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트 러셀은 정말 인드라 주장처럼 1930년대부터 1954년 빌더버그 창립 이전까지 세계를 지배했는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마도) 음모론 3대장인 버트런트 러셀, 빅터 로스차일드, 데이비드 록펠러의 자서전을 다 읽은 아로의 관점에서 봤을 때, 버트런트 러셀이 1920년 소비에트의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고 마음에 들지않아 내쫓고 스탈린으로 교체했다거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주의 중국을 끌어들였다거나, 제국주의 일본이 로스차일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러셀과 일본이 불화를 겪었다거나, 러셀이 1930년대부터 1953년까지 '국유본 황제'로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진두지휘했다고 하는 인드라의 음모론은 과대포장된 망상이요, 개소리로 사료된다.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지 꼴리는대로 글을 쓰는 인드라 같은 애들 때문에 대중들은 음모론은 다 허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탐구과제 1. 인드라의 주장처럼, 버트런트 러셀은 과연 1930년대부터 1954년 빌더버그 창립 이전 (1953년)까지 세계를 지배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버트런트 러셀은 세계정부의 황제는 커녕 1920년대부터 재정난에 봉착해서 자기 먹고 사는 것도 바쁜 사람이었다. (* 러셀이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시드니 웹, 비어트리스 웹, H.G. 웰즈, 버나드 쇼, T.S.엘리엇, 블라디미르 레닌, 손문, 주은래, 메이너드 케인스,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자와할랄 네루, 알버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막스 보른, 존 듀이, 줄리언 헉슬리, 펄 벅, 에리히 프롬, 아놀드 토인비, 니키타 흐루시초프, 존 포스터 덜레스 등 폭넓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했던 것은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증명할 뿐이다. 러셀은 이미 화이트헤드와의 공저 《수학 원리》(라틴어: Principia Mathematica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1910-1913)의 출간으로 1910년대에 전국적인 지명의 철학자가 되었다.)
소련과 중국,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뒤인 1922년에 러셀은 돈을 벌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가족과 함께 살 집을 두 채 사고 나니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던 것이다. 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과 관련된 어떤 일이든 하려고 했다. 본인 스스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돈벌이를 위해 중국과 관련된 좀 이상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1928년에는 친구인 H.G. 웰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수입이 변덕스런 취향을 가진 미국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어 상당히 불안정 (precarious)하다고 말한다.
1937년에는 친구인 G. E. Moore에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일을 할 수 있는지 취업청탁을 한다. 이 때 러셀의 경제사정은 영 좋지가 않았는데,
법적으로 1년에 800~900 파운드를 전부인에게 위자료로 줘야했고, 1년에 수중에 남는 돈은 300파운드 남짓이었기
떄문이다. 하여, 러셀은 Moore에게 직업을 구하기 전까지는 철학에 몰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영국에서의 취업이 잘 풀리지가 않아 미국으로 건너간 러셀은 1938년 8월, 마침내 UCLA의 교수로 취직할 수 있었으나, 자유주의 성향의 교수들을 억압하는 폭군으로 군림했던 UCLA 총장 때문에 곤혹스러워한다. 1939-40년에는 City College of New York (CUNY)의 초청으로 교수직을 옮기려고 했는데,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러셀은 뒤늦게 UCLA 총장에게 자신의 사직서를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안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러셀의 무신론 성향을 문제삼아 그를 해고하라고 독촉하던 터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러셀은 CUNY로 옮길 수 있게 되었으나, 러셀의 리버럴한 성적 관념 및 무신론 때문에 여러 사람들로부터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인드라가 러셀이 황제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은 러셀 인생의 암흑기였다.
미국에서 강연이 줄줄이 캔슬되었고, 마녀사냥도 자주 당했다. 그 어떤 신문에서도 러셀의 글을 실어주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법적인 이유로 영국에서 어떤 돈도 미국으로 인출할 수 없었기에, 한동안 미국에서의 알량한 수입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만 했다.
러셀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세명의 자녀가 있었기에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했다. (아들 John은 하버드에, 딸인 Kate는 래드클리프 (나중에 하버드에 병합됨)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 내 많은 자유주의 성향의 교수들이 러셀 대신 항의해줬지만, 다들 그의 백작이라는 지위 때문에 물려받은 재산이 있고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제적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이렇게 궁핍한 처지에 몰린 러셀에게 손을 내민이가 Argyrol을 발명한 Dr. Barnes라는 인물이었다. Barnes는 자신이 운영하는 Barnes 재단에서 러셀을 5년 임기의 철학 교수로 채용하여, 러셀이 갖고 있던 불안감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준다.
이 시기 러셀의 일과는 인드라의 주장처럼 제2차 세계대전을 기획하고 감독한 게 아니라, 매일 런던이 나치로부터 공습당했는지 아닌지, 우체국으로부터 고국의 소식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ㅎㅎ
1942년 12월 28일, 러셀 부인의 오만한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Dr. Barnes는 러셀을 일방적으로 해고했고, 러셀은 오랜 시간 Barnes와 법적 공방을 벌이게 된다. (나중에 러셀이 승리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Barnes는 1951년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_C._Barnes)
다시 궁핍한 상황에 처하게 된 러셀은 한번은 너무 가난해서 뉴욕으로 가는 편도행 티켓을 사서 강의를 한 뒤,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돌아오는 티켓을 사야했다. 왕복 티켓을 살 돈도 없었던 것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러셀은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또 로스차일드계 (유태계) Simon and Schuster 출판사에서 신작 인세로 3000달러를 얻어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올더스 헉슬리는 6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일자리를 얻기 위해 분주히 다니는 러셀을 조롱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 버트런트 러셀의 미국에서의 생활은
1) 영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서
2)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자식들을 영국보다는 좀 더 안전한 미국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결정으로,
러셀은 자서전에서 이 '유배 생활'을 꽤 고통스럽게 묘사한다.
이 시기에 겪었던 일들 때문인지 버트런트 러셀은 훗날 상당한 반미성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러셀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엄청난 명예를 가진 노년의 백발신사로서 전세계에 본격적인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949년 이후의 일이다.
1949년 러셀은 영국 왕실이 주는 OM 작위를 얻게 되었으며 (화이트헤드와의 공저 《수학 원리》(라틴어: Principia Mathematica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1910-1913) 때문), 1950년에는 성에 대해 쓴 에세이 Marriage and Morals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 명성이 정점에 달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러셀은 1950-53년 한국전쟁 당시 Joseph Needham 교수가 미국이 한국에서 생물학전, 화학전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 주장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인 1963년에는 그 주장을 믿게 되었다면서, Needham 교수에게 사과한 바 있다. 이말은 달리 해석하면, 러셀은 인드라의 주장과 달리 한국전쟁의 기획자가 아니었고, 그 구체적인 동향에 대해서도 어두웠다는 뜻이다.
만약 러셀이 인드라의 주장처럼 이 시기 세계정부의 황제였다면, 1953년 스탈린이 죽자, BBC의 요청으로 러셀이 강연한 내용이 통편집되었겠는가? (러셀이 스탈린을 너무 비난해서 BBC가 방송을 그대로 내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러셀이 명성의 정점에 있던 1953년 크리스마스에도 재정 문제는 러셀을 괴롭혔다.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 10,000파운드에 1,000파운드를 더 얹어서 세번째 부인에게 위자료로 줘야했고, 두번째 부인에게도 위자료를 줘야했으며, 막내 아들의 교육과 휴가를 위해 돈을 내줘야했고, 질병으로 고통받던 장남의 치료비도 내줘야했으며, 장남이 그동안 안 낸 세금을 대신 내줘야 했고, 그 장남이 낳은 세명의 아이들의 교육비까지 내주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다.
1955년에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통해 세계의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반핵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으나, 닐스 보어도 거절하고, 영국 왕립협회 회장이었던 Lord Adrian도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해서 러셀은 크게 실망하고 만다. 아니, 감히 전임 세계 황제의 요청을 거절해???
러셀이 1963년에 만든 버트런트 러셀 평화재단에 부자들은 Lord Gladwyn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감히 전임 세계 황제의 요청을 거절해???x2
버트런트 러셀은 빅터 로스차일드와 함께 싱크탱크를 세운 바 있는 영국 총리 해럴드 윌슨 (노동당)에 비판적이었다. 윌슨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또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냈다. 윌슨 치하 영국 언론에서는 버트런트 러셀 평화 재단의 활동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고, 보도를 할 때면 꼭 조롱하고 비난했다. (이는 영국 언론만 그런 게 아니라서, 미국 뉴욕타임스 역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버트런트 러셀의 사설 게재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윌슨 정부는 러셀과 친분이 있는, 영국에 비자를 받으러 온 소련인 세명에 대한 비자 발급 거부했는데, 러셀의 거듭된 청원에도 불구하고 영국 총리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러셀이 1970년 죽을 때 자식들에게 물려준 재산은 '전임 황제' (?)로는 너무 초라한 한화 18억 정도다.
Russell died of influenza, just after 8 pm on 2 February 1970 at his home in Penrhyndeudraeth, aged 97.[133] His body was cremated in Colwyn Bay on 5 February 1970 with five people present.[134] In accordance with his will, there was no religious ceremony but one minute's silence; his ashes were later scattered over the Welsh mountains.[135] Although he was born in Monmouthshire, and died in Penrhyndeudraeth in Wales, Russell identified as English.[136][137][138] Later in 1970, on 23 October, his will was published showing he had left an estate valued at £69,423 (equivalent to £1.1 million in 2021).[135] In 1980, a memorial to Russell was commissioned by a committee including the philosopher A. J. Ayer. It consists of a bust of Russell in Red Lion Square in London sculpted by Marcelle Quinton.[139]
https://en.wikipedia.org/wiki/Bertrand_Russell#Final_years,_death_and_legacy
물론 러셀이 국제투기자본 내에서 영향력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러셀은 분명 국제투기자본의 오피니언 리더였다.
러셀의 저서에는 '세계정부'라는 표현이 깜짝 놀랄만큼 매우 많이 등장하며, 어떤 형태의 세계정부가 만들어져야하는지도 제법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러셀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군사적 억제력을 가진 세계정부만이 세계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UN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세계정부를 만들어야한다고 믿었다.
러셀은 1910년대부터 영국 노동당과 페이비안 협회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식인 서클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여,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수감되고, 출소한 이후에는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 2명과 함께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점심식사도 했던 것이며, 노동당 출신의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를 비롯해 평생 최소 8명의 영국 총리와 식사자리를 같이 했던 것이다. 물론 8명의 총리와의 식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특권 (?)이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는 1920년 영국 정부를 대표해 소련으로 건너가 막심 리트비노프의 주선으로 블라디미르 레닌과 1시간이나 대화했고, 중국에서는 손문의 초청을 받았으며, 훗날 주은래를 통해 서양과 교섭할 중국 측 대표로 마오쩌둥을 발탁한 것이다.
1940년대에는 같은 페이비언 협회의 멤버이자 오랜 지인인 비어트리스 웹과 인도 독립 문제를 논의해 (* 인도를 네루에게 맡기고 영국은 아시아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것을 권고) 결국 인도 독립을 관철시켰으며,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는 러셀에게 평소 매우 공손했다고 한다. 인도 네루 정부의 승인 하에 1957년 1월, 인도 뉴델리에서 동서양 과학자들을 규합해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1961년 중인전쟁 때는 주은래가 미국이 대만을 점령한 것을 두고 러셀이 비난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중인전쟁의 교섭을 러셀에게 요청했다. 주은래, 네루 모두와 친분이 있던 러셀의 교섭 덕택에 1961년 중인전쟁은 조기에 종료될 수 있었다.
이후 주은래는 러셀의 반핵운동에 동조하여 영국 총리 해럴드 윌슨에게 핵무기 사용 금지를 촉구하고, 회담을 제안했으나, 윌슨이 거절한다.
이처럼 러셀은 국제투기자본 내 영국 귀족들이 이권을 갖고 있던 중국과 인도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소비에트의 수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실시간으로 편지를 주고 받고, 1950년부터 1971년까지 동독의 국가 원수를 지낸 발터 울브리히트와 교섭하여 스파이 혐의를 받은 Heinz Brandt를 석방시킨 일화 역시 소비에트 영역권 내에서 러셀이 가졌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셀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즉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존슨에게도 자유롭게 편지를 썼으나, 러셀이 중국과 인도, 소비에트로부터 받았던 융숭한 대접에 비하면 별로 대우는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존슨의 입장에서 러셀은 너무 친소비에트적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1930~40년대 일자리를 찾아 경제적으로 고군분투하던 버트런트 러셀이 세계황제였다는 인드라의 주장은 황당무계한 헛소리지만, 그가 국제투기자본 내에서, 특히 영국 노동당 내에서 오피니언 리더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특히 중국과 인도 문제에 있어서...
만약 인드라나 인드라 추종자들이 러셀이 1930~40년대 세계정부의 황제였지만 비상한 두뇌 덕택에 친구나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일부러 경제난에 시달리는 것처럼 위장했다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의 할말은 없다. 그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할리가 없다고 보지만,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미 러셀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로가 보기에 러셀은 천재긴 했지만, 신은 아니었다.
탐구과제 2. 인드라의 주장처럼, 버트런트 러셀과 로스차일드, 록펠러 가문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하는가?
인드라의 또 다른 주장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1930년대부터 러셀계였고, 러셀이 록펠러를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통해 끌여들여 1960년대 후반, 빅터 로스차일드와 권력투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헌데, 러셀의 자서전 및 위키피디아에는 '록펠러'나 '로스차일드'라는 이름 자체가 언급이 안 된다. 아, 딱 한번 언급되기는 한다. 러셀이 1920년 중국을 방문할 때 몸져누운 적이 있는데, 그 때
베이징에 소재한 the Rockefeller Institute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을 때 언급된다.
해서, 이 지면을 빌어 아로가 심층적으로 버트런트 러셀과 로스차일드, 록펠러 가문 사이의 관련성을 탐구해보도록 한다.
러셀과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관련성
1. 러셀은 1906년,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입한 영일동맹 (1905) 체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벨푸어 선언'으로 유명한 로스차일드계 아서 벨푸어 외무장관의 도움으로 러셀은 교도소에서 편안하게 책도 읽고 글을 쓰며 보낼 수 있었다. 다른 죄수들에게는 결코 허용되지 않은 사치였다.
3. 러셀은 1917년 영국에서 케렌스키의 10월 혁명을 지지하는 시위에 동참한 바 있다.
4. 1940년대 초반 직장에서 짤린 러셀은 로스차일드계 (유태계) Simon and Schuster 출판사에서 신작 인세로 3000달러를 줘서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 1947년 러셀은 영국 상원 (House of Lords)에서 미국 내에서 UN을 선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다고 발언했다. (당시 UN이 미국에서 빅터 로스차일드 프로파간다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줌.) 러셀은 억제력을 가진 세계정부만이 세계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며, UN의 국제적 지위 강화를 옹호했다.
단, 러셀은 '모두까기 인형'답게 UN의 구조적 문제점을 두 가지 지적하기도 했다.
1) 중국이 UN에 편입이 안 된 것 (이건 1971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2) 강대국들만을 위한 안보리의 비토권
6. 1950년대에 러셀은 빅터 로스차일드와 교류한 바 있다. 원자폭탄 도면을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내준 적도 있다.
7. 러셀은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에는 보다 호의적인 반면,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존 F. 케네디, 린드 B. 존슨에는 보다 비판적인 편이었다.
8. 러셀은 1965년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영국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버리며 베트남 전쟁에 항의했다.
9. 버트런트 러셀은 빅터 로스차일드와 함께 싱크탱크를 세운 바 있는 영국 총리 해럴드 윌슨 (노동당)에 비판적이었다. 윌슨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또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냈다. 윌슨 치하 영국 언론에서는 버트런트 러셀 평화 재단의 활동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고, 보도를 할 때면 꼭 조롱하고 비난했다. (이는 영국 언론만 그런 게 아니라서, 미국 뉴욕타임스 역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버트런트 러셀의 사설 게재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윌슨 정부는 러셀과 친분이 있는, 영국에 비자를 받으러 온 소련인 세명에 대한 비자 발급 거부했는데, 러셀의 거듭된 청원에도 불구하고 영국 총리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
10. 러셀은 인생 말년으로 갈수록 미국에 더 비판적이 된 반면, 소비에트와 북베트남의 범죄는 축소시켜 발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버트런트 러셀을 존경하는 노엄 촘스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촘스키는 미국의 전쟁범죄는 분명하게 지적하지만, 그 반대편의 전쟁범죄를 말하는 것은 다소 소극적이다. '편가르기 놀이'하나?) 또, 소비에트 스파이들 일부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러셀은 2000년대에 뒤늦게 소비에트 스파이로 확정된 Morton Sobell의 무고를 줄기차게 주장한 바 있다.
(소비에트에 친화적이라는 세간의 비판에 대해 러셀은 발끈하며 응수한 바 있다. 러셀에 따르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반공주의자였으나, 1953년 스탈린의 죽음과 1954년 비키니 섬 핵실험, 그리고 미국 내 매카시즘 광풍 이후
핵전쟁의 위험을 소련보다 미국과 서방세계에 두게 되었다고 한다.
러셀은 소련이 처음 핵무기를 발사했을 때도 격렬하게 비난했고, 소비에트가 유태인들을 처우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러셀이 소련에 대해 서방세계보다 더 잘했다고 평가한 유일한 때는 흐루시초프가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감행하기 보다는 케네디에게 양보했을 때였다.
러셀은 자신이 서방에 대한 비난만큼 소비에트에 대한 비난도 자주 했다는 입장, 그러니까 처음부터 '모두까기 인형'이었다는 입장이다. 아로와 비슷한데?)
러셀과 록펠러 가문과의 연관성
1. 1920년 중국에서 몸져누운 러셀은 베이징에 있는 the Rockefeller Institute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이 병원에서 폐렴구균 (penumoccocci)을 죽이는 혈청 (serum)을 러셀에게 투여해 완치될 수 있었다고 러셀은 자서전에서 감사를 표한다. 러셀은 이 사건 이전에는 정치적으로 록펠러 가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2. 1936년, 데이비드 록펠러를 런던정경대로 초대한 학장 William Beveridge가 버트런트 러셀과 페이비언 협회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록펠러를 가르쳤던 교수 중 일부는 러셀과 친분이 있었다. 유태인 좌익 사회주의자 Harold J. Laski가 그 중 한명이다. 참고로, 데이비드 록펠러의 부친인 록펠러 2세가 런던정경대의 재정기부자였다.
3. 1947년 러셀은 영국 상원 (House of Lords)에서 미국 내에서 UN을 선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다고 발언했다. (당시 UN이 미국에서 빅터 로스차일드 프로파간다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줌.) 러셀은 억제력을 가진 세계정부만이 세계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며, UN의 강화를 옹호했다.
록펠러 2세는 뉴욕에 UN부지를 기부한 바 있다.
4. 러셀은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이자 아이젠하워 정부의 국무장관인 존 포스터 덜레스와 1957년 편지를 주고 받은 바 있다. 미국 (아이젠하워)과 소련 (흐루시초프)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함이었다.
5. 러셀이 1957년 7월 조직한 퍼그워시 회의의 재정후원자 두명이 각각 록펠러계이자, 로스차일드계였다.
a. 사이러스 이튼: 데이비드 록펠러와 함께 소비에트를 원조한 기업인.
b. 아리스톨 오나시스: 케네디의 미망인과 결혼한 사람으로, 로스차일드 해운 네트워크와 관련이 있는 선박왕
퍼그워시 회의에 참여한 일부 인사들은 훗날 소비에트의 스파이로 밝혀진다.
6. 버트런트 러셀은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사건을 미국 정부의 소행으로 보았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또 워런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불신했다. 그는 워런위원회 멤버들 모두가 어째서 다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인지 (특히 록펠러계) 의구심을 강하게 내비쳤다. 러셀 재단 사람들도 러셀의 관점에 동의했다고 한다. 러셀의 자서전에 따르면, 러셀 재단 직원들은 미국 대사관에서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러셀 재단을 지원했던 아프리카 3개국의 정상들이 사임했고, 누가 한 짓인지는 분명했다 (미국 정부). 그 중 한명은 러셀이 존슨 대통령에게 the Tribunal (베트남 전쟁 범죄를 조사하는 모임)의 활동과 관련해서 보낸 편지를 보냈다. 러셀이 존슨에게 보낸 편지가 아프리카 정상의 손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존슨이 이 편지를 아프리카 정상에게 보내 협박했다는 뜻이 된다.
미국 저널리스트들은 러셀이 운영하는 the Tribunal의 편향성에 대해 연일 공격했다. 워런 위원회를 가장 격렬하게 옹호했던 사람들이 가장 격렬하게 러셀을 비난한 것에 대해 러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 적었다. 러셀은 존슨에게 the Tribunal에 참석해달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러셀의 표현대로라면) '베트남 폭격에 바뻤던' 존슨은 답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7. 러셀은 1960년대~70년대 내내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소비에트에 대대적인 공장을 지으며 냉전에 기름을 부었고, 베트남 전쟁을 축소하려고 했던 케네디를 암살한 데이비드 록펠러의 의중에 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8. 러셀과 그의 개인 비서는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닌 중동 편을 들었는데, 이는 데이비드 록펠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론
버트런트 러셀은 '모두까기 인형' 성향을 가졌던 철학자로, 진실 그 자체의 탐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만큼 인드라의 주장과 달리 그렇게 정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록펠러계네, 로스차일드계네, 하는 것은 인드라의 망상일 뿐이다.
인드라의 망상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러셀이 영일동맹을 지지한 것은 친로스차일드적인 행보, 케렌스키의 10월 혁명을 지지한 것은 친프리메이슨적인 행보 (또는 친로스차일드적인 행보), 감옥에서 아서 벨푸어의 도움을 받은 것이나 1943년 유태계 출판사 Simon and Schuster의 도움을 받은 것, 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지지한 것은 친로스차일드적인 행보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제1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것은 반로스차일드적인 행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러셀이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한 것은 로스차일드와 별 관련이 없었을 공산이 크다. 직접적인 반전 운동의 원인은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에드워드 그레이의 거짓말에 놀아나 전쟁에 참여하게 된 영국인들에 대한 자조감과 영국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해석함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러셀의 자서전에도 이 시기 러셀은 영국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에 총리였던 H. H. 애스퀴스나 외무부 장관이었던 에드워드 그레이를 면전에서 만나면 죽여버릴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제2차 대전에 대한 러셀의 지지 역시 로스차일드와는 별 관련이 없이, 자서전에 나온 그대로, 순전히 나치 독일의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을 수 있다. 러셀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생각하면, 그가 나치를 혐오했던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니키타 흐루시초프에 대한 러셀의 태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인드라의 망상적 세계관에 따르면,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련의 서기장을 지낸 흐루시초프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발탁한 인물이므로, 흐루시초프에 친화적이었던 러셀은 친로스차일드파로 분류해야 마땅하다. 또 러셀과 러셀재단, 그리고 the Tribunal이 소비에트나 북베트남의 전쟁범죄를 축소시켰다는 의혹을 받는데, 이것은 친로스차일드적인 행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러셀은 베트남 전쟁 자체에 시종일관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러셀을 반로스차일드로 분류해야 한다. 즉, 앞 뒤가 맞지 않게 된다.
록펠러는 어떤가?
인드라의 망상적 세계관에 따르면, 데이비드 록펠러가 황제가 되는 1973년 이전에 러셀은 록펠러와 한 배를 타고 로스차일드의 세계지배에 저항했다. 1920년 러셀과 록펠러 병원의 인연, 1936년 록펠러와 런던정경대의 인연, 또 1957년 퍼그워시 회의가 록펠러 자본의 힘을 빌린 것 등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유추다. 하지만 1963년에 이미 러셀은 록펠러가 개입한 케네디 암살사건을 대대적으로 비난했고, 미국의 록펠러계 존슨 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을 연일 비판하는 등 서로간에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러셀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이유 역시 로스차일드나 록펠러와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러셀이 자서전에 적은 바에 따르면, 러셀은 평생 레오폴드 2세의 콩고에서의 잔혹한 만행 등 많은 전쟁을 목격했지만, 베트남 전쟁은 살면서 목도한 최악의 전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농노들로 이루어진 나라를 일방적으로 침략한 전쟁이며, 제2차 세계대전 전체와 맞먹는 폭탄이 베트남에 투여되었기 때문이다. 러셀은 미국에 맞서 싸우는 베트남인의 용기를 존경하며, 진실을 알리기 위한 시도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자서전에 적었다.
탐구과제 3. 인드라의 주장처럼, 1920년 일본이 버트런트 러셀 사망기사 오보를 내면서 러셀을 분노케하고, 또 러셀이 1921년 일본을 작심비판 한 것은 당시 일본 제국이 로스차일드 영토였기 때문인가?
당시 일본 제국이 로스차일드 관할이었고, 일본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던 러셀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러셀 왈, "문명화된 중국인은 전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인간이다.")
러셀이 1920년 중국에서 병에 걸려 2주간 요양생활을 할 때 부인인 Dora가 정성스레 간호했는데, 이 와중에 일본 저널리스트들이 끈질기게 Dora에게 러셀의 용태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질린 Dora가 저널리스트들에게 퉁명스럽게 반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애들의 기분을 나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러셀이 죽었다고 의도적으로 오보를 냈을 뿐만 아니라, 기사 말미에 “many people in the world would be pleased to have Mr. Russell dead.”라고 적기까지 했다.
허나, 이후 일본 언론이 버트런트 러셀이 방일하는 기간내내 정정기사를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순히 Dora의 태도에 기분이 나뻐서 그랬다는 것보다는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그랬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러셀은 병에서 회복되자,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일본으로 떠나긴 했으나, 이 오보사건으로 기분이 상했는지 예정되어 있던 강의들을 게이오 대학에서의 강의 하나로 줄였고, 일정 역시 12일로 줄였다.
여행 내내 러셀은 일본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서전에서 러셀은 중국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매너가 없고 자신을 거슬리게 했다고 적었으며, 일본경찰과 저널리스트가 한팀이 되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토로했다. 심지어 그들은 러셀이 잠을 자는 모습마저 사진으로 찍을 정도였다.
반대로 식당 같은데 가면 일본인들이 러셀을 왕족처럼 대우하는 등 지나치게 아첨을 떨어서 러셀의 혐오감을 자아냈다.
러셀은 일본인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도 원시적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교토에서 묵는데, 모기장이 뜯겨져 나가 숙박업소에 수선을 요구했는데, 러셀의 모기장만 고치고 같이 동행한 Dora의 모기장은 고쳐주지 않았다. 여러번 항의를 한 끝에 고쳐주었다고 한다.
만원열차 안에서는 어떤 친절한 일본인 남성이 러셀에게 자리를 양보했는데, 러셀은 그 자리를 Dora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다른 일본인 남성이 러셀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러셀은 그 자리를 Eileen Power라는 동행한 여성 역사학자에게 양보했다. 이에 분노한 일본 남성들 때문에 열차 안에서는 거의 폭동이 일어날 뻔했다고 한다.
(*Elieen Power은 런던정경대 교수를 지낸 사람으로, 데이비드 록펠러를 런던정경대로 초청한 사람 William Beveridge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Eileen_Power
Her most famous book, Medieval People, was published in 1924. In 1927, Power founded the Economic History Review. In 1933, she joined the head of LSE, William Beveridge, in establishing the Academic Freedom Committee, an organization that helped academics fleeing from Nazi Germany. A critic of Britain's foreign policy, Power was an active member of the Union of Democratic Control.[citation needed])
러셀과 Dora의 여행에서 딱 한명의 일본인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데, '이토'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일본 정부에 대항한 무정부주의자로 러셀을 만난지 얼마 안 가 일본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교살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It%C5%8D_Noe
Death
On September 16, 1923, according to writer and activist Harumi Setouchi, Itō, Ōsugi, and his 6-year-old nephew Munekazu (born in Portland, Oregon) were arrested, strangled to death, and thrown into an abandoned well by a squad of military police (known as the Kenpeitai) led by Lieutenant Masahiko Amakasu.[15] The atrocity happened in the chaos immediately following the Great Kantō earthquake. Once the bodies were retrieved from the well, both Ōsugi and Itō's bodies were inspected and found to be covered with bruises indicating that they had been severely beaten.[2] According to literary scholar Patricia Morley, Itō and Ōsugi were strangled in their cells.[16] Noe Itō was 28 years old.[15]
The killing of such high-profile anarchists, together with a young child, became known as the Amakasu Incident and sparked shock and anger throughout Japan.[8] Amakasu was arrested and sentenced to ten years in prison for the murders, but he was released after serving only three years.
Itō and Ōsugi are both buried in the Kutsunoya cemetery in Aoi-ku, Shizuoka.
교토에서 요코하마로 올 때는 어린애들의 사진촬영 세례에 아이를 임신했던 도라가 피해다니느라 유산을 할 뻔했고, 분노에 휩싸인 러셀은 아이들을 쫓아가 죽일려고 했다. 그러나 애들을 놓치는 바람에 죽일 수 없었다. 어떤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광기에 휩싸인 러셀의 사진을 찍는다.
훗날 러셀이 회고하기를, 이 때 러셀이 느낀 강렬한 분노의 감정은 흡사 제국주의 시절의 백인이 자신의 가족을 위협하는 야만적인 유색인종들에 둘러싸였을 때 그들 전부를 죽이고자 하는 원시적인 분노와 비슷한 유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러셀은 다른 인종으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의지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열정임을 깨달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난장판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3,600명의 학생들 앞에서 '문명의 재건설'을 주제로 1시간 30분동안 강연을 했는데, 작가 Yamamoto Sanehiko의 회고에 따르면, 러셀은 자신의 병을 잊을만큼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이는 원래 예정시간인 30~40분을 훨씬 넘긴 것으로, 러셀이 청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도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러셀의 자서전에는 나오지 않는만큼, 러셀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러셀에게 정말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준 강연이었다면 700페이지의 자서전에 한 토막 정도는 들어가야하지 않았을까?)
러셀과 일본의 불화는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핵투하로 철저히 궤멸되고 (러셀의 예언대로) GHQ의 명령대로 일본사회가 움직이면서 봉합이 되기 시작한다. 버트런트 러셀은 1963년 일본에 러셀 재단의 지부를 설치하며, 일본과의 공조를 말년까지 이어갔다. 하버드에서 공부했던 러셀의 큰 아들인 존은 (훗날 백작 작위를 세습받지만, 정신병에 걸린 상태로 죽는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 비슷한 시기 일본 유학을 떠났던 록펠러 4세, 제이 록펠러가 떠오른다. 일본은 록펠러 가문의 영지였기 때문일까? 인드라의 독특한 주장에 따르면, 일본 자민당은 러셀의 자유당, 록펠러의 민주당에서 따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1945년 이후의 일본은 러셀과 록펠러의 식민지였으며, 1960년 미일안보조약 투쟁은 일본을 공산화하려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음모였다고 한다. 물론 러셀-록펠러파가 승리했다는 인드라의 결론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p.s.
인드라는 타비스톡 연구소가 버트런트 러셀의 친척인 베드포드 공작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고, 이것을 두고 버트런트 러셀이 타비스톡 연구소를 만든 증거로 보았는데, 러셀의 자서전을 보면 정작 러셀은 먼 친척인 the Duke of Bedford 공작을 말년에 딱 한번 자신의 생일파티 때 만났을 뿐이다. 러셀이 자신이 조직한 단체명에 Bedford를 집어넣을만큼, Bedford 쪽과 정말로 감정적 유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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