본의 체제를 완성시킨 인물이자 초기부터 현재까지 천황이 별 실권을 쥐어본 적이 없는[3][4]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강력한 전제 권력을 행사한 천황이었다.[5]
천년이 넘게 일본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육식금지령으로도 유명하다.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 금종사)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로 유명한 대불전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대불전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8]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기사
1. 개요[편집]
백제 중흥의 명군이었던 무령왕의 후손을 모후로 둔 천황으로 간무 헤이시로 대변되는 타이라 씨족의 조상이었다. 타이라노 기요모리의 헤이케나 가마쿠라 막부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호조씨,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걸출한 영웅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대표적인 타이라의 혈통이었다.
2.3. 헤이안 시대를 열다[편집]
헤이안 천도 이후 간무 덴노는 관제 및 군제와 토지 문제의 변혁을 통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율령제의 정비 및 통치의 안정을 꾀했으며, 그에 따라 정부 조직과 기능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런 천도와 제도 정비 과정에서 자신의 부황인 코닌 덴노의 옹립에 크게 기여했던 후지와라 가문을 신임하여 중용하고,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이했다. 특히 '후지와라 북가'의 인물들을 발탁했는데, 그 덕에 헤이안 시대에는 천황가와 강대한 귀족 후지와라 가문 간의 협치가 계속 이어졌고, 후지와라 씨족 중 북가가 융성하게 되었다.
정부 조직과 기능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간무 덴노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를 동북의 에미시에 파병했으며, 좌대신 후지와라노 우오나를 파면한 후, 규슈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간무 덴노는 상경을 허락해 후지와라노 우오나는 수도에서 사망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당시 후지와라 일족은 힘이 강한 외척이었지만 흔히 헤이안 시대하면 떠올리는 막나가는 세도 정치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지와라노 다마로가 우대신이 되었는데 당시 좌대신과 우대신 자리가 비어 있어서 간무 덴노가 권력을 직접 행사하고 있었다. 우대신이 사망한 뒤 후지와라노 고레키미가 새 우대신이 되었고, 덴교의 지도 아래 엔랴쿠지가 건설되었다.
간무 덴노는 한창 나라(헤이조쿄)에 있다가 나가오카를 거쳐 나중에 교토(헤이안쿄)로 천도한 것이라 나라 시대의 마지막 천황이기도 했다.
3. 백제와의 관계[편집]
"간무는 백제인이다."
교토에는 간무 덴노의 어머니인 백제계 여인과 그 조상들을 섬기는 신사가 내려오고 있고, 이곳에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 측 기록에는 백제 무령왕이 아들을 일본에 보냈다는 내용이 없는데, 무령왕 아들의 후손이 사실이라면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간무 덴노 자신이
"구다라노고니키시(百濟王, 백제왕) 일족은 짐의 외척이다.(百濟王等者朕之外戚也)"
간무 덴노는 황후 소생이 아니었고, 일본의 전통적인 지배 계층 출신도 아니었다. 그때문에 스스로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왕권신수설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신화까지 역사에 기록해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明年正月十四日辛亥。中納言正三位藤原朝臣小黒麻呂率誄人奉誄。上諡曰天高知日之子姫尊。壬午。葬於大枝山陵。皇太后姓和氏。諱新笠。贈正一位乙継之女也。母贈正一位大枝朝臣眞妹。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皇后容徳淑茂。夙著聲譽。天宗高紹天皇龍潜之日。娉而納焉。生今上。早良親王。能登内親王。寳龜年中。改姓爲高野朝臣。今上即位。尊爲皇太夫人。九年追上尊號。曰皇太后。其百濟遠祖都慕王者。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皇太后即其後也。因以奉諡焉。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코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8]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출처: 《속일본기》
즉, 간무 덴노의 입지는 외국의 신화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약했다는 뜻이 되며, 후지와라 씨족의 권세 강화와 헤이안 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편 당시 수백 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신화가 당대 일본에도 알려져 있었으며, 해당 신화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도래인 출신의 마미치는 같은 도래인의 피를 이은 간무 덴노를 옹호했으나, 덴노는 오쓰구를 지지하여, 2대 사업을 중지했다.출처: 《理解しやすい日本史B》
794년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로 천도한 이후, 수도 조영사업 및 에미시 정벌 건으로 백성이 힘들어한다며 이를 반대하는 후지와라노 오쓰구(藤原緒嗣)와 찬성하는 스가노노 마미치(菅野真道) 사이에 이른바 덕정상론(徳政相論)이 일었다. 이 과정에서 관련 기록이 존재한다.
昔『日本は三韓と同種也』と云事のありし、かの書をば、桓武の御代にやきすてられしなり。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 같은 동족)의 나라였다.’고 적힌 책이 전해내려 왔는데, 간무 덴노 시대 때 불에 타버려 소실됐다고 한다.《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9]
고고학적으로 일본에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전파한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도래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야요이인들의 기원인 일대와 삼한 일대가 같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물론 이웃 동네인 부여와 읍루(말갈 전신)의 차이처럼 그 시절에도 언어와 풍습이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한의 일부 지역에서 비슷한 문화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에서 삼한과 함께 나타난 민족이 일본으로 도래하고, 남은 민족은 삼한과 신라, 백제, 가야의 성립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성격상 천황 가문의 해외 도래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간무 덴노가 백제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일본 최초의 율령제 시대이자 일본의 이미지가 정립된 헤이안 시대를 연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이 시기부터 일본은 중국 및 한반도의 영향이 대폭 축소되고, 견당사가 중단되어 자국 중심적이며 독특한 국풍 문화가 점차 발달하게 되었다. 다만 중국과는 송대까지 비공식적인 교류가 어느 정도 이어졌다.
2. 생애[편집]
(延曆八年冬十二月戊辰朔) 乙未, 皇太后,高野新笠. 崩. (중략)
(明年正月戊戌朔辛亥) 上諡曰-天高知日之子姬尊.
壬子, 葬於大枝山陵.
皇太后, 姓和氏, 諱新笠.和氏, 百濟武寧王之子-純陁太子之裔也. 居大和國城下郡大和鄉, 因地制姓也. 贈正一位-乙繼之女也. 母-贈正一位-大枝朝臣-真妹. 后先, 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皇后, 容德淑茂, 夙著聲譽. 天宗高紹天皇龍潛之日, 娉而納焉. 生今上桓武帝, 早良親王, 能登內親王. 寶龜年中, 改姓為-高野朝臣. 今上即位, 尊為皇太夫人. 九年, 追上尊號, 曰-皇太后.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皇太后, 即其後也. 因以奉諡焉.엔랴쿠 8년(789) 12월 28일, 황태후 타카노노 니이가사이다가 돌아가셨다. (중략)
(이듬해 정월 14일,) 시호를 올려 아메타카시루히노코히메노미코토라고 하였다. 15일, 오오에야마(大枝山) 능에 장사지냈다.
황태후의 성은 야마토(和)씨이고, 휘는 니이가사(新笠)이다.야마토씨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예이다. 야마토국 시키시모군 오오야마토향에 살아서, 그 땅(의 이름)으로 인하여 성씨를 만들었다. 증 정1위 오토쓰구의 딸이다. 어머니는 증 정1위 오오에노아손 마이모이다.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로부터 나왔다. (중략) 그 백제의 먼 조상 도모왕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고 낳은 이이다. 황태후는 즉 그의 후손이다. 이로 인하여 시호를 받들었다.
《속일본기》 <간무 덴노조>#
백제를 중흥시킨 명군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전하며, 아버지는 타카노노아손 오토쓰구(高野朝臣乙継/弟嗣)[3]이다. 도래인 가계인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계보 등은 전하지 않는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제49대 고닌 덴노가 즉위하기 전에 혼인했다고 하며,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부터 명성을 드러냈다고 한다. 고닌 덴노는 본래 할아버지 대에 계승권 다툼에서 패배해 천황 계승이 어려울 것이라 여겨졌는데, 그 시기에 만난 게 니이가사였다. 정황상 니이가사가 백제계 도래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고닌 덴노의 즉위를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고닌 덴노는 61세라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즉위한 고령의 덴노로, 황후 이노우에 내친왕(쇼무 덴노의 딸)을 폐위하고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아들 야마노베 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는 후지와라 집안이 야마노베 친왕을 밀었기 때문인데, 백제계 도래인 출신이었기에 반대가 많았지만 당대에 권력을 쥐고 있던 후지와라 가문이 밀어붙였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엔 칭호가 후궁을 뜻하는 '부인'(夫人)이었으나 이때부터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격상되었는데, 사실상의 정실임에도 황후는 되지 못한 애매한 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간무 덴노는 치세 기간 동안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이들에게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거나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에 임용하였다. 이는 간무 덴노의 혼인관계에서 후지와라 씨족 못지않게 백제계 도래인들이 많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예 구다라노고니키시(백제왕) 일족을 두고 "그들은 짐의 외척이다(百済王等者、朕之外戚也)"라고 선언했을 정도다.
즉위 후 간무 덴노는 도래계 혈통 때문에 출신 문제에 민감했다. 간무 덴노는 《일본서기》의 천손강림 신화와 비슷한 고구려 및 백제 건국 신화까지 거론하면서 이들도 하늘의 자손이니 문제없다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백제계 도래인이라는 설이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서술했으나 이후 인정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백제 관련 언급[편집]
2001년 12월 18일, 아키히토는 68세 생일 기자 회견에서 다음해에 열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와 관련하여 한국에 대해 역사적, 지리적인 관심이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천황의 모계 혈통이 백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자신의 선조인 간무 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이라는 《속일본기》의 내용을 인용했다.[2]
“ | 일본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고 《일본서기》 등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과 초빙되어 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습니다. 궁내청 악부(樂部)의 악사들 중에는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나 개인적으로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고, 이후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이런 교류만 있던것은 아니었습니다. | ” |
이와 관련하여 역사 연구자들은 일찍이 2001년 기자회견 직후부터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이 천황 가문 백제 유래설로 바로 연결되지 않음을 지적해온 바 있다.
김현구 당시 고려대학교 교수는 현재 천황 가문이 백제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적잖이 회자되어 왔지만 확증은 없고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견해들이어서 역사 연구자 입장에서는 학문적인 성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았다.[3][4]
그리고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이 일본의 역사 인식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잘못하면 일선동조론, 즉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는 학설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애초에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속일본기』의 기록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2005~2006년 <인터넷 시민의신문(ngotimes.net)>에 <한국사 바로읽기 연중기획>이라는 연재를 진행한 이근우 부경대 교수는 18회 <일본 천황가는 백제의 후예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와 같은 내용을 정리하여 게재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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