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죽으면서 남긴 유산들; 나폴레옹은 나와 성격이 비슷하구나; 자기 편에게는 매우 후하게 베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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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5월 5일,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 섬에서 유배 중 사망했다. 그는 세인트 헬레나에 도착한 뒤로 약 9번에 걸쳐 유언장을 작성하고 수정했다. 그중 5번은 죽기 1달 전에 이뤄졌다.


세간의 인식에는 나폴레옹이 워털루에 패하고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쫒겨난 뒤로도 자신 명의로 된 엄청난 액수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세인트 헬레나에서도 다 무너져 가는 롱우드 하우스에서 살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꽤 많은 귀금속과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섬의 그 누구보다도 부유했다. 


나폴레옹은 실제로도 통이 큰 인간이었다. 공을 세운 부하가 있다면 수천~수만 프랑을 상금으로 주거나 그 자리에서 귀족 작위를 하사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식을 할 때면 원수와 장군들, 기타 훈장을 받게 된 병사들에게는 상여금 파티가 열렸다. 대표적으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하자 전투에 참전한 모든 장병들과 전사자 유가족들에게 1인당 200프랑씩 위로금을 지급했었다. 심지어 세인트 헬레나 유배길에 타고 간 영국해군 벨레로폰 호의 선원들에게도 '자신을 존중하고 심심하지 않게 해줬다'는 이유로 1인당 1기니 금화를 포상으로 주려고도 했다. 



다음은 나폴레옹의 유언장에 언급된 공식적인 상속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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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똘롱(Charles-Tristan de Montholon)백작 -  200만 프랑 

(주: 별 다른 직위 없는 부관이었으나 유배기간 동안 항상 나폴레옹의 옆에 붙어서 말동무를 해줌.)


베르트랑(Henri-Gatien Bertrand) 백작 - 50만 프랑 + 파르마 공국과 밀라노에 있는 나폴레옹 명의로 된 영지 수입 3만 프랑 

(주: 궁정대원수. 다만 나폴레옹의 거처랑 떨어진 곳에 살아서 상대적으로 덜 신임 받음.)


마르샹(Louis Marchand) - 제1 침실시종. 40만 프랑 + 백작 작위 

(주: 혼자서 나폴레옹의 똥오줌을 다 받아내는 등 굳은 일을 도맡아서 함.)


알리 (Ali) -  제2 침실시종. 10만 프랑


노베라즈(Noverraz) - 제3 침실시종. 10만 프랑


피에롱(Pyerron) - 수석 집사장 - 10만 프랑


상티니(Santini) - 집사장 - 10만 프랑


아르샹보 형제 (Archambault) - 마부. 5만 프랑


앙또마르키(Antommarchi) - 주치의. 연금 6,000 프랑 + 유럽왕실 주치의로 고용될 수 있는 추천장


에메리(Apollinaire Emery) - 보조의. 10만 프랑


비냘리 신부(Ange Paul Vignali) - 종부성사를 해준 코르시카 신부. 10만 프랑

(주: 명목상 '성당 재건기금'.)


라스까즈 백작(Las Cases) - 회고록을 집필 해준 작가. 10만 프랑


발콤 일가(Balcombe) - 이웃집 가족. 72,000 프랑 + 12,000 프랑짜리 지불보증서 

(주: 단순히 자신과 격 없이 친하게 지내줬다는 이유에서.)


마리아 발레프스카(Marie Walewska) - 폴란드 출신 애인. 20만 프랑


라발레트 백작(Antoine Chamans Lavalette) - 부관이자 처조카 사위. 10만 프랑


뒤록(Géraud Duroc) 장군 - 궁정관. 5만 프랑


라리(Dominique Jean Larrey) - 군의관. 10만 프랑 

(주: 19세기 외과의술 발전의 선구자로 전쟁 내내 프랑스 의학발전에 큰 기여를 해서 나폴레옹이 매우 신임했음.)


캉브론(Pierre Cambronne) 장군 -  10만 프랑 

(주: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 'Merde!'의 주인공.)


라두르베예(La Bédoyère) - 부관. 10만 프랑 

(주: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기분을 잘 맞춰줌.)


브레이르(Michel-Sylvestre Brayer) 장군 - 10만 프랑


데누에트(Lefebvre-Desnouettes) 장군 - 10만 프랑


드루오(Antoine Drouot)장군 -  10만 프랑


뒤베르에(Mouton-Duvernet) 장군 - 10만 프랑


제라르(Jean-Baptiste Girard) 장군 - 10만 프랑


샤르트랑 (Jean-Hyacinthe-Chartrand) 장군 - 10만 프랑


트라보 (Jean-Pierre Travot)장군 - 10만 프랑


랄르망(François Antoine Lallemand) 장군 - 10만 프랑


프랑클로젤(Bertrand Clauzel) 장군 - 10만 프랑


레알 백작(comte Réal) - 파리 경찰청장. 10만 프랑


메네발(Claude-François de Méneval) - 황제 재임시절 전속비서. 10만 프랑


아르노(Antoine-Vincent Arnault) - 프랑스 혁명기 극작가. 10만 프랑 

(주: 나폴레옹은 그가 쓴 희곡 마리우스(Marius à Minturne)를 좋아했음.)


마르보(Marcellin Marbot) 대령 - 10만 프랑


비뇽(Baron Bignon) 남작 - 외교관. 10만 프랑


캉티용(Marie André Cantillon) 대위 - 1816년 웰링턴 암살시도를 했던 프랑스군 기병장교. 1만 프랑


탈라보(Poggi de Talavo) - 엘바섬 헌병대 병참장교. 10만 프랑


엘바 섬 수비대 장교와 병사들 - 30만 프랑


마르타(Matra) 부인 - 엘바 섬 유배 당시 식모. 2만 프랑


바가글리노(Bagaglino) - 엘바섬의 양치기. 1만 프랑


위베르(Hébert) - 이집트 원정 시절 하인. 2만 프랑


데르뷔유(Jannet-Dervieux) - 이집트 원정 시절 마굿간 지기. 2만 프랑


뮈롱(Jean-Baptiste Muiron) 대령 - 아르콜레 전투 시절 부관으로 나폴레옹을 구해주고 전사. 10만 프랑


뒤고미에 (Jacques François Dugommier) 장군 - 툴롱 전투 당시 나폴레옹의 상관. 10만 프랑


루이즈 코니(Louis Coni) - 나폴레옹이 대위 시절 근무했던 코르시카 바스텔리카(Bastelica) 의용대대 부관. 2만 프랑


보코냐노(Boccognano) 마을 - 2만 프랑 

(주: 1792년 나폴레옹이 대위 시절 이 마을에 휴가를 왔다가 강도들에게 납치 당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구해줌.)


니콜라(Nicolas) - 코르시카 양치기. 1만 프랑

(주: 위의  보코냐노 마을 출신으로 나폴레옹을 구하는데 제일 큰 공을 세움.)


테유 (Jean-Pierre du Teil) 장군 - 오손(Auxonne) 포병학교 재학시절 교관. 10만 프랑


레코(Recco)신부 - 나폴레옹의 학창시절 문학 선생님. 2만 프랑 


코스타(costa) - 아작시오의 곤돌라 장인. 1만 프랑


워털루 전투 전사자 유가족들과 고참근위대 상이용사들 - 56만 프랑


기타 대육군에서 복무한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라인강 독일인 상이용사들 - 10만 프랑


세인트 헬레나의 영국인 의사들, 선착장 인부들, 중국인 쿨리들 - 위에 책정된 금액들을 제외하고 남는 잔액




(현재 금시세로 환산하면 1프랑 = 4 US달러 정도로 치환됨.)





위에 나열한 것과 같이, 그는 자신과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준, 혹은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평범한 이들까지 다 기억해가며 유산을 나눠줬다. 프랑스 제국을 건국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26인의 원수들은 단 한명도 없는데, 이들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거나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을 배신 때렸기 때문에 크게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오히려 백일 천하 당시 콰트르 브라, 리니, 워털루에서 자신을 따라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목록에 적힌 장군들은 대부분 이때 인연을 맺은 이들이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에서 회고록 집필 이외 할 일이 없었으므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섬 주민들이나 유색인종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를 하는 것을 즐겼다. 가끔씩 보급을 위해 기항하는 배의 선장들이 예의상 접견을 하러 오면 특히나 좋아했다. 그는 자신과 이런 '스몰 토크' 해준 이들에게 항상 금화를 주는 등 금전적 보상을 잊지 않았다. 물론 섬의 영국총독은 나폴레옹이 돈을 뿌려가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는 거라 여기며 이를 매우 경계하였고, 나중에는 외출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막았다.     


아쉽게도 나폴레옹의 유언은 절반만 집행됐다. 자신의 유배시절 측근들과 시종들에게는 확실히 유산이 돌아갔으나 그 아래 열거된 수많은 인물들중 상당수는 행정상 신원파악이 되질 않거나 혹은 절차상 일부러 무시되면서 한푼도 못 받은 이들도 있었다. 물론 비록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황제께서 나를 기억해주셨다!'라며 평생 자랑으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나폴레옹이 왜 이렇게 사소한 인연들에게까지 금전적 배상을 해주려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권력자일수록 외로워진다'는 속설대로, 그는 화려한 궁정생활보다 사소한 일상에 더 기쁨을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출처: https://www.napoleonica.org/fr/collections/testa_Napol%C3%A9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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