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켄슈타인이 대철로서 세계 전체를 표상한다고 하기에는 성격적인 하자가 너무 많았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2/05/16/how-queer-was-ludwig-wittgenstein

Here is a man with an ambiguous sense of patriotism who goes to war only because it might be a crucible in which he may show himself worthy by doing his duty. Worthy of what? Duty to whom? Only a draconian, unforgiving superego. Notoriously, when Wittgenstein decided to give away his money, it was not to the poor but to his siblings, who were perfectly well provided for already. The sacrifice was itself a good. He took the same attitude to much of life as he did to thinking: it had to hurt for it to count. In a discussion on religious views of existence, he once said, “Of this I am certain, that we are not here in order to have a goo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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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몇 년간 군복을 입고 다녔을 정도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으며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되기를 원해 사범학교에 다녔다. 전쟁 전 아버지가 전 재산을 미국으로 이전시킨 바람에 (예술가에게 나눠준 것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가족들에게 나눠주게 된다. 그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논고」의 출판은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사범학교에서의 피로 따위가 겹쳐져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고」를 영국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줘도 되겠냐고 묻고, 비트겐슈타인은 원하는 대로 하라며 답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1920년 여름, 수도원에서 잠시 정원사로 일하다가 그해 가을 트라텐바흐라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의 교사 경험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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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독일 「자연철학연보」에 「논고」가 엉망진창으로 게재되다. 이는 저자와의 최소한의 상의도 없이 게재됐기 때문에 해적판으로 여겨지게 된다. 「자연철학연보」의 「논고」는 후에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영어판으로 개정되어 재출판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교사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고장 난 기계를 고쳐주거나 하는 호의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이상한 귀족'이나 '약간은 미쳐버린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좀처럼 끊지 못했다. 그 스스로가 교사 생활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떠난다면 노동을 할 생각이었다. 가끔씩 옛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러셀과는 직접 만나기도 했다.[53]) 램지와 만나 그의 「논고」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의 문제는 「논고」에 의해 모두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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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상, 565~566.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1922년, 신비주의에 한창 열을 올리던 그가 내게 똑똑한 것보다는 착한 것이 낫다고 아주 진지하게 호언장담하던 시절, 나는 그가 말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스브루크에서 나와 함께 숙박 시설에 묵을 때도 벌레들이 무서워 한곳에서 이틀을 자지 못했다. 나는 그때 러시아와 중국을 여행한 후여서 그 정도 사소한 문제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으나, 세상에 어떤 것을 준다 해도 벌레를 진득하니 참고 살 수는 없다고 하는 그의 확신에는 도무지 단련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벌레 공포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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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merican philosopher Norman Malcolm, who was a student of Wittgenstein’s, writes of the “frequent and prolonged periods of silence” in his classes, of how sometimes, “when he was trying to draw a thought out of himself, he would prohibit, with a peremptory motion of the hand, any questions or remarks.” Malcolm goes on, “His gaze was concentrated; his face was alive; his hands made arresting movements; his expression was stern. One knew that one was in the presence of extreme seriousness, absorption, and force of intellect. . . . Wittgenstein was a frightening person at these classes. He was very impatient and easily ang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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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so demanding of himself was never going to be a tolerant soul. The novelist and philosopher Iris Murdoch, who met him twice, spoke of him as she might have done of a twentieth-century Socrates: “Both he and his setting were very unnerving. His extraordinary directness of approach and the absence of any sort of paraphernalia were the things that unnerved people.” With Wittgenstein, there were no polite formalities, but Murdoch failed to get much philosophy out of him. What good was a single philosophical conversation? he asked her. What good was a single piano le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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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tendency to turn every human encounter into a confrontation, a reckoning, sounds an awful lot like moralism. But he was not moralistic in the sense of imposing on people the demands of a received body of rules. Compulsory seriousness might be closer to the mark, although his seriousness was compatible with a deep strain of silliness: he was capable of writing campy letters, of joining his friends at the local fairground, of playing the demanding part of the moon in an impromptu reënactment of celestial movements. An intensely rational man—he had, after all, started off as a logician—he loathed mere reasonableness, a squalid ideal for squalid people. He rejected the idea that the world’s demands on the individual might have a natural limit in the reasonable.

His students at Cambridge, no less than the beleaguered children he taught in Austria, were victims of his appetite for enforcing standards at which any human—any human human—must surely quail. He rarely doubted his authority to tell people how to live. One student, Alice Ambrose, was excommunicated after she gave him “cheek.” Her offense, she later recalled, was telling him that “he used his power over people to extract worship.”

In this, he was unlike Socrates, who, for all his piety, took people as they were. His queerness was compatible with having a good time, with liking people and being liked by them in turn. Wittgenstein, lacking a mode between the deathly serious and the giddily silly, inspired more extreme reactions—alarm, fear, contempt, reverence. Ambrose once wrote, generously, that there was “a very great deal in him to love.” Love, yes. But it is hard to find anyone who like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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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아파서 쓰러지게 된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나는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유럽인이야. 유럽에서 죽고 싶어…… 바보처럼 여기에 오다니." 그러나 병세는 곧 회복되었고, 10월 말, 런던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 받은 건강 진단의 결과가 11월 25일 나오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립선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 인생이 선고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만 치료받으면 6년 정도를 더 살 수 있다는 말에 놀란다. "내 인생이 그렇게 연장된다니 유감이다. 이런 반쯤의 생활에는 여섯 달도 너무 길다."고 말한다. 시한부 선고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헬레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빈에서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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