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거품경제의 역사 (1986-1991) / 미국의 록펠러 자본은 한국전쟁, 세계은행의 원조, 그리고 미국의 반도체 기술제공으로 일본을 1968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만들고, 1970-80년대에는 소니와 히타치, 도요타의 미국 시장을 키워준다; 그러나 플라자 합의, 루브르 합의, BIS비율 8%, 모건스탠리의 매각 등을 통해 거품 경제를 침몰시킨 것 또한 록펠러 자본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 한 일본

전투 중 파괴된 차량의 80%, 무기의 70%를 일본으로 옮겨와 수리했다. 군수물품 생산을 전담한 일본 내 공장도 860곳에 달했다.

도요타 - 군용차량을 한국군에 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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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미국의 반독점 규제로
반도체 기술을 일본에 공개

일본은 50년대말부터 도입한 반도체 기술로 각종 전자제품을 만든다.

마치 국제투기자본이 미국의 기술을 유출시켜 소련의 핵개발 및 과학기술을 시켜준 것과 유사했던 흐름.



1970년대 atlanta journal-constitution 만평
made in japan 라벨이 붙은 일본 제품이 미국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경고하는 그림


데이비드 록펠러의 친구였던 모리타 아키오가 이끌었던 소니: 휴대용tv, 컬러tv, 워크맨을 잇달아 개발



일본 도요타

오일쇼크 시기, 리터당 17km, 연비 좋은 차를 개발

1980년 무렵엔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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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플라자 합의

플라자 합의(영어: Plaza Accord, Plaza Agreement, 일본어: プラザ合意)란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G5 경제선진국(프랑스, 서독, 일본, 미국, 영국)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를 가리킨다. 1980년대 초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전임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부터 이어진 높은 인플레이션의 억제를 목적으로 엄격한 금융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금리는 두 자리에 달해 세계의 유동자금은 미국으로 집중돼서 미 달러의 가치가 올라갔으며 동시에 미국의 수출 감소와 수입 확대(무역 불균형)가 이루어졌다. 고금리 정책을 통해 민간 투자를 억제해서 인플레이션 탈출은 성공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막대했던 무역 흑자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 후에 인플레이션이 진정됨에 따라 금융 완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는 경기 회복, 즉 무역 적자 심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금리 하락이 진행되면 미국의 금융시장은 투자매력을 잃고 그와 함께 달러시장은 점차 불안정화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으로 보였다. 요컨대 1970년대 말기 달러 위기의 재발을 두려워한 선진국이 협조적 달러 안정화 내지 하락의 실시를 꾀했던 까닭에 금리인하를 통한 달러 평가절하 메카니즘이 아닌 정치적 결정에 의한 이 합의가 이루어졌다. 플라자 합의에서 미국 달러화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채택했었다.[2] 발표일 다음날에 달러화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약 20엔이 하락하였다. 1년 후에는 달러의 가치가 거의 반이나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태까지 되었다. 미국 달러 가치 하락은 미국 수출품을 수입하는 나라가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게 해서 점차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미국이 생산한 제품과 서비스를 더 많이 구매할 수 있게 했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에서는 급속한 엔고로 인해 ‘엔고 불황’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됐지만, 초기의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인하하지 않고 5% 그대로 동결시켰고, 무담보 콜금리는 6%미만에서 8%로 올렸다. 하지만 엔고에 의한 불황의 발생 우려가 현실화되자 저금리 정책의 시행이 실시되었다. 이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이나 주식 투기를 가속화하여 거품 경제 가열을 초래하였다. 또 엔고에 의하여 일본 경제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반액 세일”이라고 까지 일컬어지는 미국 자산 사들이기,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 해외여행의 붐, 자금이 싼 나라로의 공장 이전 등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일본인들은 일억총중류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지나쳤던 달러화 하락 현상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하여 환율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1987년 다시금 각국이 협조하기로 하는 루브르 합의가 이루어졌다.

 
1987년 루브르 합의 5% -> 2%로 일본금리 낮추라

로널드 레이건이 일본에게 균형적으로 내수시장을 발전하라 조언하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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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세계 50위 기업 가운데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고 더구나 20위 위로는 일본 기업이 자그마치 16개에 달하며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3배가 넘었다.[11] 심지어 일본 기업을 제외하면 최상위 6개 기업의 총합이 2847억 달러로, 1위 NTT의 기록인 2768억 달러를 턱걸이로 겨우 넘어서는 정도이다. 참고로 1988년 한국국내총생산(GDP)은 2023억 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했다.[12] 1988년 당시 국가별 GDP 순위에 NTT의 시가총액을 대입하면 호주를 제치고 15위에 달하는 수준이다.[13][14]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일본 한 나라의 GDP가 나머지 아시아 국가 전체의 GDP를 합친 것보다 컸다.[15] 참고자료[16]

1인당 GDP도 경이로웠는데 IMF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1인당 GDP는 1986년부터 2002년까지 빠짐없이 세계 10위권 안에 든 것은 물론이고 그 기간 동안 5위를 1번(2001), 4위를 4번(1989, 1991, 1992, 1997), 3위를 5번(1993~1996, 1999), 심지어는 2위를 2번(1988, 2000)이나 기록할 정도로 높았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1인당 GDP는 미국보다 낮았던 적이 단 4년(1986, 1998, 2001~2002)밖에 없었을 정도였던 것은 물론이고(?) 북유럽 국가들도 능가하면서 스위스, 룩셈부르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다.[17] # 더구나 이는 잃어버린 10년 시기까지 포함한 수치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상당수가 은행증권회사 등의 금융 관련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더욱 유심히 봐야 할 것은 1987년 매출액이 1,000억 달러 이상이었던 기업은 일본의 은행들과 다이와증권을 제외하면 제너럴 모터스뿐이라는 것이다.[18] 또 흥미롭게도 도쿄전력, 도쿄가스, 간사이전력, 주부(中部)전력 등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 규모도 아닌 일개 지역의 전력/가스 공급업체가 글로벌 기업들의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전력공사, 서울도시가스, 부산도시가스 등이 애플, 삼성전자 등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으로 평가받았다고 보면 된다.

사실 얼핏 봐선 그냥 '쩌네'라고 생각하고 말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식시장도 결국 수요와 공급에 의해 움직이는데 소비 시장이 일본 전체도 아닌 일부 지역으로 한정돼서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방 에너지 공급업체까지 세계적인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것은 뭔가 정상적인 기업 성장과는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즉, 주식시장에 유입된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거기까지 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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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지금과 정반대로 일본인들이 닛산 시마 같은 중대형차에 열광하던 시기였다.[78] 또 외제차 수입도 급증해 벤츠 주력 모델이었던 W201 190E[79]는 너무 많이 보급되어 '코벤츠'[80]로 불렸으며 BMW E30 3시리즈는 롯폰기 코롤라[81]란 별명이 붙었다. 이 두 차량은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한국에서도 수요가 넘쳐서 이때 나왔던 물건을 이삿짐 명목으로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스포츠카들의 수요도 대폭 증가했는데 일본 국내에선 수프라와 NSX, 스카이라인 GT-R. RX-7, 미쓰비시 GTO 등이 수요들을 노리고 제작되었으며 외제쪽에선 페라리와 포르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테스타로사와 911의 수요가 엄청 많았으며 특히 플래그 쉽에 한정생산이었던 F40과 959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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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자 경기부양책을 펼치던 일본 정부는 자산가격의 비정상적인 폭등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1989년 3%의 소비세(한국의 부가가치세)[26]를 신설하면서 동시에 전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했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 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천천히 올려야 할 금리를 너무 급격히 올려 버린 나머지 이전까지 크게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이는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서 경제의 경착륙을 불러왔다.

일본은행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0%까지 올렸다. 즉 2년 3개월만에 3.50%p나 금리가 폭등한 것.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먼저 고꾸라지고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즉, 신규대출 전면금지), 기존대출도 LTV(Loan-to-value, 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 200%→70%로 제한이라는 자폭을 하고 말았다. 부동산은 거래액수가 매우 큰 만큼 LTV의 변동은 구매자 성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담보가치를 130%p나 변동시키는 조치를 너무 쉽게 꺼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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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장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구두개입과 토지구역 감시제도 마련 그리고 금리 인상[65]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버텼지만 1990년 3월 27일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대신이 발표한 대출 총량규제[66]로 고꾸라졌다. 대출 총량규제는 쉽게 말하면 총량규제 발표 시점부터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였다. 발표 시점부터 6개월간 전면 금지하고 이후에도 3년간 이전에 200%까지 막나가던 LTV를 감정평가액의 70%로 제한했다.[67] 이러다보니 대출이 없으면 매매가 끊기는 부동산 시장의 특성상 매매는 없이 호가만 대폭락했다. 이때 정부의 대책에는 연착륙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부동산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버는 놈들은 그냥 망해도 싸다"는 생각을 지녔으며 류타로도 일본 전체 경제에 다소 영향이 있을 순 있으나 비정상적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내할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했고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예상보다 싱겁게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직장인들을 달래주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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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는 1991년에 문을 열어 1994년 문을 닫았다. 1990년대의 클럽이므로, 시기적으로만 보면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훗날 일본의 각종 언론이나 대중매체에서 줄리아나 도쿄를 버블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내세우며, 이 때문에 일본인들조차 줄리아나 도쿄가 버블 시대의 클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2021년 11월, 줄리아나 도쿄의 부활 이벤트를 다룬 테레비 아사히의 뉴스 보도. 여기서도 줄리아나 도쿄를 버블 시대의 상징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혼란이 있는 이유는 줄리아나 도쿄가 영업했던 시기가 오늘날 경제학/역사학적으로 정의된 거품경제 시대는 아니지만 거품경제 시대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에 거품경제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후대에 주가 등의 수치를 바탕으로 임의로 정의내린 것일 뿐이고, 일본 거품경제는 1991년이라는 특정 시점에 일제히 무너진 것이 아니라 넓게 잡으면 1994~95년까지 조금씩 꺼져간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일본인들은 거품이 꺼졌다는 인식은 커녕 경제 호황이 거품이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즉 줄리아나 도쿄에 다녔거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1980년대 버블 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주제는 일본인들 본인들조차, 특히 당시를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헷갈려하는 내용이므로, 인터넷에 여러 질답이 올라와 있다. 사례 1 사례 2

정작 진짜 버블의 절정이었던 1980년대 중후반 유명 클럽으로 꼽혔던 "마하라자"[3], "킹&퀸" 등은 대중매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비교적 대중적인 콘셉트로 운영되었던 줄리아나 도쿄와는 달리 진짜 1980년대의 디스코 클럽들은 복장 규정이 까다롭다거나 하는 등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되지도 않는 것이다.

 

90년대 후반 노지마 신지의 인기

1996년 롱베케이션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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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을 통해서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됐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 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993년 일본 경제백서 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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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고베 대지진
일본 중앙은행 금리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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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부도회사 19,171개
개인파산 10,000여건
전년도 대비 1.5배



90년대 후반부터 청년층 인구 감소

저성장, 저물가 디플레이션 시대



98년 제로금리 도입

2001년에 고이즈미 정권 하 일본 중앙은행은 양적완화를 세계 최초로 도입
시중은행에 돈 많이 품


2003년도 일본내 자살률 최고를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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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학자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는 중에 시행된 금리 인상과 대출 총량 규제 등의 정책을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보았고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벤 버냉키가 이끌었던 미국의 연방준비제도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미국은 금리 인하와 강력한 부양 정책을 펼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일본는 이상하게 이 시기 미국과 같이 양적완화를 안해서
엔화가치 올라 기업들이 수출이 안돼 힘들었다.
도요타 리콜 사태도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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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
아베 노믹스 무제한 양적완화 실시.
고이즈미 때보다 5배 강력한 양적완화였다.

블랙기업 등 저임금 일자리는 많아졌지만,

어쨌든 지표상으로만 보면 주식시장, 고용시장 모두 아베노믹스 이후 개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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