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 속 동성애: 당나라에서 동성애를 배워 일본에 동성애를 유행시킨 스님 구카이; 스님과 제자의 첫날밤을 뜻하는 치아관정의 관습; 동성애, 양성애 일왕 시라카와; 후지와라 요리나가 (동성애 일기 다이키(台記) 집필), 도바 상왕 등이 얽힌 11세기~12세기 말 남색으로 인한 애정싸움, 전쟁으로 인해 일왕제가 망하고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된다

 




시라카와 덴노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천황이 허수아비 국왕이 되게만든 만악의 근원인데, 그가 시행한 인세이가 일본 정치의 고질적인 악습으로 남게되면서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결국 막부를 위시한 무사정권에게 정치 권력이 넘어갔기 때문이다.[3]

 

시라카와 법황은 셋칸케를 비롯한 귀족들의 장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셋칸케의 전횡을 억제하기도 했지만, 점차 인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조정이 무력화되고, 정치가 자의적으로 행해져 조정의 권위가 떨어지는 폐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에 심취했던 인이 사원들에 장원을 기진하거나 새로운 사원을 세우면서 재정 지출이 증가하고, 장원 개혁이 약화되는 폐해를 생겨났다. 더불어 후지와라 셋칸케와 밀접했던 무사씨족 '카와치 겐지[河内源氏]'를 경계하여, 겐지와 경쟁하던 무사씨족이었던 '이세 헤이시[伊勢平氏]'를 중용했는데, 그 비호 아래 타이라 가문이 인의 무장세력으로서 복무하면서 지방의 문제나 승병들의 강소 등을 막고, 상업과 장원에서 쌓은 부를 인에 바치면서 성장하여 무가정권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18]

당시까지는 반석과 같던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였으나 위와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후대에 분란의 여지를 남겼으며, 여기에다 사적으로 호색했던 면이[19] 추문을 불러일으켜 이후 황가의 내분, 즉 '호겐의 난'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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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C%A7%80%EC%99%80%EB%9D%BC%EB%85%B8_%EC%9A%94%EB%A6%AC%EB%82%98%EA%B0%80

격렬한 데다 타인에게 엄격한 깐깐한 성격으로 「속이 검고 용서가 없는 빡빡한 인간」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고, 「악좌부」라는 별칭으로 유명한데 이 「악」도 현대 일본어에서의 「사악하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성질 ・ 능력 ・ 행동 등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그 자체에서 오는 공포와 경외의 표현이다. 다만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도 기록해 남겼는데 태정관(太政官) 관인을 죽인 범인이 조정의 사면령으로 풀려나자 이에 분노해 자신의 하인(이자 남색 상대) 하타노 기미하루(秦公春)를 시켜 그를 죽이게 하고서 이 사실을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었다」(天に代わって之を誅するなり)고 일기에 남기고 있다.[3]

사생활 면에서 남색을 즐겼던 사실까지 일기에 기록해 남기고 있는데, 일본의 사학자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나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의 연구에 따르면 일기에 기록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남색 상대로는 하인이었던 하타노 기미하루 ・ 하타노 기미토(秦兼任) 외에도, 구게(公家)로써 후지와라노 다다마사(藤原忠雅) ・ 후지와라노 다메미치(藤原為通) ・ 후지와라노 기미요시(藤原公能) ・ 후지와라노 다카스에(藤原隆季) ・ 후지와라노 이에아키라(藤原家明) ・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 ・ 미나모토노 나리마사(源成雅), 무사로써 미나모토노 요시카타(源義賢) 등의 이름이 특정된다. 고미 후미히코는 이 가운데 네 명까지가 인의 근신으로써 권세를 떨치던 후지와라노 이에나리의 친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6. 여담[편집]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를 일본의 은거(隱居) 제도와 유사한 정치형태였다고 설명한다. 일본의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수장이 가독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은거'를 결정한 뒤에도 여전히 가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26] 따라서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上皇)이 그 위치에서 천황과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현직 천황을 능가하기까지 하는 것도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황실 즉 '천황이라는 지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가문'의 최고 당주가 천황이라는 지위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현직 천황이 아니다 뿐이지 엄연히 황가의 당주인데 당주로써 그 가문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 뭐 어떻단 거냐."는 인식과 유사하다.

인세이 제도 자체는 사라졌지만, 이와 비슷한 제도가 등장하게 된다. 후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인세이 제도와 비슷한 '은거 제도'를 만들어 나간다. 또한, 쇼군 통치시기에도 이와 유사한 '오고쇼(大御所)' 제도가 나타난다. 앞서 설명했듯이 일본의 '재벌 기업' 경영에서 흔히 보이는 후계자 위임 과정도 인세이 제도와 유사한 면이 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이들은 외척과 쇼군과 인세이를 만기친람(萬機親覽)을 어지럽힌 적폐로 찍어서 섭정황실전범에서 황태자황태손으로 제한하고 간파쿠쇼군 직위를 폐지하고 양위를 다루는 규정을 넣지 않아서[27] 다시는 만기친람을 어지럽히는 저런 짓이 나올 수 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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